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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April 30, 2009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이야기(15) - 최성재

풍신수길, 이순신, 누르하치(5)

풍신수길과 누르하치는 각기 400년 동안 축적된 역사가 피워낸 꽃이요 열매였다.
최성재


이순신은 담력과 지략이 있고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다. --징비록, 유성룡--

이순신의 사람됨은 말과 웃음이 적었다. 용모는 단아하여 마음을 닦고 몸가짐을 삼가는 선비와 같았으나 속에 담력과 용기가 있어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이는 곧 그가 평소에 이러한 바탕을 쌓아 온 때문이다.

그의 형님 이희신과 이요신은 둘 다 먼저 죽었으므로, 이순신은 그들이 남겨 놓은 자녀들을 자기 아들딸처럼 어루만져 길렀으며, 무릇 시집보내고 장가들이는 일은 반드시 조카들을 먼저 한 뒤에야 아들딸을 결혼시켰다.

이순신은 재주가 있었으나 운수가 없어서 100가지의 경륜 가운데서 1가지도 뜻대로 베풀지 못하고 죽었다. --징비록, 유성룡--

수길의 용모는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얼굴은 검고 주름져 원숭이 형상이었다. 눈은 쑥 들어갔으나 동자가 빛나 사람을 쏘아보았는데, 사모(紗帽)와 흑포(黑袍) 차림으로 방석을 포개어 앉고 신하 몇 명이 배열해 모시었다. 사신이 좌석으로 나아가니, 연회의 도구는 배설하지 않고 앞에다 탁자 하나를 놓고 그 위에 떡 한 접시를 놓았으며 옹기사발로 술을 치는데 술도 탁주였다. 세 순배를 돌리고 끝내었는데 수작(酬酢)하고 읍배(揖拜)하는 예는 없었다.

--선조수정실록 1591/3/1--

秀吉容貌矮陋, 面色皺黑, 如猱玃狀。 深目星眸, 閃閃射人, 紗帽、黑袍, 重席地坐, 諸臣數人列侍。 使臣就席, 不設宴具, 前置一卓, 熟餠一器, 瓦甌行酒, 酒亦濁, 三巡而罷, 無酬酢拜揖之禮。

선조: 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

황윤길: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김성일: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선조수정실록 1591/3/1--


秀吉容貌矮陋, 面色皺黑, 如猱玃狀。 深目星眸, 閃閃射人, 紗帽、黑袍, 重席地坐, 諸臣數人列侍。 使臣就席, 不設宴具, 前置一卓, 熟餠一器, 瓦甌行酒, 酒亦濁, 三巡而罷, 無酬酢拜揖之禮。

上問秀吉何狀, 允吉言: “其目光爍爍, 似是膽智人也。” 誠一曰: “其目如鼠, 不足畏也。”


평수길은 살마주(萨摩州)의 종 출신인데, 남자답고 건장하며 활달하고 민첩하고 구변(口辯)이 좋더라. --明史, 일본열전--

平秀吉,萨摩州人之奴,雄健跷捷,有口辩。

이에 국왕이 거처하는 산성을 고쳐 큰 대궐을 짓고 성곽을 웅대하게 건축하고 궁전을 건립하니, 그 누각이 아홉 겹에 이르렀다. 그 안에는 실로 부녀자와 진귀한 보석이 있었다. 법률의 집행이 엄격했으니 군대가 나아감에 물러섬이 없었다. 이를 위반한 자는 아들과 사위라도 예외 없이 주살(誅殺)했다. 그래서 진격하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다. 이에 연호를 고쳐 문록이라 하고 중국을 침략하고 조선을 멸망시킬 욕망을 아울러 가졌다. --明史, 일본열전--

乃改国王所居山城为大阁,广筑城郭,建宫殿,其楼阁有至九重者,实妇女珍宝其中。其用法严,军行有进无退,违者虽子婿必诛,以故所向无敌。乃改元文禄,并欲侵中国,灭朝鲜而有之。

수길이 여러 성의 군사를 크게 정복한 후 3년치의 군량을 쌓아 두고 장차 중국을 침략할 야망을 품었다. --明史, 일본열전--

*诸三岁粮에서 ‘诸’는 ‘儲(저: 쌓다)’의 오기인 듯, 필자가 구한 사본은 간체자(簡體字) ‘诸’로 되어 있으니까, 오기라기보다 원문 ‘儲’를 이렇게 썼을지도 모름.

秀吉广征诸镇兵,诸三岁粮,欲自将以犯中国。--明史, 일본열전--

노추(奴酋 큰 두령: 누르하치)는 비대하거나 수척한 편도 아닌데, 체구가 건장하고 코는 곧고 크며, 얼굴은 야무지면서 길었습니다. --선조실록 1596/1/30--

奴酋, 不肥不瘦, 軀幹壯健, ? ?簅 面鐵而長

노추 형제의 처와 제장(諸將)의 처는 모두 남벽(南壁)의 온돌 밑에 섰는데, 노추의 형제는 남쪽의 동쪽 모퉁이 땅위에서 서북쪽을 향하여 검은 의자에 앉았고 제장은 모두 소추(누르하치의 동생)의 뒤에 시립하였습니다. 술이 두어 순배 돈 후에 올라부락(兀剌部落)의 새로 항복한 장수 부자태(夫者太)가 일어나 춤을 추었고, 노추도 문득 의자에서 내려와 비파를 퉁기면서 몸을 흔들었습니다. --선조실록 1596/1/30--

奴酋兄弟妻及諸將妻, 皆立於南壁炕下; 奴酋兄弟, 則南行東隅地上, 向西北, 坐黑漆倚子, 諸將俱立於奴酋後。 酒數巡, 兀剌部落新降將夫者太起舞, 奴酋便下倚子, 自彈琵琶, 聳動其身。

호인들의 말이 ‘전일에는 출입하는 자가 반드시 궁시(弓矢)를 휴대하여야만 서로 침해하며 노략질하는 환란을 피할 수 있었는데, 왕자(王子)가 단속한 후부터는 원근의 출행에 마편(馬鞭)만을 가지고 다녀도 되니 왕자의 위덕(威德)은 비길 데가 없다.’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전에는 자의에 맡겨 행동하게 하고 또 사냥으로 생업을 도왔는데, 지금은 행동을 속박하고 또 사냥한 것을 바치게 한다. 비록 그를 두려워하여 말하지는 못하나 마음속으로야 어찌 원망이 없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1596/1/30--

胡人等言: “在前日, 胡人之凡有出入者, 必佩持弓矢, 以避相侵害搶掠之患, 自王子管束之後, 遠近行走, 只持馬鞭。 王子威德, 無所議擬。” 或言: “前則一任自意行止, 亦且田獵資生, 今則旣束行止, 又納所獵。 雖畏彼不言, 中心豈無怨苦?” 云。

회첩(回帖) 속에 찍힌 인(印)을 살펴보니 ‘건주좌위의 인[建州左衛之印]’이라고 전각되어 있었습니다. --선조실록 1596/1/30--

觀回帖中印迹, 篆之以建州左衛之印。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걸쳐 동아시아의 향후 300년 역사를 송두리째 바꾼 세 인물, 이순신 장군, 풍신수길, 누르하치의 인물됨을 기록을 통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풍신수길과 누르하치가 확립한 새 질서는 초창기의 이 편린(片鱗)에서 많은 것이 드러난다. 그들은 무엇보다 수백 년간 ‘법보다 주먹이 앞서던’ 시대를 종식시키고 ‘주먹보다 법이 앞서는’ 새 시대를 만들었고, 여자를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었다.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빠졌던 1595년 12월 22일에서 12월 28일, 여진을 직접 찾아간 신충일(申忠一)이 자세하게 기록한 누르하치의 이모저모는 청나라를 연구함에 있어서 어떤 것보다 귀중한 1차 사료다. 후에 청나라 건국으로 누르하치는 신의 반열로 올라서기 때문에 이런 생생한 모습은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에서 보면, 신충일이 외국의 사신이 갔을 때, 여진 건주위의 주요 장군들이 총집합하는데, 거기엔 여자들도 당당히 참여한다. 남녀의 따로따로 앉기가 7세부터 시작되었던 조선에 비하면 하늘과 땅처럼 다른 풍습이다. 누르하치 형제를 포함하여 여러 장수의 부인들은 가장 따뜻한 남쪽에 그것도 온돌이 있는 곳에 서 있었다. 앉은 사람은 누르하치와 누르하치의 친동생뿐이다.

한편 풍신수길은 말 그대로 구중궁궐(九重宮闕)을 새로 지어 가장 깊숙한 곳에 부녀자와 보석을 할당하여 그들을 보호하거나 저장한다. 이것은 곧 다음을 상징한다.

‘전쟁 끝, 평화 시작!’

‘불행 끝, 행복 시작!’

‘증오 끝, 사랑 시작!’

일본은 12세기 말 이래로 약 400년간 전세계 어떤 곳보다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그것도 말도 다르고 옷도 다른 외국인을 상대로 한 전쟁이 아니라 친구도 사제(師弟)도 주종(主從)도 부모형제도 부부도 언제 어느 때 원수가 될지 모르는 내란이었다. 신라 통일로 따지면 1300년, 고려의 재통일로 따지면 1000년 만에 소련과 중공의 괴뢰가 그들의 무기와 군대를 대거 끌어들여 일으킨 동족상잔은 반세기가 지났지만, 남북의 7천만 마음속에서 아직도 증오의 용암이 부글부글 들끓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상황임을 생각해 볼 때, 내란이 얼마나 인간성을 말살하는지 알고 남음이 있다. 남북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재통일되지 않는 한, 이 저주스러운 증오는 그칠 리 없다.

누르하치의 여진족도 일본과 마찬가지였다. 중원에는 명(明)이 한반도에는 조선이 각각 들어서면서, 여진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남쪽으로는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으로 쫓겨났고, 서쪽으로는 요서 이동으로 쫓겨났다. 명나라의 분할통치(divide and rule) 정책에 따라 400여(衛384, 所20)개의 작은 부락으로 갈가리 찢어지고 갈라지고 흩어져서 서로 명나라의 고임을 받으려고 애쓰며 동족을 상대로 한 하늘을 머리에 둘 수 없는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증오의 수렁에 빠져, 나이 7살만 되면 누구든지 몸에 무기를 들고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다. 중원과 멀리 중앙아시아까지 세력을 떨쳤던 금(金)이 망한 이후로 치면, 무려 400여년 만에 그들은 드디어 민족의 영웅을 맞이하게 이르렀다. 머잖아 여진족을 통일하고 나면 싸워도 조선이나 중국을 상대로 싸우고, 황금처럼 빛나는 동족끼리는 법과 상식과 말로 분쟁을 해결하는 세상을 만들게 된다. 신충일이 여진의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간 때는 이런 통일(여진족의 완전한 통일은 1616년 후금을 건국한 지 3년째인 1619년)의 기운이 거세게 일던 무렵이었다.

이 해 1595년에 누르하치는 명이 여진에게 주는 최고의 영예인 용호(龍虎)장군이 된다. 일본으로 치면 직전신장이 우대신(우의정)이 되고 풍신수길이 관백(關白: 關은 관문, 白은 ‘주인 白’할 때의 그 ‘白’으로 ‘말하다’의 뜻임. 천황에게 하는 말은 모두 이 관문을 거쳐야 하므로 사실상 천황보다 높은 제1인자가 됨. 스탈린이 레닌이 병상에 눕게 되자 이런 역할로 독재 권력을 완벽히 장악했고, 김정일은 1985년 무렵 이런 식으로 김일성을 바지저고리로 만들고 사실상 유일한 독재자가 됨.)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군벌의 힘이 크게 차이나지 않는 상황에서 이렇게 명분을 장악하면, 통일의 절반이 이뤄진다.

왕건이 망해가는 신라에게 유화정책을 씀으로써 천명(天命)을 이어받아 자신보다 훨씬 강했던 후백제의 견훤을 물리치고 새 왕조를 개창한 것도 마찬가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남북통일도 인권과 자유와 평등, 법치와 전통과 역사 등 보편타당한 명분을 선점한 쪽이 통일의 주역이 될 것이다. 머릿속의 평등과 계급투쟁적 민족과 마르크스적 정통성에서 각각 수식어 ‘머릿속의’ ‘계급투쟁적’ ‘마르크스의’란 말을 교묘하게 감추고 막연하게 평등과 민족과 정통성을 앞세워 명분을 선점하려는 김씨공산왕조와 그 추종자나 ‘쓸모 있는 바보’들에게 알든 모르든 명분을 빼앗기면, 통일은 그만큼 요원해지고 그만큼 더 많은 피의 강이 흐른다.

신충일이 찾아갔을 때, 엉성하긴 하지만 누르하치가 머무는 성채는 세 겹으로 이루어졌음을 발견한다. 내성과 외성 그리고 외성 바깥, 이런 구조인데, 내성에는 누루하치 일족이 살고 외성에는 각 장군이자 부족장, 외성 바깥에는 군인이 산다.

외성 안에는 호가(胡家)가 겨우 3백 채, 내성 안에는 호가가 1백 채, 외성 밑 사면에는 호가가 4백여 채가 되었습니다.

내성 안에는 친근한 족류가 살며, 외성 안에는 모든 장수 및 족당(族黨)이 살고 외성 밑에 사는 자는 모두 군인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1595/1/30--

一, 外城中, 胡家纔三百餘; 內城中, 胡家百餘; 外城底四面, 胡家四百餘。

一, 內城中, 親近族類居之; 外城中, 諸將及族黨居之; 外城底居生者, 皆軍人云。

이건 바로 일본에서 직전신장이 처음으로 시작한 것인데, 저 유명한 안토(安土 아즈치)성이 바로 그것이다. 누르하치의 그것이나 직전신장의 그것이나 이것은 지방분권을 종식시키고 중앙집권으로 권력을 일원화하는 첫 걸음이다. 어제까지 칼을 겨누고 싸우던 무리들을 한 곳에 모아 이제는 한 식구로 살게 만든다. 아내와 자식도 포함하여 모두 한 곳에 모아서 산다. 이제 평화다, 우리는 이제 한 식구다, 서로 오순도순 살자, 더 힘을 길러 나라를 통일하자, 통일하면 그들도 용서하고 다 이처럼 살자, 우리는 전쟁이 목표가 아니라 평화가 목표다, 살인을 위한 살인은 더 이상 없다, 보라! 서로 매일 얼굴을 맞대고 인사하고 식사를 같이 하고 노래하고 춤추니 그 아니 즐거운가!

이렇게 한데 모여 삶으로써 언제든지 이해관계에 따라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할 수도 있다. 지방으로 부족장이나 영주나 장군이 흩어지면 언제 다시 실력을 길러 도전할지 모르지만, 엄격한 조직과 정다운 공동생활을 통해 친선을 다지다 보면, 반란의 싹은 절로 없어지고 설령 있더라도 금방 발각된다. 직전신장과 풍신수길은 처음부터 그랬지만 성 아래에는 시장을 조성하고 사통팔달 도로를 시원하게 뚫고 새로 편입한 모든 땅에서는 관세(關稅)도 없애서 상공업자가 자유롭게 이윤을 추구하여 멋진 신세계가 펼쳐지면서 경제가 활발해지도록 만들었다. 후에 누르하치도 그렇게 한다. 이들은 서로 벤치마킹한 적이 없지만, 본능적인 정치 감각으로 그렇게 할 줄 알았다. 평화가 봄바람처럼 불어오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새 세상을 만들었다. 군사적 재능만 있는 자는 절대 이런 새 세상을 만들지 못한다.

전쟁이 끝난 후 가장 비참한 자는 군인이 아니라 패자(敗者)의 가족이다. 여자는 유린당하고 어린이는 학살되거나 노예가 된다. 패자(敗者)의 여자는 원수의 씨를 뱃속에 길러야 하거나 한 순간 쾌락의 대상이 된 후 비참하게 살해된다. 신라와의 희망 없는 최후 결전을 앞두고, 계백 장군이 가족을 무참히 살해한 것은 그런 비극을 차마 가족에게 안겨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1000년이 흐르고 다시 300년이 흐른 후에도 누가 눈물을 흘리지 않으랴!

누르하치가 부녀자들에게 가장 좋은 자리를 내 준 것은, 승리한 수컷 사자가 암컷을 독차지하고 이전의 새끼를 물어 죽이는 것처럼 여자는 독차지하고 아이는 죽이던 악습에서 벗어나, 승자가 어제까지만 해도 원수였던 패자(敗者)의 부녀자들을 그들에게 고스란히 돌려 주고 각자의 가족은 각자가 보살피며 평등하게 오순도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관대함에 어느 누군들 심복하지 않으랴!

풍신수길이 여자를 구중궁궐에 보물과 함께 보호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제 더 이상 승자의 최대 쾌락인 강간은 없다. 설령 최후의 순간이 오더라도 보석으로 몸을 지킬 수 있다. 실지로 풍신수길은 어마어마한 황금을 대판(大阪 오사카)성에 보관하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석 자 칼보다 무서운 세 치 혀에 의해 가족이 언제든지 풍비박산(風飛雹散)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었다. 일본과 여진과 조선 중에서 겉보기에는 가장 평화로운 사회에 살고 있었지만, 풍신수길과 누르하치가 등장한 후 조선은 가장 불안한 세상에 살고 있었다. 그들 나라 사람들은 새로운 질서가 도입되고 새로운 법률이 칼같이 집행되어 올바르게 사는 사람, 양심 바르게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 법을 어긴 자는 최고 지도자의 아들이나 사위라 할지라도 용서받지 못했지만, 법을 지키는 자는 노비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세상을 만들게 이른다. 능력의 사회가 펼쳐진다. 누구든 능력을 발휘하면 어제의 종도 최고 지도자가 될 수 있고, 어제의 명나라 앞잡이(누르하치는 뜻을 세울 수 있을 때까지 철저히 명나라에 아첨하고 비굴하게 굴어 경제적 이권을 독점하고 군사적 역량을 몰래 키움)도 민족통일의 영웅이 되는 사회였다. 조선은 정반대다. 돈과 패거리와 아첨이 질서와 법과 양심을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이순신 장군은 혀와 붓의 도산검림(刀山劍林) 속에서 입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고 히히덕거리며 함부로 웃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양심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정의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아첨할 수는 없었고 뇌물을 바칠 수는 없었고 당쟁의 끈을 슬그머니 잡을 수는 없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능력을 발휘할수록 그는 질시와 모함의 대상이 되었다. 나라를 홀로 구한 것이 죄가 되어 서울로 압송된 경우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함경도에서 여진족과 싸우던 때도, 전라도 발포에서 성실하게 근무하던 때도 오히려 잘했기 때문에, 그러나, 뇌물을 안 바치고 아첨을 안 했기 때문에 조정에 끈을 대지 않았기 때문에, 삭관박탈 당하고 백의종군했다. 조카들까지 줄줄이 떠맡아 먹여 살릴 식구가 누구보다 많았지만, 물욕이나 명예욕이나 권력욕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 세 번이나 삭관박탈 당하고 두 번이나 백의종군했다. 만약 이순신 장군이 만주나 일본에 태어났다면, 하늘을 어루만지고 땅을 주무르는 그 재주로 보아 풍신수길이나 누르하치를 부하로 거느렸을 것이다. 중국의 황제가 되거나 일본의 장군(將軍 쇼군)이 되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은 삭관박탈 당하고 백의종군할 때 더욱 잘 나타난다. 너무도 담담하다. 생사를 초월한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변명 한 마디 않는다. 예, 아니오, 라고 하거나 물적 증거(함경도에선 적군에 비해서 아군의 숫자가 너무 적으므로 원병을 청한 후 그 사본을 보관했고, 전라도에선 휘하의 군사와 병기고가 이웃 고을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한 1등임을 기록해 두었음. 나중에 따로 자세히 밝힐 예정임.)를 댄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사랑하는 조국이 있음에 굴욕을 굴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묵묵히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계속한다. 그저 모기한테 한 방 물린 것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모기에게 물리고 칼을 빼드는 것만큼 우스운 인간도 없는 법이다. 철저한 신분 사회에서 그는 지위가 높든 낮든 개의치 않고 한결같은 생활을 계속한다.

놀랍게도 풍신수길과 이순신 장군과 누르하치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지만, 공통점이 많다. 그것은 각 민족의 이 영웅들이 아랫사람을 대할 때 가장 잘 나타난다. 7년 전쟁의 와중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선, 그 지방에 사는 백성들에겐

일사불란한 조직이 있었고,

누구나 승복하는 신상필벌(信賞必罰)이 있었고,

만인이 평등한 법이 있었고,

활발한 생업이 있었고,

능력의 만개가 있었고,

빛나는 눈동자가 있었고,

군침 도는 음식이 있었고,

물자를 아끼는 검소함이 있었고,

평등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고,

신뢰가 있었고,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허례의식(虛禮儀式)과 권위의식(權威意識)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풍신수길은 무려 3년치의 군량을 쌓아 놓고도 외국 사신에게 간단하게 탁주 몇 잔 대접할 뿐, 복잡한 의식으로 거들먹거리지 않았다. 풍신수길은 늦둥이 아들을 안고 나와서 옷에 오줌을 싸자,

깔깔 웃고는 안으로 들어가 사람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눈을 빛내며 조선에서 온 사신의 외교문서에 대해 긴밀히 의논했다. 누르하치는 항복한 장군이 춤을 추자, 자기도 거기에 답하여 친히 비파를 뜯으며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풍신수길은 직전신장이 살아 있을 때는 자식이 없는 몸으로 그의 아들을 입양함으로 자기가 죽으면 그 영지가 모조리 직전의 가문으로 가도록 하는 등 철저히 충성을 다 바쳤지만, 막상 일인자가 되자 일본이 옛날부터 중국과 동등한 황제국이라는 의미에서 연호(年號)를 새로 제정했다. 명나라에 조공을 바친다는 것은 애초에 생각도 않았던 일이다. 썩은 명나라에 기대어 일개 사신에게도 비굴하게 큰 절을 올리려고 애걸복걸하던 조선의 왕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한편, 누르하치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 보고 명나라에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하며 조선의 사신에게 보내는 외교문서에 고작 ‘건주 좌위(建州左衛)’라고 자신을 낮추었다. 그러나 그도 때가 되자, 저 유명한 7대한(大恨)을 외치며 원수의 나라 명을 멸망시키고 황제로 등극하려 했다. 그들은 권위는 절로 따로 오는 것이지 스스로 내세우면 도리어 천 리 만 리 달아난다는 것을 잘 알았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어떠했는가. 종의 아픔도 아파하고 졸병의 죽음도 못 견뎌 하면서, 운주당(運籌堂)을 상시로 개방해 놓고 장수만이 아니라 일개 병사도 노비도 농민도 어부도 목동도 누구나 와서 정보와 의견을 알려 주고 건의하게 했다. 또한 삭관박탈 당하고 백의종군해도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늘 한결같았다.

그러나 적을 대할 때는 이들 셋은 추상과 같았다. 아군은 가능하면 피해를 입히지 않고 적군에겐 가능하면 큰 피해를 주거나 숫제 무혈로 제압했다. 항복한 자는 어제의 죄를 묻지 않고 관대하게 대했다. 이순신 장군은 항복한 왜가 부탁하자, 그들끼리 민속놀이를 즐기는 것을 허용한 일도 있다.

어두워질 무렵 항복해 온 왜인들이 광대놀이를 벌였다. 장수된 자로서는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니었지만, 귀순하여 따르는 왜인들이 간절히 바라기에 금하지 않았다.

--난중일기 1596/7/13--

昏降倭等多張優戱 爲將者不可坐視而歸附之倭懇欲庭戱 故不禁也

일본과 여진(滿洲는 누르하치가 퍼뜨린 말로 지혜의 부처 문수보살의 文殊에서 왔다고 함)은 삶이 곧 전쟁이었으니까, 평소의 신체단련이, 평소의 성 쌓기가, 평소의 해자(垓字) 파기가, 평소의 사냥이 모두 전쟁 연습이었다. 따라서 재능이 탁월한 사람은 약간의 운만 따르면 장군으로서 입신출세하기가 식은 죽 먹기였다. 공차는 재주를 타고난 자가 브라질에서 프로 축구 선수되기처럼 쉽고 재미있었다.

조선은 정반대였다. 평소의 음주가무가, 평소의 독서가, 평소의 음모가, 평소의 눈치 보기가, 평소의 가렴주구가, 평소의 세금 포탈이, 평소의 병역 기피가, 평소의 패거리 짓기가, 평소의 멱살잡이가, 평소의 예절타령이, 평소의 시문 짓기가, 평소의 큰소리치기가 모조리 전쟁에서 도망치기 연습이었다.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도 장군으로 입신출세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인도에서 세계 최고 피겨스케이팅 선수되기보다 어렵고 무망(無望)했다. 너도나도 달아난 게 실은 정상이었다. 그것은 양떼가 늑대를 보면 본능적으로 달아나는 것과 같았다.

풍신수길과 누르하치가 전쟁 영웅이 되고 새로운 질서를 가져온 것은 각기 400년 동안 축적된 역사가 피워낸 자연스러운 꽃이요 열매였다. 굳이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보다는 못해도 누군가 그를 대신할 사람이 나올 기회의 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불세출의 영웅이 되고 고립무원의 작은 전라도의 섬과 해안에서 전쟁 중에 새로운 질서를 잠시나마 도입한 것은 아무리 봐도 기적이다.
(2009. 4. 19.)

Wednesday, April 29, 2009

오명박과 李바마

오명박과 李바마

이명박이 경선 대선 대통령 시절 한결같이 난 실용주의라요, 난 이념같은 것은 몰라요! 하더니 오바마도 영어로 똑같은 말만 반복한다. 난 Ideology 같은 것 몰라요, 난 pragmatist 라요! 위클리 스탠다드에 실린 피터 버코위츠의 논설이다. http://www.weeklystandard.com/Content/Public/Articles/000/000/016/425yustu.asp 경제만 살리면 되지, 이념은 무슨 이념! 이명박을 오명박이라 불러도 괜찮을 것 같고, 오바마를 이바마라고 불러도 상관없을 것 같다. I don’t know what ideology means! I am a pragmatist!

실용주의 오바마는 이념같은 것 모르니까, 이란의 물라들과도 친구가 될 수 있고, 베네수엘라의 휴고 차베즈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데, 이념같은 것 모른다는 이 친구가 공화당 씹어대는 데는 제일 앞장 서고 있다. 우리 미국이 잘못 했시요! 부시 시절, 미국 정보원들이 9.11 알카에다 테러리스트들을 너무 지독하게 물고문 했으니, 정말 잘못 했시요! 오바마 식으로 나간다면 오바마가 김정일과 친구되기는 시간 문제이다. 김동무, 우리 이념 따지지 않고 인권 따지지 않을테니까, 6자회담에 나오셔서 다시 잠시만이라도 핵무기 미사일 포기하는 척 하시라요! 세계경제가 안 좋지만 김동무에게 줄 돈은 억 억 소리가 나게 준비했시요!

오명박이 한나라당을 뻐꾹 한 다음에 제일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한나라당 전 대표들 이회창 씨와 박근혜 씨이다. 이명박은 민주당이나 민노당 빨갱이들보다 이총재, 박 전대표를 더 미워하는 것 같다. 이회창 박근혜라면 웃던 얼굴이 금방 살얼음 판이다. 왜 그럴까? 난 이념같은 것 몰라요? 난 실용주의라요? 주적 김정일이 개판을 치는데는 화가 나지 않고, 같은 당 박근혜는 가만 있는데도 가만 내버려 두질 않는다.

이바마도 이념 제치고 실용주의 한다면서 제일 미워하는 적이 공화당 사람들인 것 같다. 사우디 아라비아에 가서는 시크에게 허리를 90도로 굽혀 절을 하더구만서도, 미공화당에서는 어제 머저리 알렌 스펙터 상원의원까지 민주당으로 빼앗아 왔다. 이제 민주당이 상원에서 60석 거의 차지했으니까, 용용 죽겠지? 어이가 없다. 하필이면 이런 변절자 알렌 스펙터의 선거구가 필자가 사는 펜실베이니아 주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정치판은 다를 게 없다. 오명박이나 이바마나 믿을 데라곤 눈을 씼고 쳐다보아도 한 군데도 없다. 빨갱이들이 개성공단에서 한국직원을 달포나 인질로 억류하고 있는데도 오로지 유연 정책이란다! 김정일이 미사일 쏘면 당장 PSI에 가입하겠다더니, 그것도 가짜 空砲였다. 난 실용주의 유연정책가란 말이외다!

빨갱이들이 미국 여기자들 로라와 유나를 잡아가서 인민재판을 하겠다는데도 북한특사란 스티븐 보즈워스인가 힐러리 바마워스인가는, 북한에 강경책을 쓰면 저 분들이 더 강경해진단 말이에요!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 다시 집어 넣자고? (펄쩍 뛰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 김장군님의 비위를 건드리다니! 이 자도 분명 이바마 오명박을 닮아서 유연정책 실용주의, 아니, 굴종환자다.

이런 와중에 조선-중앙-김대중 대기자님들은 뇌무현을 잡아가두면 안 된다고 난리들이다. 돈을 비교적 작게 해처먹었으니 내버려 두자? 전 대통령을 구속 재판 옥살이를 시키면 나라 망신이니 그냥 내버려 두자? 하나님, 맙소사! 조선과 중앙과 대기자님이 하나같이 그야말로 꼴갑들을 하고 있다. 당신들이 보수 애국자인가? 뇌무현을 잡아가두지 않으면 누굴 잡아 가둬야 하나? 뇌무현과 함께 개대중이도 잡아 가둬라! 하고 나와야지, 만고의 역적 개대중은 언제 잡아 가두나? 노벨평화상 받은 전 대통령을 잡아가두면 국제망신살이니까 개대중이 죽으면 國葬을 지내야 하나? 이런 사람들이 보수이고 보수 신문들이란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오명박이도 그렇고 이바마도 그렇고 힐러리의 미국무부도 그렇고, 모두들 싻이 노랗다. 모두가 왼손잡이들, 아침이슬들이다. 북한인권을 챙기기는 커녕 기회만 되면 김정일에게 더 열심히 갖다 바칠 사람들이다. 6자회담의 사깃꾼 김정-크리스 힐은 엊그제 이라크 대사로 영전 임명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이 요지경 속이다.

2009/4/29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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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April 21, 2009

세상 참 요지경 속이다

어제 美상원에서 6자회담의 변절자 크리스 힐을 駐이라크 대사로 인준해주자는 일단계 투표가 있었다. 이제는 크리스 힐의 자격 適格 토론은 그만하고 크리스 힐의 인준투표를 본회의에서 곧 하자는 투표에서 70표 이상이 찬성, 20표 정도가 반대로 대세가 크리스 힐 쪽으로 기울었다고 한다. 북한인권의 영웅 샘 브라운백 상원의원이 고전분투하셨는데, 공화당의 머저리 척 루거 의원(前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장)조차 크리스 힐 편이라 하니 브라운백이 어찌 막겠는가! 존 볼턴 前 유엔대사가 얼마 전 말하신대로 세상이 Upside Down, 정말 요지경 세상이다. 부시의 6자회담 졸개 크리스 힐을 극좌파 오바마가 크게 영전시키겠다고 저 고집이니, 세상이 거꾸로 되어도 한참 거꾸로 되었다.

딴 것은 다 차치하고라도, 이제는 김위원장님 덕분에 산산조각이 난 6자회담의 미수석대표였던 크리스 힐이 크게 잘못한 것에 두 가지가 있다. 방코 델타 아시아 은행에 있는 김정일의 핵자금을 찾아준 것과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어준 짓이다. 그건 대통령 조지 부시와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가 시켜서 한 것이지, 어째서 크리스 힐 혼자서 책임질 일이냐? 셋에 다 책임져야 하고, 그 중에서 부시가 제일 책임을 져야하지만, 크리스 힐에게도 똑같은 책임이 있다. I followed the orders? 크리스 힐이 다 조작한 짓이다.

크리스 힐은 김정일 돈을 찾아주기 위하여 벼라별 짓을 다 했다. 김정일의 검은 돈을 추적하여 까발긴 미재부무 관리들과도 싸우고, 러시아와 중국을 쏘다니면서 제발 김장군님 돈을 세탁하여 갖다 바쳐달라고 비두발발하고, 결국은 2500만불 돈을 개정일에게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미국무부의 차관보란 작자가 왜 저 지랄인가? 속이 메스꺼울 정도였다.

크리스 힐은 상원청문회에서 샘 브라운백 의원에게 공개적으로 약속했었다. 6자회담에서 꼭 북한인권 문제를 거론하겠습니다. 앞으로는 미 북한인권특사 제이 레프코위츠를 꼭 6자회담에 초청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김정-힐은 제이 레프코위츠에게 전화 한 통 한 적이 없다. 내 눈으로 레프코위츠 편지를 보았다. 크리스 힐로부터 초청은 커녕 전화 한 통 받은 적이 없었노라고!

크리스 힐은 워싱턴에 온 탈북자들을 여러 번 만나보았다. 통역하기 위하여 필자도 그 자리에 있었다. 크리스 힐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두 눈깔 처연한 표정으로, 여러분들, 참 용감하십니다! 북한인권 참 참혹합니다! 내가 6자회담에서 꼭 북한인권을 거론하겠습니다! 입만 나불대었지, 한 번도 북한인권 거론한 적이 없었다.

그런 크리스 힐이 조만간 이라크 대사로 부임하게 생겼다. 부시와 오바마의 축복을 받으면서! 민주당과 공화당의 축복을 받으면서! 그러니, 미국에서도 출세하고 싶으면, 거짓말 잘 하고, 줄을 잘 서야 한다. 곧은 말, 바른 말만 하는 존 볼턴 대사는 미기업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찬밥신세로 연구나 하고있고, 가짓 말 잘 하고, 줄 잘 서는 크리스 힐은 이제 영전되어, 부시와 오바마와 김정일의 축복을 받으며 주이라크 미대사로 납신다.

북한인권 물렀거라!
샘 브라운백 물렀거라!
여기 신숙주같고 이완용같은 크리스 김정-힐이 납신다!
세상 참 요지경 속이다.

2009년 4월 21일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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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April 19, 2009

사람들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자!

금년 들어서 미국에서는 링컨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링컨 기념행사가 거의 매일 열리고 있다. 링컨 생일날인 2월 12일부터 워싱턴 연방국회도서관에서 열린,”With Malice Toward None 아무도 미워하지 말고”란 전시회는 내 나머지 생에서 잊을 수 없는 감동과 추억이 될 것이다. 그 전시회에는 링컨의 친필문서들이 거의 몽땅 전시되어 있었다. 게티스버그 연설문 기초, 제2차 취임연설문, 노예해방 선언문, 그리고 제일 인상 깊었던 문서는, 링컨이 암살자 존 윌크스 부스의 총에 맞아서 포드 극장 건너 편에 있는 피터슨 家의 작은 침대에 피를 철철 흘리며 누워있을 때, 링컨의 응급치료를 담당했던 의사가 쓴 銃傷 기록문에 링컨의 피가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묻어있던 것이었다.

어제도 필라델피아에 있는 The Union League 란 단체에서 링컨 200년 기념 토론회가 열렸다. 필라델피아 교외에서 근 40년을 살면서도 필라델피아 시내 한 복판에 있는 이 유니언 리그란 곳을 방문한 적이 없던 필자로서는 유니언 리그 古건물(1865년 건축)도 처음 방문하고, 링컨에 관한 토론으로 하루종일(아침 9시반부터 오후 3시반까지)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듣고 배우고 토론했다. 어제 새로 들은 놀라운 사실은 링컨이 1864년 6월 필라델피아 시에 들렸을 때, 이 유니언 리그에도 다녀갔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유니언 리그 건물에는 링컨 사진, 그림, 조각들이 남북전쟁 당시 연방군 장군들의 초상화들과 함께 아래 위층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미국사람들이 링컨을 사모하고 역사를 소중하게 모시는 것은 아무리 자주 접해도 볼 때마다 부럽고 감탄스럽다.

어제 연사는 모두 5사람이었는데, 모두들 링컨 책을 몇 권씩 출판한 링컨 석학들이었지만, 그 중에는 링컨을 깎아내려서 유명해진 흙탕물치기 미꾸라지 석학(?)도 한 사람 끼어들어서 필자는 질문시간에 그 사람에게만 질문을 드리대었다. (뭐라고? 미국이 하나가 아니라 서너 개 나라로 갈라졌어도 괜찮았을 거라고? 미국을 하나로 지키기 위해서 링컨이 60만 장정을 죽인 것은 너무했다고? 링컨은 사실 너무 과대포장 되었다고? 당신이 정말 링컨 연구가 학자인가? 링컨을 이런 식으로 깎아 내리다니! 이건 역사 다시 쓰기로 한 빨갱이들이나 하는 짓거리 아닌가!) 괄호 안의 반박은 내가 화가 나서 속으로 질러댄 욕지거리이고, 그 자에게 필자가 물어본 것은, 링컨이 60만 장정의 희생 참극을 미리 예견했었더라도 링컨은 남북전쟁을 강행했을 거라 생각하는가? 그 자가 우물쭈물 대답이 끝나도 전에 딴 토론발표자가 끼어들었다. 강행했을 것이다! 바로 매트 핀스커 교수란 발표자였다.

매트 핀스커 교수가 세 번째 연사였는데, 발표주제가 링컨의 정치적 지도력이란 내용이었고, 그는 유명한 링컨의 눈먼 문서, The Blind Memorandum(1864년 8월 23일, 링컨이 戰時內閣 장관들에게 문서내용을 보지말고 문서 뒷면에 서명만 해달라고 요청했던 문서)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면서, 링컨의 두 가지 信條 정책을 설명했다. 1864년 8월, 링컨은 자신의 재선을 자신이 믿지못할 정도로 모든 상황이 최악이었다. 전쟁은 갈수록 참혹하고, 국민들은 끝이 안 보이는 전쟁에 신물이 났고, 自黨이란 공화당조차 과격파들은 링컨에게 대통령 자리를 양보하라고 윽박지르고, 링컨이 처한 당시 상황은 참으로 사면초가였다. 그러나 11월 대선에서 링컨은 국민들에 의해 재선되었다. 링컨은 자신이 재선된 다음 그 눈먼 문서의 내용을 장관들에게 보여줬지만, 그 문서에는 자신이 선거에서 지고 자신의 政敵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그 후임 대통령 당선자와 자신이 공조해서 나라를 살리겠다는 비장한 각오의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렇게 링컨은 연방보존과 인간해방이란 두 신념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산 증거물이 바로 이 눈먼 문서이다.

어제 내가 심포지움에 모인 사람들에게 열심히 주장한 것은 링컨이 해방시킨 것은 흑인노예들이지만, 사실은 인간을 해방시킨 것이란 사실이다. 노예들이 흑인들이라서 해방시킨 것이 아니라 흑인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해방시킨 것이다. 만약에 그 당시 미국에서 어떤 백인종이나 황색인종이 흑인들처럼 노예신분으로 가축취급을 당하고 있었다면, 링컨의 노예해방 인간해방이란 신념에 망설임이 있었을까? 아니다, 링컨은 피부색갈과 관계없이 그 어떤 인종이라도 노예나 가축으로 부림 당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을 것이고,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남북전쟁 아니라 세계대전이라도 불사했을 것이다.

그 당시 미주남부에서 노예제도가 없었다면, 남부 노예주들이 노예제도를 서부변방으로 확산하겠다고 어거지를 부리지 않았다면, 남부가 연방에서 무슨 딴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이탈한다고 선언했었다면, 링컨은 남부의 이탈 독립을 막을 이유나 명분도 없었고, 막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라가 갈라지면 언젠가는 서로 싸우지만, 남부에 노예제도란 악이 없었다면 왜 링컨이 그토록 처참했던 남북전쟁을 강행했겠는가?

김정일이란 악마가 2300만 북한주민들이 얼굴이 검거나 생긴 것이 달라서 노예처럼 부려먹고, 굶겨죽이고, 때려죽이나? 아니다. 김정일이란 악마는 2300만 자국민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김씨왕조 유지를 위해서는 소모품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300만을 굶겨죽이고도 아무렇지 않은 것이다. 김정일이 북한사람들을 노예로 부려먹고 굶겨죽이기 때문에 우리는 한반도 남북전쟁을 불사해야 한다. 김정일이 주민들을 정치범수용소 공개처형으로 죽이지 않고 잘 먹여살리면, 김정일과 싸울 필요가 없다. 남북이 따로 따로 갈라져서 살아도 괜찮다. 그러나 북한 빨갱이들이 2300만 인간을 노예취급, 소모품 취급을 한다면, 북한사람들이 내 동포가 아니고 흑인이거나 백인이거나 일본인이더라도, 김정일과는 싸워야 한다. 하물며 딴 인종도 아니고 내 동포들을 죽이는데! 죽기살기로 싸워야 한다.

21세기에 들어선 링컨은 Global Lincoln, 세계적 위인이라야 한다. 미국만의 링컨이 아니다. 한국사람들이 링컨을 배워서 김정일 김대중 노무현을 제거하면, 우리나라 살아나고, 링컨은 Universal Lincoln, 한국의 링컨이 될 것이다. 며칠 전 4월 15일, 남북한 빨갱이들이 위대한 수령님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살아있다고 선전하지만, 살인마 김씨父子왕조의 애비 악마 김일성은 단지 그 자식새끼 악마 김정일 안에 살아있는 것이지, 그 육신이나 주체사상은 뒈져서 썩어문드러진 지가 오래이다. 그 뒈진 놈을 사모하고 추종하는 시간증(屍姦症) 자폭환자들이 남북한의 김정일 김대중 빨갱이들이다. 그러나 링컨은 온세상 핍박받고 억압당하는 사람들 안에 지금도 살아있다. 상상하기도 싫지만, 링컨이 미국에서 잊혀지는 날, 미국도 끝장이고, 민주주의도 끝장이고, 아마 인류가 인간답게 사는 것도 끝장나는 날일 것이다.

2009년 4월 19일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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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링컨의 눈먼 문서 The Blind Memorandum

Washington, D.C.
August 23, 1864
This morning, as for some days past, it seems exceedingly probable that this Administration will not be re-elected. Then it will be my duty to so co-operate with the President elect, as to save the Union between the election and the inauguration; as he will have secured his election on such ground that he can not possibly save it afterwards.
A. Lincoln

오늘 아침, 지난 얼마간의 사정을 돌아보면 우리 행정부가 이번 대선에서 다시 재선되리란 기대는 이제 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 연방을 살리기 위하여 대통령 당선자와 협력하여, 대선 날부터 새 대통령이 취임할 때까지 사이에 대통령 당선자와 협력해서 이 연방을 살리는 것이 제 의무입니다. 왜냐하면, 새로 당선된 대통령은 연방을 살리자는 공약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 아닐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A. Lincoln

Thursday, April 16, 2009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이야기(14)-최성재

풍신수길, 이순신, 누르하치(4)

국가도 유기체로서 개인과 마찬가지로 허약해지면 이웃 국가들이 절대 가만두지 않는다.
최성재


국가도 개인과 마찬가지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주기가 있다. 영원한 개인이 없듯이 영원한 국가도 없다. 개인은 길어야 100년이고 개인의 집합체로서 하나의 의지를 가진 유기체 곧 대외적으로 독점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국가는 길어야 1000년이다. 대체로 인생은 50년이었고, 국가는 200년이었다. 의학이 발달하여 이제 평균수명이 선진국에서는 80년으로 늘어났지만, 건강수명은 아직도 60년이 채 안 된다. 자연히 60세가 넘어서까지 경제활동을 계속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 때부터는 전반적으로 가정이나 사회나 국가에 알게 모르게 짐이 된다. 인류 역사상 처음 맞는 노령인구의 급격한 증가가 과연 지구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무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전혀 새로운 사회가 도래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로서는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크다. 네 사람(부모와 조부모)이 벌어서 두 사람(자녀)을 먹여 살리던 시대에서 두 사람(부부)이 벌어서 네 사람(자녀와 부모)을 먹여 살려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순리로 보아서 인간의 평균수명은 60세, 국가의 평균수명은 200년이 적당한 듯하다. 새 생명이 태어나고 새 국가가 탄생하면, 전체적으로 훨씬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이 면면부절(綿綿不絶) 펼쳐지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무렵에 동양 3국 중 명(明)과 조선은 늙어서 병든 상태였다. 둘 다 죽고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새 왕자가 태어날 시기였다. 명나라는 그런 역사적 순리를 따라서 새 시대를 위해 자연사했다. 만주에서 일어난 누르하치에 의해 어둠이 된 빛[明]을 몰아내고 새 맑은 왕조[淸]가 탄생했던 것이다. 일본도 오랜 진통 끝에 길게 보면 무려 400년 만에 새 옥동자[德川幕府]가 태어났다. 그러나 조선은 바뀐 것이 거의 없이 아니, 더 악화된 상태로 300년을 더 연명했다. 그러다 보니, 말기에는 거의 식물인간처럼 한심해졌다.

평균수명 50세가 안 되던 시대에도 100세까지 건강하게 죽는 날까지 일을 손에 놓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었듯이,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규모로 작은 국가가 아니라 제대로 규모를 갖춘 국가가 200년을 넘겨 400년, 500년을 새 왕조처럼 원기왕성하게 산 국가도 있다. 그렇게 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평화로운 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피 비린내 나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개인으로 말하면 그것은 병의 근원을 도려내는 수술이거나 늙은 피를 젊은 피로 바꾸어, 세모벌수(洗毛伐髓)하여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제대로 국가의 형태를 갖춘 지(지증왕 재위 500~514 연간, 이 때부터 비로소 신라라는 국호와 왕이란 칭호를 씀) 약 200년이 흘러 신라가 삼한의 전국(戰國)시대에서 승리하여 삼한(三韓)을 통일한 것과, 고려가 새 왕조를 개창한 지 100년 무렵부터 200년에 걸쳐서 국가의 명운을 걸고 동아시아의 새 패자(覇者) 요와 금을 잇달아 물리치거나 선제공격하여 당당히 그들과 버성기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국가를 유지한 쾌거이다. 중국에서 살펴보면, 강한성당(强漢盛唐)으로 북경올림픽의 개막식 주제를 제공한 한(漢)과 당(唐)의 경우가 있다. 한나라(BC202~AD220)는 중국의 역사에서는 유례없이 전한과 후한으로 약 400년이나 장수했고, 당나라(618~907)는 약 300년 동안 장수했다.

한나라는 건국 후 200년 무렵에 내란의 시기를 거쳐 황족의 방계인 유수(劉秀) 광무제(光武帝)가 사실상의 새 왕조를 개창함으로써 썩은 부위를 도려내는 개혁을 단행했다. 그래서 한나라의 영광은 200년간 연장되었다. 중국인은 이 시대가 너무나 자랑스러워 스스로를 한족(漢族)이라고 일컫는다.

당나라는 현종(재위 712~756)이 '개원의 치(開元之治)’로써 개혁군주의 길을 감으로써 중국의 다른 통일왕조보다 상대적으로 오랫동안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광무제의 개혁에는 비길 수 없었기 때문에 한나라만큼 장수할 수는 없었다.

동양의 영광이 한(漢)이라면, 서양의 영광은 로마다. 흔히 로마 천 년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도시 국가 시절까지 포함하는 과장이고 로마가 국가의 틀을 제대로 잡은 것은 BC 3세기 중엽에서 BC 2세기 중엽까지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카르타고와의 100년 전쟁에서 최후 승자가 된 이후이다. 서양인들이 가슴 뿌듯해 하는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는 캐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곧 BC 1세기 중엽에서 말엽부터 시작된다. 서로마가 멸망한 해가 476년이므로 로마의 평화는 약 500년 계속된 셈이다.

천하의 팍스 로마나도 200년이 경과하자 심각한 질병으로 거의 사망 직전에 이른다. 3세기 무렵 약 100년간 극심한 내란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이 내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중기의 개혁을 단행하지 못했으면 로마의 평화는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가 그 일을 담당했다. 그것이 로마의 평화가 500년을 채우게 된 비결이다. 그로부터 천년을 훌쩍 지나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제2의 로마의 평화를 재현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으로 또는 사악한 의도 때문에 끝내 실패한다. 제2의 로마의 평화는 나폴레옹에게 이긴 영국과 히틀러에게 이긴 미국에 의해 각각 달성된다. 현재는 이것이 다시 위협받고 있다. 머잖아 미국, 중국, 인도 또는 전혀 뜻밖에도 한국에 의해 새로운 세계평화 시대가 올 것이다.

왕조 중기의 개혁은 새 왕조 개창 때의 혁명과 다를 뿐만 아니라 그보다 어렵다는 것을 율곡 이이(李珥)가 잘 간파하고 있었다. 율곡은 130회가 넘는 국정 개혁안을 제시했는데, 그는 근본적으로 뜯어고칠 필요가 있는 왕조 중엽을 경장(更張)의 시대라고 불렀다.

이이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예부터 나라가 중엽에 이르면 반드시 안일에 젖어 점차 쇠약해지기 마련인데, 그때 현명한 임금이 일어나 진작하고 분발하여 천명(天命)을 다시 이은 뒤에야 뻗어가는 햇수가 길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국가가 2백여 년을 전해 왔는데 이제 이미 중엽으로 쇠퇴해가는 시기이니, 이는 진정 천명을 이어주어야 할 때입니다. 전하께서 옛날의 임금들을 내리 살펴보시더라도 전하와 같은 임금이 매우 적습니다. 전하께서 욕심이 적으시고 청백하게 몸을 닦으시며 백성을 사랑하고 선비에게 겸손하니 이는 진정 큰 일을 할 수 있는 임금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분연히 일어나지 못한다면 다시는 바라볼 날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이 쇠퇴하고 풍속이 천박하면 인심이 해이해지는 법입니다. 지난번 한재(旱災)가 있을 때에는 조금 걱정하고 두려워할 줄 알더니, 이제는 비가 내린 뒤라서 갑자기 안락하게 여기기를 마치 태평한 때처럼 하고 있으니 이를 소신은 깊이 우려하는 바입니다.

세속의 논의는 다 새로운 일을 추진하는 것을 가리켜 일 벌이기를 좋아한다 하고 전대로 답습하는 것을 안정된 것이라고 합니다만, 소신은 소요를 일으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쌓인 폐단과 고질화된 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세속의 논의대로 한다면 한 가지 폐단도 고치지 않고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릴 따름이니, 어찌 보존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항상 비상한 대업을 이룩하겠다는 뜻을 갖고 점차로 선정(善政)을 일으켜 사대부의 기대를 저버리지 마시고 적자(赤子: 백성)를 구제하소서.”--선조실록 1581/7/(날짜 기록이 없음)--

珥白上曰: “自古爲國, 若至中葉, 則必狃安而漸衰, 其時有賢主作焉, 振起奮興, 迓續天命, 然後歷年綿遠。 我國家傳至二百餘年, 今已中衰, 此正迓續天命之秋也 殿下歷觀前古人君, 如殿下者甚鮮。 殿下寡慾淸修, 愛民下士, 此正有爲之主也。 今日不能奮興, 則更無可望之日矣。 世降俗末, 人心解弛。 頃者有旱災時, 稍知憂懼, 而今則得雨之後, 遽爾恬憘, 有如太平之時。 此小臣所深憂也。 流俗之論, 皆以設施爲喜事, 因循爲安靖。 小臣非欲騷擾也, 只是積弊痼疾, 不可不救正故也。 若如俗論, 則不改一弊, 坐而待亡而已。 畢竟何能保存乎? 願殿下恒存有爲之志, 漸興善政, 以無失士望, 以濟赤子也。”

통일신라시대 말기에는 최치원(崔致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건의한 개혁안은 둘 다 실패한다. 힘과 세력의 뒷받침이 없는 건의 사항에 그쳤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봐와 같이 그것은 새 왕조를 개창하는 것에 준하는 대수술이 필요한 것이니만큼, 말 그대로 피비린내가 진동해야만 달성될 수 있다. 공고한 기득권을 스스로 놓으려 하는 지배층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치원의 시무(時務) 10여조와 이이의 130여 시무책이 성공했다면, 신라는 다시 200년을 더 이어갔을지 모르고, 조선은 조선판 광무제가 등장하여 임진왜란에서 고려가 거란을 물리쳤듯이 통쾌하게 승리하고 이어 대륙의 새 패자(覇者) 금(金)이 감히 고려는 넘보지 못하게 했듯이 병자호란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고 대륙의 청(淸)과 바다의 일본과 더불어 병약하고 추한 삶이 아니라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을 300년 더 누렸을지 모른다.

경장(更張)의 시대에 필요한 개혁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역시 조세(租稅)와 군역(軍役)과 인재등용이다. 이 세 부문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기득세력인 양반이었다. 특히 성리학을 달달 외어 지배층이 된 문관이었다. 사화(士禍)나 사색당쟁(四色黨爭)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사상 싸움도 아니었고 도덕 재무장 운동도 아니었다. 누가 조세를 합법적으로 많이 포탈하느냐, 누가 군역의 의무에서 면제되느냐, 누가 독점적으로 관리에 등용되느냐, 라는 것이었다. 동서남북을 막론하고 붕당(朋黨)은 조세를 상습적으로 포탈했고, 군역은 누구도 지지 않았고, 현실과 동떨어진 성리학만을 익혀서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국가 관리 능력이 전혀 없는 자들이 관료층으로 올라섰다.

율곡 이이와 서애 유성룡은 각각 후에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서인의 시조(始祖)요 동인의 영수(領袖)가 되지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똑같았다. 경장의 시대에 맞는 개혁안에 대해 거의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노비를 군인으로 충당하자는 노비충군(奴婢充軍)이다. 율곡은 1573년과 병조판서로 재직 중이던 1583년 서얼이나 노비에게 신분상승을 조건으로 변방에 근무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서애는 임진왜란 중인 1595년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양반과 노비를 함께 군에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병졸을 교련시키는 한 가지 일은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없으니, 출신(과거 급제 후 등용되지 못한 자) 양반·서얼· 향리(鄕吏)· 공천(公賤)· 사천(私賤)을 논할 것 없이 장정으로 실제 군사가 될 만한 사람은 사목(事目: 규칙)에 의거하여 모두 대오(隊伍: 군대)로 편성하여 그 부근의 각 동리에 거처하도록 하고, 각각 묶어 몇 부대가 되도록 하며, 한편으로는 병기(兵器)를 조치 준비하여 새로 훈련하도록 하라. --<군문등록> 유성룡--이덕일 역
중종36년(1541)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에 의해, 양반은 합법적으로 군 복무도 않고 세금도 한 푼 안 내게 되었는데, 율곡과 서애가 이런 ‘발칙한’ 안을 내놓았으니, 양반들이 붕당(朋黨)에 관계없이 코와 귀로 뜨거운 김을 내뿜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도 군(軍)에 가기 싫었지만, 그 노비도 보내기 싫었다. 왜냐하면 그들 노비는 양반들에게 유(有)노동 무(無)임금의 최대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토지 다음으로 소중한 것이 공짜로 부려 먹을 수 있는 노비였기 때문이다. 성(性)상납도 심심찮게 했고. 세금도 내기 싫었지만, 양반에 따라 수백 명 수천 명이나 거느린 노비도 절대 바치기 싫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이 율곡과 서애의 제안대로 몇 년 국토방어로 피와 땀을 흘리고 나면 자신들과 동등하거나 유사한 신분으로 상승하게 된다. 죽으면 죽었지,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여기에 무슨 동서남북으로 갈가리 찢어진 당쟁이 있을까. (남북전쟁에서 링컨이 흑인부대를 창설한 것은 남부군의 단결력에 결정타를 먹이고 북부군의 사기를 진작시킨 영단英斷이었다. 그것은 인권의 새와 군사의 새 두 마리를 동시에 맞춘 옥돌이었다.)

일치단결하여 당파에 관계없이 율곡의 조세개혁법안인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공납 대신에 쌀로 내자는 제안)과 서애가 전란 중에 일부 실시한 대동법(大同法)에 반대했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전시 기간 중 한시적으로 실시하자던 둔전제(屯田制)도 반대하거나 뭉갤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쌀이 자기들한테는 안 들어오고 농민과 국가로 몽땅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전쟁에 대비하든 평화를 만끽하든 국가는 재정이 튼튼해야 하고 국민은 배불러야 한다. 그러자면, 가진 자는 세금을 많이 내야 하고 갖지 못한 자는 세금을 적게 내야 한다. 그러나 세종대왕에 의해 멋지게 실현된 이 조치가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졌다.

과거제만으로 인재를 뽑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도 율곡은 갈파하고 있다. 이상에 관한 것들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시신(侍臣)이 경연에서 군적의 폐단을 말하였다. 김우옹이 아뢰기를,

“오늘날 폐단을 구하기 위해서는 오직 헛된 군액을 많이 늘리는 것만 힘쓰지 말고 사실에 따라 충군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군정(軍丁)이 다 사실대로만 되면 민력(民力)이 펴져서 유망(流亡)하는 자들이 차츰 돌아올 것이니, 지금 군액이 감소하였더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증가될 것입니다. 헛된 군액을 많이 늘리기만 힘쓰고 사실대로 하지 않으면 군적에 오른 자들이 유망하여 그 피해가 친족과 겨린에게 미칠 것으로, 가까스로 남아 있는 백성까지도 모두 살 곳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군액을 늘리는 것은 곧 감소시키는 것입니다.”하였다.

이이 등이 이어 아뢰기를,

“국가가 사천(私賤)에 대하여 입법(立法)한 것이 공평하지 못하여 이미 어미의 신분을 따르면서 또 아비의 신분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 폐단의 결과 양민(良民)이 전부 사가(私家)로 들어가 군정(軍丁)이 날로 줄어드는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법은 참으로 온당치 못하다. 대체로 법전은 변경할 수 없으나 이와 같은 법은 변통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하였다. 군신(郡臣)이 법을 변통하는 것이 좋겠다고 찬성하니, 상이 수의(收議)하라고 명했다. 상이 또 하문하기를,

“아비를 따를 것인가, 어미를 따를 것인가?”

하니, 여러 사람이 다 아뢰기를,

“어미를 따르는 것이 온당합니다.”

하였다. 우옹이 아뢰기를,

“아비를 따르는 것이 의리상 당연한데, 어찌 어미를 따르게 하여 인륜을 어기겠습니까.”

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오활하다고 하였다. 끝내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 중지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선조수정실록 1573/9/1

○侍臣於經筵亦言籍軍之弊。 金宇顒曰: “今日捄弊, 只在不務虛額之多, 只務從實充軍。 軍丁皆實, 則民力紓而流亡漸還, 今雖減額, 而後必增, 只務虛額而不實, 則此等流移, 害及族、隣, 而遺民盡至失所。 然則增額乃所以減之也。” 李珥等因言: “國家於私賤立法獨偏, 旣從母, 又從父。 其弊至於良民盡入私家, 而軍丁日少。” 上曰: “此法誠未便。 大抵法典不可變, 然若此法似當變通。” 群臣因贊其變通之便, 乃命收議。 上又問: “從父乎? 從母乎?” 諸人皆曰: “從母便。” 宇顒曰: “從父, 是義理所當然。 豈可從母, 違背人理乎?” 諸人皆以爲迂闊, 竟以議不一, 寢不行。

비변사(유성룡이 사실상 지휘)가 회계하기를,

“우리나라 사족(士族)의 집에는 노복이 천 또는 백으로 헤아릴 수 있는데 관병은 날로 축소되고 있으니, 이것이 비록 오래도록 유전해 온 풍속으로서 졸지에 변경할 수 없다고는 하나 이들을 군적에 포함해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것은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공·사천을 막론하고, 삼의사(三醫司)의 잡과와 같은 예로써 설과(設科)하여, 뽑힌 자는 즉시 양인으로 삼아 우림위(羽林衛)에 예속시키라는 것은 바로 위급한 때를 구제하는 거사가 될 것으로 상교가 과연 지당합니다.

다만 우림위는 금군에 속해 있으니 천한 노예로 이런 영광을 얻으려면 반드시 대단한 군공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요, 만일 과거에 합격하는 즉시 우림위에 예속시킨다면 후일에 공을 세운 자가 있어도 또한 시상하기가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규칙을 엄중하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아무에게나 남발하는 폐가 있을 것이니, 이제 규칙을 엄중히 정해야 합니다. 요컨대 뛰어난 자가 합격되게 하고, 시취한 후에 성적이 우수한 자는 우림위에 제수하고, 그 나머지는 양인으로 삼으면 알맞을 듯합니다. 또 그 주인의 인물을 불문하고 으레 관직에 제주하면 벼슬길이 혼란하여져서, 반드시 시행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날 것이니, 해조(該曹: 해당 부처)로 하여금 규칙을 세밀하게 제정하여 벼슬에 제수하거나, 대가를 지불하거나, 또는 다른 노복으로 대체(代替)해 주게 하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대략은 이와 같고 그간의 절목에 대하여는 유사가 적중하게 마련해야 할 것이니, 특별히 상의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여러 날을 생각해 보았는데, 오늘날 무인을 양성하여 정병을 얻는 것은 이보다 더 좋은 방책이 없는 것 같았다. 이러한 제도가 한 번 세워지면 온 나라의 남정 노예들은 자연히 활을 쏘는 무사가 될 것이니, 국가에서 재물을 소비하며 권장하는 노고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수십 년 동안 오랜 세월을 거치게 되면 그 이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요, 또 어떤 일에도 방해되거나 손상되는 것도 없을 것이며, 따라서 명분에 구애되는 일도 없을 것이니, 동국 만세의 복리로서 우자일득(愚者一得)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에서는 양인과 천인의 사이를 막중한 강상(綱常)처럼 생각하는데 매우 무리한 일이다. 지금 이 규칙은 그 주인으로 하여금 기쁘게 할 수 있어야만 사람마다 각자가 서로 권장할 것이다.

대가를 지불하거나 대체해 주는 것에 대해서도 내가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와 같이 하면, 계속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벼슬을 제수하는 것에 혼란이 일어날 것을 나도 이미 염려했는데 오직 이 조항이 약간 방해될 점은 있으나 잘 참작하면 좋은 방도가 없지 않을 것이다. 무릇 모든 일은 상량하여 시행하는 데 달려 있으니 규칙을 세워 시작한 후에 다시 상의하여 차차 마련함으로써 영구한 법으로 삼으면 될 것이다. 어제 본사에서 유성룡(柳成龍)의 장계에 의하여 군사를 뽑아 훈련하는 사목을 올렸는데, 더할 수 없이 잘 된 것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외방의 각 고을에서 누가 주장하여 하겠는가. 그러므로 속담에, 관가의 돼지가 배 앓는 격이라는 풍자가 있다. 전에 만들어진 사목(事目)도 좋지 않은 것은 아니나, 결국 겉치레에 불과하여 폐를 끼치고 속전(贖錢)을 받아낼 자료가 되었으니, 어찌 효과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이 규칙은 그와는 다르니, 대체로 각자 각심 면려하여 교화(敎化)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하였다. --선조 1593/6/14

備邊司回啓曰: “我國士族之家臧獲, 以千百數, 而官兵則日就削弱。 此雖國俗流傳之舊, 難可卒變, 然簽名操鍊, 不可少緩。 公私賤設科, 如三醫司雜科之例, 與選者, 卽許爲良人, 屬羽林衛, 出於救時之擧, 上敎果爲允當。 但羽林, 係是禁旅, 賤隷之得此者, 必有大段軍功, 然後方可, 而若參榜卽授, 則後日有功, 亦難爲賞。 且其規矩不重, 則必有濫竊雜冗之弊, 今宜重規矩, 要令拔萃者得參, 而試取之後, 居高等者除羽林, 其餘從良, 則似乎適中。 且其主不問人器之當否, 而例爲除官, 則仕路溷濁, 必有難行之患。 令該曹詳定規式, 或除官、或給價、或給代, 似或無妨。 大略如此。 其間節目, 則在有司磨鍊之得中, 使之另加商確施行。” 上曰: “予累日思之。 今日鍊武, 得精兵之策, 竊以爲毋出於此者。 此規一立, 一國男丁之隷, 自然皆化爲控(絃)〔弦〕之士, 而國無費財勤勸之勞。 延至數十年之久, 則其益有不可盡言, 而又無妨礙傷損, 害於名分之事, 東國萬世之益也。 可謂愚者之一得。 我國以良賤之間, 有若綱常之重, 極爲無理, 而今之此規, 必使其主, 有所喜悅, 然後人各自相勉勵矣。 給價、給代, 予非不慮, 而如此則恐或難繼。 除職溷濁, 予已慮之, 唯此條稍妨, 不無斟酌可處之方。 大槪在於商確施行, 立規草創之後, 更可商盡磨鍊, 以爲永久之法。 昨日, 本司抄兵訓鍊事目, 因柳成龍之啓, 可謂盡善, 非不至矣。 然外方各官, 其誰尸之? 故諺有官猪腹痛之譏。 自前事目, 非不至矣, 而終不過爲文具, 貽弊徵贖之資, 安能有效乎? 此規則異於是, 蓋各自刻勵興化故也。”

유성룡이 아뢰기를,

“공천(公賤)·사천(私賤)을 막론하고 모두 군사로 편입시켜야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물러간 다음 그 주인이 찾아간다면 훈련도감(訓鍊都監)의 호령도 시행되지 않을 것이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적이 물러간 뒤를 기다릴 것도 없이 지금도 그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미 노주(奴主)의 분의(分義)가 있으니 그 상전(上典)이 잘 조처하여야 할 것이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어찌 사람마다 좋게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처첩(妻妾)까지도 항오(行伍)에 편입해야 할 때입니다. 국초(國初)에 김종서(金宗瑞)는 대간으로 있다가 하향한 사람까지도 군역(軍役)을 정하고자 했다 합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감히 노주(奴主)를 따지겠습니까.”하였다. --선조실록 1594/2/27--

成龍曰: “勿論公賤私賤, 盡括爲兵, 然後可爲也。” 上曰: “賊退之後, 厥主能推, 訓鍊都監號令, 亦恐不能行也。” 成龍曰: “不待賊退之後, 今亦如是矣。” 上曰: “旣有奴主之分, 其上典好爲處置。” 成龍曰: “豈可每人而悅之乎? 此乃妻妾編於行伍之時也。 國初金宗瑞, 以臺諫下鄕, 而尙欲定軍役云。 此何等時, 而敢言奴主乎?”

이이(李珥)가 아뢰기를,

“세도(世道)가 쇠미해져서 수많은 사자(士子)들이 오직 과거만이 발신(發身)하는 길인 줄 알고 있습니다만, 저 일등 가는 인물들은 필시 이 과거를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자는 출신하지 못한 자를 대간(臺諫)으로 삼으면 선량하지 않은 자까지 뒤섞여 진출할 것이라고 의심합니다마는, 만약 공론이 크게 행해진다면 필시 올바른 사람이 이에 뽑힐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 문사(文士) 역시 선량하지 않은 자가 요직을 차지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선조수정실록 1573/9/1

珥曰: “豈至於太過乎? 世衰道微, 紛紛士子, 只知科擧爲發身之路, 彼第一等人物, 必不屑屑於此也。 或疑未出身者爲臺官, 則不善者混進, 若公論大行, 則此等必選其人, 不然則文士亦多有不善者居要地矣。” 上曰: “此言是也。” 珥曰: “今日之務, 莫急於恢張公道, 而必須自上無一毫私意然後, 使人感發矣。 近日臺諫所啓, 若涉宮禁、內需等事, 殿下必牢拒, 群下疑殿下之有私, 安所取則乎?”

전쟁의 최일선에서 고군분투하던 이순신 장군 혼자 힘으로 2만 명의 군사를 당시로서 세계 최고 강병으로 양성하고 있을 때, 임금 이하 조선 전체가 단 1만 명의 정예병도 키우지 못한 것은 바로 율곡과 서애가 제안하고 일부 실시한 조세제도와 군역제를 제도화할 힘과 세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두루 살펴야 비로소 이순신 장군이 군사만이 아니라 조세제도와 군역제와 인재발탁에서 얼마나 위대한 일을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눈물이 절로 흐르도록 실천(實踐)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풍신수길과 누르하치를 이순신 장군의 앞뒤에서 나란히 살펴보는 것은 그들을 살펴보아야만 일본과 조선과 명(明)이 처한 당시 상황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왜 조선이나 명나라의 입장에서 보아 그렇게 터무니없이 강했고, 이순신 장군이 성취한 일이 얼마나 그동안 불가사의하게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이 가신 지 400년이 넘도록 그를 그저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갈 수 없는 신장(神將)으로 시렁 위에 얹어놓고 감탄만 하거나 빌기나 하고 일본을 욕하기만 할 뿐, 따라 배워서 한국을 일본과 중국을 능가하는 나라로 만드는 것은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그나마 박정희 시대는 달랐다. 제대로 연구하고 구체적으로 따라 배우지는 못했지만, 이 충무공의 정신은 널리 알려졌다. 1967년 이순신 장군과 다산 정약용을 일개 봉건주의자로 폄하한 김일성과는 정반대로 박정희는 이순신 장군의 충성과 다산 정약용의 실용을 국가 차원에서 크게 알리고 선양했다.

어찌된 셈인지, 박정희 사후 이순신 장군은 독재자가 정통성을 호도하기 위해 신격화된 인물로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퍼지면서 원균 명장설이 나오는가 하면 현충사는 무장간첩에게 입이 찢겨 죽은 이승복 어린이의 기념관처럼 쓸쓸해지기 시작했다. 정약용은 오히려 박정희의 ‘국민’ 대신 김일성의 ‘인민’과 유사한 ‘민중’이란 말을 선택한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슈퍼스타로 떠올랐다. 정약용의 실학은 실리주의자 박정희에게 특정한 계층 없이 모든 국민에게 널리 이익을 가져다 주는 근대화(여기엔 산업화만이 아니라 민주화도 포함됨)의 한 뿌리로 자리매김했지만, 한국의 민주화 ‘올인’ 명분주의자들에게는 정약용의 ‘애민愛民’이 노동자 농민에게만 빛과 소금이 되는 사회주의의 원조로 둔갑하게 이르렀다.

그들에게 이순신 장군의 충성은 국가와 국민 차원에서 안보와 경제를 함께 추구하는 것이어서 영 거북했지만, 다산 정약용의 애민(실학이 아니라)은 국민의 70%가 극빈층에서 중산층으로 신분상승함으로써 현실적으로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된 ‘노동자 농민 착취’라는 허구에 악용할 소지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종도 함부로 다루지 않았고 졸병의 죽음도 애가 타도록 안타까워 했던 이순신 장군이었건만, 박정희를 일언지하에 천하의 독재자로 몰고 그의 성취를 민중 착취의 모래성으로 왜곡하고 악선전하기 위해, 엉뚱하게 조선시대의 절대다수 반(反)개혁파와 마찬가지 논리로 원균을 제멋대로 높이고 이순신 장군을 역사가 아닌 신화로 격하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풍신수길의 왜(倭)와 누르하치의 여진(女眞)은 조선과 명나라가 경멸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이 조선에겐 한 하늘을 두 머리에 일 수 없는 원수였지만, 지배층이 큰소리는 혼자 도맡아 치다가 멀리서 총소리만 들려도 간이 벼룩의 간만해져서 다투어 도망가는 그런 썩은 나라가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과 명나라가 이 당시는 야만과 위선과 독선의 나라였다. 일본과 후금(後金: 淸)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연간에 국가 지배층이 우리나라의 신라시대처럼 자랑스럽게 전쟁의 최일선에 섰고, 조세 제도가 국가와 국민에게는 함께 유리하고 탐관오리에게는 지극히 불리했다. 최고의 인재도 줄줄이 발탁되었다.

풍신수길이 전국의 토지를 직접 조사하기 시작하여 완료되기까지는 약 20년이 걸렸는데, 그로써 파악한 석고(石高)는 1850만 석이었다. 1만 석 당 250명의 군사는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었으니까, 약 45만 대군이 언제든지 보무도 당당히 철포와 창, 칼과 방패를 들고 국가의 부름에 응할 수 있었다. 조선을 침략한 16만 대군 외에 그들은 30만의 예비전력이 있었다. 조총 한 자루 없이 죽창 한 자루씩만 깎아 들어도 능히 조선을 멸망시킬 수 있는 부(富)였고 전력(戰力)이었다. 풍신수길의 직할지만 2백만 석이었다. 5만의 친위군이 있었다는 말이다. 만약 선조가 5만의 친위대가 있었다고 해 보자. 그렇게 무력했을까. 5만은커녕 그의 곁에는 단 10명의 친위대도 없었다. 눈물 콧물 부대만 있었을 따름이다.

건강은 그냥 오지 않는다. 골고루 알맞게 먹고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절제 있는 생활을 해야 찾아온다. 한 사람의 몸 안에만 무려 유익하거나 해로운 2조 마리의 세균이 살고 있는데, 하물며 인체의 바깥에는 얼마나 많은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가 있을까. 이들은 호시탐탐 인간을 노린다. 무절제한 향락에 빠진 자나 영양실조로 세상에 보이는 것이라곤 음식밖에 없고 생각나는 것도 음식밖에 없는 자들을 언제든지 노린다.

10미터만 움직여도 하인들이 어깨에 메고 가는 가마나 하인에게 경마[견마牽馬] 잡힌 노새를 타고 가고, 기름진 음식을 하루에 세 끼 네 끼 꼬박꼬박 챙겨먹고, 자식 주렁주렁 낳아 조상과 부모에게 효도한다며 이 여자 저 여자 다 건드는 자들이 조선의 양반들이었다. 반면에 노비와 양인(良人)은 하루 두 끼 먹기 힘들었고 반찬 두 가지 구경하기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전쟁이 터지자,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가 제 세상을 만났다. 전염병이 창궐했다. 그 대상은 주로 영양실조에 걸린 백성들이었다. 적의 조총과 칼에 쓰러진 자보다 전염병에 걸려 죽은 자들이 열 배는 되었다. 인구의 3분의 1이 희생된 것이다.

한 국가도 유기체로서 개인과 마찬가지로 허약해지면, 이웃 국가들이 절대 가만두지 않는다. 그들은 호시탐탐 인체를 노리는 박테리아와 세균에 비할 수 있다. 극소수의 영양과잉 귀족과 절대다수의 영양실조 무리로 조선은 사실상 먼저 본 자가 임자였다. 사실상 이순신 장군 덕분에 300년 평화를 공짜로 얻기는 했지만, 이에서 전혀 교훈을 얻지 못하고 새 왕조를 개창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대 개혁은 감히 시도도 못했다.

경장(更張)의 시대에 무언의 약속으로 개혁을 단행하지 않기 위한 입씨름이 사색당쟁이었다.

율곡과 서애가 개혁안을 모두 알려 주었고 충무공이 그들의 개혁안 못지않은 각종 시책을 장계로 조정에 알리면서 몸소 실천했지만, 임진왜란 후 국가 차원에서 실현된 개혁안은 하나도 없었다. 있더라도 껍데기뿐이었다. 그래서 조선 말기에 이르면 구중궁궐 깊은 곳에 사는 왕비가 외국의 일개 깡패에게 난자당하고, 이름 하나 거창한 황제라는 자가 외국공관에서 몸을 피신하여 국정을 돌볼 지경에 이르렀다. 근대 무기로 무장한 군대 1천 명이면 능히 2천만의 나라를 장악할 수 있었다. 문제는 동서남북에서 마른 침을 삼키며 노리는 외국이었다. 중국과 러시아와 영국과 일본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 중의 승자(勝者)가 조선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2009. 4. 12.)

Sunday, April 12, 2009

뇌무현이 아니라 제갈대중입니다

뇌무현이 대통령 시절, 마누라, 아들, 청와대 수하들을 총동원하여 미국달라 한국돈 가리지 않고 왕창 해처먹었다고 온 나라가 시끄럽다.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빼고 대한민국에서 대통령 자리에 앉아서 돈 안 해처먹은 정치꾼들이 어디 있었나? 전두환 노태우도 수천억씩 해처먹었다 하고, 김영삼, 개대중도 아들들 시켜서 큰 돈 작은 돈 가리지않고 많이들 해처먹었다. 이명박은? 이명박은 도곡동 BBK 명찰이 달렸었어도 청와대에 드러누어서 들어갔다. 대한민국 현 공직자 중에서 제일 돈많은 사람이 이명박이란다. 대통령만이 아니라 장관자리에 앉거나 금뱃지 단 사깃꾼들이, 임명되고 당선된 날부터 떨려나기 전까지 돈 긁어모으기에 정신들이 없다. 거의 예외가 없다.

뇌무현이 김정일을 사모하는 빨갱이라 죽일 놈이지, 돈좀 해처먹었다고 죽일 놈은 아니다. 그리고 뇌무현보다 더 쥑일 놈이 바로 개대중이다. 개대중은 돈도 더 해처먹었고 거의 죽게된 김정일을 응급수혈로 살려놓고, 돈으로 노벨평화상을 사취한 역적들 중 역적 사깃꾼이 바로 개대중이다. 뇌무현 잡아가두기 전에 개대중부터 잡아죽여야 한다. 그래야 살인마 개정일의 적화통일을 막을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뇌무현 잡아가두고 개대중 잡아죽이면 우리나라에 실낱같은 희망은 있다. 뇌무현과 개대중을 뇌물죄로 족치지 말고, 利敵 반역죄로 족쳐야 한다. 반국가 반민족 반인류 반인권죄로 족쳐야 한다. 김정일을 핵으로 몰아대지 말고, 인종학살범으로 몰아세워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개정일이 미사일인지 인공위성인지 쏘아올리니까, 외국에 나가있던 오바마가 “Words should mean something, 말에는 행동이 따라야 한다”고 일갈했었다. 듣던 중 제일 그럴 듯한 말이라, 또 한 번 속자고 귀가 솔깃 했었다. 아무렴, 쏘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쏘아올렸으면 응분의 조치가 있어야지! 그러나 1주도 지나지 않아서 속내가 다 드러났다. “Words don’t mean anything! 주둥아리로만 떠들자는 속셈”이 곧 드러났다. 유엔 대북제재결의도 신통치 않은데, 안보리 의장성명으로 미사일 핵깡패 북한을 징계하자고? 정말 가소롭다. 유엔 United Nations은 오래 전부터 유엔이 아니다. United Rogues, United Idiots, United Crooks가 바로 유엔이다. 클로디아 로제트 여사의 칼같은 논설을 읽어보면 저렇게 썩은 유엔은 해체해도 벌써 해체했어야 한다. 존 맥케인 대선후보는 유엔 대신에 Alliance of Democracy를 만들자고 주장했었다. 존 볼턴 전 유엔대사는, 뉴욕에 있는 39층짜리 유엔본부 건물에서 10개층을 없애도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라 했다. 그런 유엔에 달려가서 김정일을 몰아세우겠다는 것은 6자회담보다 더 한심한 짓거리이다. 마피아들에게 달려가서 마피아들의 Godfather를 잡아넣자고 졸라대는 꼴이다.

안팎으로 절망밖에 없다. 개대중 뇌무현이 10년을 설쳤어도, 대한민국 아직 끄떡도 없지 않은가? 왜 그렇게 비관적이고 절망뿐인가? 한국이나 미국이나 좌파 반역 세상이라 희망이 절벽인 것이다. 김영삼이 “부자들이 괴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더니, 오바마도 “부자들에게 뜯어서 빈자들을 살리겠다”고 설친다. 개대중 뇌무현이 김정일을 좇아가면서 대한민국 정통성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더니, 오바마도 유럽에 가서 “미국 부시의 오만방자”에 대하여 사과하기 바쁘다. “우리가 죽일 놈이고 우리가 잘못했시요!” 미국의 관타나모 감옥이나 아부 그레이브 감옥만 큰 잘못 인권유린이고, 뙈놈 호금도와 북괴 김정일의 정치범학살 인종학살은 알지도 못한다.

우리나라에서 돈 해처먹지 않고, 뇌무현이 현직 대통령일 때, 법의 칼을 드리대었던 정치가가 있기는 있다. 김문수 경기도지사이다. 김문수 국회의원이 뇌무현 이기명 강금원 일당의 비리를 국회에서 폭로하자, 뇌무현이는 조선-동아-중앙일보와 현직 국회의원 김문수을 민사 형사로 소송했었다. 돈 한 푼 없는 김문수 의원에게 무고죄로10억을 내놓으라고 얼어대었었다. 뇌무현 일당은 법정에서 김문수 의원에게 몽땅 패소했다. 그리고도 뇌무현은 “하기 싫은 대통령”을 5년 滿期하고 봉하궁전으로 내려갔다. 김문수 의원은, “거짓으로 진실을 가릴 수는 없다”라고 한 마디 하고, 지금은 경기도 살림으로 24/7 바쁘시다. 필자는, 당치도 않게 링컨을 팔아먹은 뇌무현을 이가 갈리게 증오하는데, 김문수 지사는 뇌무현 따위 증오할 시간도 없다. 일일 택시 운전기사로 경기도 곳곳을 주말마다 싸돌아 다니시느라고, 뇌무현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시다.

올 해가 링컨 대통령의 탄생 200주년으로 미 전국에서 매일 기념행사가 계속 된다. 기념행사에 제일 앞장 섰던 오바마는 링컨이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링컨은 휘그당 공화당 보수였는데, 오바마는 민주당 극좌파 리버럴이다. 오바마가 끝나면 미국이 다시 정통보수로 돌아올까? 다시 링컨같은 지도자가 나타날까? 지금 돌아가는 꼴로 보아서는 희망이 없다. 미국은 언젠가 중국과 결판을 내야 한다. 미국이 지금 개정일의 인권문제를 앞장 세워 중국과 맞붙어야 하는데, 그런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 초록이 동색인 중국은 절대로 김정일을 잡아죽이지 않는다. 김정일이 붕괴되면 중국으로 피난민이 쏟아져 들어온다고? 이런 거짓말을 퍼뜨리고 떠드는 머저리들이 서울과 워싱턴에서 북한통 중국통이라고 마구 떠든다.

희망도 없고 갈 길도 보이지 않지만 북한인권은 절대이다. 우리나라를 살릴 수 있는 오로지 한 길이 북한인권이다. 그 길만 보고 죽을 때까지 달려가야 한다. 남이 좇아오지 않으면 혼자서라도 달려가야 한다. 며칠 전 영화 Man of La Mancha 라 만차를 다시 보면서 혼자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

도저히 가망없는 꿈을 좇노라
도저히 이길 수없는 적과 싸우노라
도저히 감당할 수없는 설음을 내 가슴에 품었노라
勇者도 가지 않겠다는 곳으로 달리노라...

도저히 고칠 수없는 불의를 고치겠노라
저 멀리있는 순수와 고결을 사랑하노라
육신이 지치고 아파도 다시 일어서노라
저 닿지 못할 하늘의 별을 향하여!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니-

아무리 희망이 절벽이라도
아무리 멀어서 보이지 않더라도
나는 그 별을 향하여 달리겠노라--
회의하지도 않을 것이며, 쉬지도 않겠노라
내 몸이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나는 하늘의 정의를 향하여
끝까지 달리고 싸우겠노라

나는 아노라
이 영광스러운 대의를 위하여
오로지 내가 옳은 일을 한다면
내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내 가슴은 평화롭고 평안할 것을

세상이 조롱하고 상처투성이라도
이 한 사람 때문에 세상이 더 나아진다면
마지막으로 젖먹던 힘까지 찾아내어
바랄 수 없는 저 별들을 향하여 달리리라.

2009년 4월 12일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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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April 10, 2009

망조가 든 김씨왕조(에버슈타트)

Kim's Crumbling Dynasty
Kim Jong Il's search for a successor could turn out to be bigger news than this weekend's missile launch

망조가 든 김씨왕조 - 김정일의 후계가 누구인가가 지난 주말 미사일 발사보다 더 중요할 것이다
월스트리트 저널 아시아 판 4월 6일자 논설 /니콜라스 에버슈타트 (남신우 번역)

지난 일요일, 북한이 새로운 다단계 탄도 로케트를 실험발사했는데, 국제사회는 이 미사일이 어디로 얼마나 날아갔는 지에만 모두의 관심이 쏠렸었다. 그러나 최근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중 우리가 진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북한의 전체정권과 김씨왕조가 형편없이 취약해진 것 같다는 소식이다.

북한이 이번 미사일을 날린 것은 대외적 목적도 분명히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북한의 국내 정치적 목적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었다. 김정일은 이번 미사일 발사를 북한의 최고인민회의가 열리기로 예정된 목요일 직전으로 정확히 시간까지 맞추어 쏘아올렸다. 미사일 발사에 이르기 까지 북한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중대한 일들은 북한이 아무리 외부로부터 감추려해도 이제는 비밀이 아니다.

우리가 제일 주목해야 할 일은 김정일의 건강이 정말로 많이 나빠진 것이다. 김정일은 작년 늦여름에 공개석상에서 장기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그는 전에도 여러 번 이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신파조 연극에 나오는 배우처럼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곤 했었다 (김정일이 영화광이란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나타난 김정일은, 북한 미디어들이 아무리 조작을 하고 감추려 해도,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나타났다.

북한의 공영매체가, 언제 찍은 것인지 모르지만, 지난 달 말에 발표한 김정일의 사진들을 보면, 북한의 지도자 동무가 꼭 요덕 정치범수용소에서 몇 달 사시다가 나온 것 같은 모습이다. 김일성 대학 수영장에서 찍었다는 사진을 보니까, 김정일 동지의 똥배가 쏙 들어갔고, 몇년 전 김정일의 사진에 비하면 꼭 죽기 직전의 시체같은 몰골이 되었다. 김정일이 좋아하는 모택동 바지저고리도 잘 맞지않고 바지저고리 속이 거의 텅 빈 것 같아 보였다. 얼굴도 얼마나 안 되셨는지, 피부가 곧 떨어지기라도 할 모습이었다. 얼굴을 감추려고 쓴 거대한 검은 색안경을 낀 것이 마치 퇴색한 헐리우드 배우같아 보였고, 수영장 손잡이를 잡고 어기적거리는 모습이 정말 가관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이것은 “위대한 장군님”의 사진은 아닌데, 선전선동의 귀재들인 북한매체가 왜 장군님의 이런 몰골을 발표했을까? 북한매체들에게 지금 제일 중요한 사업이, 장군님께서 아직 살아계시다는 걸 알리는 일임이 분명한 모양인데, 친애하는 지도자 동무께서도 이 일이 급하긴 많이 급한 일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AFP 통신에 의하면, 북한 미디어들은 장군님께서 같은 시기에 작년보다 3배나 더 자주 소위 “현지지도”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한다 (작년에는 12번이었는데 금년에는 40번이었다 함).

장군님께서는 당신의 건강만이 아니라 후계자 선택에도 걱정이 많으신 모양인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사회주의 국가 북한에서 아직 확실한 후계가 선정되지 않은 것이다. 금년 초,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은 만 67세가 되었다. 김정일의 애비 김일성이 그 나이가 되었을 땐 (1979년) 그의 아들은 벌써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어 10년 가깝게 전권을 휘둘렀었다. 김정일은 제 아비 나이가 되었는데도, 제 아비의 건강을 물려받기는 커녕 자기가 갖고있는 절대권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세 아들 중 어느 아들에게 물려줄 것인가도 정하지 못한 것 같아보인다.

제일 나이가 어린 아들 김정운을 살펴보자. 남한의 정보기관에 의하면 20살 갖넘은 김정운이 지난 3월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선거에서 후보로 등록되었다고 전했다. 이로서 김정운이 지난 선거(?)에서 제 아비로부터 공식적으로 왕관을 전수 받으리라고 예상들을 했었는데, 북한매체에서 지난 달 발표한 최고인민회의 687명 대의원 명단 중에 김정운이란 이름이 빠져버렸다. 선거가 아니고 김정일이 지명하는 대의원들 중에서 김정일의 아들이 빠져버린 것이다. 김정운이 아예 후보도 아니었든지, 아니면 선거에서 졌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번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정일의 공식적 후계가 빠져버린 것이다.

10대 소년시절 스위스에서 교육을 받은 둘째아들 김정철은 에릭 클랩턴이란 영국의 록가수를 좋아한다는데, 수년 전 김정철을 왕자로 옹립하려던 계획도 무산되었던 것 같다. 2005년 말부터 2006년 초까지, 김정철의 사진이 평양 건물 사무실에 걸렸었고, 북한관리들이 김정철의 얼굴이 들은 옷핀을 달고 다녔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루 갑자기 김정철의 사진과 옷핀이 사라졌고, 무슨 연유에선지 김정철의 후계자 지명은 흐지부지 되었다.

그러면 장남 김정남이 남았는데, 뚱뚱하고 머리를 바짝 깎아 정말 못생긴 김정남은 거의 대부분 북한 밖에서 생활하고 있다. 소문에 의하면, 지난 2001년 김정남이 가짜 도미니카 여권으로 일본 디즈니월드를 방문하려 입국을 시도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강제추방 당했을 때, 김씨왕가에서는 김정남을 치지도외했다고 한다. 지난 주 김정남은 북경국제공항에서 일본기자들에게 북한의 로케트 발사에 관한 의견을 밝혔다. 김정남은 “북한의 로케트 발사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자위권을 위한 정당한 반응’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한다.

김정일의 아들 김정남이 이런 발언을 했다는 사실이 북한 내에 알려졌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북한정권의 공식 신조는 일본이야말로 제일 악랄한 역사적 주적이며 미국보다도 더 흉악하고 끈질긴 원쑤들이라는데 김정남이 그런 망발을 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북한의 선전매체들은 이번 로케트 발사를 장군님 “선군정치”의 최고 로작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김정남이 제 아비의 력작을 이렇게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니, 김정남이 제 아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불문가지라 할 수 있다. 김정일 왕조 안에서 과거 이런 불협화음이 일어난 적도 없고 새어나간 적도 없었다. 앞으로 북한정권에 닥아올 불협 불화의 전주곡일 지도 모른다.

철저하게 닫쳐있던 일인수령 절대독재 정권에 전에는 보지 못했던 균열이 갑자기 생긴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북한정권의 미래에 지난 번 미사일 발사보다 더 중요한 사태가 전개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에버슈타트 씨는 워싱턴 소재 미기업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위기와 파탄 속의 북한경제”란 저서가 있음.

영어원문은 다음 사이트를 클릭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http://online.wsj.com/article/SB123904531956994033.html

2009년 4월 10일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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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April 05, 2009

충무공 이순신 장군 평전(13)-최성재

풍신수길, 이순신, 누르하치(3)

이순신 장군은 직전신장과 풍신수길과 덕천가강의 장점을 한 몸에 갖고 있었다.
최성재


집단의 국가요, 조직의 사회요, 화(和)의 민족인 일본은 예로부터 영웅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 독불장군은 용납하지 않는다. 자연히 일본에는 영웅이 별로 없다. 그래서 수상이 1년, 2년 만에 바뀌어도 일본은 잘도 굴러간다. 국가 지도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국가 지도자가 누구냐에 따라, 새로운 태양이 뜨기도 하고 졸지에 거대한 암흑이 강림하기도 하는 한국과는 사뭇 다르다. 한민족에게 국가지도자가 미치는 영향은 박정희와 김일성만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인공위성이 전하는 한반도의 밤 정경은 대낮처럼 밝은 휴전선 이남과 칠흑처럼 어두운 휴전선 이북의 선명한 대조로 한 눈에 온갖 거짓과 왜곡을 드러내고 바로잡는다.

한국과 북한의 차이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라고 중얼거리고 싶겠지만, 공산국가에서도 아니 본 받는 척 경제정책에서 속속들이 박정희를 본받은 등소평의 중국은 암흑을 몰아내는 새로운 태양을 맞이했다. 등소평의 사후에도 그의 정책 내지 박정희의 경제정책을 계속 유지한 중국은 이제 당당히 세계 2대 강국으로 올라섰다. 제2차세계대전 후에 탄생한 자본주의 국가는 이 지구상에 100개가 넘지만, 인구 3천만 이상의 거대 국가(인구 5천만의 한국을 약소국이니, 강소국이니 하는 분류는 애초에 잘못된 것) 중에서 세계 최하위의 개도국에서 세계 최상위의 중진국으로 발돋움한 나라는, 불과 18년 사이에 천지개벽하듯 비상한 나라는 영웅 박정희가 국가지도자로 노심초사하던 대한민국밖에 없다. 그만큼 한민족은 국가지도자의 역량에 크게 의존한다. 말 잘하는 자들이 저마다 박정희 정도는 아무나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면서, 박정희를 욕함으로써 세를 모으고 박정희를 비판함으로써 표를 얻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푸른 기와집으로 입성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한국을 1인당 GDP의 상대적 순위(경제)나 법치(法治) 지수(정치)에서 한 단계도 끌어올린 자가 없는 것은 그 동안의 국가지도자가 하나같이 말만 번드레한 범용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입에 가장 자주 오르내리는 영웅은 직전신장과 풍신수길과 덕천가강이다. 이들은 나란히 일본의 3대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중 직전과 덕천은 크기는 작아도 그 아버지가 입법 사법 행정의 권한을 한 손에 쥔 영주였지만, 풍신은 원래 성(姓)도 없던 자였다. 신분이 높아질 때마다 성을 짓기도 하고 바꾸기도 했다. 이름도 계속 바꿨다. 그의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와아' 하고 고함이나 지르고 '예예' 하며 심부름이나 하던 자였고, 어머니는 그런 자를 남편으로 맞아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다가 그나마 일찍 여의고 살 길이 막막하여 손바닥만한 땅을 가진 자에게 개가한 여자였다. 이처럼 수길은 밑바닥의 밑바닥 출신이었다. 새 남편의 눈치가 보여 입을 덜려고 그의 어머니는 수길을 절에 맡긴 모양이다. 거기서 그가 기껏 한 일은 '식사시간입니다. 식사하세요!'라고 외치는 일(이를 갈식喝食이라고 함)이었다. 작고 못생긴 원숭이는 누구에게나 멸시를 당했지만, 일본 3대 음성답게 목소리 하나는 대단했던 모양이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었던 일본의 전국시대는 현대사회와 비슷했다. 다만, 오늘날은 경제가 당시의 군사를 대신한다.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해도 양반 가문이 아니면, 그저 소나 말처럼 일하면서 경멸과 천대 속에서 살아야만 했던 당시의 조선사회는 일본사회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조선은 중기 무렵부터 양반도 동반(문반)과 서반(무반)은 하늘과 땅처럼 달라졌다. 군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자도 문반이라는 이유만으로 왕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역전의 장군을 수하로 거느렸다.

이순신 장군 위에는 타락한 암행어사가 있었고, 암행어사 위에는 무능한 관찰사가 있었고, 관찰사 위에는 무식한 순찰사가 있었고, 순찰사 위에는 한심한 도체찰사가 있었다. 조선에서는 철저한 신분과 혈통의 제약 속에 개인이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 동일한 사상과 동일한 책으로 하늘이 노랗도록 공부하여 기껏 임금에게 아첨하거나, 정책을 두고 싸우는 게 아니라 자신은 절대 지키지 않는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어 정적의 도덕적 흠결을 찾아내어 물고 뜯거나, 이리저리 뇌물을 바치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전국시대의 일본은 조선과 정반대였다.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은 하극상이 정상이었다. 힘이 없거나 머리가 모자라는 자는 언제든지 쫓겨나거나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다. 기름장사도 수백만 석 영주가 될 수 있었고, 천황도 돈이 없어 10년이 넘도록 즉위식도 올리지 못했다. 수길이 일개 종의 신분에서 일어나 일본을 통일하고 제1차대동아공영권을 꿈꾸게 이른 것은 이런 역동적 환경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일본은 미국과 정반대로 동부개척의 역사다. 미국은 대서양을 건너 동부에 정착한 유럽인이 토착민을 죽이거나 흡수하면서 서부로 뻗어갔지만, 일본은 대한해협을 건너간 삼한 사람들이 토착민들을 죽이거나 흡수하면서 동부로 뻗어갔다. 개척의 시대엔 농민이 곧 무사다. 내 땅과 내 재산과 내 가족을 내가 지키기 위해 농민도 무장한다. 일본에서는 승려도 그러했다. 새로 개척한 땅을 중앙정부에서 강제로 앗아가서 중앙의 귀족에게 나눠 주거나 조세를 거두려고 하면, 농민들은 반발하게 마련이다. 이런 과정에서 전란이 시작된다. 점차 전문 무사 계급이 등장한다. 그렇게 농민과 무사가 분업하면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민과 승려는 스스로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풀지 않는다. 싸우면서 일하고 싸우면서 참선한다.

1467년 응인의 난이 시작될 즈음에는 더 이상 개척할 땅은 없다. 북해도(北海道 홋카이도) 이서(以西)는 땅 끝(육오陸奧 무쓰)까지 개간된다. 대신 생산력이 급격히 증가한다. 이 때부터 옛날에 중앙에서 파견되어 영주 노릇하던 수호대명(守護大名)은 거의 몰락하고 전국대명(戰國大名)들이 다투어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는데, 이들은 전문무사 집단을 양성하고 무기를 개발하고 난공불락의 성곽을 쌓고 대규모 관개시설을 갖추고 상업을 장려하고 장인을 우대한다.

풍신수길이 작은 눈을 반짝이며 서서히 신분상승할 무렵에는 유혈이 낭자한 전국시대도 이제 나름대로 틀이 잡힌다. 200명, 300명에 이르던 대명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해서 50명, 60명의 유력한 대명으로 압축된다. 통일의 기운이 서서히 무르익어 간다. 새로운 질서도 서서히 윤곽을 드러낸다. 그 중의 하나가 저 유명한 훤화양성패(喧譁兩成敗 겐카료세이바이)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개인 복수 금지' 법률이다. '개인적으로 싸우는 자는 이유 불문하고 둘 다 죽인다'는 법률조항이다. 싸움은 오로지 이웃 나라와의 싸움 곧 공적인 전쟁으로 한한다. 전국대명들은 다투어 이런 법률조항을 제정한다. 이로써 유력한 전국대명이 다스리는 영토 내에서는 평화가 찾아온다. 꽃샘 추위는 남아 있지만, 봄은 봄이다.

1560년은 전국시대에 한 획을 그은 해다. 직전신장이 10배가 넘는 군대를 맞아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무모한 전쟁 끝에 불과 2천의 군사로 천황이 머물던 일본의 중심으로 진출하려던 금천의원(今川義元 이마가와 요시모토)을 물리친 것이다. 눈앞에 다가온, 조선으로 치면 한양 입성의 무지개 꿈을 그리며 좁은 골짜기(통협간桶狹間 오케하지마)에서 더위에 허덕이던 금천은 갑자기 몰아친 천둥번개와 함께 달려온 직전에게 목을 바친다. 이 때 직전의 포상이 새 시대를 알린다. 적장의 목을 딴 자에게는 아주 작은 상을 주고 적장과 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자에게는 상상을 초월한 어마어마한 상을 내린다. 녹봉에 가장 인색하기로 유명하여 큰 전쟁에서 이긴 부하 장수에게 상이라며 식탁에서 귤 한 개를 집어주기도 했던 직전은 그를 무려 3천 석의 영주로 봉한다. 예전 같으면 전공에 기록도 않던 일에 대해서 말이다.

이것이 바로 당시로서는 전혀 뜻밖에도 중소 대명에 지나지 않던 오늘날로 말하면 중소기업 사장에 지나지 않던 직전신장과 덕천가강과 보따리 장사에 지나지 않던 풍신수길이 거대한 대기업들을 모조리 물리치고 사상 초유의 군벌을 일군 이유다. 5척 단구(145㎝로 추정)로 체구도 유난히 작고 너무 못 생기고 도통 위엄도 없어서 칼이나 창을 들고 싸우면, 보잘것없는 졸병 하나도 이기지 못할 풍신수길이 대장군이 된 것은 바로 이런 탁월한 장군의 밑에 들어갔기 때문에 가능했다. 졸병 자리라도 하나 얻을까 하여, 머나먼 준하(駿河 스루가)의 금천에게 갔다가 금천은 멀리서 쳐다보지도 못하고 광대 노릇이나 하다가 고향 미장(尾張 오와리)으로 돌아와 당시로서는 영 평판이 안 좋던 직전에게 간 이유도 바로 인재를 알아보는 자가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직전과 풍신과 덕천은 한미한 출신에 지나지 않았지만, 아니 오히려 그 때문에 시대의 흐름을 누구보다 잘 꿰뚫어 보았다. 그들은 기득권이 작거나 아예 없었기 때문에 시대의 거대한 흐름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전의 방식으로는 천하통일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과감히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던 것이다.

이들 세 명을 비교하여 흔히 새의 우화를 든다.

직전신장은 새가 울지 않으면 죽여 버리고,
풍신수길을 새가 울지 않으면 울게 만들고,
덕천가강은 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린다.

여기서 새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고 우는 것은 능력 발휘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직전신장의 능력본위 인재발탁의 예를 잘 보여준다. 울지 않으면 곧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울면 곧 능력을 발휘하면 신분과 계층과 직업과 지역에 관계없이 바로 발탁한다는 것이다. 중국 최초의 통일대왕 진시황과 비슷하다. 진시황에게 그랬던 것처럼 직전신장에게 인재가 구름처럼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직전신장은 인물(人物) 중에서 人은 버리고 物만 보았다고 할 수 있다. 현대 과학경영의 첫 걸음도 바로 이러했다. 직전은 천하통일에 쓸모 있는 자는 누구든 환영했다. 인간도 물건과 똑같았다. 상품의 효용성이 문제였지, 상품의 철학이나 미학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게 철포(조총) 한 자루는 장수의 작전을 따르지 않고 공명심에 불타 올라 말을 타고 쏜살같이 홀로 적진으로 달려드는 천하제일 칼잡이보다 훨씬 유용했다. 항우 장사의 힘을 자랑하는 무모한 말 탄 기사보다 밀집대형을 이루고, 그가 개발한 긴 창을 들고 방패로 빈 틈 없이 몸을 가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적을 향해 다가가는 졸병들이 그에게는 훨씬 유용했다.

각종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는 상인도 직전신장에게는 무사 못지 않은 상품이었다. 그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성 아래에 거리를 만들어 주고 그들에게는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새로운 무기와 새로운 정보도 똑같이 중요했다. 식량을 제공하는 농민도 싸우는 병졸도 똑같이 중요했다. 모름지기 상품의 가치만 있으면 되었다. 이 점에서 비렁뱅이 천황도 마찬가지였고 파리 장군(쇼군)도 마차가지였다. 그들은 아무런 힘이 없었지만 천하통일의 명분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줄도 모르고 까불면, 은혜를 저버리고 반역을 도모하면 바로 제거해 버렸다(1573). 그렇게 하여 족리(足利 아시카가) 막부는 영원히 사라졌다. 천하제일 미인으로 소문난 여동생도 상품이었다. 유력한 전국대명에게 시집 보냈다.

전쟁과 경제와 정치에 두루 유용한 도로도 크게 닦고 모든 것의 토대인 농지도 빼앗거나 새로 만들었다. 재정의 뼈이자 전쟁의 피인 조세를 확보하기 위해 토지조사도 새로 했다. 그렇게 하여 숨은 토지를 대대적으로 찾아냈다. 문화의 유용성도 알아서 다도회도 열었고 연극도 장려했다. 무엇보다 그는 법률을 엄격히 적용했다. 도둑과 강도 따위는 발도 못 붙이게 했다.

직전신장에게는 큰 약점이 있었다. 인물에서 人은 아니 보고 物만 보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사람으로 인식하고 주군(主君)이 머리를 툭툭 치고 다들 보는 앞에서 망신을 주는 것을 대범하게 보아 넘기지 못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자존심 붕괴로 인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는 반란을 꿈꾸게 된다. 결국 천하포무(天下포武)를 눈앞에 두고 직전신장은 누구보다 중용했던 부하에게 암살 당한다(1582). 동생을 시집 보낸 것으로 안심하다가, 정략 결혼보다 묵은 인정과 현실 외교를 중시했던 매제에게 기습당하여 몸만 간신히 빠져나가는 위기도 겪은 적도 있었다.

풍신수길은 직전신장이 죽기 전까지 속마음을 한 번도 들키지 않았거나 그 때까지는 속마음이 아예 없었을 것이다. 그는 직전신장에게 人은 아니고 物만 보였다. 주군의 영광을 자신의 영광에 우선시켰다. 그러나 일생일대의 기회가 오자, 5년간 싸우던 전쟁에서 포커 페이스를 십분 활용하여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전광석화처럼 달려가 안심하고 있던 반란자를 물리치고 단숨에 패권을 휘어잡았다.

풍신수길은 우는 새만으로는 천하포무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울지 않는 새는 울게 만들어야 함을 알았다. 능력이 없는 자도 능력을 발휘하게 만들어야 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음을 알았다. 새는 어떻게 하면 노래할까.

첫째, 먹이를 주어야 한다.
둘째, 짝을 찾아 주어야 한다.
셋째, 눈에 보이지 않는 천라지망(天羅之網)으로 한데 모아야 한다.

먹이는 경제다. 돈이다. 보급이다. 무기다.
짝은 유혹이다. 미끼다. 정보다. 공작(工作)이다. 선전선동이다.
그물은 조직이다. 연합이다. 질서다. 정의다. 관용이다.

전쟁은 곧 경제요, 보급이요, 무기임을 풍신수길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배부르면 필부도 용기백배하지만, 사흘 굶으면 천하제일 사무라이도 절로 고꾸라진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조총 한 자루 들면 졸장부도 호랑이가 되지만, 맨 손으로는 천하제일 사무라이도 비루먹은 강아지보다 못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 모든 것을 그는 직전신장보다 더 잘 알았다. 압도적인 물량으로 상대를 주눅들게 만들어 항복할 때까지 에워싸고 상대의 식량을 고갈시키고 전쟁의지를 꺾어 싸우지 않고 이기거나 싸워도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이기는 것이 풍신수길의 대원칙이었다. 그러면 새로운 성(城)의 식량과 의복과 무기를 고스란히 차지할 수 있고 패자로부터 원성도 듣지 않게 된다. 두 번의 큰 전쟁에서는 무려 25만 명을 동원하고 30만 명을 동원했다. 그것은 숫제 소풍이었다. 축제였다. 버티면 과연 얼마나 버틸까.

난공불락의 성곽을 짓는 것도, 강물을 막아 새로운 강의 물줄기를 바꾸는 것도 풍신수길을 따라갈 자가 없었다. 그런 성곽 안에서는 어린애와 아낙네도 깔깔거리며 싸울 수 있고 그런 강의 물줄기로 물에 잠긴 성곽 안의 사람들은 물에 빠진 생쥐보다 초라해진다는 것을 풍신수길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순신 장군에 의해 보급이 차단되자, 풍신수길이 전군에게 명령하여 일본으로부터 보급이 가능한 남해안에 성곽을 쌓고 농성하게 만들자, 명나라 6만 군대도 헛심만 빼다가 대패하고 천하의 이순신 장군도 발을 동동 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을 상기해 보자. 이순신 장군처럼 풍신수길도 전쟁은 경제요, 보급이요, 무기임을 잘 알았던 것이다.

풍신수길은 떠돌이 장사 시절부터 경제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농사도 중요하지만 상업도 그 못지않게 중요함을 알았다. 그래서 직전신장의 자유도시 계(堺 사카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상업도시를 조성했다. 그것이 바로 대판(大阪 오사카)이다. 전국의 모든 상품이 거기로 모여들고 거기서 흩어졌다. 동경(東京 도쿄)이 덕천가강의 도시라면, 대판은 풍신수길의 도시다. 오늘날도 이 두 도시는 경쟁 의식이 엄청나다. 이 두 도시간의 야구 경기는 전쟁이다.

풍신수길은 1583년 천악(賤嶽 시즈가타케) 싸움에서 이김으로 직전신장이 암살된 지 불과 1년 만에 직전신장의 이전 세력을 완전히 자기 수중에 넣는다. 그 후 그는 대대적인 태합검지(太閤檢地)에 들어간다. 여기서 태합은 수길의 새 직함을 뜻하는 말로 관백(關白)보다 한 품계 위다. 검지는 토지조사다. 직전신장의 검지는 다른 전국대명의 검지처럼 자진 신고제라서 누락의 경우가 많았지만, 풍신수길의 검지는 직접조사여서 누락의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1591년 전국을 통일한 지 1년 만이자,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1년 전에 이번에는 전국적인 토지조사에 들어간다. 이로써 농민은 전국적으로 항구적인 경작권을 보장받고 국가의 재정은 튼실해질 대로 튼실해진다. 정치적으로는 그로써 풍신수길과 지방영주는 직전시장 시절 동맹관계에서 주종관계로 바뀐다. 이래저래 해외원정의 준비가 물샐틈없이 이뤄진다.

1588년 풍신수길은 농민으로부터 무기를 빼앗아 버린다. 반란의 싹을 차단하는 동시에 평화를 정착시킨다. 이것은 또한 '개인 복수 금지법'을 어길 수 있는 물적 토대를 영구히 앗아가 버려, 현대적 의미의 사법권을 국가가 독점하는 계기가 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 군인과 경찰만 무기를 휴대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병든 평화로 흐느적거리던 조선에서는 상식이었던 이런 조치가 400년간의 전란시대를 겪은 일본에서는 누구도 상상 못하던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일이었다. 전국시대를 끝내고 평화시대를 제도화한 것은 바로 이 두 가지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후에 덕천가강에 의해 그대로 계승된다.

직전신장도 정보의 중요성을 잘 알았지만, 풍신수길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풍신수길은 수동적인 정부 입수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정보를 만들고 퍼뜨렸다. 공작(工作)의 대가였다. 유언비어를 적군에 퍼뜨리는 풍신수길의 정보전에는 귀신도 놀라서 저들끼리 수군거리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원숭이는 적을 매수하는 데도 귀신이었다. 그 덕분에 직전신장은 어렵지 않게 막강한 대명들을 차례차례 굴복시킬 수 있었다. 이순신만 제거하면 조선은 식은 죽 먹기로 접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서 풍신수길이 간첩 요시라를 내세워 선조 이하 조선 조정을 농락한 것은 그가 무엇보다 애용하던 전술이었다. '개인 복수 금지법'에서 보듯이,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이 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그들은 둘 다 사형이었다. 더군다나 해외원정 중임에랴! 조선은 당쟁에 날을 지새다보니까, 왜적도 자기들처럼 국가보다 패거리나 가문을 더 중시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풍신수길은 훤히 꿰뚫어 보았음에 틀림없다.

조직 관리도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도 풍신수길은 귀재였다. 어제의 적도 웬만하면 용서하고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영지를 이리저리 바꿈으로써 영주들의 힘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그들에 대한 지배력을 높였다. 예를 들면, 1585년 약 4만 ㎢인 아홉 개의 나라로 이뤄진 구주(九州 큐슈)를 정복한 후, 그는 수호대명으로서 전국대명이 된 아주 드문 경우인 명문 도진(島津 시마즈) 가문을 그대로 살려 주는 대신 영지를 대폭 축소시키고 그 주위를 소서행장과 가등청정과 흑전장정의 영지로 둘러싸 버린다. 후에 소서행장은 임진왜란 때 제1군, 가등청정은 제2군, 흑전장정은 제3군, 구주의 명문거족 도진의홍은 제4군을 맡는다. 또한 임진왜란 때 구주 지역에 석고(石高) 당 가장 많은 전비와 인력을 부담시킨다. 이처럼 풍신수길은 주도면밀했다.

풍신수길은 여자를 유난히 밝혔지만, 유전자 보존 능력이 아예 없었거나 현저히 떨어졌다. 뒤늦게 얻는 아들은 남의 씨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아무리 철통같은 조치를 취한들 임진왜란으로 힘이 대폭 감소된 풍신 가문의 어린 아들이 대를 이어간다는 것은 난망한 일이었다. 농민은 무기가 없었지만, 영주들은 여전히 무기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풍신수길과 이순신의 건곤일척 대혈투로 가장 큰 이득을 취한 자는 누르하치지만, 일본 국내로는 가장 큰 이득을 취한 자는 기다림의 대가 덕천가강이었다. 새는 봄이 오면 자연히 울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느긋이 기다리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덕천가강은 물리력으로는 무너뜨리는 것이 불가능했던 풍신수길의 대판성을 풍신수길에게서 배운 공작전(工作戰)으로 적의 마음을 훔쳐 풍신수길이 죽은 지 18년 되던 해에 250년 평화의 시대를 연다.


놀라운 것은 이순신 장군은 이들 세 명의 장점을 모두 갖췄다는 것이다. 그것도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어떤 새든지 저마다 우는 재주가 있음을 알아 보고 어떤 새든 모을 수 있으면 다 모으고(군법을 어긴 자만 벌주거나 처형했을 뿐, 울지 않는다고 새를 죽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듯이 갈 데 없는 백성과 군사를 다 품음), 당장 급하면 아니 우는 새도 달래거나 놀라게 하여 울리고, 휴전처럼 시간 싸움에 들어갈 경우엔 새가 울 때까지 한시를 읊고 '국화 아래서 술잔을 기울이며' 느긋이 기다렸다.

이순신 장군은 직전신장 이상으로 전쟁은 냉혹하고 잔인하다는 것을 알고 울지 못하는 새를 절대 전쟁터로 내몰지 않았다. 직전신장 이상으로 이순신 장군은 혹독한 훈련으로 불과 1년 2개월 만에 오와 열도 못 맞추던 수하의 장수와 군사들을 전쟁 기계로 만들었다. 전쟁은 경제요, 보급이요, 무기임을 풍신수길보다 잘 알고 관찰사가 빼앗아 가고 육군이 징발해 가고 조정에서는 쌀 한 톨 보태주지 않는 상황에서 둔전을 개발한다, 바다 통행세를 받는다, 고기를 잡는다, 소금을 굽는다, 기부미와 기부금을 받는다, 염초를 굽는다, 전선을 건조한다, 하여 풍신수길 이상으로 보급에 힘써서 군사들이 배곯지 않고 막강한 무기로 싸우는 데 만전을 기했다. 그래서 일단 이순신 장군이 전선(戰船)을 끌고 간다 하면, 일시에 전선을 모아서 감으로써 적을 무기든 전선이든 우선 물량면에서 대개 압도했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완봉승 아니면 퍼펙트승했던 것이다.

소수로 다수를 이기는 것은 원래 이순신 장군이 가장 꺼리던 전술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자신의 생명과 국가의 사직을 걸고 직전신장 이상으로 과감하고 용맹했고, 풍신신수길 이상으로 정보에 밝아서 아군과 적군의 장단점과, 아군과 적군의 심리와, 자연의 힘까지 꿰뚫어 보고, 덕천가강 이상의 인내력을 발휘하여 그냥 때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때를 창조하여 적을 조금씩 조금씩 유인하여 태산처럼 무겁게 묵묵히 기다리다가 전력을 다해 싸움으로써 10배의 적도 능히 물리쳤다.

김정일은 이순신 장군과 대척점에 있다. 이 자는 일본의 3대 영웅이 가진 나쁜 점만 고스란히 갖고 있다. 직전신장은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오는 수단으로 인간을 하나의 전쟁 수단으로 보았지만, 상업과 농업과 공업을 대대적으로 진작시켰지만, 백성들을 우선 편안하게 살게 했지만, 김정일은 평화를 끝내고 전쟁을 가져오기 위해서 또는 평화를 전쟁보다 못한 지옥으로 만들기 위해서 2천만 동족을 똥개보다 하찮은 동물 아니 물건으로 취급하고 있다. 풍신수길 역시 직전신장처럼 국내적으로는 지긋지긋한 전쟁의 시대를 끝내기 위해 공작과 선전선동을 서슴지 않았고 마침내 이웃 나라를 침략했는데, 김정일은 평화의 시대를 끝내기 위해 세계가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한국을 말살시키고 5천만의 노예를 더 얻기 위해 부자가 대를 이어 오로지 전쟁 준비에 광분하고 있다.

임진왜란에 이어 병자호란에 시달린 4백년 전 조선의 역사를 그대로 재현하려는지, 한 번의 동족상잔으로는 성이 안 차는지 부자가 대를 이어 오로지 한국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쳐들어가려면 기적을 이룬 동족이 아니라 미워 죽겠다는 일본이나 고구려의 고토를 차고 앉은 중국으로나 쳐들어갈 일이지, 못난 인간일수록 골목만 벗어나면 꼼짝도 못하는 주제에 만만한 가족만 못 살게 굴듯이 동족만 괴롭히고 동족만 학살하려고 아등바등한다. 적화통일을 꿈꾸고 끈질기게 기다리는 것은, 어느 날 절로 대한민국이 굴러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덕천가강을 능가한다.

한국도 한심한 것이 선조 같고 원균 같고 윤두수 같고 김응서 같은 인간들이 적이 공작 차원에서 내려보낸 요시라 같은 자들의 말만 믿고, 김정일한테는 절대 바른 말을 못하고, 풍선 한 개 못 띄우는 주제에, 한국의 위대한 성취만 흠집내기에 급급한 자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
(2009. 4. 5.)

Saturday, April 04, 2009

쏠테면 계속 쏘아대라!

김정일이 미사일을 쏘아올리는 것은 자국민을 수백만 굶겨죽이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시시한 사건이다. 그런데 온세상 사람들이 북한주민들 수백만 굶어죽을 때는 잠자코 있다가 김정일이 공갈용 대포동 미사일을 쏜다니까, 아침저녁 뉴스마다, 김정일이 로케트를 쏘았다! 안 쏘았다! 못 쏘았다! 이제 곧 쏜다! 난리법석들이다.

김정일이 죽일 놈인 진짜 이유는, 사깃꾼 역적 김대중과 노무현, 그리고 순복음인지 순사기인지 조용기같은 남한목사들이 갖다바친 돈과 식량으로 북한주민들을 먹여살릴 생각은 않고, 장난감 핵폭탄이나 만들고, 날아가기도 전에 떨어져버리는 불량품 미사일을 만드는 것에 열중하는 것이다. 김정일이 죄없는 양민들을 살인지옥 정치범수용소에 가두어 못살게 굴고 죽이니까 나쁜 놈이지, 개성공단 금강산으로 남한바보들에게서 생돈을 갈취하는 짓은 아무 것도 아니다. 갖다 바치겠다는데 마다할 샌님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아무튼 요즈음 전세계 뉴스들, 서울은 물론 미국 일본에서도, Fox News나 CNN, Wall Street Journal과 New York Times에서도 김정일의 미사일 발사 件이 거의 톱뉴스로 시시각각 보도되고 있다. 북한주민들이 몰죽음해서가 아니라, 한국 일본 미국 사람들이 몰죽음 할까보아 덜덜 떨고들 있는 것이다. 아이구, 저 미친 놈이 미사일 머리에 핵탄두를 달면 어찌할꼬? 아이구, 저 똥배 놈이 핵이나 미사일을 이란의 물라 mullah들에게 팔아넘기면 어찌할꼬? 아이구, 후진타오 아저씨, 저 미친 놈 좀 말려주구랴!

힐러리 클린턴 왈, “북한이 미사일을 쏘아올리는 것은 provocative 한 짓이고, 그에 상응한 조처를 취할 것이다.” 전에도 많이 듣던 말이다.

로버트 게이츠 왈, “북한이 쏘아 올리거나 말거나 내가 무슨 상관이냐?”

이명박 왈, “북한이 미사일을 백 개 쏘아올려도 난 전쟁 절대 안 한다!” 아무리 아침이슬 이명박에게서 나온 말이라도 정말 믿기 힘든 말이다.

김정일은 미사일을 더 자주 매일 쏘아올려야 한다. 그래야 세계가 김정일에 주목하고 떠들어대니까, 김정일은 남북한에서 더욱 더 위대해지고, 남한 미국에서는 돈과 기름과 식량이 더욱 더 바리바리 들어갈 것이다. 이명박이나 오바마나 클린턴이나 게이츠, 모두들 김정일의 핵만 떠들어대지, 북한인권은 저리 가라다. 불쌍한 미국회 북한인권법은 눈을 씼고 찾아보아도 온데간데 없다.

남한의 친북좌파들 왈, “김위원장님께 로케트를 쏘아올리시니 민족적 차원에서 자랑스럽다”고? 에라, 이 우라질 역적 빨갱이들아! 자랑할게 없어서 살인마가 날리는 미사일 로케트가 자랑스러워?

김정일은 내일이나 모레 미사일을 쏘아올릴 것이고, 그러면 미국과 한국은 유엔에 달려가서 왕왕 대겠지만, 며칠 지나면 유엔에 진치고 있는 친북좌파 중공, 러시아, 아프리카, 중동이슬람 국가들 때문에 흐지부지 될 것이고, 전쟁 절대로 안 하겠다는 이명박은 개성공단 금강산으로 김정일에게 계속 퍼줄 것이고(이명박이 상호주의 대북정책이라고? 제발 정신들좀 차리세요!), 김정일은 계속 연일 북한사람들을 굶겨죽이고 때려죽일 것이고, 남한사람들을 심심하면 납치 억류 심문할 것이다. 오로지 한 나라, 東아시아의 이스라엘이 되어가는 일본만이, 일본인들 납치해간 김정일을 때려잡자고 아우성 치겠지만, 고이즈미나 아베나 아소보다는 김정일이 훨씬 더 장수(長壽)이시니까, 김정일은 계속 미사일이나 날리고 가끔씩 핵폭탄 실험이나 하면 된다.

그래, 김정일아! 너 참 위대하니까 미사일 계속 쏘아대라!
언젠가는 네가 쏘아올린 미사일이 네 대가리에 떨어질 날이 올 것이다.
반드시 올 것이다!

2009년 4월 4일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씀
http://nkgenocide.net
http://nk-projects.blogspo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