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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February 28, 2009

선조와 이명박 (충무공 이순신 이야기 8) - 최성재

선조의 아들, 종 그리고 상전

선조에게 원균은 아들, 이순신은 종, 되놈은 사기꾼도 상전이었다.
최성재

원균의 무의식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말이 선조실록에 전한다.

...
김수가 아뢰기를,
“ 서성이 술을 차려 잔치를 베풀고서 두 사람이 화해(和解)하도록 했는데, 원균이 이순신에게 말하기를 ‘너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다.’【다섯 아들이란 권준(權俊), 배흥립(裵興立), 김득광(金得光) 등을 말한다. 】하였으니, 그의 분해 하고 불평함을 알 수 있습니다.”

수(目+卒) 曰: “ 徐성( +省) 置酒開宴, 使二人和解, 則 元均 謂 舜臣 曰: ‘汝有五子’【五子指 權俊 、 裵興立 、 金得光 等也。】云。 其忿?不平可知。”
... (선조실록 1597/1/27)

권준, 배흥립, 김득광 등은 이순신 장군의 휘하 장수다. 원균은 이처럼 이순신 장군과 이들의 관계를 부자지간으로 파악한다. 서성은 선조의 딸 정신옹주의 시아버지니까, 선조의 사돈인데 1594년 순무어사(巡撫御史)로 한산도로 감찰하러 온 적이 있다. 그 때 술자리에서 원균이 술 힘을 빌어 미친 소처럼 발광하자, 서성이 눈살을 찌푸린다. 그 다음 날 서성은 직접 이순신의 군사훈련 장면을 구경한다. 나중에 이순신 장군이 그와 군사기밀도 밤늦도록 논의했다니까, 그가 크게 감동을 받았던 모양이다. 서성이 두 사람을 화해시켰다는 것은 1596년쯤일 것 같다.

맑음. 순무어사 서성이 내 배에 와서 이야기했다. 우수사(이억기), 경상수사(원균), 충청수사(구사직)가 함께 왔다. 술이 세 순배 돌자 경상수사 원균은 짐짓 술 취한 척하고 미친 듯이 날뛰며 입에 나오는 대로 지껄이니, 순무어사도 여간 황당해 하지 않았다. 소행이 극히 흉악하였다. 삼가현감이 돌아갔다. (난중일기 1594/4/12)
晴 巡撫徐성來話于我船 右水使及慶尙水使 忠淸水使幷到 酒三行 元水使 陽醉發狂亂發無理之言 巡撫不勝怪怪 所向極凶 三嘉歸

원균은 무의식중에 '죽느냐 사느냐, 유능한가 무능한가, 덕이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문제인 국가의 중대사를 한갓 '좋아하느냐 미워하느냐' 그것만이 대수인 가정의 사랑싸움으로 확신하고 있다. 이건 원균만이 아니라 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문만 듣고 자신과 제 식구만 살려고 천 리 만 리 도망가는 임금 이하 90% 조선 사대부의 무의식 세계다. 자식은 잘나고 못나고 곱고 밉고 착하고 못되고 이런 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 오히려 못난 자식을 더 챙기고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고 못된 놈일수록 함함하다고 한다. 아픈 손가락에 더 신경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백성의 어버이인 선조가 친인척과 아첨꾼만을 '내 가족 내 자식'으로 생각한 것도 이런 가치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선조의 외척 중에 이순신 모함에 가장 앞장선 윤두수가 있다. 윤두수의 손자 해숭위 윤신지가 인빈 김씨의 둘째 딸 정혜옹주의 남편이다. 그런데 원균은 윤두수의 친척(선조실록 1596/11/7)이다. 따라서 원균은 선조의 아들과 마찬가지다. 그가 아무리 잘못해도 그것은 허물이 될 수 없다. 사랑하는 아들이니까! 아니, 하는 짓마다 잘못하니까 더욱 파르르 떨며 아랫것들 앞에서 역성을 들어준다. 생사여탈권을 앞세워 엿장수의 논리보다 더 엉성한 논리로 감싼다. 동네 소문이 너무 무서우면 잠시 골방에 피신시켰다가 사람들의 기억이 좀 희미해졌을 무렵에 피둥피둥 살찐 몸뚱이에 화려한 비단 옷을 입혀서 으스대며 돌아다니게 한다.

【당시 정혜옹주(貞惠翁主)가 아직 어렸는데 피난길이 어수선하고 말을 준비할 수 없었으므로, 왕이 따르는 관리들에게 명하여 자원하여 다른 길로 데리고 가서 난리를 피하게 하면 후한 상(賞)을 내릴 것이라고 하였다. 내수사(內需司) 관원 윤백상(尹百祥)이 전지에 응하여 길을 바꿔 황해도 산길로 들어가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 적을 피한 뒤 겨울에야 사잇길로 의주(義州)에 이르렀다. 옹주는 뒤에 해숭위(海嵩尉)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선조실록 1592/5/1)

선조가 국가대사(大事)보다 가정소사(小事)를 더 중시한 것은 다음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사관은 민심을 들어 준열하게 나무라고 있다. 명나라에 천추사(황제의 后妃 생일 축하 사절)로 가기로 내정된 윤두수의 아들 윤방 집안에 경사가 났다. 며느리 정혜옹주가 출산한 것이다. 그러자 선조는 희색이 만면하여 즉시 윤방을 동지사로 바꾸어 나중에 보내기로 하고 손주도 보고 며느리의 산후 조리도 지켜보게 한다. 윤방이 사돈이라 하여 중국의 사신으로 보내기로 한 것도 웃기는데, 선조는 그 사돈이 손주 곧 선조 자신의 외손을 싱글벙글 들여다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겨 정해진 임무도 취소하고 날짜를 미루어 더 중요한 사절의 임무를 부여한다.

이비(吏批)에게 전교하였다.
“윤방(尹昉)을 천추사(千秋使)로 차정했는데 옹주(翁主)가 해탈(解脫=解産)한 뒤에 병이 있으니, 우선 천추사를 체차하고 동지사(冬至使)로 차임하여 보내도록 하라.”【 윤방은 곧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의 아비이다. 이때 왜적의 사자가 협박하므로 조석으로 변을 대기하고 있는데, 마침 이런 명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불쾌하게 여겼다. 】
(선조실록 1604/3/12)

윤두수의 손자이자 선조의 사위 윤신지는 임금의 총애만 믿고 정유재란 당시 왜적이 천 리밖에 있을 때부터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기다리다가 왜적이 상경한다는 소문을 듣고 얼씨구나 피난길에 오르는데, 처남인 왕자 정원군(定遠君: 인조의 아버지)과 더불어 백성들을 상대로 세도와 행패를 부리다가 사헌부로부터 쓴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이에 대해 선조는 종들이 한 일을 어찌 주인이 다 알 수 있겠냐며 아들과 사위를 적극 두둔한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변란 뒤에 더욱 두려운 것은 민심(民心)입니다. 민심을 한번 잃어버리면 도둑의 화란이 가볍지 않을 터이니, 오늘날은 오직 백성들을 위무하여 민심을 결속시키는 것으로써 급무를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정원군(定遠君) 이부(李?) 등이 후궁(後宮)을 배종(陪從)하여 서쪽으로 내려갈 적에, 그의 궁노(宮奴)를 방종하게 놔두어 지공(支供)이 풍부하지 못하다면서 향소(鄕所)를 마구 구타하고 기명(器皿)을 부수었습니다. 또 족속(族屬) 및 아는 사람들을 많이 거느리고 궁노라고 칭탁하여 더욱 공궤(供饋)를 요구하였으며, 불법으로 쇄마(刷馬)를 차지하여 타거나 짐을 싣도록 함으로써 처음 마전(麻田)에 이르렀을 때에는 쇄마 수가 30필에 불과하던 것이 매읍(每邑)마다 더 색출한 까닭에 수안(遂安)에 이르러서는 거의 2백 필에 이르렀으므로 연로(沿路)의 백성들이 분주하게 음식을 제공하고 쇄마를 징발하느라 원망하는 소리가 자자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성천(成川)에 이르러서는 끝없이 폐단을 저질러 온갖 물품을 마련하도록 요구하였는데 그 수에 있어서 한이 없어서 조금이라도 여의치 않으면 궁노가 바로 왕자(王子)에게 하소연하고 그러면 왕자는 금지시켜 단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대로 따라서 그들이 멋대로 구는 것을 조장함으로써 온 부(府)의 민심으로 하여금 이미 흩어지게 하였습니다. 본부(本府)에 머무른 지 날짜가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그 폐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래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지난해 북도(北道)의 변이 본보기가 되고도 남을 텐데 오히려 경계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 삼도(三道)가 모조리 어육(魚肉)이 되어버린 판에 서로(西路)만이 그런 대로 믿을 만한데, 왕자가 또 그곳을 무너뜨리고 있으니 참으로 지극히 한심스럽습니다. 정원군 부와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를 모두 파직시키소서. 그리고 검찰사(檢察使) 신잡(申?)과 수행한 재신(宰臣) 구사맹(具思孟) 과 허잠(許潛)은 폐단을 끼치는 일을 좌시하고 단속하지 않아 도무지 위임하여 보낸 의의를 망각하였으니, 모두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헌부(憲府)와 간원(諫院)에 답하기를,
“이 일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폐단을 저지른 하인이 없지는 않겠지만 주인이라고 해서 꼭 그것을 다 안다고 할 수 없는데 어찌 이토록까지 해야 하겠는가. 그리고 또 재신이 어찌 금지시키지 않았을 리가 있겠는가. 성천(成川) 사람이 전미(田米) 7홉을 내줘 장차 굶주리게 되었다고 하는 달갑지 못한 소문을 듣고도 내가 차마 말하지 않았다마는 이 일은 잘못 들은 말이 아닌가 싶다. 지금은 우선 추고하거나 파직시킬 필요가 없다. 재신에게 글을 내려보내 각별히 단속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1597/9/22)

선조는 왕가인 전주 이씨로 봐선 어떤 왕보다 훌륭한 일을 했다. 국초(國初)부터 이씨 왕가의 가장 큰 문제였던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大明會典)>> 에는 어찌된 셈인지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었다. 제발 고쳐 달라고 애원했지만, 거룩한 태조 주원장과 관련된 기록은 절대 고칠 수 없다며 애를 태웠다. 이 문제를 선조대에 해결한 것이다. 1588년에 유홍이 마침내 고쳐진 <<대명회전>>을 갖고 온다. 난리도 이런 난리도 없다. 약 400년 후 35년간 일제의 질곡에서 해방된 날처럼 기뻐한다. 눈물의 바다! 선조는 친히 모화관(慕華館)으로 가서, 명의 칙사를 맞이한다. 2년 후 종계개정에 공을 세운 이들은 나라를 빛낸 인물 곧 광국공신(光國功臣)이라 하여 크게 표창 받아 왕족 대우를 받는다. 광국1등공신은 3명인데, 여기에 첫 번째로 윤두수의 동생 윤근수의 이름이 올라간다. 글을 썩 잘한 윤근수가 종계변무의 외교문서를 쓴 듯하다. 나머지 두 1등 공신 황정욱과 유홍은 직접 명에 주청사(奏請使)로 다녀왔다. 윤두수는 광국2등공신이다. 가문의 영광!

광국공신(光國功臣)과 평난공신(平難功臣)의 녹권(錄卷)을 반사하고 고유제(告由祭)와 회맹(會盟)을 의례대로 한 뒤 물품을 등급별로 하사하고 나라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백관이 진하(進賀)하니 궐정(闕庭)에서 사연(賜宴)하였다.

광국공신은 종계(宗系)를 변무(辨誣)한 공인데, 1등 수충 공성 익모 수기 광국 공신(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은 윤근수(尹根壽) 【이상(貳相: 左右贊成)을 지냈고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이다.】· 황정욱(黃廷彧) 【예조 판서를 지냈고 장계 부원군(長溪府院君)이다.】· 유홍(兪泓) 【우의정을 지냈고 기계 부원군(杞溪府院君)이다.】 등 3인이고,
2등 수충 공성 익모 광국 공신은 홍성민(洪聖民) 【이조 판서를 지냈고 익성군(益城君)이다.】· 이후백(李後白) 【이조 판서를 지냈고 연양군(延陽君)으로 추봉(追封)되었다.】· 윤두수(尹斗壽) 【영의정을 지냈고 해원 부원군(海原府院君)이다.】· 한응인(韓應寅) 【좌의정을 지냈고 청평 부원군(淸平府院君)이다.】· 윤섬(尹暹) 【교리를 지냈고 용성군(龍城君)으로 추봉되었다.】· 윤형(尹泂) 【공조 판서를 지냈고 무릉 부원군(茂陵府院君)이다.】· 홍순언(洪純彦) 【 당릉군(唐陵君)으로 역관(譯官)이다.】 등 7인이고,
3등 수충 공성 광국 공신(輸忠貢誠光國功臣)은 기대승(奇大升) 【대사간을 지냈으며 덕원군(德原君)으로 추봉되었다.】· 김주(金澍) 【 화산군(花山君)으로 추봉되었다.】· 이양원(李陽元) 【우의정을 지냈고 한산 부원군(漢山府院君)이다.】· 황임(黃琳) 【호조 판서를 지냈으며 의성군(義城君)이다.】· 윤탁연(尹卓然) 【순찰사를 지냈고 칠계군(漆溪君) 이다.】· 정철(鄭徹) 【좌의정을 지냈고 인성 부원군(寅城府院君)이다.】· 이산해(李山海) 【영의정을 지냈고 아성 부원군(鵝城府院君)이다.】· 유성룡(柳成龍) 【영의정을 지냈고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이다.】· 최황(崔滉) 【이상을 지냈으며 해성군(海城君)이다.】 등 9인으로 19인이다. 전후 사신으로 가서 허락을 받아냈거나 의논을 드리고 주문(奏文)을 지은 공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평난공신(平難功臣)은 토역(討逆)한 공인데, 1등 추충 분의 병기 협책 평난 공신(推忠奮義炳幾?策平難功臣)은 박충간(朴忠侃) 【 상상군(商山君)으로 형조 판서를 지냈다.】· 이축(李軸) 【좌참찬을 지냈고 완산 부원군(完山府院君)이다.】· 한응인(韓應寅) 등 3인이고, 2등 추충 분의 협책 평난 공신은 민인백(閔仁伯) 【 여양군(驪壤君)이다.】· 한준(韓準) 【호조 판서를 지냈으며 청천군(淸川君)이다.】· 이수(李綏) 【 남계군(南溪君)이다.】· 조구(趙球) 【 전릉군(全陵君)으로 추봉되었다.】· 남절(南截) 【 남계군(南溪君)이다.】· 김귀영(金貴榮) 【좌의정을 지냈고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이다.】· 유전(柳?) 【영의정을 지냈고 시령 부원군(始寧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유홍(兪泓) · 정철(鄭徹) · 이산해(李山海) · 홍성민(洪聖民) · 이준(李準) 【형조 판서를 지냈고 전성군(全城君) 이다.】 등 12인이고,
3등 추충 분의 평난 공신(推忠奮義平難功臣)은 이헌국(李憲國) 【우의정을 지냈고 완성 부원군(完城府院君)이다.】· 최황(崔滉) · 김명원(金命元) 【좌의정을 지냈으며 경림 부원군(慶林府院君)이다.】· 이증(李增) 【 아천군(鵝川君)이다.】· 이항복(李恒福) 【영의정을 지냈고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이다.】· 강신(姜紳) 【 진흥군(晋興君)이다.】· 이정립(李廷立) 【 광림군(廣林君)으로 병조 참판을 지냈다.】 등 7인으로 모두 22인이다. 박충간 이하는 고변(告變)을 했고 민인백 이하는 역도의 괴수를 잡았고 김귀영 이하는 추관(推官)으로서 죄인의 복초를 가장 많이 받아냈기 때문이다.【혹자가 추관을 녹훈한 것에 대해서 지나치다고 하니 상이, 역적이 진신(縉紳) 가운데서 나왔는데 다행히 제때에 주벌했다고 여겨 추관에게 공을 돌렸다.】
(선조수정실록 1590/8/1)

평난공신은 1589년 정여립의 난을 진압한 공신이다. 다소 긴 이 기사를 인용한 것은 이들이 바로 이를 계기로 준(準) 왕족이 되었기 때문이다. 부원군은 왕의 외척, 군(君)은 왕의 아들 중 후궁의 아들을 이르는 말인데, 이들 공신들은 하나같이 부원군 또는 군(君)이 된다. 이 중에는 유능하고 덕망 높은 충신도 있었지만, 입만 꾀꼬리처럼 앵무새처럼 발달한 형편없는 인간이 더 많다. 명나라의 종계 기록 실수나 정여립의 난에 비하면 수억 배 중요하고 수천만 배 위태로운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이들 새로운 왕족들은 요직만 차지하고 앉아 왜적의 머리 하나라도 베는 데 기여하기는커녕 미증유의 전란으로 인구의 3분의 1과 경지면적의 5분의 4를 잃어 버리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 주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자들이 대부분이다. 선조는 아무리 이들이 나라 말아 먹는 실정을 거듭해도 벌줄 줄 모른다. 벌을 준다고 해도 사람들의 입이 무서워 실은 일시적으로 쉬게 만든다. 당파와도 관계없다. 정여립처럼 역신으로 몰리지 않는 한, 용서 또 용서요, 중용(重用) 또 중용이다.

시문에는 능했으나, 이들은 한두 사람을 빼고는 군사에는 문외한의 문외한이었다. 그럼에도 전쟁 기간 내내 요직을 독차지한다. 오늘날로 말하면, 일등병의 경험도 안목도 없는 자들이 별을 주렁주렁 달고 현장 최고 사령관에게 역시 전쟁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임금의 뜻을 받들어 구름 잡는 명령을 내린 격이었다.

선조나 이들 공신들에게는 국가는 없고 전주 이씨 가문과 자신들의 가문만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로 이어지는 만경대 김씨 왕가도 이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선 전체가 전주 이씨 왕가의 재산이었듯이 북한 전체가 만경대 김씨 왕가의 재산이다. 대한민국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초대 대통령부터 장군 출신 대통령까지는 국가관이 투철했다.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중기 이후 이씨왕조보다 훨씬 못하고 조선총독부보다 못한 김씨왕조의 거짓과 폭력에 맞서 고뇌의 단호한 결단을 내리며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을 피웠다. 그러나 그 후로는 네 명의 현대판 왕이 출현했다. 누구든 민주니 통일이니 민족이니 환경이니 평등이니, 아름다운 말을 입에 가득 품고 새로운 왕 또는 새로운 왕의 후보에게 접근하여 '지당하옵니다!'만 외치고, 머리에 붉은 띠를 묶고 왕이나 왕의 후보가 위기에 처했을 때 혀와 팔과 다리의 근육을 폭발적으로 사용하면 광국공신이 되고 평난공신이 된다. 왕의 사돈이 되고 왕의 아들이 된다. 그리하여 이들은 민주 국가에는 치명적 독(毒)인 치외법권의 특전을 누린다.

임진왜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선조와 얼마나 가까운 거리에서 찔찔, 훌쩍훌쩍 또는 펑펑 울었느냐에 따라, 눈물만이 아니라 콧물도 얼마나 줄줄 많이 흘렸느냐에 따라, 공신의 서열이 정해졌다. 왜적 한 명 물리치는 데 아무런 공이 없어도 관계없다. 하여간 도망 안 가고 왕의 곁에 맴돌기만 하면 되었다. 왕의 심신을 편안히 해 주면 되었다. 공신의 서열은 당연히 왜적을 많이 물리친 정도에 따라야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삼국통일 과정에서 50년 간 단 한 번도 패전하지 않은 김유신의 공이 너무 커서 임금 아래 최고직인 각간에 봉하고 그것도 모자라 대각간에 봉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태대각간으로 봉하여 사실상 왕과 같은 반열에 올라서게 만들고 죽어서는 흥무대왕으로 추존한 것과는 너무도 다르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김유신은 왕이 될 수도 있었지만, 절대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고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문무왕 김법민은 김유신을 끝까지 믿고 공훈을 새로 만들어 계속 올려 주었다. 그래서 김유신은 죽음에 임하여, "왕께서 믿어 주심에..."라는 말을 남겼다. 이것이 바로 군신유의(君臣有義)다.

전쟁에 도움을 주기보다 방해만 한 문관들이 최고 공신 자리를 독차지했다. 임금 곁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내시 24명과 말고삐 잡은 자들(理馬: 정6품 잡직) 6명이 이순신 장군 휘하의 기라성 같은 장수들이나 유격전으로 왜적을 왕짜증나게 만들었던 의병들을 다 제치고 우르르 호성공신에 올랐다. 실지로 이씨왕가를 300년 더 이어지게 만든 일선 장수와 장병들은 철저히 소외되고, 단지 곁에서 왕과 함께 우왕좌왕하며 잔심부름하고 질질 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신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이들은 선조의 아들이고 일선에서 승전한 이순신 장군 이하 군인들은 선조의 일개 종이요 가축이었기 때문이다. 칼 들고 화살 메고 싸운 선무공신은 1등, 2등, 3등 다 합해도 전쟁 내내 임금 곁에서 적의 칼이나 총에 죽을 염려가 전혀 없이 호의호식하다가 호성공신이 된 내시 24명보다 적은 18명밖에 안 되었다. 무인(武人)은 주인을 먹여 살리기 위해 천한 일을 도맡아함이 마땅한 종이었기 때문이다. 힘만 센 천하고 무식한 종이었기 때문이다. 이들 중에서 18명을 등급은 낮지만 공신에 봉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했던 것이다.

단, 원균은 선조의 종이 아니라 선조의 아들이었다. 따라서 그는 사실상 두 번의 큰 패전으로 정여립의 수백 배되는 대역죄를 저질렀지만, 임금의 엄명에 의해 선무1등공신의 반열에 올랐던 것이다. 방화로 경찰을 죽인 자들과 공산독재의 치하에 자유대한을 은근슬쩍 넘기려던 국가 반역자들이 권력의 힘에 빌붙어 해괴망측한 논리에 의해 민주인사로 둔갑한 것과 비슷하다.

호종(扈從) 곧 피난 중에 왕을 얼마나 졸졸 잘 따라다녔느냐, 그것이 제일이었다. 이를 호성(扈聖)공신이라 한다. 호성1등공신은 이항복과 정곤수 2명이다. 이항복은 이해가 가지만 정곤수는 누굴까? 그는 명나라에 가서 군사를 불러오는 역할을 담당했다. 원균이 이순신에게 원군을 청했으므로 공이 이순신보다 크다는 견강부회(牽强附會) 논리를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 임란 내내 영의정으로 군계일학의 능력을 발휘한 유성룡은 오히려 호성2등공신이다.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느라고 이항복보다 피난 가는 임금 곁을 떠난 적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호성2등공신은 왕자 신성군과 정원군을 비롯하여 31명이다. 여기에 당당히 윤두수와 윤근수 형제는 이름을 올린다. 또 다시 가문의 영광! 이씨 왕가의 명예를 회복한 광국공신에 이어 임진왜란에 2등으로 공을 많이 세운 호성공신까지 되었으니, 마침내 왕의 외척까지 되었으니, 이들의 친척인 원균은 다시 한 번 선조의 아들로서 자리를 굳건히 지킨 것이다. 거기에 섭섭지 않게 한산도에서 서울까지 이어지도록 선물을 바리바리 실어 올려보냈으니, 인사정책에 세 정승 이상으로 막강한 힘을 휘두른 베개머리 청탁이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으랴!

진주대첩의 김시민, 전라좌수영보다 더 많은 전함과 군인을 제공하여 이순신 장군의 싸우면 반드시 일방적으로 이기는 승첩에 혁혁한 공을 세운 전라우수사 이억기를 2등으로 밀어내고 원균은 선조의 노골적 두둔과 은밀한 비망기에 의해 이순신, 권율과 더불어 선무1등공신의 반열에 올라섰다. 바로 옆의 경상좌수영을 돕기는커녕 싸움 한 번 않고 전라좌수영의 2.5배되는 전함과 1만 명 수군을 스스로 침몰시키고 스스로 해산시킨 후 화살 한 개 없이 노 젓는 사람만 데리고 꽁꽁 숨어 있다가 전함 한 척만 끌고 졸졸 따라다닌 자가 이순신 장군이 6년간 피와 땀, 눈물과 한숨으로 일궈 놓은 전함 1백여 척과 2만 명 수군을 단 한 번의 전투에서 몽땅 수장시킨 자가 선무1등공신의 반열에 올라섰다. 원균보다 직급이 높았지만 도망갔기 때문에 바로 처형된 경상좌병사 이각처럼 원균도 임진년에 바로 처형하여 광화문 네거리에 효수함이 마땅했지만, 그는 사실상 임금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모든 죄를 사함 받고 도리어 선무1등공신으로 가문의 족보를 밤하늘의 1등별처럼 빛냈다.

공신(功臣)들의 명칭을 정하여 대대적으로 봉(封)했는데, 서울에서 의주까지 시종(始終) 거가(車駕)를 따른 사람들을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하여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이 있게 명칭을 내렸고, 왜적을 친 제장(諸將)과 군사와 양곡을 주청(奏請)한 사신(使臣)들은 선무 공신(宣武功臣)으로 하여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이 있게 명칭을 내렸고, 이몽학(李夢鶴)을 토벌하여 평정한 사람은 청난공신(淸難功臣)으로 하고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 있게 명칭을 내렸다.

호성공신 1등은 이항복(李恒福) · 정곤수(鄭?壽)인데 충근정량갈성효절협력호성 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力扈聖功臣)이라 하고, 2등은 신성군(信城君) 이후(李珝) · 정원군(定遠君) 이부(李?)· 이원익(李元翼) · 윤두수(尹斗壽) · 심우승(沈友勝) · 이호민(李好閔) · 윤근수(尹根壽) · 유성룡(柳成龍) · 김응남(金應南) · 이산보(李山甫) · 유근(柳根) · 이충원(李忠元) · 홍진(洪進) · 이곽(李?) · 유영경(柳永慶) · 이유징(李幼澄) · 박동량(朴東亮) · 심대(沈岱) · 박숭원(朴崇元) · 정희번(鄭姬藩) · 이광정(李光庭) · 최흥원(崔興源) · 심충겸(沈忠謙) · 윤자신(尹自新) · 한연(韓淵) · 해풍군(海豊君) 이기(李耆) · 순의군(順義君) 이경온(李景溫) · 순령군(順寧君) 이경검(李景儉) · 신잡(申?) · 안황(安滉) · 구성(具宬) 인데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 공신(忠勤貞亮?節協策扈聖功臣)이라 하고, 3등은 정탁(鄭琢) · 이헌국(李憲國) · 유희림(柳希霖) · 이유중(李有中) · 임발영(任發英) · 기효복(奇孝福) · 최응숙(崔應淑) · 최빈(崔賓) · 오정방(吳定邦) · 이응순(李應順) · 신수곤(愼壽崑) · 송강(宋康) · 고희(高曦) · 강곤(姜?) ·내시(內侍) 김기문(金起文) ·내시 최언준(崔彦俊) ·내시 민희건(閔希蹇) ·의관(醫官) 허준(許浚) · 이연록(李延祿) ·이마(理馬) 김응수(金應壽) ·이마 오치운(吳致雲) ·내시 김봉(金鳳) ·내시 김양보(金良輔) ·내시 안언봉(安彦鳳) ·내시 박충경(朴忠敬) ·내시 임우(林祐) ·내시 김응창(金應昌) ·내시 정한기(鄭漢璣) ·내시 박춘성(朴春成) ·내시 김예정(金禮楨) ·내시 김수원(金秀源) ·내시 신응서(申應瑞) ·내시 신대용(辛大容) ·내시 김새신(金璽信) ·내시 조구수(趙龜壽) ·의관(醫官) 이공기(李公沂) ·내시 양자검(梁子儉) ·내시 백응범(白應範) ·내시 최윤영(崔潤榮) ·내시 김준영(金俊榮) ·내시 정대길(鄭大吉) ·내시 김계한(金繼韓) ·내시 박몽주(朴夢周) · 이사공(李士恭) · 유조생(柳肇生) · 양순민(楊舜民) · 경종지(慶宗智) ·내수사 별좌(內需司別坐) 최세준(崔世俊) ·사알(司謁) 홍택(洪澤) ·이마 전용(全龍) ·이마 이춘국(李春國) ·이마 오연(吳連) ·이마 이희령(李希齡) 인데 충근정량호성 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이라 하여, 각각 작위(爵位)를 내리고 군(君)으로 봉했다. 모두 86인인데 내시(內侍)가 24명, 이마(理馬)가 6명, 의관이 2명이고, 별좌(別坐)와 사알(司謁)이 또 2명이다.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은 이순신(李舜臣) · 권율(權慄) · 원균(元均) 세 대장인데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 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이라 하고,
2등은 신점(申點) · 권응수(權應銖) · 김시민(金時敏) · 이정암(李廷?) · 이억기(李億祺) 인데 효충장의협력선무 공신(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이라 하고,
3등은 정기원(鄭期遠) · 권협(權?) · 유사원(柳思瑗) · 고언백(高彦伯) · 이광악(李光岳) · 조경(趙儆) · 권준(權俊) · 이순신(李純信) · 기효근(奇孝謹) · 이운룡(李雲龍)인데 효충장의선무 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이라 하였다. 각각 관작을 내리고 군(君)으로 봉했는데 모두 18인이다.

청난공신(淸難功臣) 1등은 홍가신(洪可臣)인데 분충출기합모적의청난 공신(奮忠出氣合謀迪毅淸難功臣)이라 하고, 2등은 박명현(朴名賢) · 최호(崔湖)인데 분충출기적의청난 공신(奮忠出氣迪毅淸難功臣)이라 하고, 3등은 신경행(辛景行) · 임득의(林得義)인데 분충출기청난 공신(奮忠出氣淸難功臣)이라 하였다. 각각 관작을 내리고 군으로 봉했는데 모두 5인이다.

사신은 논한다. 국가가 임진년의 왜변을 만나 종사(宗社)가 전복되고 승여(乘輿)가 파천했으며 원릉(園陵)이 화를 입었고 생령들이 해독을 받았으니, 말하기에도 참혹한 일이다. 다행히 황은(皇恩)이 멀리 미침을 힘입어 팔도(八道)가 다시 새로워졌으니, 임금의 도리에 있어 논공 행상(論功行賞)하여 공로에 보답하는 특전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호종신(扈從臣)을 80여 명이나 녹훈(錄勳)하였고 그 가운데 중관(中官)이 24명이며 미천한 복례(僕隷: 종 또는 노복)들이 또 20여 명이나 되었으니, 또한 외람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이르러서는 주군(州郡)에서 불러 모은 도적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그것을 토평한 것이 어찌 공이 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선조실록 1604/6/25)

이순신 장군은 선조에게 어떤 신분이었을까. 신하도 아닌 종이었다. 신하는 왕에 대한 상대 개념(君臣)이고, 종은 주인에 대한 상대 개념(主從)이다. 국가 개념이 정립 안 된 선조는 신하가 없었다. 친인척(공신 포함) 아니면 이씨 왕가를 섬길 종만 있었다. 그러나 부들부들 떨면서 중국이 빤히 바라다 보이는 의주까지 도망갈 때는 선조도 약간 철이 들어 나라를 구할 충신을 간절히 바랐다. 오매부망 왜군을 물리칠 장군에 대한 희소식을 기다렸다. 몇 십 명 죽인 소소한 전투 말고 수천 명 죽이고 수백 척의 적선(敵船)을 수장시켜 전쟁의 물줄기를 바꾼 승첩이 마침내 도착했다. 천만 뜻밖에도 섬나라 사람들이 장기로 하는 바다에서 승첩이 왔다. 너무도 꿈만 같아 임금과 신하들이 다들 끌어안고 몇 달 만에 처음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바로 임금은 상을 내렸다. 그러다가 드디어 명나라의 군대가 왔다. 그러나 고작 3천 명을 끌고 와서 조승훈은 큰소리 뻥뻥 날리다가 평양성에서 왜군에게 참패했다. 말하기도 부끄러운 패전 후 조승훈은 조선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웠다.
--2만 명이 넘는 왜군을 왜 2천 명밖에 안 된다고 했느냐!
그 말도 일리가 있었으니, 조선은 한 해가 다 가도록 왜적의 숫자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래저래 더욱더 이순신 장군이 돋보였다. 한산대첩은 왜군이 평양 이북으로 올라가지 못하게 만든 왕쐐기였다. 조승훈이 패할 때까지만 해도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종이 아닌 충신으로 대접했다.

마침내 이여송이 약 4만 명의 대군을 몰고 와서 바닷길이 막혀 굶주림에 시달리던 왜군을 평양성에 쫓아냈다.
이 때부터 선조의 태도가 급격히 달라진다. 이순신은 종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이여송은 하늘보다 높은 상전으로 우러러 본다. 이여송만이 아니다. 명의 관리는 아무리 지위가 낮아도, 심유경 같은 국제 사기꾼도 선조가 버선발로 쫓아가 큰절을 올려야 할 상전이다. 종은 공을 세우는 것이 당연하고 공이 너무 높으면 도리어 껄끄럽다. 공이 크면 일찌감치 밟아야 한다. 상전은 아무리 우대해도 지나침이 없고 종은 아무리 하대해도 모자람이 있다. 대신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아들은 못날수록 내리사랑을 단비처럼 쏟아 부을 대상이다. 선조가 명나라 사람은 지위의 높낮이에 관계없이 그토록 비굴하게 받들어 모신 것은 심리적으로 전쟁의 모든 공을 자신이 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대인들을 성심성의로 섬김으로 그들이 가슴 뭉클 감동 먹어 우리나라를 구했도다.
--이순신이 공을 세워? 명나라 장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그까짓 것 아무나 할 수 있다구. 원균한테 맡겨 봐. 못할 줄 알아? 더 잘해! 두고보라구, 이 바보들아! 우리나라 수군은 원래 강해!

하늘에서 내려온 군대가 대번에 섬나라 오랑캐를 몰아낼 줄로 알았는데, 벽제관에서 대패한 후 다시는 싸움에 나서려 들지 않았다. 이 때부터 선조는 뭔가 찜찜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수라고 생각하고 명나라 관리나 장수만 만나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굴하게 군다. 한 나라 왕이란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조폭도 이 정도로 비굴하진 않다. 그러면서 홀로 조선 전체 군사의 3분의 2를 양성한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임을 끝내 모르고, 아니! 절대 인정하지 않고 이순신 장군을 감히 주인의 명에 대드는 건방진 종 취급한다. 임진왜란을 사실상 종식시킨 기적의 기적 명량대첩 후에도 선조는 이순신 장군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않고, 종 이순신에게 다른 사람에겐 다 내려도 상도 내리지 않는다. 종으로서 당연히 할 '사소한 일'을 했을 따름이다. 도리어 명나라 장수가 자기 공은 아무 것도 없다며 민망해 하면서 이순신에게 상을 내린다.

...
상이 말하기를,
“흉적이 조금 물러가고 종묘 사직이 다시 돌아왔으니 이는 참으로 대인의 공덕이라 감사함을 무엇으로 말하겠습니까. 절을 하여 사례하겠습니다.”
하니, 양 경리(양호: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최고위직)가 말하기를,
“이게 무슨 말씀이오. 제가 무슨 공이 있습니까. 이러한 예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고, 상이 굳이 청해도 따르지 않았다. 상이 말하기를,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바로 그의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인이 은단(銀段)으로 상주고 표창하여 가상히 여기시니 과인은 마음이 불안합니다.”
하니, 경리가 말하기를,
“이순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다 흩어진 뒤에 전선(戰船)을 수습하여 패배한 후에 큰 공을 세웠으니 매우 가상합니다. 그 때문에 약간의 은단을 베풀어서 나의 기뻐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자, 상이 말하기를,
“대인에 있어서는 그렇지만 과인에 있어서는 참으로 미안합니다.”
하였다.
...
上曰: “兇賊少却, 廟社重還, 實是大人之功, 無以爲謝。 請作拜以謝。” 經理曰: “惡, 是何言也? 俺何功哉? 不敢當此禮。” 上强請, 不從。 上曰: “統制使 李舜臣 捕捉些少賊, 是乃渠職分內事也。 非有大功伐, 大人賞以銀段, 褒以美之, 寡人未安于中。” 經理曰: “ 李舜臣 , 好漢子也。 收拾戰船於散亡之餘, 能立大功於?敗之後, 極可嘉奬, 故略施銀段, 以示俺嘉悅之意耳。” 上曰: “在大人則然矣, 於寡人, 實有所未安也。”
...
(선조실록 1597/1/20)

선조가 하늘같은 상전인 중국인을 얼마나 극진히 모셨는지는 다음 기사 하나만으로 족할 것이다. 원균이 경상도와 전라도를 한꺼번에 잃기 한 달 전, '종 주제에 약간의 공을 세웠다고 적에 대해 군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이행하지 않고 감히 기어오르려 한' 이순신을 백의종군 시켜놓고, 명나라의 고작 부총병에 지나지 않은 오유충에 오체투지 큰절하는 장면이다. 그 4일 후엔 이씨 왕가를 피신시키기로 결정한다. 실은 평양성 탈환 외에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명나라 군대도 믿지 못한다. 호랑이 같고 범 같은 명나라 제독 진린을 때로는 어르고 때로는 꾸짖으며 사실상 부하로 거느린 이순신 장군과 비교해 보라. 소련군 대위 김일성의 3백만 동족 학살에 뒤이어 3백만 동족을 아사시키고 4천8백만 중에서 한 천만 더 학살할 계획을 추호도 변함없는 자에게 꼬박꼬박 위원장이라 부르며, 벌벌 기며, 애국시민은 도리어 친일파 후손과 독재주구로 몰고, 노골적으로 또는 은밀히 무어든 바치지 못해 애걸복걸한 한국의 최근 대통령들과도 비교해 보라.

오 부총병【 오유충(吳惟忠) 】이 왔는데, 상이 모화관(慕華館)에 행행하여 맞아 위로하였다. 사시(巳時) 정각에 동가(動駕)하자 왕세자가 궐문 밖에서 지송(祗送)하고 다시 문학(文學) 성이문(成以文)을 보내 모화관에서 문안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초혼(初昏)에 송석경(宋錫慶)이 총병에게 문안하고 와서 말하기를 ‘총병이 「오늘은 늦었으니 상께서는 환궁(還宮)하시고 입성(入城)하여 서로 뵙기를 바란다. 」 하였다.’ 하니, 이에 검열(檢閱)이지완(李志完)을 보내 ‘이미 교외(郊外)로 나왔으니 영위(迎慰)하는 뜻을 폐할 수 없다.’고 전하게 하였다. 초경(初更)에 총병이 도착하여 계단으로 들어와 막차(幕次)로 올라갔다가 잠시 후에 나오니, 상이 소차(小次)에서 나와 서로 읍하고는 배석(拜席)으로 나아갔다. 오유충이【그는 몸가짐이 참람하지 않고 군졸을 엄하게 검칙하였는데 우리나라에 온 여러 장수 중 그와 짝이 될 만한 자가 실로 없다. 】 말하기를,
“조의(朝衣)가 상자 안에 있는데, 꺼내지 못해 청복(靑服)으로 뵙게 되어 미안합니다.”
하였다. 상이 양배(兩拜)하기(두 번 절하기)를 청하니, 유충이 ‘명대로 하겠다.’ 하고, 자기 역시 양배하여 사은하기를 청했는데, 상이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했는데도 굳이 청하므로 상이 ‘억지로 어길 수가 없다.’ 하였다. 오유충이 또 자리를 바꾸어 절하기를 청하자, 상이 ‘그것은 결코 감당할 수 없다.’ 하고는 사배(謝拜)하였다. 상이 통사(通事)로 하여금 먼저 황은에 감격한다는 뜻을 말하게 하자, 유충이 말하기를,
“황상께서 어찌 구해주지 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다만 적들이 처음에 봉(封)함을 받고자 하므로 토벌하지 않았던 것인데, 끝내 천조(天朝)를 기만하고는 감히 다시 동병하였으니 이번 출사(出師)야말로 그냥 묵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유 총병(劉摠兵) 역시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어서 나올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유 대인(劉大人)이 또 나온다니, 황은이 더욱 망극하외다. 대인이 전에 평양 전투에서 제일 먼저 공략해 우리 나라가 거기에 힘을 입었는데, 이제 또 재차 나오니 우리 백성들이 다시 살아날 희망이 있게 되었소이다. 사배(謝拜)하겠소이다.”
하니, 유충이 말하기를,
“성상의 말씀이 당연합니다. 평양 전투에서 우리가 먼저 성을 탈환했습니다만, 이는 왕사(王事)로 나온 이상 본디 저희가 해야 할 직분이었습니다. 후에 경주(慶州)에 있을 때는 군마(軍馬)가 적어 군사 지원을 요청했는데 중간에 가로막혀 오랫동안 한산(閑散)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나가라고 해서 또 온 것이니, 사배는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통사에게 이르기를,
“그가 죄(罪)를 입은 까닭에 대하여 말을 잘 꾸며 일러주라. 만약 모가 나게 이야기하면 중국 조정과 이 제독(李提督: 이여송)에게 폐가 될 것이니, 잘 꾸며서 말하라.”
하고, 상이 말하기를,
“대인의 공덕을 우리나라가 힘입었으니, 사배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하니, 유충이 말하기를,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곳의 수병(水兵)은 얼마나 되며, 육병(陸兵)은 얼마나 되고, 전비(戰備)는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사배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사배를 다시 청해야겠소이다. 말씀하신 것은 날이 저물었으니, 써서 올리겠소이다.”
하니, 유충이 말하기를,
“국왕께서 해주신 한 마디 말씀을 제 마음 속에 이미 받아들였으니, 번거로이 수고하실 게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대인의 덕이 지중하여 사례할 길이 없는데 사배를 허락하지 않으니, 읍(揖)을 하여 사례하겠소이다.”
하니, 유충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좋습니다.”
하였다. 마침내 두 번 읍하고, 상이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잔파(殘破)되고 배신이 태만하여 일로(一路)에서 미진한 일이 많았을 텐데 매우 황송하외다.”
하니, 유충이 말하기를,
“일로의 지공(支供)은 힘을 쓰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가산(嘉山) · 황주(黃州) 사람들은 비가 오는데도 술을 가지고 나와 호군(?軍)하였는데, 이는 국왕의 은혜입니다.”
하자, 상이 말하기를,
“말씀을 감당할 수 없소이다.”
하고는, 앉기를 청하여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대인을 처음 보던 날에 주례(酒禮)를 행하려 하였는데, 대인이 굳이 하지 못하게 하여 매우 서운했었소이다.”
하니, 유충이 말하기를,
“제가 거느린 절강(浙江) · 복건(福建)의 군사는 척 총병(戚摠兵)이 훈련시켰고 저는 그의 문생(門生)입니다. 어찌 저의 분부를 어기고 폐단을 짓는 일이 있겠습니까. 일로의 간고(艱苦)함에 대해서는 정 통사(鄭通事) 【 정득(鄭得) 】가 아는 바입니다. 이제 듣건대 2부(部)는 하처(下處)를 구했는데 3부는 우사(寓舍)를 얻지 못했다 하니, 다시 분부하셨으면 합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대인이 전에 평양 전투에서 철환(鐵丸)을 맞기까지 하여 우리 나라 사람들이 지금까지 마음 아파하고 있는데, 지금은 어떻소이까?”
하니, 유충이 말하기를,
“박힌 철환을 아직 빼내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기억하고 물으시니, 감사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하처(下處)에 대한 일은 즉시 분부하겠소이다.”
하니, 유충 이 말하기를,
“감사합니다. 듣건대 국왕께서 일찍 이곳에 임어(臨御)하셨다니 미안하여 그만 물러가야겠습니다.”
하자, 상이 말하기를,
“어찌 수고랄 것이 있겠소이까. 다만 대인이 수고로울 것이니, 말씀대로 하겠소이다.”
하고, 예단(禮單)을 올리니, 유충이 말하기를,
“감사합니다. 저도 쉬고 싶습니다만, 군졸이 편안해야 주장(主將)의 마음도 편해지는 법입니다. 지난밤에 비를 맞고 왔으니, 속히 하처를 만들어 주시면 되지 어찌 예단을 주십니까. 후일에 받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정(軍丁)을 먼저 출발시키고 나서 총병이 들어가야 할 것이니, 도감(都監)으로 하여금 별도로 처리하게 하라.”
하니, 이호민(李好閔)이 아뢰기를,
“도감과 한성부(漢城府)가 힘을 합쳐 함께 해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상이 오유충에게 답하기를,
“말씀대로 했소이다.”
하고, 이어 예단을 올리기를 청하니, 유충이 말하기를,
“어른께서 주는 것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는 법인데, 더구나 국왕께서 내리시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잔파된 곳에서 받기가 미안하고 또 날도 저물었으니, 단자(單子)만 받고 물건은 후에 받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처음 보는 날에 그처럼 물리친다면 무척 서운합니다.”
하니, 유충이 말하기를,
“단자를 받으면 물건을 받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제 날도 저물었고 감히 받지는 못하겠으나 감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 중국 군사를 그냥 놔두고 혼자 들어가서는 안 된다.”
하니, 이호민이 아뢰기를,
“군인들의 숙소는 이미 분부하였으니 즉시 처리할 것입니다. 총병을 먼저 들어가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말하라.”
하였다. 유충이 말하기를,
“읍을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말씀대로 하겠소이다.”
하였다. 유충이 말하기를,
“배사(拜謝)해야 할 것이나 수고를 끼칠까 싶어 감히 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감당하지 못할 일이외다.”
하고, 마침내 두 번 읍하였다. 상이 계단을 내려가 전송하려 하자, 유충이 굳이 사양하여 내려오지 말기를 청하였다. 상이 계하(階下)에 말을 대게 하니, 유충이 다시 청하였다. 상이 입차(入次)하였다. 상이 재차 읍하니, 유충이 마침내 말을 타고 떠났다. 상이 환궁하니, 왕세자가 궐문 밖에서 지영(祇迎)하고, 인하여 들어와 문안하였다. 정원(政院)·약방 제조(藥房提調)와 2품 이상의 옥당(玉堂)이 문안하였다.
(선조실록 1597/6/14)

명나라 군은 조선을 구원하러 왔지만, 북한은 임란 때나 경술국치 때의 왜적보다 못한 것이 땅 욕심이 나면 만주로, 간도로 쳐들어갈 일이지 노예 동족을 날마다 굶겨 죽이고 때려죽이는 것도 성에 안 차는지 평화롭게 배부르게 잘사는 남쪽의 동족을 핵폭탄과 미사일과 땅굴과 화학무기와 120만 군대로 기어코 전면전을 벌여 노예 동족을 7천만으로 늘리겠다고 서슴지 않고 공언한다. 그런 자에게 명색이 정권교체했다는 이명박 정부는 무슨 사랑의 콩깍지에 씌었는지 진실과 사랑의 풍선 하나 날리는 것도 펄쩍 뛰며 못 보내게 한다. 법으로 엄단하겠단다!
(2009. 2. 28.)

우리 민족은 해낼 수 있습니다

필자는 정치가도 아니고 외교가도 아니고, 국제정세는커녕 동남아 지역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잘 몰랐습니다. 평생 건축설계를 天職으로 생각하고 美洲동부 공립학교들 설계에만 종사해왔고 설계가 그렇게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수백만 북한주민들이 김정일에게 몰죽음 당했는데, 그런 사람백정을 열심히 지원해준 남한의 두 역적 김대중 노무현과 싸우면서, 점차로 동남아 지역정세나 중국을 지켜보며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10년 지켜본 결과, 사람백정 김정일을 없애려면 두 가지 先決조건이 있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김정일을 없애려면 남한의 친북좌파들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그리고 친북좌파들과 싸울 때 송사리들과 싸우지 말고, 그들의 슨상님이자, 根腫이고 뿌리인 늙은 毒蛇 김대중을 잡아죽여야 합니다. 집중적으로 집요하고 끈질기게 김대중의 反조국 反민족 역적질을 씹고 또 씹어대야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오른쪽 왼쪽을 오락가락하지만, 그 사람의 치명적 단점, 의심이 가는 점이, 왠 일인지 김대중을 절대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명박은 김대중을 정말 민주화투사로 존경하든지, 아니면 김대중에게 약점을 잡혔거나 暗約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두 가지 경우 어느 쪽이든, 이명박에게 김대중과 싸울 각오가 없으면 이명박은 아무 짝에 소용없는 핫바지 저고리입니다. 아니, 빨리 청와대에서 내쫓아버려야 할 국가의 癌的 존재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김정일을 무서워해서 싸우기 싫으면 최소한 김대중을 감옥에 잡아넣을 수는 있어야 대한민국 대통령입니다. 김대중을 없애지 않으면서 김정일을 없앤다는 것은 백프로 전혀 가망없는 소리들입니다.

둘째, 김정일을 없애려면 중국을 몰아세우거나 兆단위 돈으로 뙈놈들을 매수해서 김정일과 호금도 사이를 갈라놓아야 합니다. 호금도가 김정일 뒷배를 보아주는 한, 이명박은 물론 오바마가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하더라도 김정일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김정일이 핵실험해서 중국이 정말 화를 냈었다고? 김정일이 미사일을 날리면 호금도가 매를 들고 김정일 종아리를 치실 거라고?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미국과 남한과 일본이 돌돌 뭉쳐서 중국에게, 너희들, 김정일을 처치하지 않으면 앞으론 너희들과 땡전 한 푼 거래하지 않겠다고 얼러대면 뙈놈들이 조금은 움찔 할 것입니다. 뙈놈들은 돈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이게 모두 대낮의 몽상 망상입니다. 이명박이 그럴 리 없고, 오바마가 그럴리 없고, 일본도 그럴 리 없습니다. 이명박에게는 [비핵개방3000포]가 있을 뿐이고, W. 부시와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에게는 [제100차, 제1000차 6자회담, 양자회담]이 있을 뿐이고, 일본사람들에게는 오로지 피납북자들 문제만이 있습니다.

한국정부, 미국정부, 중국 공산당이 모두 김정일을 죽이자는 것에는 반대입니다. 김정일 정권을 교체해야 하나? 절대로 아니올시다! 입니다. 김정일에게서 핵만 뺐으면 만사 오케이라고들 떠드는데, 김정일의 장난감 핵조차도 해결하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가 해결하지 못한 똥배 김정일의 핵을 오바마 힐러리가 해결 해? 이명박이 해결 해? 김정일의 핵은 김정일의 행님 호금도도 해결할 수 있을 지 없을 지 잘 모르는 일입니다. 아마, 못할 겁니다. 안 할 겁니다.

정치가도 아니고 외교가도 아니고 군사전문가도 아닌, 재미교포 소시민인 이 남신우의 결론은, 저와 동갑인지 저보다 한 살 더 많다는 개정일이 저보다 훨씬 더 오래 잘 살 거란 것이고, Nuclear 김정일이 살아있는 한, 김정일의 장난감 핵은 심심하면 CNN, Fox News에서 가끔씩 보도할 것이고, 그렇게 한세월하는 동안 북한주민들은 김정일과 호금도에게 계속 맞아죽고 굶어죽을 것입니다. 미국은 가끔 한 두명 탈북자들을 받아들이는 척만 하면 되고, 이명박은 계속 [비핵개방3천포]만 흥얼거리면 되고, 일본은 메구미 짱 돌려보내라! 소리만 지르면 됩니다. 지난 10년, 20년을 그렇게들 해왔으니, 앞으로도 계속 그런 염불들만 흥얼거리며 한세월 할 것입니다.

권력가들을 믿지 말라! Put not Faith in Princes!
권력가들, 정치가들, 외교가들을 믿으면,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3천포로 빠집니다. 클린턴에게 속고, W. 부시에게 속았으면 되었지, 이명박과 오바마에게 또 속으면 속는 사람들이 더 바보입니다.

그러니, 탈북투사들을 믿고 지원하고, 북한인권운동가들을 지원해야 합니다. [자유북한방송]의 김성민 대표를 돕고, [자유북한운동연합]의 박상학 대표를 돕고, 탈북투사 황장엽 선생이나, 미국의 [북한자유연대] 수잔 숄티나, [Helping Hands]의 팀 피터스나, 독일의사 노르베르트 폴러첸를 도와야 합니다. 정치외교가들 믿지말고 인권 엔지오들을 지원해야 합니다.

美남북전쟁으로 연방을 살리고 흑인노예들을 해방시킨 링컨 이전에 前흑인노예 출신이었던 노예해방운동가 프레드릭 더글러스가 있었습니다. 백인으로 노예主들과 총칼로 맞서서 싸우다가 교수형을 당한 노예해방 혁명가 존 브라운이 있었습니다. [엉클 톰스 캐빈]을 써서 미국과 유럽의 양심을 일깨운 해리엣 비처 스토우 여사가 있었습니다. 이런 혁명가 인권운동가 작가들이 길을 닦고 다리를 놓았기 때문에 진짜 인권운동가 혁명가 에이브러햄 링컨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공짜가 아니라 비싸도 한참 비쌉니다. 종잇장 돈으로 살 수있는 싸구려가 아니라, 사람의 피를 엄청 요구하는 비싼 물건이 바로 자유입니다.

지금 당장 김정일 김대중을 때려잡을 수 없으니, 저 악마들을 때려잡아줄 진짜 혁명가 지도자가 나올 때까지는 우리 인권운동가들, 탈북자들이 열심히 열심히 뛰어야 합니다. 핵으로 김정일을 때려잡을 수 없습니다. 풍선삐라 진실로 때려잡아야 합니다. 정권교체 이명박이 대한민국법으로 김대중을 때려잡을 수 있는데, 장돌뱅이 이명박이 법을 집행 안 하고 아침이슬이나 흥얼거리고 있으니, 법을 집행할 때까지 계속 이명박을 공격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제 전여옥 국회의원이 국회 안에서 빨갱이 미친 것들에게 피를 보았습니다. 빨갱이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미친 개들입니다. 이제부터 자유의 進軍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한참 피를 더 흘려야 우리는 2천만 북한동포들을 구하고 5천만 우리들의 자유와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습니다.

기미년 삼일절이 내일입니다.
우리 민족은 해낼 수 있습니다.

2009년 2월 28일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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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February 23, 2009

김정일을 선제공격해야 합니다

텔레비, 신문, 인터넷을 보면, 세계 도처에서 매일 처참한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가난과 무지와 질병과 인종차별과 기아, 독재, 전쟁, 학살 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매일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은 아직도 검은 대륙이다. 백인들의 식민지 시대에서 벗어난 지가 오래인데도, 뭐가 좀 나아지기는 커녕 어떤 면에서는 인간들의 기아 질병 학살 참상이 식민지 시대보다 더 지독한 것 같다. 중동에서 매일 벌어지는 이슬람 테러리스트 극렬분자들의 자폭자살 광란행위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인도가 경제적으로 좀 나아졌다곤 하지만, 인도의 가난과 계급차별과 질병은 아직도 10억 인구를 괴롭히고 있다. 중국이 등소평의 개혁개방으로 13억 기아를 해결해냈다고 자랑하지만, 법륜공 신도들은 잡히면 그들의 산 몸에서 臟器를 도려내는 장기공장의 祭物이다. 공산당이 끝났다던 러시아에서는 사람들이 공산당을 다시 그리워한다고 한다. 이렇게 21세기 全세계 인간들의 불행은 한도 끝도 없다.

세계 도처에서 매일 비참한 참극이 계속되는데, 왜 너에게는 惟獨 북한주민들의 인권만이 그리 중요하고 급박하고 처절하단 말이냐? 그 걸 질문이라고 하느냐! 내지르고 싶지만 필자에게는 왜 북한주민들의 인권이 그리 중요한지 밝혀 보겠습니다.

북한주민들의 문제는 사실 인권문제가 아닙니다. 인권문제 以前인 생존권 문제입니다. 세계 어는 곳을 보나, 당장 굶어죽을 지경이고, 사랑하는 자식들이 굶어 누워있는데, 먹을 것을 찾아 강을 건느거나 딴 지방을 유랑하는 것을 막는 독재는 없습니다. 북한주민들에게 인권문제라고 하면 사치스러운 개념입니다. 인권이 아니라 굶어죽느냐 멀건 죽이라도 먹고 사느냐, 생존권 문제입니다.

북한주민들은 美남북전쟁 前 흑인노예들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흑인노예들은 노예主들에게 가축 취급을 받았지만 내일 부려먹기 위해서 오늘은 먹여 살렸습니다. 북한주민들은 죽을 때까지 일만 합니다. 김정일에게는 북한주민이 소모품입니다. 북한주민들에게 먹을 것만 있으면 인권없는 뙈놈들 나라로 튀지 않습니다.

역사상 북한주민들의 참극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은 나치 히틀러에게 당한 유태인들의 홀로코스트와 美원주민 인디언들의 인종학살 참극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치 때 유럽에 살던 유태인들은 아우슈비츠 이외에는 갈 곳이 없었습니다. 600만이 학살 당하는데 도망쳐서 안전하다고 한 곳은 대서양 건너 미국밖에 없었습니다. 美대륙에서 백인들이 개미떼처럼 서부로 몰려올 때 그곳에 살던 인디언들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비극은 죽어야만 해결되는 비극이었습니다. 유태인들과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비극은 인권문제가 아니라 생존권 문제였습니다. 독일도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는 철저히 반성하고, 미국도 인디언 인종학살은 미국역사의 치부라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북한주민들이 당하는 참극은 사실 더 지독합니다. 유태인들은 전세계가 불바다로 탈 때, 집단으로 미친 독일 아리안 족들에게 당하고,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당하는 줄도 모르면서 백인들에게 당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은 동족에게 당하고 있습니다. 똑같이 생기고 똑같은 이름을 가진 김정일에게 당하고, 똑같이 생기고 똑같은 이름을 갖고있는 김대중에게 당하고, 똑같이 생기고 똑같은 이름들을 가지고 있는 남한사람들의 무관심과 외면 때문에 이 참변을 당하고 있습니다. 고금동서 역사에 전쟁도 아닌데 자민족을 이렇게 몇 백만 죽인 일은 없습니다. 韓민족? 민족끼리? 얼마나 창피하고 참괘하고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까?

이 남신우는 미국에서 40년이 아니라 백년을 살아도 그냥 韓민족 남신우입니다. 어떻게 동족이 몇 백만 살육을 당했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북한주민 인권 일을 하는 것입니다. 북한주민의 생존권이 나에게는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창피하고 미운 韓민족을 자랑스러운 韓민족으로 바꾸자! Better Late Than Never! 늦었지만, 사람들이 이미 많이 죽었지만, 지금이라도 정신차려서 북한주민들을 살리자! 죽은 사람들에게 속죄하기 위하여, 나혼자 너무 편하게 산 것이 죄스러워서, 이 미친 짓을 10년 가깝게 해온 것입니다.

김정일의 대학살은 우리가 해결해야 합니다. 미국이 해결해줄 수 없습니다. 중국 뙈놈들이 탈북난민들을 강제북송한다고 탓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일본사람들을 쪽바리라고 욕해? 일본사람들은 몇 명 안되는 자국민 피납북자들 찾겠다고 김정일과 일전불사 싸우고 있습니다. 일본사람들 욕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 동족 북한주민들을 우리 힘으로 구하면, 그 다음에 우리는 큰 소리 칠 수 있습니다. 우리 동족 살리는데 미군도 필요 없다! 우리 동족 살린다는데 중국이 왜 막느냐! 큰 소리 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의 생존권을 외면하면, 남한국민들의 생존권을 주장할 자격도 없고 명분도 없고 지킬 수도 없습니다.

세계 어느 곳이나 지금 경제위기로 난리들입니다. 이 경제위기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고, 모두 난리들입니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에게는 경제위기란 것조차 없습니다. 북한주민들에게는 지난 60년간 매일매일이 생존위기입니다.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겪고있는 경제위기는 위기가 아니라 신선놀음입니다.

살인마귀 김정일이 남한을 향하여 대포를 정조준 해놓고, 오늘내일 미사일을 날리겠다고 발광입니다. 이번 기회에 북한주민들을 살려야 합니다. 김정일이 서해바다로 대포를 쏘는 순간, 김정일이 동해바다로 미사일을 날리는 순간, 김정일이 숨어있는 평양 지하궁전을 까부숴야 합니다. 미국에 앉아서 무책임한 소리 하지 말라고? 3백만 동족이 굶어죽게 내버려 둔 것은 책임있는 짓이고, 김정일을 폭살시키자는 것은 무책임한 소리인가? 이번 기회에 김정일을 제거해야 합니다. 김정일만 제거하면 김대중 친북좌파들은 자연소멸할 것입니다. 지금이 북한동포들 살리고 나라 살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2009년 2월 23일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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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February 21, 2009

일본의 충이 조선의 효를 유린하다(7) - 최성재

일본의 忠이 조선의 孝를 유린하다

임진왜란 때의 폐습이 대한민국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최성재

임진왜란 중 조선이 한꺼번에 가장 많은 군대를 동원한 전투는 1592년 5월 5일(이미 이틀 전인 5월 3일에 왜군은 한양을 무혈점령) 용인전투로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삼도 연합의 근왕병(勤王兵) 6만여 명이었다. 이이의 10만 양병설이 인구에 회자(膾炙)하는데, 그것은 사료의 뒷받침이 되지 않는 것이어서 그의 문하생들이 후에 붕당을 강화하기 위해 지어낸 말인 듯하지만, 어쨌건 단시일에 6만여 명이 모인 걸로 보아 여기에 의병을 포함하더라도 장부상으로는 조선이 임진왜란 당시 10만 명에서 20만 명의 군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겉이 아니라 속이었다.

용인에 집결한 6만 대군은 왜장 협판안치(脇坂安治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일사불란한 지휘 아래 프로 전사 1천6백 명이 공포탄을 몇 방 쏘자, 어미 날개 죽지에 숨어 고개만 내밀고 사방을 호기심에 어려 둘러보던 꿩 병아리들이 무슨 일로 어미가 푸르륵 날아가면 즉각 사방으로 흩어지듯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그게 끝이었다. 그 후 7년 동안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 외에는 두 번 다시 육지에서는 실력은 둘째치고 숫자만이나마 일본과 대등한 대군을 동원할 수 없었다. 8도에서 다 긁어모아야 최대 만 명밖에 모을 수 없었다. 일본은 얼마나 통쾌했던지 지금도 임진왜란 중 최대의 쾌거로 이 용인 전투를 꼽는다.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수),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尹先覺) 등이 치계하였다.
“신들이 기병·보병과 6만여 인을 거느리고 이 달 3일에 수원(水原)에 진을 쳤는데 양천(陽川) 북포(北浦)를 경유하여 군사를 건너려고 합니다. 앞뒤 양쪽에서 들이치는 계책을 조정에서 급속히 지휘해 주소서.”【 김수 등이 올 적에 행군(行軍)함에 규율이 없어 앞뒤가 서로 호응하지 못하였다. 선봉(先鋒) 백광언(白光彦) · 이지시(李之詩) 등은 땔나무하고 물긷는 왜적 10여 급(級)을 참하고서 더욱 왜적을 경시(輕視)하여 교만한 기색이 있었다. 수는 이미 누차 패전하여 수하에 군사도 없어 형세가 고단하고 기운이 꺾이었으며, 광은 본시 용렬하고 겁이 많아 계책을 세워 대응할 줄을 몰랐기 때문에 조정에 명령을 청하여 진퇴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선조실록 1592/6/21)

○ 慶尙道 觀察使 金수, 全羅道觀察使 李洸, 忠淸道觀察使 尹先覺 等馳啓曰: “臣等率騎步及六萬餘人, 以本月初三日, 陣于 水原 , 欲由 陽川 北浦濟師矣。 腹背挾攻之策, 請自朝廷急速指揮。【 수 等之來也, 行軍無律, 首尾不相應。 先鋒 白光彦 、 李之詩 斬賊之樵汲者十餘級, 益輕賊有驕色。 수旣累敗, 手下無軍, 勢孤氣挫, 洸 本庸怯, 不知所以策應, 請命於朝廷, 以爲進退之計。】

윤선각이 또 치계하였다.
“신이 5월 4일에 수원에서 전라도 군사와 길을 나누어 신은 안산(安山)을 경유하고 이광(李洸)은 금천(衿川)을 경유하여 양천(陽川)의 북포(北浦)에서 회합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전라도 선봉장 백광언(白光彦)은 이미 용인에서 적과 서로 대치하였습니다. 신은 행군하여 수원부 앞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유숙하였습니다. 5일 아침에 병사(兵使) 신익(申翌), 방어사 이옥(李沃) 등으로 하여금 각각 병마를 거느리고 나아가 전투하도록 하고, 신 및 이광 ·김수 등은 모두 전쟁터에서 10리쯤의 거리로 진을 옮겨 계속 응원할 계획이었는데, 신익 ·이옥 등이 비보(飛報)를 보내 위급함을 알리기에 신이 정예병 2백 명을 뽑아 계속 달려가 응원하게 하여 3위(衛)가 합력해 싸워 10여 급(級)을 베었습니다. 그런데 곽영(郭嶸)의 진영이 적의 침박(侵迫)을 받아 황망히 달아나자, 또 한 부대의 적이 동쪽에서 쫓아와서 갑자기 신익을 핍박하니 모든 군졸도 흩어져 버렸습니다. 신의 진중(陣中)에 상하(上下)가 아직 아침밥도 먹지 않고 군사들도 미처 정돈하지 못했는데 양진(兩陣)의 패전하여 흩어진 병졸들이 토붕 와해되어 진영 앞으로 달아나 지나가기에 신이 경악을 금치 못하여 즉시 군관 10여 명으로 하여금 칼을 휘둘러 6∼7명을 참하게 하였지만, 그래도 중지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신은 다만 군졸 두어 사람들과 진중에 외로이 남아 있을 뿐이어서 어찌할 방법이 없어 부득이 적의 예봉(銳鋒)을 피해 행군하여 갈원(葛院)에 이르렀습니다. 김수가 뒤이어 도착하기에 신이 김수와 평택현(平澤縣)에 이르니 이옥(李沃)이 어둠을 틈타 뒤따라 왔습니다.

신들이 처사를 잘못하여 이렇게 무너져 패전하게 되었으니 만 번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으므로 행재소(行在所)에서 거적을 깔고 앉아 주책(誅責)을 기다려야 되겠지만, 승세를 탄 적들이 만약 직산(稷山)의 길로 곧장 내려가면 우도가 패망될 것이 염려되었습니다. 이에 신은 병사 신익, 방어사 이옥, 조방장 이세호 등과 서울에 가까운 고을에 나누어 주둔하면서 흩어져 도망한 병졸들을 소집하여 뒷일을 도모하고자 합니다.”(선조실록 1592/6/28)

얼마나 장수가 전투에 서툴렀던지 적을 벤 숫자(10여명)나 명령에 불복한다고 아군을 벤 숫자(6~7명)나 비슷했다. 오합지졸도 이런 오합지졸이 없었다. 임금부터 어찌나 잘 달아나는지 쫄쫄 굶으며 하루에 120리도 예사로 도망갔다. 원균만 도망간 게 아니다. 군인이든 관리든 백성이든 90&per;가 도망갔다! 왜군이 4월 14일 부산성 함락에서 서울 무혈입성까지 걸린 시일은 고작 19일! 당시의 꼬불꼬불 좁은 길을 감안할 때, 부산과 서울의 거리는 족히 600km는 되었을 것이니까(경부고속도로는 430km), 왜적은 하루 평균 32km, 80리나 달렸다. 과거 보러 가는 선비보다 빨랐다. 16만의 군대는 엄청난 규모인데, 이런 대군은 하루 20km 행군해도 엄청난 속도다. 전투는 사실상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졌을까. 당시 일본에서라면 그 정도 땅을 빼앗으려면 아무리 적어도 10년은 족히 걸렸다. 1582년 어느 절에서 통일의 기초를 거의 다 닦은 직전신장(織田信長)이 암살된 후, 그 기업을 그대로 이어받은 전쟁귀신 풍신수길이 통일한 것은 1590년이었다. 다 된 밥을 떠먹기만 하는데도 꼬박 8년이 걸렸던 것이다. 일본은 막부시대(1185~1466)와 남북조시대(1336~1392)와 전국시대(1467~1590)를 거치는 동안 지역마다 크고 작은 대명(大名 다이묘)이 버티고 있어서 만만한 놈이 한 놈도 없었다. 칼싸움이라면 조선사람이 말싸움하는 것보다 잘했다. 칼의 시대가 무려 400년간 지속되면서 살아남기 위해 누구나 무예를 닦고 병법을 익혔다. 여기에 전국시대 말기에 포르투갈로부터 조총이 도입되면서, 이를 가장 먼저, 빨리, 많이, 몰래 도입한 자가 통일을 꿈꾸게 이르렀다. 그가 바로 직전신장이었다.

나는 일본사의 전통적인 시대구분 대신 막부시대부터 1615년 대판(大阪 오사카) 전투까지를 전란(戰亂)시대 내지 내란(內亂)시대라고 이름짓는다.

1368년 중국에서는 몽골의 원을 몰아내고 한족의 명이 들어선다. 약 한 세대 후 1392년 청구(靑丘)에서는 조선이 들어선다. 두 지역에 거의 동시에 사대(事大)하고 교린(交隣)하는 붓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명의 영락제와 조선의 세종까지는 원래 칼로 세운 나라답게 두 나라는 군사도 막강했다. 명은 정화를 시켜 아프리카 동안까지 진출했고, 조선은 신라통일 이래 그렇게도 오매불망 원했던 고구려 옛 땅 중 꽤 많은 부분을 되찾아 처음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동시에 국경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그에 앞서 바다 건너 왜구의 소굴도 짓밟았던 것이다. 문무의 조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스스로 외적보다 내부의 적을 더 두려워 하여 군대를 의도적으로 약화시키면서 군사력이 형편없이 약화되었다. 다행히 몽골은 예년의 위엄을 다시는 못 찾았고 여진은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왜구는 잠잠했다. 그래서 명과 조선에서는 장장 200년간 평화가 지속되었다. 이 두 나라에서는 철저히 문관 우위가 지켜져서 독립적으로 자신의 군대를 가진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왕조를 뒤엎으려는 반란은 누구도 꿈꾸지 못했다. 1,000명의 정예병도 독자적으로 거느린 장군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따금 대역죄를 덮어쓰고 참살되는 자가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적을 제거하는 구실밖에 안 되었다. 왕실 안에서 겨우 군사 100여 명을 동원하여 왕을 바꾸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것은 왕조를 바꾸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명(明)은 중국의 역대 왕조 중 가장 시원찮고 가장 부정부패가 심한 왕조였다. 명의 시조 주원장이 관리는 청렴해야 한다며 녹봉을 터무니없이 적게 주는 바람에 생계형 부정부패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조선도 비슷했다. 백성과 가장 가까운 관리인 지방의 아전은 아예 과전도 녹봉도 없었기 때문에 다들 알아서 해 먹었다. 그 수단이 고도로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생활은 토지를 바탕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벼슬과 학문과 연줄과 뇌물과 패거리로 토지를 챙겨서 세금을 안 내거나 거의 안 내는 것이 양반의 최대 관심사가 되었다. 오로지 내 가문, 내 가족, 내 동문, 내 붕당뿐이었다. 입으로는 곧 죽어도 삼강오륜이었고!

이렇게 하여 조선은 중기에 접어들면서 철저히 효(孝)의 나라로 바뀌었다. 나라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내 가문, 내 가족뿐이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부모가 죽으면 나라 일은 그 날로 팽개치고 그 무덤 곁에서 초막을 짓고 3년 동안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지 않는 자는 인간도 아니었다. 충(忠)은 더 이상 국가나 백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임금에게 잘 보이는 것으로 전락했다. 그것은 일종의 효에 다름없었다.

언제 누구에게 죽을지 모르는 일본에서는 잘 싸우는 자가 되거나 잘 싸우는 자를 모시는 것이 가족을 돌보는 것보다 중요했다.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누라도 바치라면 기꺼이 바쳤고, 자식도 인질로 내놓으라면 언제든지 내놓았다. 일본은 전세계에서 가장 철저한 충의 나라로 변한 것이다. 이 전통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살아 있다. 사원은 회사에 충성을 다하고 회사는 사원을 최대한 보호한다. 아랫사람의 충성에 대해서 윗사람은 신의로 갚는다. 시야가 넓다. 법을 잘 지킨다.

대신 한국은 그저 내 부모 내 자식이다. 시야가 좁다. 법을 잘 안 지킨다. 내 가족이나 내 정신적 부모를 위해서라면 못하는 짓이 없다. 과외하지 말란다고 과외 못하는 자는 부모도 아니다. 법이 무서워 못하는 게 아니라 돈이 없어서 못할 따름이다. 신성한 국회에서도 어제 한 말 오늘 획 뒤집고 난장판을 만든다. 부모와 똑같은 어르신의 칭찬 한 마디면 머리에 피가 철철 흘러도 하나도 안 아프다. 그 영광의 상처 하나로 평생 직업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 어르신이 이 당을 만들면 이 당으로 가고 저 당으로 가면 저 당으로 가고 그 당을 만들면 그 당으로 간다. 아버지가 무조건 옳듯이 어르신은 무조건 옳다. 아버지한테 바른 소리 못하듯이 어르신한테 꿈에도 바른 소리를 못한다. --우리는 한 가족!

국가가 존망지추에 이르렀음에도 국가는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제 가족의 안위만 챙기는 데는 만백성의 어버이 선조가 가장 앞장섰다. 1597년 6월 14일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장계가 올라왔다. 그에 따르면, 이순신 장군을 하옥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간첩 요시라가 일러 준 건데, 기존의 3만에 더하여 15만이 곧 들이친다고 했다. 통제사 원균이 지키고 있는 조선의 바다를 거쳐 대대적으로 침략하는 것은 여반장이라 생각하고 드디어 왜군이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하려고 한 것이다. 이 첩보를 듣고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다가 불과 나흘 만에 선조는 제 식구부터 챙긴다.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명나라 군사가 서울로 오기 전에 왕비와 자식을 피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비겁한 인간이다. 아귀같이 남의 돈 잘 뜯어먹는 제 형님 하나 살리려고 전 국민이 보는 TV 앞에서 왜곡된 정보로 좋은 학교 나온 인재에게 망신을 주어 그로 하여금 수치에 부들부들 떨며 이승과 하직하게 만든 어느 대통령을 보는 듯하다.

...
요시라가 자기의 의견을 말하기를, ‘뒤에 나올 군사가 15만, 이 곳의 왜군이 3만, 합계 18만이다. 3∼4만 명은 진영에 유둔할 것이고 그 나머지 군사는 깊숙이 들어가는데 잇대어 진영을 치지는 않을 것이다.
...
조선의 수군은 이미 정돈되었는가? 지금쯤은 출전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1597/6/14)

...
“적의 형세가 이러하여 마 도독(麻都督)과 양 경리(楊經理)가 올 예정이다. 그러나 중국군[天兵]이 나오더라도 적을 꼭 토벌한다고 기약하기 어렵고 양식이 떨어질까 염려되니, 일이 매우 어렵게 되었다. 마 도독과 양 경리가 나오기 전에 중전(中殿)을 피난시키고 싶은데 자세히 헤아려 결정하라.”
...
(선조실록 1597/6/18)

임금이 천리 밖에서 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문만 듣고도 제 식구부터 피난시키려 하는데, 백성들이 가만있을 리 없다. 사간원, 사헌부, 승정원에서 석 달에 걸쳐서 제발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지만,
"알았다.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 이미 조치를 취했다. 너희는 가족을 도망시키면서 왜 나만 못하게 하느냐. 이미 중지하라고 했다."
등등으로 짜증과 명령과 부인(否認)의 연막을 치다가, 기어코 선조는 가족을 9월 13일에 피신시킨다. 그 장면이 아비규환이다.

경기 감사 홍이상(洪履祥)이 치계(馳啓)하였다.
“중전(中殿)과 동궁(東宮)이 상수참(湘水站)에서 주정(晝停)하였는데, 지정된 각관(各官)들이 모두 나와 대기하지 않아 공상(供上)을 전폐하였습니다. 저녁에 마전(麻田) 앞 강에 이르렀는데 작은 배 4척 만이 있었으므로 수많은 인마(人馬)와 배종한 사람들이 도로를 꽉 메운 채 밤중에야 강을 건너 마전에 도착하였습니다. 전도되고 미안스러운 상황을 차마 말할 수 없는데 몹시 비통스러운 심정으로 석고대죄(席蒿侍罪)합니다.”
(선조실록 1597/9/13)

그 사이 진짜 왜군이 대대적으로 쳐들어와서 7월 16일 원균이 참패하여 영남에 이어 호남도 무인지경이 되고, 아니나 다를까, 왜군은 바로 6년간 전쟁 무풍지대였던 호남으로 소풍가서 8월 16일 남원을, 골목대장이 심심풀이로 막대기로 두어 번 때려서 설익은 감을 후루룩 떨어뜨리듯이, 중국과 조선의 연합군이 지키는 호남의 보루를 장난 삼아 무너뜨린다. 조선 전체가 공포에 휩싸인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도성 백성들이 남원의 패전 소식을 듣고 며칠 동안에 모두 도피하여 몇 명 남지 않았는데, 그나마 남은 자들도 모두 짐을 꾸려놓고 내전(왕비)의 동정만을 기다리다가 어제 또 전주 사태의 소식을 듣고 더욱 놀라며 궤산되고 있으니, 지금 조처를 잘 하지 않으면 성안이 텅 비게 될 염려가 목전에 임박해 있습니다. 중국 장수가 이런 실정을 트집잡아 군사를 철수하여 귀국하겠다고 하면, 모르겠습니다만 장차 무슨 말로 답변하겠습니까. ...
(선조실록 1597/8/21)

왕비를 비롯하여 임금의 가족이 '솔선수범'하여 몽땅 도망가자, 9월 15일 도성은 텅 비게 된다.

승정원이 아뢰기를,
“도성(都城)의 주민들이 모조리 도피해 나가고 남아 있는 사람은 얼마 안 되는데, 현재 머무르고 있는 자들은 노약자나 의지할 데 없는 고독한 사람들뿐입니다. 상께서 혈혈 단신으로 의탁할 데 없는 아동과 여인들을 염려하시어 쌀을 주라는 분부를 특별히 내리셨으니, 이는 실로 긍휼히 여기는 훌륭한 뜻에서 나온 것으로 또한 위안하고 진정시키는 한 방도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부(五部)의 관원들이 명을 받들어 초록(抄錄)하는 즈음에 이미 그 쌀을 주라는 명령을 알려 버렸으니, 지금 중지하여 그들의 큰 기대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탁지(度支)의 관원이 군량을 걱정하여 수대로 다 줄 수 없다고 하는데 식구 수대로 다 줄 수는 없다 하더라도 현재 남아 있는 집 및 호소할 곳 없는 여인과 아동들에게는 쌀과 소금을 나누어 주고 성상께서 구휼하는 뜻을 포고하도록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선조실록 1597/9/15)

하느님이 조선을 보우하사, 바로 그 다음날 이순신 장군이 세계해전사상 가장 빛나는 명량대첩을 일궈낸다. 그리하여 왜군도 썰물같이 물러가고 피난 갔던 왕비와 백성도 호호깔깔 돌아온다. 그러나 그것이 이순신 장군 덕분이라는 걸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죽어도 모른다. 오로지 직산에서 명의 해생이 왜군을 크게 무찌른 것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실록에 따르면, 명과 왜 중 어느 부대가 많이 죽었는지도 불분명하다. 그냥 유리하게 명나라 군사도 많이 죽었다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구한 사대주의 정신을 이어받아, 지금도 국사 책에서는 이것을 직산대첩이라고, 정유재란의 변곡점이 된 획기적인 승첩이라고 가르친다.

실은 직산전투는 천안까지 무인지경으로 밀고 온 전쟁의 달인 10만 명이 전초부대의 119 구조 신호를 받고 본격적으로 한 판 벌이려고 하자, 중과부적임을 알고 덜컥 겁이 나서 명나라 군이 혼비백산 도망쳤던 전투에 지나지 않았다. 그 후 왜군은 명나라 병사의 코를 모조리 베어 버리려고 본격적으로 준비하다가, 천만뜻밖에도 남해안과 서해안이 봉쇄되었다고 하자, 전쟁의 신 마르스가 부활하여 자신들을 독 안에 든 생쥐로 만들까 봐 허겁지겁 마르스도 난감해 하는 난공불락의 왜성(倭城)이 위치한 남해안 지역으로 썰물같이 물러난 것이다.

제독 접반사(提督接伴使) 장운익(張雲翼)이 아뢰기를,
“방금 직산(稷山)의 전쟁터로부터 돌아온 중국 병사가 말하기를 ‘천안(天安)과 직산 사이에서 뜻밖에도 왜적의 선봉이 모두들 흰 옷을 입고 들판을 뒤덮어 오기에, 중국 병사들이 처음에는 조선 사람으로 생각하여 진격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에 왜적의 선봉이 먼저 포를 쏘므로 중국 병사들이 일시에 말을 달려나가 시살(시殺)하며 한참 동안 교전(交戰)하였는데, 화살에 맞거나 곤봉에 맞아 죽은 왜적이 거의 5백∼6백 명에 이르렀고 수급(首級)은 30여 개를 베었으며 해 부총(解副摠)과 양 참정(楊參政)도 각각 손수 수급 2개를 베었다. 그런데 왜적이 산에 올라가 백기(白旗)를 드니, 천안의 대군(大軍)이 즉각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므로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각자 퇴각하여 지켰는데 해 부총 등 네 장수는 지난밤에 직산을 떠나 올라오고 있으며 중국 병사들도 죽은 사람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독이 즉각 각 군영에 명을 내려 모조리 강변(江邊)으로 나가 진을 치고 그대로 야영(野營)하게 하였다고 하며, 또 영기(令旗)를 보내 파 유격(擺遊擊)으로 하여금 정예병 2천5백 명을 뽑아 거느리고서 수원(水原) 길에서 왜적을 맞아 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註] 해 부총(解副摠) : 이름은 해생(解生)이다.
[註] 양 참정(楊參政) : 이름은 양등산(楊登山)이다.
(선조실록 1597/9/9)

말은 선비가 잘하고 싸움은 무사가 잘한다. 닭 한 마리 못 잡는 효자는 담 밖에서 칼이 번득이면 아무리 잘해야 고함만 지르다가 이윽고 맨몸으로 부모를 감싸는 효도밖에 못한다. 전쟁터에서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죽지 않기 위해 적의 목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수도 없이 베어 본 무사는 담 밖에서 칼이 번득이면 잽싸게 가족을 피신시키고 번개같이 갑옷을 갖춰 입고 칼을 들고 아드레날린을 마구 분비하며 침입자가 휘두르는 칼의 허점을 노린다.

이런 지극히 당연한 이치를 조선은 철저히 무시했다. 문관이 항상 최고 사령관이 되어 시시콜콜 꿩 병아리 한 마리 못 잡을 명령을 마구 내렸다. 앞뒤가 전혀 안 맞는 그 명령 중 하나라도 안 지키면 아무리 전투마다 대첩을 거둔 상승장군도 괘씸죄를 추상같이 적용하여 오랏줄에 꽁꽁 묶어 죽도록 팼다. 그러다가 김덕령처럼 진짜 죽이기도 했다.

전쟁을 잘하려면 군대가 있어야 하고, 군대가 있으려면 평소에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하고, 평소에 준비에 만전을 기하려면 군인을 우대해야 하고, 군인을 우대하려면 그들이 드높은 긍지와 사명의식으로 군사훈련에 전념하게 해야 하고, 군인이 군사훈련에 전념하게 하려면 식량과 무기를 충분히 대 주어야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군사는 경제다.

일본은 400년 전란시대를 통해 이를 몸으로 터득했다. 특히 풍신수길이 전쟁은 보급이라는 걸 가장 잘 이해했다. 일본은 농업과 공업과 상업이 골고루 발달했다. 그 중에 근간은 역시 농업이었다. 1만 석에 군인 250명--이것이 공식이었다. 10만석 영주라면 2천5백 명의 군인을 동원할 수 있었다. 100만석에 2만5천 명, 풍신수길은 2백만 석의 대명이었으니까, 직할부대가 5만 명이었고 임란 후에 덕천가강(德川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은 7백만 석의 장군이었으니까, 직할부대가 17만5천 명이라는 말이다. 민두기의 <<일본의 역사>>에 의하면 16세기 말 일본의 총석고는 1850만 석이었다. 46만2천5백 명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조선에 16만 명을 파견하고도 30만 명의 여력이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1600년 일본의 운명을 결정짓는 관원(關原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서 양군은 각각 10만과 8만을 동원한다. 1615년 긴긴 400년 전란시대를 종식시키는 대판전투에서는 덕천은 20만, 풍신의 아들은 10만을 동원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불과 20년도 안 되어 큰 전쟁을 두 번이나 치른다. 그 정도로 당시 일본의 잠재력은 대단했다.

조선 중기 이후 가족을 최우선으로 하여 양반이 나라의 세금 떼어먹는 게 정상인 중앙집권체제의 조선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영주가 영지에서는 사실상 왕이었기 때문에 대체로 사공육민(四公六民)의 원칙에 따라 소득의 4할은 조세로 걷었다. 5할도 걷었지만, 조선처럼 사실상 6할 7할 이렇게 가렴주구하여 국가에는 거의 내지 않고(조선에선 중앙에서 총 10만 석을 못 걷었음) 개인이 대부분 착복하는 짓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민심을 잃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만 석에 군인 250명의 상비군을 둘 수 있었다는 것은 군인 한 명에 40석이 필요했다는 말이다. 세금을 이 중에서 4할 걷는다면, 군인 한 명에 16석이다. 이 중에 군사비로는 얼마나 쓰였을까. 1352년 일본에는 저 유명한 반제법(半濟法)이 공포된다. 중앙에서 파견된 수호(守護)는 원래 군사상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그러나 이 법에 의해 각 지방의 수호는 조세 중 50&per;를 군사비에 충당할 수 있었다. 군사비가 항구적으로 확보된 것이다. 생산 40석에 대한 조세 16석 중에 8석이 군사비인 셈이다. 그러면 농민이 생산한 1만 석 중에서 4천 석이 조세이고 그 중 2천 석이 군사비란 말이다. 요새 식으로 말하면 GDP의 20&per;가 군사비이다. 이 정도 비율이면 경제와 군사가 충분히 나란히 발전할 수 있다. 이 중에 먹는 것은 이순신 장군의 장계에 의하면 일인당 하루 1000g(2차대전 직전 조선인의 하루 식량 소비는 일인당 756g, 1984년 북한 주민의 하루 식량 소비는 800g, 1996년 북한 주민의 하루 식량 소비는 540g-木村光彦-), 1년에 365kg이면 되었으니까, 250 × 365 = 91,250 곧 9만1천250kg이다. 1석은 160kg이니까, 총 570석이다. 군사용 2천 석 중에 570석은 식량이고(29&per;), 나머지는 각종 무기와 의복, 말[馬]과 배[船] 등에 쓰인 비용이다.

한국의 2009년 군사비는 28조5천억 원인데, 이 중에서 식비는 미미하다. 하루 급식비가 5,210원에서 5,399원으로 인상되었으니까, 군인을 70만으로 잡으면 1년에 식비는 1조3천8백억 원밖에 안 된다. 군사비의 5&per;다. 현대의 군대는 그만큼 무기와 장비가 상대적으로 고가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옛날 역시 군사비의 70&per;는 기본적으로 무기에 쓰였다. 이순신 장군이 지휘한 수군은 전함과 화포가 기본 장비였기 때문에 육군에 비하여 식량에 대한 무기의 비중이 월등히 클 수밖에 없었다. 모든 걸 스스로 조달해야 했던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반제법에 의하여 수호대명이란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사실상 독립국가를 만든 것이다. 자신의 영지요 군대요 백성이기 때문에, 최대한 효율적으로 유지하고 관리하면서 다른 영지를 침략하여 더 키울 야망이 생기게 되었다. 군사에 재능 있는 자, 장사에 소질이 있는 자, 무기 만드는 데 재주가 있는 자, 각 영주는 이들을 최대한 우대하고 무럭무럭 키웠다. 농업이 근간이었으니까, 농토와 농민을 지키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난공불락의 성을 쌓고 군사훈련을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고, 농업생산을 높이기 위해 관개시설을 갖추고, 농토를 넓히기 위해 개간을 하는 등, 일본 전체로 보면 군사뿐만 아니라 경제도 해마다 발달했다. 특히 군대는 수십 년 간 함께 생활하면서 피나는 훈련과 생사를 넘나드는 실전을 통해 주군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기 때문에, 가공스러운 군사집단으로 거듭났다. 천하무적 스파르타의 군대와 비슷했다.

조선은 어떤가. 너도나도 군대 빠지는 것이 대유행이었다. 조선 초와는 달리 양반은 군대에 다 빠졌다. 양반 유무는 군 복무 여부로 결정되었다. 돈 몇 푼 내면 되었다. 그나마 힘센 자들은 돈도 안 냈다. 더군다나 장수는 조정의 명령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다. 무기도 제대로 없었고 먹을 것도 제대로 없었다. 군인도 규정대로 갖춘 곳은 이순신 장군의 전라좌수영이 유일무이했다. 이런 형편이니, 제대로 훈련 한 번 할 수 없었다. 거의 날마다 실전을 치른 왜군에 비해 조선은 두만강 유역의 일부 군인 외에는 실전 경험이 전혀 없었다.

이런 상태로 조선이 일본의 상대가 되었을까. 더군다나 왜적은 다 쓰러져 가는 자가 안 보이는 곳에 편안히 엎드려 50미터 밖에서 빙그레 웃으며 천하의 상산 조자룡도 한 방으로 즉사시킬 수 있는 조총까지 들고 왔다. 너도나도 왜군만 나타나면 혼비백산 늙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철부지 자식을 들쳐업고 소 고삐를 쥐고 신바람 난 강아지를 앞세우고 무턱대고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충이 조선의 효를 무인지경으로 유린한 것이다.

사족을 하나 달면, 협판안치는 원래 수군의 맹장이었는데, 후에 풍신수길의 명을 받고 기세등등 폭풍처럼 연합 함대를 이끌고 이순신 장군에게 힘을 다하고 꾀를 다하고 용기를 다하여 덤비다가 한산도 앞 바다에서 귀신에 홀린 듯 처참하게 패하여 배 밖에 나왔던 간과 쓸개를 냉큼 바다에 내던지고 간신히 목숨만 보존하여 천 리 만 리 달아났다.

안타깝게도 조선의 충 없는 효 사상이 오늘에 되살아났다. 붓이 칼을 능멸하는 유습이 되살아났다. 세종(재위 1419~1450) 문종(재위 1451~1452) 이래 무려 500년 만에 동족상잔과 월남전을 통해 피와 땀으로써 세계적 강군을 양성하여 드디어 文武가 조화를 이루는가 했더니, 민주의 '民'자도 모르는 자들이 잇달아 국가 최고 지도자가 되더니, 민주(삼강오륜과 마찬가지의 명분)를 앞세워 세계적으로 빛나는 대한민국 현대사 60년을 통째로 부정하고 역대 군인 지도자는 모조리 역적으로 만들고 말만 번드레한 무능한 자들에 둘러싸여 뒤로는 몰래 자식이나 형제를 소통령이나 소황제나 대군(大君)으로 임명하여 호가호위(狐假虎威) 뒷돈을 챙기다가 발각되고도 서로가 서로를 욕하는 척 봐 주며, 동족 학살이 전공이요 동족 학대가 副전공인 부자(父子)가 어여뻐할 일만 골라서 한다. 대한민국의 국군을, 대역죄와 인권유린과 부정부패가 들끓는 집단으로 매도하고, 야금야금 무조건 평화주의와 절대 평등의식으로 거듭난 오합지졸로 만든다.
(2009. 2. 21.)

Monday, February 16, 2009

"위대한 7인의 총잡이"

원래는 “7인의 사무라이”란 일본영화를 미국영화로 바꾼 것이 “위대한 7인의 총잡이, The Magnificent Seven”란 유명한 서부영화이다. “왕과 나”의 율 브린너를 비롯하여 스티브 맥퀸, 찰스 브론슨, 등 대단한 헐리우드 명배우들이 나온 서부영화인데, 이 명배우들은 이제 거의 모두가 저 세상 사람들이 되었다.

이 영화 내용즉슨 멕시코의 한 농촌에 수시로 馬賊團이 몰려와서 양민들을 못살게 굴고 재산을 약탈해간다. 돈도 없고 총도 없는 이 농부들이 미국의 총잡이들에게 마적단을 물리쳐 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美서부에서 내노라 하는 총잡이 칼잡이 7명이 모여서, 오로지 사람들을 구하고 편안하게 살도록 해주기 위하여 멕시코의 마적단과 대결한다.

멕시코의 농부들은 대결 시간이 닥아오면서 공포증에 견디지 못하고, 이 7명의 총잡이들에게 마을에서 떠나달라고 부탁한다. 우리들이 계속 뜯기고 얻어맞는 것이 총에 맞아 죽는 것보다 차라리 낫겠다는 이론이다. 7명의 총잡이들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이 농부들을 버릴까 하다가 그래도 불쌍하여 마적단과 대결 소탕하면서 거의 모두가 총에 맞아 죽고 2명만이 살아서 마을을 떠난다.

이번 김정일의 생일날에 미국의 수잔 숄티와 서울의 대북투사 박상학 최성용 대표들이 대북풍선삐라를 날려보냈다. 이명박과 이명박의 통일부가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하더니 결국 이 투사들이 풍선 날리는 것은 그냥 내버려두고 북한돈 몇 백장 들여온 것을 사후조사 의법조처하겠다는 수작들이다. 이번 일에 필자도 아는 몇몇 탈북자들이 이번 풍선 날리기에 반대의사를 표했다. 대북관계가 나쁘고, 남북간 긴장사태가 심각하고, 이명박 남한정부가 말리고, 겨울이라 바람도 안 좋은데, 왜 구지비 풍선 날리기를 강행하는가?

오늘 아침 인터넷에 뜬 풍선 날리기 동영상을 보면서, 수잔 숄티, 박상학, 최성용, 김성민, 송헨리, 문국한, 박영학 씨 내외의 얼굴들이 눈에 띈다. 4천8백만 남한국민과 1만5천 탈북자들중, 풍선 날리기를 주관하고 참석한 사람들이 10명 남짓했고, 오히려 내외신 기자들이 50명 몰려왔다고 한다. 엄동설한 매서운 추위에 평화의 다리에서 풍선을 날리는 이 분들을 보면서 갑자기 오래 전에 본 "위대한 7인의 총잡이들”이란 영화 생각이 났다.

정말 위대하고 감사한 분들이다.
They are truly magnificent.

2009년 2월 16일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씀
http://nkgenocide.net
http://nk-projects.blogspot.com

Sunday, February 15, 2009

제발 정신좀 차리시오, 이명박 대통령!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 임진각 평화의 다리에서 미국天使와 남한의 탈북 납북가족 鬪士들이 모여, 김정일은 위대한 수령님이 아니고 북한주민 3백만을 굶겨죽인 살인마다! 라고 적힌 전단을 실은 풍선을 날릴 예정이다.

남한의 이명박 대통령과 통일부 머저리들은, 이 천사와 투사들이 막무가내 날려보내는 풍선삐라를 막을 명분이나 방도가 없으니까, 기껒 머리를 짜내서 한다는 말이, 북한돈 밀수입은 違法이다! 라고 나왔다. 어이가 없다.

사람들 살리자는 것이 어떻게 위법인가? 사람들 죽이고 괴롭히는 것이 위법이지.

美남북전쟁 前, 링컨보다 더 정치적으로 선임이었고 유명했었던 윌리엄 수워드 美연방국회 상원의원이 노예제도에 관하여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머저리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과 머저리 로저 터니 대법원장이 도망친 흑인노예를 잡아서 노예主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퓨지티브 슬레이브 (도망친 노예) 법을 집행하겠다고 노예제도 폐지운동가들에게 협박 공갈을 하니까, 후일 링컨의 戰時내각에서 국무장관을 맡게될 수워드 상원의원은, 퓨지티브 법은 물론, 美헌법보다 더 높은 법 (至高法: Higher Law)이 있다고 주장했다. 바로 하나님의 법이다.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가?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노예로 부려먹는 자들과는 싸우고, 하나님 앞에서 죄짓지 말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 인간들의 법을 초월하는 至高法이다. 김정일의 노예로 죽지못해 사는 2천4백만 북한주민 노예들에게 진실과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는데, 뭐? 북한돈을 밀수입했으니 사후조사 의법조처 하겠다고? 대한민국 대통령과 통일부가 하나님의 법에 거역하겠다는 건가?

2월 16일, 한국의 일기예보를 보니 영하 8도까지 내려간단다. 이 추위에 임진강변에 가서 풍선을 날리는 수잔 숄티에게 너무 고맙고 너무 미안하다. 수잔은 오래 전 탈북동지들에게 말했다. 왜 미국사람인 내가 북한주민들의 인권을 챙기게 되었는가? 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수잔아, 북한주민들을 생각하면 내 억장이 무너진다. 네가 나서서 북한사람들을 구해다오. 사랑과 평화의 化身 수잔이 하나님의 지고법을 집행하기 위하여 태평양을 건너 임진강 평화의 다리에서 진실과 구원의 메시지가 담긴 풍선삐라를 날린다. 누가 막을 것인가!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지고법을 거스리려는 이명박 장로는 듣거라!
북한주민 수호천사 수잔 숄티 여사는 하나님이 보호해주시는 분이시다.
이명박은 청와대 벙커 안에서 참회기도 하고, 부지런히 평화의 다리로 달려가서 하나님의 役事에 동참하라!
그도 저도 아니면, 이명박은 소망교회 장로도 아니고 대한민국 대통령도 아니다.

제발 정신좀 차리시오, 이명박 대통령!

2009년 2월 15일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씀
http://nkgenocide.net
http://nk-projects.blogspot.com

Saturday, February 14, 2009

하느님이 우리 민족을 보우하사 이순신을 보내심 (6) - 최성재

거제도 대신 한산도, 한산도 대신 고금도
최성재

1591년 2월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1년 2개월 전에 되돌아보면 새삼 아찔한 인사이동이 있었다. 그 해 2월 4일자 선조실록을 보면, 원래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이는 원균이었다. 사간원에서 인사고과에서 하(下) 등급을 받은 자를 품계를 뛰어넘어 국가의 안위를 담당할 자리에 앉힐 수 없다고 거세게 항의하자, 선조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임명을 취소한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원균(元均)은 전에 수령으로 있을 적에 고적(考積)이 거하(居下)였는데 겨우 반년이 지난 오늘 좌수사에 초수(超授)하시니 출척권징(黜陟勸懲)의 뜻이 없으므로 물정이 마땅치 않게 여깁니다. 체차를 명하시고 나이 젊고 무략(武略)이 있는 사람을 각별히 선택하여 보내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辛未/司諫院啓曰: “全羅左水使 元均 , 前爲守令, 考績居下,  過半年, 超授 帥, 殊無黜陟勸懲之意, 物情未便。 請命遞差, 年少有武略人, 各別擇遣。” 答曰: “依啓。”
(선조실록 1591/2/4)

이순신 장군은 그 뒤에도 바로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게 아니었다. 유극량이 원균의 뒤를 이었다. 이번에는 사헌부가 가만있지 않았다. 유극량은 도무지 위엄이 없어서 장군의 재목이 될 수 없다고 길길이 뛰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선조가 미소를 머금고 이미 임명을 취소했다고 대답한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전라좌수영은 바로 적을 맞는 지역이어서 방어가 매우 긴요하니 주장(主將)은 불가불 잘 가려서 보내야 합니다. 새 수사(水使) 유극량(劉克良)은 인물은 쓸 만하나 가문이 한미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겸손합니다. 그리하여 군관(軍官)이나 무뢰배들과도 서로 '너니 내니'하는 사이여서 체통이 문란하고 호령이 시행되지 않습니다. 비단 위급한 변을 당했을 때에만 대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방어하는 군졸을 각 고을에 보낼 때에도 틀림없이 착오가 생길 것이니, 곤외( 外: 水軍)의 일을 맡기는 것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체차시키소서.
...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수사는 이미 체직하였다.”

司憲府啓曰: “ 全羅 左水使正當受敵之地, 防禦極緊, 主將不可不極擇以送。新水使 劉克良, 人物則可用, 而自以門微過恭。 至與軍官行僞之輩, 相爲爾汝, 體統紊亂, 號令莫施。 非徒緩急之間, 恐難爲備, 各官防卒之送, 必至失 , 付以 寄, 極爲可慮。 請命遞差。
(선조실록 1591/2/8)

그 후에야 비로소 이순신 장군이 진도군수로 부임하던 길에 전라좌수영으로 발길을 돌리게 된다. 오늘날 못지않는 조선시대의 인사 난맥상을 여기서 엿볼 수 있는데, 하여간 불과 열흘도 안 되는 사이에 임금 이하 조정이 전쟁의 암운을 막연히 느끼기 시작하면서도 그저 벼슬자리 나눠 먹기에 몰두하던 중에, 경상좌수영과 경상우수영에 이어 왜군이 몰려올 바다의 세 번째 길목을 지키는 으뜸 장수로 3명 중 2명이 축하 인사를 받다가 우습게 족보에만 가문의 영광을 남기고, 마지막으로 뇌물과 연줄을 초개같이 여기는 바람에 별 볼일 없고 힘만 드는 자리에만 머물러 그 당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한 인물이 1년 2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불철주야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가 조선의 2백년 사직을 구한다. 홀로 구한다.

전쟁이 일어나고 7년이 다 되도록 임금 이하 조선 전체가 불과 1만 명의 정예병도 양성하지 못했지만, 이순신 장군은 도움을 받기는커녕 이리저리 군사든 식량이든 빼앗기고 자의반타의반 갖다바치고 그것도 모자라 온갖 황당한 모함과 시기(猜忌)에 시달리면서 16세기 현재 세계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2만 명의 무적함대를 양성하여 말 그대로 홀로 나라를 구한다. 우의정 유성룡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지만, 그 뒤에는 국가의 운명이 걸렸을 때는 이순신 장군의 꿈에 꼭 나타나 귀신 곡하게 도와 준 신인(神人)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느껴진다.

1591년 2월 13일 인사 발령의 말석을 차지한 이 융통머리 없던 정의파가 그토록 중요한 일을 해낼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전쟁 기간 대부분을 영의정 신분으로 사악한 철부지 선조를 때로는 일깨우고 때로는 꾸짖고 때로는 그에게 아첨도 하며 민심을 간신히 얼키설키 모은 유성룡도 이순신 장군이 그 정도로 유능한 인물일 줄은 몰랐을 것이다. 훗날 유성룡은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던 바로 그 날에 영의정의 자리에서 쫓겨나서 고향 안동 하회마을로 내려가는데, 그 후로 선조가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한 발짝도 북쪽으로 내딛지 않았다.

정사(政事)가 있었다. 심대(沈岱)를 사간에, 이홍(李珙)을 강원도 도사에, 이경록(李慶祿) 을 나주목사에, 성윤문(成允文)을 갑산 부사에 제수하였다. 이비(吏批)에게 전교하였다.
“전라 감사 이광(李洸)은 지금 자헌대부에 가자하고, 윤두수(尹斗壽)는 호조판서에, 이증(李增)은 대사헌에, 진도군수 이순신(李舜臣)은 초자(超資)하여 전라도 좌수사에 제수하라.”

○庚辰/有政。 以 沈岱 爲司諫, 李珙 爲 江原 都事, 李慶祿 爲 羅州 牧使, 成允文 爲 甲山 府使。 傳于吏批曰: “ 全羅 監司 李洸 , 今加資憲, 以 尹斗壽 爲戶曹判書, 李增 爲大司憲, 以 珍島 郡守 李舜臣 , 超資除 全羅道 左水使。”
(조선실록 1591/2/13)

그러면 이 때 왜 유성룡은 이순신 장군을 전라도우수사나 경상우수사로 추천하지 못했을까. 전라우수영은 15관(官 고을) 12포(浦 해안고을)로 전라좌수영 5관 5포보다 약 3배 크고, 경상우수영은 8관 16포로 전라좌수영보다 2배 반이나 된다.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은 이순신 장군의 장계에 각각 5관 5포, 15관 12포란 말이 나오지만, 경상우수영에 대해서는 그런 말이 없다. 최석남은 8관 16포라고 추정하고 김종대는 <<경국대전>>에 그렇게 쓰여 있다고 한다.) 경상좌수영도 크기가 경상우수영과 비슷했던 것 같다.
1589년 1월 21일자 선조실록을 보면, 비변사에서 품계를 건너뛰어(不次採用) 유능한 무관을 추천하라고 하자, 총 37명이 추천되는데, 이순신은 우의정 이산해와 병조판서 정언신으로부터 공히 서열 3위로 복수 추천 받는다. 추천인 가운데 이산해가 가장 지위가 높았는데, 그는 오랫동안 이조판서의 직을 맡았기 때문에 누구보다 인재에 대한 자료를 많이 갖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정언신은 군무의 총책인 병조판서였다. 정언신은 그로부터 열흘 후인 1589년 2월 1일 우의정으로 발탁된다. (이 때 유성룡은 병조판서가 된다.) 다른 누구보다 이 두 사람으로부터 추천 받았다는 것은 이순신 장군이 함경도에서 근무할 때의 무능한 상관이자 후일 상주에서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줄행랑 놓는 이일에게 모함을 받아 백의종군한 후 크게 공을 세워 명예를 회복하고 집으로 돌아와 낙동강 오리알처럼 아무 공직도 없이 쉬고 있었지만, 무인 이순신의 인품이나 능력이 빼어나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이 함경도의 조산만호로 근무하던 때, 정언신은 함경도 순찰사이자 군사 총책으로서 함경도 북병사 이일의 상관이었다. 그는 자세히 조사해 본 후 이순신이 공을 세우고도 모함 받았다는 것을 알고 이순신의 1차 백의종군 시에도 조산만호의 직을 그대로 갖도록 배려했다. 참고로 이 때 원균은 어느 누구의 추천도 받지 못했다. 원균을 두둔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대로 그가 함경도에서 맹활약했다면 왜 추천 받지 못했을까. 아마 그것도 원균의 친척인 윤두수 무리들이 지어낸 말이 아닌가 한다.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강력한 추천을 받고도 아무런 직위도 받지 못한다. 선조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이순신이 모함 받았다는 것을 안 모양이다. 그래서 그로부터 6개월 후 하삼도(下三道)의 병마절제사(병사)와 수군절도사(수사)에 대한 비변사의 건의에 대해 답하는 중에 특별히 이순신을 따로 거론하며 중용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한다. 이 때 이순신은 전라 순찰사 이광의 특별 상주(上奏)로 그의 군관 겸 종4품 조방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사간원에서는 이순신이 7품계를 건너뛴 발령을 두고 불과 3일 만에 들고 일어난다. 이에 대해 선조는 헛소리 말라고 간단히 제압한다. 이틀 후에 또 사간원이 쫑알거린다. 이 때도 선조는 면박을 주어 그들의 입을 막는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하였다. (선조실록 1591/2/16)

사간원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경력이 매우 얕으므로 중망(衆望)에 흡족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인재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어떻게 현령을 갑자기 수사(水使)에 승임시킬 수 있겠습니까. 요행의 문이 한번 열리면 뒤 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빨리 체차시키소서. 나주(羅州)는 남쪽의 거진(巨鎭)으로 본시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로 이름난 곳인데 변경(邊境)에 일이 생기면 원수(元帥)는 영(營)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이웃 고을 수령과 본주(本州)의 판관들이 모두 무변(武弁)인 만큼 군대를 이끌고 적을 방어하는 데 사람이 없는 것을 걱정할 것 없습니다. 목사 이경록(李慶祿)을 체차하고 재략이 있는 문관을 각별히 골라 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순신에 대한 일은, 개정하는 것이 옳다면 개정하지 어찌 않겠는가. 개정할 수 없다. 나주 목사는 천천히 발락(發落)하겠다.”
하였다. (선조실록 1591/2/18)

최소한 1589년 1월에서 1591년 2월까지는 선조가 이순신에 대해 아무런 편견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과연 이순신의 품계를 뛰어넘은 인사가 파격적이었을까. 조금만 살펴보면 그렇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이순신은 1580년 36세에 종4품인 고흥의 발포만호로 재직한 적이 있다. 이 때도 상관의 엉터리 보고로 파면 당했었다. 그로부터 11년 후 이순신은 정읍현감으로 일생 중 가장 평온한 때를 보내게 되는데, 그것은 11년 전보다 4품계나 낮은 종6품이었다. 정읍현감 직전 이광의 군관 겸 조방장으로 근무할 때도 종4품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4품계가 낮은 현감으로 간 것이다. 품계 자체로 보면 좌천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관과 무관의 차이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오히려 현감은 종6품이지만 문관이자 고을 수령이기 때문에 종4품인 무관보다 높이 평가하던 시절이었다. 수입도 더 많아서, 현감 이순신은 이 때 어머니와 조카들을 몽땅 데려가 난생 처음으로 제대로 된 효도를 다할 수 있었고 아버지를 일찍 여읜 조카들에게 작은아버지로서 체면이 섰다. 종2품인 삼도수군통제사보다 그 비서인 종6품인 종사관이 단지 문관이란 이유만으로 선조가 더 중시했다는 것을 지난번에 얘기한 적이 있다. 이런 문관도 6품계를 뛰어넘은 사람도 있었다. 그가 바로 유성룡이다. 1569년에 28세의 유성룡은 정9품 성균관 전적(典籍)에서 정6품 공조좌랑으로 수직 승진했던 것이다. 이에 비하면 11년 만에 무관으로서 겨우 3품계 오른 것은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안타까움의 대상이다.

유성룡이 전쟁을 감지하고 위기의식을 느껴 다소 무리를 하며 이순신을 발탁했지만, 전라좌수영보다 3배 큰 전라우수영에 추천하지 못한 것은 이미 그 곳에는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발령 나기 전에 이억기가 발령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전라좌수영보다 두 배 이상 큰 경상우수영을 추천하고 싶었겠지만, 어쨌건 7품계를 뛰어넘는 상황에서 그랬다간 언관(言官)들의 입방아로 다 된 일을 망칠 수도 있을 것 같아, 수영(水營) 중에 가장 작은 전라좌수영으로 보냈던 것 같다.

또 하나, 이순신 장군보다 딱 하루 먼저 전라좌수영보다 3배나 큰 전라우수영의 총책으로 임명된 이억기와 비교해 보면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승진이 늦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억기는 1561년생으로 1545년생인 이순신 장군보다 16세나 아래다. 그럼에도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한 서른 두 살보다 한 살 적은 서른 한 살에 이순신보다 직급은 같되, 사실상 권한이 3배나 되는 전라우수사에 임명되었다. 후일 원균이 후배 이순신보다 지위가 더 낮은 것이 불만이었다고 투덜대며 이순신 모함의 정당성을 찾는데, 이억기와 비교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트집임을 알 수 있다. 선조는 사간원의 지극히 타당한 항변에 이순신보다 먼저 원균을 전라좌수사에 임명했다가 바로 취소했지만, 1년 후 전라좌수영보다 두 배 반이나 큰 경상우수영의 주장으로 내려보낸다. 1592년 2월 당시로 보면 누가 보아도 고과가 하(下)였던 탐관오리 원균이 이순신보다 출세했다. 새옹지마, 1년 만에 대역전한 것이다. 누가 알았으랴, 그것이 불과 몇 개월 후에 오로지 능력 차이로 인해 신분이 역전될 줄이야. 이번에는 아예 종2품과 정3품으로 품계가 달라졌다.

이순신 장군은 한번도 나이가 16살이나 어린 이억기가 전라좌수영보다 3배나 관할 지역이 넓은 전라우수영을 책임지고 있는 것을 부러워하거나 시샘한 적이 없다.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살리기 위해 앞장서서 눈부신 공을 세우다 보니까, 한산대첩 이후 절로 이억기의 상관이 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이억기도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전라좌수영의 3배나 되는 군사를 보유했어야만 했지만, 미처 준비를 못하여 1차 해전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한 달이나 지나서 2차 해전 중간에 전라좌수영보다 겨우 1척 많은 판옥선 25척을 끌고 왔다. 만약 이순신 장군이 경상우수영의 대부분과 전라좌수영을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그 준비 상황을 미루어 보아 경상좌수사 박홍이나 경상우수사 원균에 버금갈 정도로 왜군에게 기습당하여 일패도지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로선 생명의 은인이요 명예의 보루였다. 아마 이억기는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반면에 원균은 이순신보다 두 배 반이나 되는 관할 지역 중에서 단 한 뼘도 지키지 못하여 달랑 전선 한 척만 끌고 도망갔다가, 바로 처형되었어야 함에도 순전히 이순신 장군 덕분에 천만뜻밖에도 승전의 나팔을 불고도 은혜를 원수로 갚았던 것이다.

남해안 지도를 펼쳐 보면, 전라좌수영은 오늘날 고흥반도와 여천시 사이의 연안 지역과 섬들이다. 큰 섬은 없다. 다섯 고을은 광양현, 순천부, 보성군, 낙안부, 그리고 흥양현(고흥)이다. 포구는 여천시 앞 돌섬의 방답진 외에는 고흥반도를 빙 둘러 군데군데 위치했다. 동쪽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여도진, 사도진, 발포진, 녹도진이 바로 그것이다. 흥양현도 사실 고흥반도 서쪽에 있었으니까, 5관 5포 중에 다섯 군데가 고흥반도에 있었다. 전라좌수영은 이처럼 고흥반도가 중심이었다. 여수에는 본영이 있었다. 전라우수영은 그 서쪽 전라도 해안 지역과 섬들이었다. 가장 큰 섬은 진도다. 경상우수영은 남해도에서 충무시를 거쳐 거제시에 이어 낙동강 하구까지 미친다. 다대포 이동은 경상좌수영이다.

군사에서는 크게 세 가지가 중요하다. 천문과 지리와 인간이 그것이다. 해전에서는 육전보다 천문과 지리가 더 중요하다. 적벽대전의 남동풍이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던 조조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하여 천하가 삼분되는(天下三分) 계기를 가져왔는데, 사실상 중국이 통일되는 것은 그 후 약 4백 년이 지난 수당(隋唐) 시대였다. 지나친 단순화일지 모르나, 천문을 누가 읽었느냐에 따라, 또는 천운에 따라 중국은 전란시대가 4백년 더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일기를 쓸 때 늘 가장 처음에 날씨를 기록했다. 이것이 단지 하나의 습관이었을까. 아마 개미 한 마리의 움직임도 예사로 보지 않았던 이순신 장군의 성격으로 보아, 이것은 수군의 활동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을 것이다. 개고 흐림, 밀물과 썰물(모든 날짜가 음력으로 기록되어 있으니까,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한 눈에 거의 짐작할 수 있음), 바람 등을 파악하지 못하면, 전투는커녕 평소의 훈련도 제대로 못한다.

지형도 마찬가지다. 다도해는 리아스식 해안이라 굴곡이 대단히 심하다. 게다가 한반도는 대부분 고생대 지역이라 퇴적층이 두텁다. 천연의 항구도 많지만 그만큼 수심이 얕고 곳곳에 바위가 아니더라도 모래와 흙이 쌓이고 다져져서 만들어진 암초가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배 밑바닥이 평평하고 폭이 넓은 평저선(平底船)이 발달했다. 금강산과 설악산 등 신생대 지역이 많아 퇴적층도 별로 없고 단층구조가 발달하여 해안에서 조금만 나가면 바로 200미터 이상 깊어지는 동해안과는 전혀 다르다. 일본은 화산에 의한 신생대 지역이 대부분이라 강이 짧고 좁고 거세다. 해양성 기후라 강수량도 많다. 해안은 우리나라보다는 훨씬 단순하고 물도 깊다. 파도도 매우 거칠다. 배의 아랫부분이 깊어야 한다. 폭은 좁아야 한다. 그래야 빠르게 물살을 헤치고 나갈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남해안의 지형지물에 대해 누구보다 해박했다. 모르는 것은 어부든 목동이든 아낙네든 촌로든 누구한테든 물었다. 난중일기에 이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맑다. 아침에 광양의 고언선이 와서 봤다. 한산도의 일을 많이 전한다. 체찰사가 군관 이지각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경상우도의 연해안 지도를 그리고 싶으나 도리가 없으니 본 대로 지도를 그려 보내 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서 지도를 쓱쓱 그려서 보냈다. (난중일기 1597/5/24)

체찰사는 이원익을 말한다. 이원익은 당시 우의정으로 전쟁 총사령관이었다. 도원수 권율보다 높았다. 임금 대리였다. 이순신 장군은 흰옷을 입고 도원수 권율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권율의 지시를 기다리며 구례에 머물러 있다가 이보다 며칠 전에 이원익을 찾아뵈었다. 이원익은 어머니를 안장(安葬)하지도 못하고 천 리 밖에서 떠도는, 개인적으로는 상주(喪主)요 국가적으로는 죄인인 이순신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했다. 누구보다 이순신의 역량과 처지를 잘 아는 이원익은 이 때 어려운 부탁을 하나 한다. 원래부터 원균의 담당 해안인 경상우도의 지도를 그려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원래 군진(軍陳)을 그리는 데 기가 막힌 재주를 지녔던 장군이었지만, 보지도 않고 다른 장수의 지역 지도를 그 날로 그린다. 이원익은 이 때 마땅한 사람만 있다면, 당시 통제사로 있던 원균 휘하의 누구에게든 지도를 그리라고 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누구도 그것을 그릴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건 있다면 원래 계급이나 신분은 높지 않지만 병사 중에 있어야 한다. 수군 총책인 삼도수군통제사가 할 일이 아니다. 공자가 여러 방면에 재주가 많았듯이 이순신도 그 못지않았다. 뱃길에 대해서 부분적인 것은 몰라도 그 어떤 토박이도 이순신보다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이로써 드러난다.

가만히 살펴보면 이순신 장군은 본영은 여수였지만, 전쟁 총본부는 한 번도 전라좌수영에 설치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산도는 경상우수영 관할이었고 나중의 고금도는 전라우수영 소속이었다.

그러면 왜 이순신 장군은 거대한 거제도를 본부로 삼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원균 때문이었다. 거제도에 본부를 설치하지 못한 것도 원균 때문이었고 한산도에 본부를 설치한 것도 원균 때문이었고 고금도에 본부를 설치한 것도 원균 때문이었다. 그 이유를 밝히기 전에 먼저 이들 세 섬에 대해서 잠깐 기술한다.

거제도는 제주도를 제외하곤 한국의 5대 섬 중 제일 크다. 넓이는 375㎢로 서울시 605㎢의 절반이 넘는다. 이론상 5백만 명이 거주할 수 있다. 경상우수영에는 이보다 조금 작은 남해도도 있다. 남해도는 298㎢다. 바로 곁의 54㎢의 창선도와 합하면, 전라우수영의 진도 354㎢와 거의 같다. 참고로, 고려가 인류 역사상 최강 몽골에 맞서 약 40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바다의 철옹성 강화도는 300㎢이다.

한산도는 15㎢밖에 안 된다. 명량대첩 후 명나라 수군과 함께 둥지를 튼 고금도는 44㎢로 백령도 45㎢와 비슷하다. 임진년 이후 경상도 연안에 소굴을 짓고 틀어박힌 왜군으로 하여금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게 한 조선 판 버뮤다 삼각지대의 한복판 한산도의 약 3배 크기다. 2007년에 고금대교가 개통되어 지금은 강진에서 버스 타고 쉽게 갈 수 있다. 충무사는 묘당도에 있는데, 고금도와 연결되어 한 몸이 되어 있다. 2008년 4월에 내가 갔을 때는 중고등 학생들이 소풍 와서 수건돌리기를 하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즐거웠다.

거제도에는 한때 왜군이 세 곳에 2만 4천 명이나 주둔하고 있었다. 1595년 6월 8일자 선조실록에 따르면 왜군은 총 13만 1천 명이었다. 그 다음 해에는 거제도 동쪽 가덕도와 그 맞은 편 안골포를 경계로 짓고 일제히 물러가지만, 여전히 거제도는 한산도와 견내량 부근을 제외하곤 왜군의 소굴이었다. 거제도와 그 맞은 편 진해 웅천의 제포를 조선이 관할하려면 최소한 육군 1만 명과 수군 1만 명이 더 필요했다. 그러면 조선 수군은 전진 배치하면서 한산도의 제2 방어책도 확보하므로 시간적으로는 최소한 한 나절, 공간적으로는 바다를 포함하여 1천㎢의 작전 지역을 더 확보할 수 있었다.

원균이 경상우수영을 한 뼘도 방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은 선제공격으로 나가 경상우수영의 약 절반을 확보했지만, 중과부적으로 거제도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한산도와 견내량이라는 천험의 지형을 이용하여 적에게는 아군의 움직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하면서 불리하면 견내량의 좁은 지역에 전선 5척만 배치하면 얼마든지 적의 대군을 가로막을 수 있었다. 그 사이 전열을 갖추면 한산대첩 때처럼 견내량과 한산도 사이로 유인하여 사방의 크고 작은 섬에서 숨어 있다가 독 안에 든 쥐처럼 적을 섬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견내량에 항상 작은 탐후선과 협선을 들락거리게 하면서 전선도 몇 척 상시 대기시켰다. 또한 오늘날의 진해, 창원, 마산, 고성을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왜적이 감히 넘보지 못하게 했다. 그러면 사람들이 지도를 보면서 왜적이 거제도를 우회하여 남해도로 침략하면 되지 않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했다. 첫째는 거제도를 우회하는 것은 난바다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당시 항해술로는 대단히 위험했다. 둘째는 한산도에서 바라보면 대마도까지 보였으니까, 아군이 그들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가만히 기다리다가 배를 젓느라 지칠 대로 지친 왜군의 전선을 박살내는 것은 에프킬라로 모기떼 몰살시키기보다 쉬웠다. 만약 원균이 보통 정도의 머리만 갖고 있었더라면, 5년 간 이순신 장군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견내량과 한산도와 거제도의 함수 관계를 알아채고 어떤 경우에도 몰살당하는 경우는 피했을 것이다. 조금만 신경 쓰면 최소한 비길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이순신 장군은 지리(地利)로 1만 명 이상의 군사와 1백 척 이상의 힘을 얻었다.

명량대첩은 이순신 장군이 적은 군사로 많은 군사를 어떻게 궤멸시켰는가를 무엇보다 잘 보여 준다. 말 그대로 울돌목은 조류가 이순신 장군의 불운을 400년이 지나도록 밤낮으로 통곡하듯이 우당탕탕 울면서 지나가는 곳이다. 진도대교와 목포 앞의 방파제로 물살이 약화되었다고 하지만, 작년 4월에 내가 밤낮으로 지켜본 바에 의하면 과히 천험의 요새였다. 이순신 장군의 기함(旗艦) 한 척으로 능히 세 시간을 버틸 수 있는 곳이었다. 배가 나란히 두세 척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양쪽은 암초가 가득하다고 한다. 바다의 울음은 바로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니까!

그러면 이순신 장군은 왜 진도 벽파진이나 해남의 전라우수영에 본부를 설치하지 않았을까. 당연히 그것은 한 뼘이라도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경상우수영과 전라좌수영은 원균의 일패도지 때문에 너무도 허무하게 잃었지만, 전라우수영은 한 치도 잃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침 일찍이 장군이 둔전을 설치했던 고금도가 있었다. 완도가 더 큰 섬이지만, 육지와 멀어서 육지와 바다 사이의 길목을 차단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견내량이나 명량보다는 못하지만 아쉬운 대로 적은 군사로 능히 대군을 막을 수 있고 완도 등으로 보호도 받는 고금도에 본부를 설치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왜성이 설치된 순천 서쪽의 연안 지방과 섬들을 확보하여 수많은 백의민족의 생명도 구하고 군량미도 확보할 수 있었다. 전선도 더 만들 수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천문과 지리도 기가 막히게 잘 활용했지만, 가장 중시한 것은 역시 인간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아무리 하찮은 사람도 무시하지 않고 그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했다. 단, 소를 훔쳐가면서 적이 쳐들어왔다고 거짓말하는 등 사악한 인간은 바로 목을 베어 공중에 높이 매달거나 둥근 엉덩이가 판판해지도록 곤장을 침으로써 군기를 엄히 다스렸다. 착한 사람에게는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바람보다 부드러웠지만, 악한 인간에게는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청상과부의 오뉴월 서리보다 매몰찼다. 이 충무공의 민심 얻기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밝혀 볼까 한다.
(2009. 2. 14.)

Friday, February 13, 2009

미친 세상

벼슬이 좋긴 좋다. 북한인권은 커녕 김정일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던 힐러리 클린턴이 오바마의 국무장관이 되었다고 낼모레 아시아 순방을 떠나기 전에 아시아 소사이어티에서 북한에 관하여 한 마디 했더니 모든 언론이 무슨 새로운 발상이나 발언을 했다는 식으로 대서특필, 김정일에게 새로운 외교제안이나 격문을 뛰운 것처럼 야단들이다. 북한이 핵을 완전 포기하면 미북관계를 정상화 하겠다고? 지난 10년 힐러리는 어디 갔다 왔나? 콘디 라이스와 크리스 힐이 지난 7, 8년간 사시장철 되푸리 한 말인데, 녹음기도 저런 녹음기 없다.

김정일이 핵을 포기하면 정전조약을 평화조약으로 만들고, 김정일의 똥배가 더 불러서 손사래를 칠만큼 마냥 퍼주겠다고? 그래, 김정일이 핵을 포기한다고 치자. 핵포기했다는 것을 검증하자니까 막판에 또 6자회담을 내질러버린 김정일이다. 김정일이 미국과 유엔 머저리들에게, 너희들 들어와서 맘대로 샅샅히 뒤져 보아라! 한다고 치자. 땅굴이 수백개이고 지하벙커가 수천개인데 어떻게 샅샅히 뒤져볼 것인가? 그래도 샅샅히 뒤져볼 수 있다고 또 가정해보자. 그럼 김정일이 핵만 포기하면 북한주민들 맞아죽고 굶어죽는 것은 어쩔 작정인가? 김정일이 장사포로 서울을 쑥밭 만들겠다고 발광하는 것은 어쩔 작정인가? 북한주민들 굶어죽는 것 상관없고, 김정일의 장사포도 상관없으면 아예 한반도에서 철수해버리는 것이 더 정직하다. 주한미군 당장 철수해라!

시끄럽다! 우리 높은 양반들이 다 알아서 할 터인데 네가 무얼 안다고 시끄럽게 구는가? 서울과 워싱턴에 앉아계신 높은 양반들 믿다가 지난 10년 허송세월 했다. 높디높은 북한인권 W. 부시만 믿다가 닭좇던 개신세가 되어버리고, 2004년 미연방국회 북한인권법안도 휴지장이 되어버리고, 김정일 때려잡겠다던 존 맥케인 의원까지도 대선에서 낙방하고, 이제는 북한인권이라면 멀찌감치 외면하던 힐러리 클린턴이 미국무장관이다. 힐러리가 북한인권을 통감하고 챙시신다고? 힐러리는 바람둥이 남편까지 참고 이용하면서 미대통령 되려고 아둥바둥 벼라별 짓을 다 한 여자이다. 북한인권? 안중에도 없다.

워싱턴 동지들이 나에게 충고아닌 충고를 한다. 신우야, 그럼 어떻게 하잔 말이냐? 오바마 달래고 힐러리 달래서 북한인권을 계속 해야지 않겠느냐? 오바마가 북한인권 챙기고 힐러리가 북한인권의 “인” 자만 알아도 계속 비두발발 해보겠다. 핵만 포기하면 평화조약 맺겠다는 힐러리에게 북한인권이 통할 것인가?

재미교포 소시민 남신우가 발광한다고 오바마나 힐러리가 움찔할 리 없다. 그러나 미국영화 빠피용에 나오는 빠피용처럼 외마디 소리나마 지르다가 죽어야 할 것이 아닌가! 야, 이 미친 놈의 세상아! 나 빠피용 남신우가 여기 있다. 너희들이 다 나를 미쳤다고 흉을 보더라도, 김정일이 살아있고 김대중이 살아있는 한, 나는 미친 행세 할 것이다. 김정일 때려잡고 김대중 때려잡아야 북한주민들 한민족이 살아난다! 한민족이 살아나야 인류에게 희망이 있다.

정말 미쳐도 더럽게 미친 세상이다.
그러나 끝까지 싸워야 한다.

2009년 2월 13일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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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을 때려잡아야 대한민국이 살아난다

용산참사 사태와 김석기 내정자 자진사퇴로 보수우익들의 분노와 한탄과 좌절이 그 어느 때보다 막바지에 다달은 것 같다. 경찰이 국법 집행한 것을 놓고 과잉진압이라고 친북좌파 민주당 민노당 빨갱이들의 어거지 생떼 발악이 정말 가관이다. 이 빨갱이들 뒤에 누가 있나? 민주당의 정세균이나 민노당의 강기갑은 아무 것도 아니다. 저들은 그냥 송사리 참새들 정도이다.

한반도에서 제일 최고의 악마 악질이 누구인가? 김정일과 김대중이다. 한반도의 모든 악과 거짓과 반민족 역적행위는 이 두 김가들이 해왔다. 그런데 북한의 김정일은 이제 핵폭탄 몇 개를 품고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미국만 상대하겠다는 거대한 核毒蛇가 되었다. 남한 힘으로 김정일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김대중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거의 다 뒈지게 된 김정일을 김대중이 살려놓았다. 미국 역대 대통령들, 클린턴과 W. 부시에게 각기 8년이란 임기를 주었어도 김정일을 제거하지 못하였다. 이 헛똑똑이 바보들이 오히려 김정일과 김대중에게 끌려다니며 속아주었다. 오바마와 힐러리는? 전혀 가망이 없다. 클린턴에서 부시 2기로, 부시 2기에서 오바마로 연결되는 눈가리고 아웅식 숨박꼭질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남한의 노벨평화상 사깃꾼 김대중을 제거하는 것은 이명박 대통령이 맘만 먹으면 가능하다. 대역죄, 사기죄, 선동죄 등, 대한민국법 어느 한 조항만 집행하면 김대중은 무기징역이나 사형을 면할 수 없다. 젊어서부터 빨갱이였고, 다 망해가던 김정일을 살려놓고 핵을 만들게 자금을 지원한 역적이 김대중이다. 김대중은 증오와 원한의 化身이다. 그중 대한민국에 대한 증오와 원한이 제일 심하다. 그런 김대중을 왜 내버려 두나?

이명박이 왜 김대중과 노무현에게 저토록 철저히 함구緘口하고 절절 매는가? 박근혜 이회창이라면 웃던 얼굴도 찌그러지는데, 김대중 슨상님과 노무현 전임자는 아무리 개판을 치고 선동을 해도, 계속 웃는 얼굴이고 상관없다는 식이다. 이명박이 김대중을 잡아넣지 않으면 이명박은 보수도 아니고 우익도 아니고 대통령도 아니다. 법집행? 대역죄를 저지른 김대중을 잡아넣지 않는데, 대한민국에서 무슨 법을 집행하란 말인가?

많은 보수우익들과 조선 동아가 자신들이 힘썼기 때문에 이명박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밖에서 안을 드려다보는 재미교포 필자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된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묵인이나 묵계가 없었더라면, 도곡동 BBK 이명박은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지난 대선에서 이해찬 손학규 정동영들이 전혀 가망없으니까, 김대중과 노무현이 이명박이 대통령 되는 것을 묵인 묵계했을 수 있다. 너 대통령이 되도록 내버려 둘테니까, 우리 둘만은 건드리지 말아! 김정일에게 비핵개방3000 떠들어도 괜찮고 상호주의 떠들어도 좋지만, 우리 둘을 전두환이나 노태우 꼴 만들지 말아!

증거는 없다. 묵인했다거나 묵계가 있었다거나 증거는 없다. 그러나 만약에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사이에 묵계가 있었다면, 지난 1년 이명박이 한 짓이 모두 설명된다. 쇠고기 촛불난동에 뒷산에 올라가 아침이슬이나 읊조리고 앉았고, 용산참사 사태에 포도대장부터 내쫓는 것이 모두 설명된다. 이념 물건너 갔으니까 실용이나 읊고 앉았으면, 김대중도 편하고 노무현도 편하고 김정일도 편하다. 김정일 김대중이 편하면 대한민국이 불편하다. 이명박은 대한민국을 편하게 만들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 같다. 이명박은 김정일 편하게 해주려고 대북 풍선삐라까지 말리고 앉아있다.

근본이 문제다. 북한인권 철저히 외면해온 사람이 갑자기 대통령이 되었다고 바뀔 리가 없다. 정주영 회장 심부름이나 하던 사람이 최고경영자라고? 구멍가게라도 주인이어야 경영자이지, 어떻게 정주영 회장이 있었는데 이명박이 최고경영자였단 말인가?

이명박 대통령이 김대중 노무현 두 毒蛇를 한꺼번에 오라를 매어 법정에 세우면 그때 이명박은 진짜 대통령이 될 것이고 대한민국이 진짜로 편해질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이 동교궁전과 봉하궁전에서 편하게 지내는 한, 대한민국이 편하기는 커녕 그 존망이 걱정스럽다. 김대중 내버려두고 민주당 민노당 송사리들 참새들과 아무리 옥신각신 해도 아무 소용 없는 짓이다.

김대중을 때려잡아야 이명박이 대한민국 대통령이다.
김대중을 때려잡아야 대한민국이 살아난다.

2009년 2월 13일
김대중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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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February 12, 2009

Happy Birthday, Abraham Lincoln!

오늘은 워싱턴을 비롯하여 미 전국에서 하루종일 링컨 탄생 200주념 기념행사들이 열렸습니다.

어쩌다가 저도 뉴욕 교포방송 라디오코리아로부터 링컨에 관한 인터뷰를 부탁받아서 오늘 링컨에 관한 얘기를 15분간 했습니다.

15시간을 해도 모자를 링컨 얘기를 15분간에 하자니 급히 많이 떠들어 대었습니다.

링컨은 미국만의 대통령이 아닙니다. 링컨은 세계의 대통령이고, 특히 한민족들이 알아야 할 지도자 상입니다.

저를 인터뷰한 방송국의 노창현 기자가 고맙게도 뉴시스 통신에도 링컨 얘기를 실어주었습니다.

다음 링크를 클릭하시면 기사가 나옵니다. HAPPY BIRTHDAY, ABRAHAM LINCOLN!



2009/2/12

남신우 드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3&aid=0002523190

Tuesday, February 10, 2009

링컨 대통령, 생신을 축하합니다

링컨 대통령, 생신을 축하합니다

지금부터 꼭 200년 前인, 1809年 2月 12日, 美중서부 켄터키州의 하딘 카운티(郡)란 僻地에 있는 8坪짜리 통나무집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이란 인물이 태어났습니다. 부모가 모두 文盲이었고, 학교라곤 1년도 채 다니지 못했던 링컨은 혼자서 글을 깨우치고 算術을 익혔습니다. 낮에도 곰이 돌아다니고, 하늘을 찌를 듯한 巨木들이 촘촘한 숲속에서 링컨은 혼자서 도끼로 하루종일 나무를 찍었습니다.

링컨이 9살 났을 때, 링컨의 어머니 낸시가 우유중독으로 사망했습니다.
링컨이 19살 났을 때, 링컨에게 하나밖에 없던 누나 사라가 아기를 낳다가 죽었습니다.
링컨은 22살이 되자, 영원히 아버지의 집을 떠나 일리노이州 뉴세일럼이란 개척마을로 가서 혼자서 공부하며 벼라별 궂은 일을 다 했고 결국 獨學으로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습니다.

링컨은 결혼하고 부인 메리 토드와 아이들을 키우면서, 네 아들중 두 아이를 잃었습니다. 둘째아들 에디는, 링컨이 스프링필드 변호사 시절, 4살 어린아이 때 죽었고, 셋째아들 윌리는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 1862년 백악관에서 죽었습니다.

링컨은 이렇게 평생 죽음과 함께 살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대통령 시절까지 사랑하던 사람들이 하나하나 그로부터 떠나갔습니다. 링컨이 새로운 미국을 만들기 위하여 일으킨 美남북전쟁에서는 60만이란 장정들이 죽었습니다.

남북전쟁이 끝나자마자 링컨 자신도 남의 손을 빌려 죽었습니다. 위대한 사업을 하기 위하여 60만 장정들을 죽인 것에 대한 贖罪를 하기 위하여…

링컨이 美연방을 살리기 위하여 이 많은 사람들을 죽게했는가, 아니면 당시 미국인구 3천만에 4백만이나 되던 흑인노예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남북전쟁을 했는가? 이 두 개의 위대한 사업중 무엇을 위하여 전쟁을 했는지 따질 필요도 없이, 링컨은 美연방도 살리고 흑인노예들도 해방시켰습니다. 링컨은 노예없는 새 美합중국을 만들어서 미국을 인류의 피난처 안식처 희망의 나라로 바꿔 놓았습니다. 링컨 前의 미국은 백인들만의 미국이었고, 링컨 후의 미국은 전세계 모든 인종들의 미국이 되었습니다. 링컨이 태어난지 200주년을 기념하는 올 해에는 아프리카 흑인 아버지와 캔자스州의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바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선출되었습니다.

링컨을 미국의 16대 대통령, 남북전쟁에서 이긴 대통령, 흑인노예들을 해방시킨 대통령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링컨은 지금도 우리들 속에서 시퍼렇게 살아있는 지도자입니다. 링컨이 지금 있다면 미국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 링컨이 한국에 다시 태어났다면 지금 남북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링컨에게 물어보면 정답이 나옵니다. 답도 아주 정확하고 시기적절한 답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링컨이 중요하고, 링컨의 2백주년이 중요합니다. 링컨을 링컨기념관에 처박아 놓고, 저 사람 참 훌륭했던 사람이다! 오래 전의 과거 일로만 생각하면 그런 링컨은 우리에게 필요 없습니다. 링컨의 책 속에서, 기록 속에서, 일, 이차 대통령 취임연설문, 게티스버그 연설문, 쿠퍼 유니언 연설문, 링컨-더글러스 토론연설문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우리의 할 일과 이념과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링컨의 이념은 민주주의와 인권과 평화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짧고 제일 훌륭하다는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문에 링컨의 이념이 몽땅 들어있습니다.

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 our fathers brought forth on this continent, a new nation, conceived in Liberty, and dedicated to the proposition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Now we are engaged in a great civil war, testing whether that nation, or any nation so conceived and so dedicated, can long endure. We are met on a great battle-field of that war. We have come to dedicate a portion of that field, as a final resting place for those who here gave their lives that that nation might live. It is altogether fitting and proper that we should do this.

But, in a larger sense, we can not dedicate -- we can not consecrate -- we can not hallow -- this ground. The brave men, living and dead, who struggled here, have consecrated it, far above our poor power to add or detract. The world will little note, nor long remember what we say here, but it can never forget what they did here. It is for us the living, rather, to be dedicated here to the unfinished work which they who fought here have thus far so nobly advanced. It is rather for us to be here dedicated to the great task remaining before us -- that from these honored dead we take increased devotion to that cause for which they gave the last full measure of devotion -- that we here highly resolve that these dead shall not have died in vain --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87년 前, 우리 建國父들께서는 自由에서 着想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平等하게 태어났다는 前提에 立脚한 새로운 나라를 이 대륙에 建立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런 착상과 전제에 입각하여 건립된 이 나라나 어떤 나라라도, 과연 오랜 세월 持續될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거대한 內戰을 치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전쟁의 大激戰地였던 이곳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이 대격전지의 한 부분을, 그러한 나라가 살아남도록 이곳에서 자신들의 목숨을 바친 그분들의 마지막 휴식처로 奉獻하고자 이곳에 모였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해야하는 것은 全的으로 타당하고 적절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큰 의미로 보면, 우리는 이 땅을 봉헌할 수도 없고, 神聖化할 수도 없으며, 淨化할 수도 없습니다. 이 땅은, 이곳에서 싸우다가 戰死하거나 살아남으신 용감한 분들이, 우리 庸劣한 사람들이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능력과는 상관없이 이미 神聖하게 만들어놓으신 聖域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여기에서 하는 말을 별로 주목하지도 않을 것이고, 오래 기억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저분들이 이곳에서 한 일들은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까지 저분들이 이곳에서 싸워 그토록 崇高하게 進展시켜놓은 이 未完의 聖業에, 오히려 우리 살아있는 사람들이 우리 자신을 奉獻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우리 앞에 남겨진 이 위대한 과업에 온 몸을 바쳐야 하겠습니다 – 이곳에서 자신들의 모든 것, 영예롭게 목숨을 바치신 이분들로부터, 우리는 이분들이 헌신하신 그 大義에 보다 더 큰 精進을 盟誓해야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가, 여기서 돌아가신 이분들의 죽음이 헛된 죽음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하느님이 保佑하시는 이 나라가 새로운 자유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또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들을 위한 정부가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존속되도록 정진할 것을 맹세해야 하겠습니다.

링컨 대통령, 생신을 축하합니다.

2009년 2월 12일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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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February 07, 2009

너희는 권력가들을 믿지 말라!

지난 8년간 수잔 숄티 여사와 함께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부시 대통령, 김정일의 核이 아닙니다! 북한인권입니다! 라고 떠들어 대왔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에게도 편지를 보냈고, 크리스 힐 대사에게도 졸라 대었다. 핵이 아닙니다! 북한인권입니다!

모두들, 북한인권 정말 참혹합니다! 김정일이 정말 나쁜 놈입니다! 하고선 돌아서서 김정일의 핵무기 핵확산에만 신경을 곤두 세웠다. 6자회담을 계속하면 김정일이 결국 핵을 포기할 것이다. 그런 연후에 우리는 북한인권을 따질 것이다! 걱정 말고 기다려라! 우리도 북한주민들 참혹상을 다 잘 안다. 탈북난민들 강제북송 당하고 공개처형 당하는 걸 잘 안다. 그러니 보채지 말고 참고 기다려라!

이제 6자회담은 개판으로 끝장 났다. 북한인권은 커녕 김정일의 핵도 해결하지 못하고, W. 부시는 텍사스 목장으로 돌아가고, 콘디 라이스나 크리스 힐은 야인 신세가 되었다. 당신들 도무지 뭐 했어? 우리더러 참고 기다리라더니, 당신들 도무지 한 일이 뭐야? 이렇게 배신 당할 수가 없다. 워싱턴의 한 知人이 이-메일을 보내왔다. Yes, it has been a very bitter lesson--"put not your faith in princes", as it says in the Psalms… 그래 네 말이 맞다, 우리 모두 속쓰린 교훈을 얻었다 - 시편에서 말씀하신대로, “너희는 권력가들을 믿지 말라”는 교훈을 다시 얻었다.

김대중 노무현이 김정일 위원장님이라고 설설 기더니, 정권교체 이명박도 오락가락 이념은 물건너 갔다고 요지부동이다. 이 민주주의 대한민국에 빨갱이가 어디에 있는가? 김정일 위원장이 핵을 없애고 개방만 하면 북한주민들을 3천불 소득으로 만들어 주겠다. 그래, 남한에 빨갱이 없고, 이념도 따지지 말고, 김정일이 개과천선하면 계속 퍼줘도 괜찮다. 그러나, 오늘도 주린 배를 참지못해 두만강을 건너는 북한주민들 탈북난민들은 어쩔 작정인가? 김정일의 정치범수용소, 공개처형은 어쩔 작정인가?

김정일이 핵 없애고 개방하면 그때 가서 정치범수용소 따질 것이고, 공개처형 따질 것이고, 북한인권 따지겠다고?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기를 바라시지! 핵 없다던 놈이 핵개발 핵실험하고,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어주니까, 이제는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라고 공갈인데, 김정일이 핵을 포기해? 한국 미국 권력가들을 믿다가는, 북한주민 2천만이 다 굶어죽은 후에야 북한인권 따질 것이고, 남한 용산에 화염병 신나 염산이 아니라 핵폭탄이 떨어져야 정신들 차릴 것이다. “너희는 권력가들을 믿지 말아라!”

자유북한운동연합의 박상학 대표가 풍선삐라를 날리기 때문에 김정일 위원장님이 노발대발 하신다고? 그러니 제발 자제하고 문제좀 만들지 말라고? 풍선삐라가 화염병인가? 염산폭탄인가? 풍선삐라는 비폭력 자유 진실의 평화적 메시지이다. 김정일이 백두산 아니라 쏘련에서 난 “유리”이고, 김정일이 꽁보리밥이 아니라 상어지느러미 프랑스 꼬냑만 마시고, 김정일 여편네 계집이 하나가 아니라 수십 명이고, 이것들이 다 사실인데, 왜 막는가?

정치가 권력가들은 다 앞을 바라보고 四圍를 둘러보아, 백성들을 위하여 일이 풀리는 방향으로 노력하신다고? 참고 기다리라고? 김대중을 참아주고 기다렸더니, 노무현이 나오고, 노무현 5년 지옥을 참고 기다렸더니, 이념없는 이명박이 들어섰다. W. 부시만은 그러지 않겠지! 하고 8년 기다렸더니, 미국까지 사회주의로 몰고가려는 오바마가 들어섰다. 오바마는 6자회담도 하고, 양자회담도 하고, 김정일과 獨對까지 하시겠다는 분이다. 가짜 인권운동가 지미 카터가 저리 가라다.

풍선삐라 날려야 한다. 권력가들 믿지말고 진실을 알려야 한다. 2월 12일, 낼모레면 200주년 생신을 맞는 링컨이 말씀하셨다: “The Fact is, Truth is your Truest Friend, no matter what the Circumstances are. 진실로 告하 건데, 진실이야 말로 당신의 가장 진실된 친구입니다. 주위 상황이 어떻든 간에 진실만이 당신의 진실된 친구입니다.”

그 누가 막더라도 북한주민들에게는 제일 진실된 친구인 풍선삐라를 世紀의 거짓말쟁이 김정일의 생일날인 2월 16일, 북한으로 날려보내야 한다.

2008년 2월 7일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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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February 06, 2009

비서 한 명 없었던 이순신 장군(5)-최성재

문서수발할 개인비서 1명 없던 삼도수군통제사
최성재

이순신 장군은 일인십역(一人十役)하신 분이다. 이렇게 하면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더라도 실수가 있게 마련인데, 놀랍게도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특히 최고지휘관으로서 제일 중요한 능력인 판단력이 갈수록 예리해져 아무리 위급한 상황에서도 적의 간담은 서늘하게 하고 아군의 가슴은 설레게 만들었다. 대신 당신의 몸이 견뎌내질 못했다. 통음(痛飮)하고도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혀 한 번 꼬부라지지 않는 타고난 건강 체질에 무의식까지 맑은 경이적인 정신력을 소유했지만, 수시로 아팠다. 전투 중에는 엄청난 정신력으로 이를 다 이겨냈지만, 비교적 안전한 평시에는 인사불성이 되도록 아플 때가 많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전혀 쉬지 못했을 것이고 큰 판단착오를 일으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식으로라도 강제로 쉬지 못했다면 과로사했을지도 모른다.

백성과 군사를 위해서는 조정에 여러 가지 건의도 하고 부탁도 했지만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리 어려워도 아쉬운 소리를 않던 분이었으나, 마침내 이순신 장군은 도무지 철부지 도련님 같은 선조에게 1593년 11월 17일 문서 수발할 개인비서를 한 명 청한다. 이순신 장군은 산더미 같은 공문과 장쾌하고 절절한 천하명문 장계를 일일이 직접 썼지만(제일 긴 것은 6천여 자나 됨), 이제 명과 왜의 강화회담으로 전쟁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계속 그런 일까지 다하다가는 더 큰 일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을 절감했던 모양이다. 저간의 사정을 살펴보면, 이 글 속에는 당신의 건강을 너무 해쳐서 악적 풍신수길만 신바람 나게 해줄 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숨어 있다.

신이 이미 통제사의 책임을 겸하여 삼도 수군의 장령들을 모두 부하로 거느리게 되어 감독하고 지휘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신은 영남 바다에 나와 있어서 글만으로 먼 길 사이를 연락하기 때문에 많은 사무가 신속히 실행되지 못합니다. 도원수와 순찰사가 머무는 곳에 결재를 받아야 할 일도 많은데 거리가 서로 멀어서 더러 기한에 미치지 못하여 일마다 어긋나게 되므로 못내 염려하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입니다만, 문관 한 사람을 순변사의 준례대로 종사관이라 일컫고 왕래하며 의논도 주고받고, 소속 연해안 여러 고을을 두루 다니며 감독도 하고 일도 처리하고, 사부(射夫)와 격군(格軍)과 군량도 계속하여 마련하게 한다면, 앞으로 닥쳐올 큰 일을 만분의 일이라도 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여러 섬의 목장 중에 노는 땅이 있어 농사 지을 만한 곳이 있는지도 조사해 보아야만 하겠으므로 감히 이렇게 품달합니다. 조정에서는 두루 헤아리셔서 만일 사리와 위신에 어긋남이 없다면, 장흥에 사는 전 부사(府使) 정경달(丁景達)이 마침 자기 집에 있다고 하니 특별히 임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신으로서 종사관(從事官)을 임명해 주시기를 청하는 장계 1593/윤11/17)

종사관은 원래 포도청에만 있던 문관직으로 종6품이었다. 임진년에 상주에서 참패한 이일이 후에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지방을 돌아다니며 각 도에서 육군의 최고 장수인 좌우병사와 수군의 최고 장수인 좌우수군절제사를 감독하고 지휘할 때, 조정에서 종사관을 붙여 주었다. 이순신 장군은, 절제사보다 한 급 높은 통제사는 직급으로 보아 순변사와 동일하므로 종사관을 한 명 붙여 주는 것이 명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전거(典據)를 스스로 제공하여 쑥덕공론만 무성한 조정의 입을 간단히 봉해 버린다. 또한 아예 그에 합당한 사람도 추천한다. 유능한 사람이 쉬고 있으므로 그 사람을 쓰겠다고 한 것이다. 부사라면 종4품인 군수보다 두 직급 높은 종3품이다. 종6품 종사관보다는 6직급 높은 자리다. 직급을 올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보다 6단계 낮은 것을 요구하니까, 조정에서는 반대할 것이 없다. 그러나 실지로는 임명만 되면 종2품인 통제사의 암행어사와 마찬가지니까, 3도의 수군 연해안에서는 정3품의 권한이 있다. 정경달에게도 사실 체면이 손상되지 않는다. 이처럼 이순신 장군은 짧은 문장 속에서 누구에게도 누가 되지 않는 묘수를 찾아 설득한 것이다.

순변사는 군사도 없이 돌아다니는데도 종사관을 딸려 주었지만, 이순신 장군은 조선 전체 군사의 3분의 2인 약 2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명장으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도 불구하고 간단한 공문들을 처리하고 당신이 구술하거나 초안을 잡은 글을 정서할 개인비서 한 명 없었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그 후 아무 소리도 않고 바로 정경달을 통제사의 종사관으로 임명한 모양이다. 아쉬운 것은 왜 한두 명 더 딸려 주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문서 수발 외에 군인 징발과 식량 조달, 둔전(屯田) 관리 이 세 가지 일을 더 알려 준 것은 최대 4명 최소 2명이 더 필요하다는 것인데, 달랑 한 명 정경달만 임명한 것이다.

웃기는 것은 후에 원균은 경상우수사에서 충청병사로 영전되면서(1594/12/1 수사와 병사는 직급이 같았지만 육군이 실세였음), 제멋대로 규정을 만들어 자격 미달의 인간을 종사관으로 스스로 임명했다가 사헌부의 질책을 받았다는 것이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각도의 병사(兵使)에게는 본래 종사관(從事官)이 없는 법인데, 충청병사(忠淸兵使) 원균(元均)은 전(前) 군수(郡守) 최덕순을 종사관의 명칭을 붙여 수행시킬 것을 계청하여 거느리고 갔으니, 이는 법규에 어긋나는 처사로서 지극히 잘못된 것입니다. 덕순은 바야흐로 도내에 우거(寓居)하고 있다가 연줄을 이용해 간청하여 이 소임을 맡게 되었으나,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열읍(列邑)에 전식(傳食)하므로 많은 폐단을 끼치고 있습니다. 원균을 추고(推考)하고 최덕순의 종사관 칭호를 없애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사는 추고할 수 없다. 칭호를 없애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 사신[史官]은 논한다. 최덕순은 음관(蔭官)으로서 추솔하고 비루하여 한 가지 점도 취할 것이 없다. 임진란 때 가평군수(加平郡守)로 있으면서 우리나라의 피난민을 죽여서 머리를 깎고 이마에 문신을 새겨 왜인의 형색을 만들어 행재소(行在所)에 거짓으로 보고하고 상공(上功)을 노리다가 여러 사람이 목격하여 정상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그에게 형이 가해지지 않았으니, 통탄함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대관(臺官)의 이 논란 역시 너무 가벼운 것이다. 】 (선조실록 1596/1/12)

하긴, 선조가 원균의 간을 잔뜩 키워 주었다. 원균이 조정의 쓰레기들과 작당하여 이순신 장군을 모함하자 이순신 장군이 너무 황당하고 갑갑하여 사직(辭職)을 청함에 어쩔 수 없이, 선조는 원균을 경상우수사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데, 벌을 주는 게 아니라 곧장 안전하고 '물 좋은' 후방으로 영전시킨다. 여기서 원균은 얼씨구나, 탐관오리의 본색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에 앞서 원균은 선조한테 말 한 마리 내려보내 주소서, 라고 당당히 청탁한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충청병사(忠淸兵使) 원균(元均)은 사람됨이 범람(泛濫)하고 게다가 탐욕 포학하기까지 합니다. 5∼6월에 입방(入防)한 군사를 기한 전에 역을 방면하고 그 대가로 씨콩을 거두어 다 농사(農舍)로 실어 보냈습니다. 또 무리한 형벌을 행하여 잔혹한 일을 자행하여 죽은 자가 잇달고 앓다가 죽는 자도 많아서 원망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온 도에 가득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통렬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철원부사(鐵原府使) 심원해(沈源海)는 사람됨이 탐욕스럽고 용렬합니다. 환자곡(還上穀)의 수효를 속여 보고하여 사사로이 사용하였으며, 소를 잡아 민간에서 재리(財利)를 꾀하였습니다. 심지어 형을 위해 경내에 집을 경영하고 전토를 널리 차지하기까지 하였으니, 듣고 보는 이들이 경악하고 있습니다. 파직하소서.
봉산군수(鳳山郡守) 박응인(朴應寅)은 전에 연안부사(延安府使)로 있을 때에 백성에게 거두어들이는 것이 한이 없고 비용이 너무 과람하여 길가의 거읍(巨邑)이 탕진되어 텅 비게 하였으니, 체차(遞差)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원균의 사람됨은 범람하지 않다. 이런 시기에 명장을 이처럼 해서는 안 된다. 윤허하지 않는다. 나머지(두 사람)는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선조실록 1595/8/15) **원균만 용서함**

상(上: 선조)이 승정원에 전교하였다.
“원균(元均)의 장계(狀啓)를 살펴보니 전마(戰馬)를 얻고자 하였다. 이번에 내구마(內廐馬) 2필을 보내 1필은 원균에게 보내고 1필은 군영에 두고 길러서 전쟁에 쓰도록 하라.”
(선조실록 1595/4/3)

다시 1년 후 선조는 전라병사로 떠나는 원균에게 미리 은총을 내려 말 한 필을 하사한다. 고금의 명장 이순신에게는 고양이 한 마리 내려보내지 않은 선조가 이렇게 원균이라면 간이라도 빼 주고 싶어했다. 원균은 왕이 친히 하사하는 말을 타고, 얼마나 기세등등했을까. 백성의 고혈을 얼마나 우려먹었을까.

전라 병사 원균(元均) 이 배사(拜辭)하니, 상이 일렀다.
“경(卿)이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하여 지성스러운 충성과 용맹이 옛 사람도 비할 자가 드물기에 내가 일찍이 아름답게 여겨 왔지만, 돌아보건대 아무 것도 보답한 것이 없었다. 이번에 또 멀리 떠나게 되어서 친히 접견하고 전송하려 했었는데, 하필 기운이 편치 못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 내구(內廐)의 양마(良馬) 한 필을 내려 나의 뜻을 표하니 경은 받으라.” (선조실록 1596/8/11)

선조는 글을 잘했다. 명나라에서 온 사람도 선조보다 글을 잘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속에 든 것이 온통 시샘, 편벽, 사대주의, 교만, 냉혹 등이어서 내용 없는 미사여구밖에 몰랐다. 이순신 장군이 장계를 100편(오늘날 전하는 것은 78편) 이상 올려 보냈음에도 거의 읽지 않았던 것 같다. 읽어도 공허한 시문에만 능했던지라 당대 최고 문장가의 글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선조: 이순신이 글을 잘하는가?
유성룡: 예. (선조실록 1597/1/27)

이순신 장군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선조가 조정 대신을 모아 하루 종일 윽박지르던 중 불쑥 경멸하듯이 내뱉은 말이다. 심지어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종6품인 일개 문관보다 하찮게 보았다. 왜군이 100리 밖에만 다가와도 공포에 질려 온갖 추태를 다 부린 것도 까맣게 잊고 고려 시대에 아비 김부식의 위세만 믿고 무장 정중부의 수염을 불로 태우던 새까만 문관 김돈중만큼이나 무인 천시 사상을 갖고 있었던 임금이었다. 지난 수십 년간 소련과 중공의 앞잡이로서 조국해방이란 황당무계한 논리로 동족을 3백만 학살한 김일성은 은유적으로 찬양하면서, 김정일의 핵실험에는 자폐증상의 민족적 긍지를 느끼면서, 민주라는 미명하에 군인 출신 대통령이라면 별의별 황당무계 꼬투리를 끌어대며,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침을 뱉을 정도로 증오하는 자들의 핏속에는 바로 선조와 김돈중의 DNA가 고스란히 담겨 있을 듯하다.

...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의 호령이 수령에게 시행되지 않고, 여러 장수가 서로 화합하지 않는다고 하니, 명망이 있는 문관으로 종사관을 삼아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전 부사(府使) 정경달(丁景達)이 내려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명망이 있는 문관을 정하여 보내야 열읍(列邑)을 호령할 수 있을 것이며 군중(軍中)에 외람한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를 꺼려 진정이 될 것이다. 병판(兵判)의 뜻은 어떠한가 ?”
하니, 심충겸이 아뢰기를,
“이 계책이 매우 타당합니다.”하였다. (선조실록 1594/6/18)

이순신 장군이 참 어렵게 특별히 청원함에 다들 그 명쾌한 논리와 깔끔한 문장에 꼼짝 못하고 종사관을 내려보낸 지 불과 반 년 남짓한 시간이 흘렀는데, 그새 선조는 까맣게 잊고, 해괴한 이유를 들어 이순신 장군의 일거수일투족을 자신에게 고자질해 줄 미관말직 문관 한 명을 내려보내려고 한다. 이에 영의정 유성룡이 이미 종사관을 내려보냈다고 상기한다. 그럼에도 선조는 고집을 피우며 군무의 최고 책임자인 병조판서에게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안이 어떠냐고 다그친다. 순전히 임금의 총애로 막중한 직책의 병조판서가 된 듯한 심충겸이란 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좋다고 '매우'란 수식어를 붙여 맞장구를 친다. 이것이 당시 만인지상의 안목이었고 조정의 수준이었다.
(2009. 2. 6.)

Tuesday, February 03, 2009

뭐, 감옥에 잡아 넣겠다고?

어제 탈북자유투사 박상학 대표와 납북가족회의 최성용 대표가 북한 돈 5천원 짜리를 들고 통일부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2월 중순 북한으로 날려보내는 풍선삐라에 이 북한지폐를 넣겠다 한다. 북한주민 한 사람이 일개월 죽자고 일해서 받는 (아니, 만약에 받는다면) 노임이 1500원에서 2500원 정도라 한다. 북한주민이 풍선삐라에 들어있는 5천원 짜리 북한 돈을 줏으면 그야말로 마른 하늘로부터 돈벼락을 맞는 셈이다.

오늘아침 인터넷 뉴스에서 읽은 통일부 벼슬아치 김호년이란 자의 수작이다:

"정부 승인없이 북한화폐를 반입하는 것은 위법이라는 정부 입장에도 불구, 해당단체들이 북한화폐를 승인없이 반입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이와 관련, 정부는 이들 단체에 대해 남북교류협력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정부 소식통은 전했다.

앞서 김 대변인은 지난 달 28일 브리핑에서 단체들이 승인없이 무단으로 북한화폐를 들여오는 행위는 위법이라면서 "법질서 위반행위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대처한다는게 일반적 원칙이고 상식"이라고 밝혔다

김 대변인은 이어 단체들이 대북 전단을 북한돈과 함께 살포하려 하는데 대해 "북한 화폐 반입문제와는 별개로 전단 살포는 남북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점을 감안, 자제을 요청한다"고 부연했다.

남북교류협력법 및 관련 고시에 따르면 승인을 얻지 않은 상태에서 북한 화폐와 같은 승인 대상 물품을 반입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전재 끝)

남북교류협력법이 무슨 말라비틀어진 매국법(賣國法)인지 몰라도 며칠 전 북괴가 이미 남북관계법이나 합의는 몽땅 무효라고 선언했다. 떠들어도 좀 무얼 알고나 떠들어라!

법질서 위반행위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대처하겠다고? 용산에서 빨갱이들이 살인방화 난동을 벌렸기 때문에 김석기 포도대장이 엄정하게 법을 집행하니까, 한나라당 떨거지들까지 동조하여 민주당 빨갱이 국회의원들이 몽땅 들고일어나 포도대장을 내쫓겠다는 세상이다. 자네도 법으로 엄정하게 대처하면 그나마 대변인 벼슬자리에서 내쫓길 지도 모른다. 풍선삐라 날리는 것이 법질서 위반행위라고? 짖어도 좀 무얼 알고나 짖어대라!

전단 살포가 남북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괴뢰군은 서해바다에서 우리 해군장병들을 쏘아죽이고 (꽃같은 우리 해군장병들을 죽게 만든 빨간 넥타이 역적 김대중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린다!), 금강산 관광하러 간 우리나라 관광객을 쏘아죽이고, 엊그제에는 한반도에서 당장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공갈협박인데, 삐라가 남북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이런 미친 개소리를 白晝 대한민국 통일부 청사에서 지꺼리는 자가 우리나라 통일부 대변인이다.

이 망국법인지 매국법을 어기면 3년 이하, 3천만원 이하 벌금형이란다.
어디 한 번 애국투사 인권투사 자유투사 박상학과 최성용을 감옥에 잡아넣어 보아라! 이 두 분은 이미 남한감옥을 들락날락 한 독립투사들이다.

박상학 대표가 지난 9월, 미국 뉴욕에 와서 W. 부시 대통령에게 말했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 넘어와서 북한인권운동하다가 감옥을 서너 번 들어갔었는데, 남한의 감옥이 북한의 특급호텔보다 훨씬 낫더군요 (폭소 박수).

통일부는 남한의 빨갱이 시민단체들에 국민세금 퍼주기 전에, 박상학 대표가 감옥갈 각오로 살인마 김정일 생일날 북한주민들에게 날려보내는 풍선삐라에 단 돈 5천원짜리 한 장이라도 보태주길 바란다.

그게 바로 사람들 살리고 나라 살리는 길이고 자유통일하는 길이다.

2009년 2월 3일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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