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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April 05, 2009

충무공 이순신 장군 평전(13)-최성재

풍신수길, 이순신, 누르하치(3)

이순신 장군은 직전신장과 풍신수길과 덕천가강의 장점을 한 몸에 갖고 있었다.
최성재


집단의 국가요, 조직의 사회요, 화(和)의 민족인 일본은 예로부터 영웅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 독불장군은 용납하지 않는다. 자연히 일본에는 영웅이 별로 없다. 그래서 수상이 1년, 2년 만에 바뀌어도 일본은 잘도 굴러간다. 국가 지도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국가 지도자가 누구냐에 따라, 새로운 태양이 뜨기도 하고 졸지에 거대한 암흑이 강림하기도 하는 한국과는 사뭇 다르다. 한민족에게 국가지도자가 미치는 영향은 박정희와 김일성만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인공위성이 전하는 한반도의 밤 정경은 대낮처럼 밝은 휴전선 이남과 칠흑처럼 어두운 휴전선 이북의 선명한 대조로 한 눈에 온갖 거짓과 왜곡을 드러내고 바로잡는다.

한국과 북한의 차이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라고 중얼거리고 싶겠지만, 공산국가에서도 아니 본 받는 척 경제정책에서 속속들이 박정희를 본받은 등소평의 중국은 암흑을 몰아내는 새로운 태양을 맞이했다. 등소평의 사후에도 그의 정책 내지 박정희의 경제정책을 계속 유지한 중국은 이제 당당히 세계 2대 강국으로 올라섰다. 제2차세계대전 후에 탄생한 자본주의 국가는 이 지구상에 100개가 넘지만, 인구 3천만 이상의 거대 국가(인구 5천만의 한국을 약소국이니, 강소국이니 하는 분류는 애초에 잘못된 것) 중에서 세계 최하위의 개도국에서 세계 최상위의 중진국으로 발돋움한 나라는, 불과 18년 사이에 천지개벽하듯 비상한 나라는 영웅 박정희가 국가지도자로 노심초사하던 대한민국밖에 없다. 그만큼 한민족은 국가지도자의 역량에 크게 의존한다. 말 잘하는 자들이 저마다 박정희 정도는 아무나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면서, 박정희를 욕함으로써 세를 모으고 박정희를 비판함으로써 표를 얻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푸른 기와집으로 입성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한국을 1인당 GDP의 상대적 순위(경제)나 법치(法治) 지수(정치)에서 한 단계도 끌어올린 자가 없는 것은 그 동안의 국가지도자가 하나같이 말만 번드레한 범용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입에 가장 자주 오르내리는 영웅은 직전신장과 풍신수길과 덕천가강이다. 이들은 나란히 일본의 3대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중 직전과 덕천은 크기는 작아도 그 아버지가 입법 사법 행정의 권한을 한 손에 쥔 영주였지만, 풍신은 원래 성(姓)도 없던 자였다. 신분이 높아질 때마다 성을 짓기도 하고 바꾸기도 했다. 이름도 계속 바꿨다. 그의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와아' 하고 고함이나 지르고 '예예' 하며 심부름이나 하던 자였고, 어머니는 그런 자를 남편으로 맞아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다가 그나마 일찍 여의고 살 길이 막막하여 손바닥만한 땅을 가진 자에게 개가한 여자였다. 이처럼 수길은 밑바닥의 밑바닥 출신이었다. 새 남편의 눈치가 보여 입을 덜려고 그의 어머니는 수길을 절에 맡긴 모양이다. 거기서 그가 기껏 한 일은 '식사시간입니다. 식사하세요!'라고 외치는 일(이를 갈식喝食이라고 함)이었다. 작고 못생긴 원숭이는 누구에게나 멸시를 당했지만, 일본 3대 음성답게 목소리 하나는 대단했던 모양이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었던 일본의 전국시대는 현대사회와 비슷했다. 다만, 오늘날은 경제가 당시의 군사를 대신한다.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해도 양반 가문이 아니면, 그저 소나 말처럼 일하면서 경멸과 천대 속에서 살아야만 했던 당시의 조선사회는 일본사회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조선은 중기 무렵부터 양반도 동반(문반)과 서반(무반)은 하늘과 땅처럼 달라졌다. 군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자도 문반이라는 이유만으로 왕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역전의 장군을 수하로 거느렸다.

이순신 장군 위에는 타락한 암행어사가 있었고, 암행어사 위에는 무능한 관찰사가 있었고, 관찰사 위에는 무식한 순찰사가 있었고, 순찰사 위에는 한심한 도체찰사가 있었다. 조선에서는 철저한 신분과 혈통의 제약 속에 개인이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 동일한 사상과 동일한 책으로 하늘이 노랗도록 공부하여 기껏 임금에게 아첨하거나, 정책을 두고 싸우는 게 아니라 자신은 절대 지키지 않는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어 정적의 도덕적 흠결을 찾아내어 물고 뜯거나, 이리저리 뇌물을 바치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전국시대의 일본은 조선과 정반대였다.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은 하극상이 정상이었다. 힘이 없거나 머리가 모자라는 자는 언제든지 쫓겨나거나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다. 기름장사도 수백만 석 영주가 될 수 있었고, 천황도 돈이 없어 10년이 넘도록 즉위식도 올리지 못했다. 수길이 일개 종의 신분에서 일어나 일본을 통일하고 제1차대동아공영권을 꿈꾸게 이른 것은 이런 역동적 환경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일본은 미국과 정반대로 동부개척의 역사다. 미국은 대서양을 건너 동부에 정착한 유럽인이 토착민을 죽이거나 흡수하면서 서부로 뻗어갔지만, 일본은 대한해협을 건너간 삼한 사람들이 토착민들을 죽이거나 흡수하면서 동부로 뻗어갔다. 개척의 시대엔 농민이 곧 무사다. 내 땅과 내 재산과 내 가족을 내가 지키기 위해 농민도 무장한다. 일본에서는 승려도 그러했다. 새로 개척한 땅을 중앙정부에서 강제로 앗아가서 중앙의 귀족에게 나눠 주거나 조세를 거두려고 하면, 농민들은 반발하게 마련이다. 이런 과정에서 전란이 시작된다. 점차 전문 무사 계급이 등장한다. 그렇게 농민과 무사가 분업하면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민과 승려는 스스로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풀지 않는다. 싸우면서 일하고 싸우면서 참선한다.

1467년 응인의 난이 시작될 즈음에는 더 이상 개척할 땅은 없다. 북해도(北海道 홋카이도) 이서(以西)는 땅 끝(육오陸奧 무쓰)까지 개간된다. 대신 생산력이 급격히 증가한다. 이 때부터 옛날에 중앙에서 파견되어 영주 노릇하던 수호대명(守護大名)은 거의 몰락하고 전국대명(戰國大名)들이 다투어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는데, 이들은 전문무사 집단을 양성하고 무기를 개발하고 난공불락의 성곽을 쌓고 대규모 관개시설을 갖추고 상업을 장려하고 장인을 우대한다.

풍신수길이 작은 눈을 반짝이며 서서히 신분상승할 무렵에는 유혈이 낭자한 전국시대도 이제 나름대로 틀이 잡힌다. 200명, 300명에 이르던 대명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해서 50명, 60명의 유력한 대명으로 압축된다. 통일의 기운이 서서히 무르익어 간다. 새로운 질서도 서서히 윤곽을 드러낸다. 그 중의 하나가 저 유명한 훤화양성패(喧譁兩成敗 겐카료세이바이)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개인 복수 금지' 법률이다. '개인적으로 싸우는 자는 이유 불문하고 둘 다 죽인다'는 법률조항이다. 싸움은 오로지 이웃 나라와의 싸움 곧 공적인 전쟁으로 한한다. 전국대명들은 다투어 이런 법률조항을 제정한다. 이로써 유력한 전국대명이 다스리는 영토 내에서는 평화가 찾아온다. 꽃샘 추위는 남아 있지만, 봄은 봄이다.

1560년은 전국시대에 한 획을 그은 해다. 직전신장이 10배가 넘는 군대를 맞아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무모한 전쟁 끝에 불과 2천의 군사로 천황이 머물던 일본의 중심으로 진출하려던 금천의원(今川義元 이마가와 요시모토)을 물리친 것이다. 눈앞에 다가온, 조선으로 치면 한양 입성의 무지개 꿈을 그리며 좁은 골짜기(통협간桶狹間 오케하지마)에서 더위에 허덕이던 금천은 갑자기 몰아친 천둥번개와 함께 달려온 직전에게 목을 바친다. 이 때 직전의 포상이 새 시대를 알린다. 적장의 목을 딴 자에게는 아주 작은 상을 주고 적장과 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자에게는 상상을 초월한 어마어마한 상을 내린다. 녹봉에 가장 인색하기로 유명하여 큰 전쟁에서 이긴 부하 장수에게 상이라며 식탁에서 귤 한 개를 집어주기도 했던 직전은 그를 무려 3천 석의 영주로 봉한다. 예전 같으면 전공에 기록도 않던 일에 대해서 말이다.

이것이 바로 당시로서는 전혀 뜻밖에도 중소 대명에 지나지 않던 오늘날로 말하면 중소기업 사장에 지나지 않던 직전신장과 덕천가강과 보따리 장사에 지나지 않던 풍신수길이 거대한 대기업들을 모조리 물리치고 사상 초유의 군벌을 일군 이유다. 5척 단구(145㎝로 추정)로 체구도 유난히 작고 너무 못 생기고 도통 위엄도 없어서 칼이나 창을 들고 싸우면, 보잘것없는 졸병 하나도 이기지 못할 풍신수길이 대장군이 된 것은 바로 이런 탁월한 장군의 밑에 들어갔기 때문에 가능했다. 졸병 자리라도 하나 얻을까 하여, 머나먼 준하(駿河 스루가)의 금천에게 갔다가 금천은 멀리서 쳐다보지도 못하고 광대 노릇이나 하다가 고향 미장(尾張 오와리)으로 돌아와 당시로서는 영 평판이 안 좋던 직전에게 간 이유도 바로 인재를 알아보는 자가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직전과 풍신과 덕천은 한미한 출신에 지나지 않았지만, 아니 오히려 그 때문에 시대의 흐름을 누구보다 잘 꿰뚫어 보았다. 그들은 기득권이 작거나 아예 없었기 때문에 시대의 거대한 흐름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전의 방식으로는 천하통일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과감히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던 것이다.

이들 세 명을 비교하여 흔히 새의 우화를 든다.

직전신장은 새가 울지 않으면 죽여 버리고,
풍신수길을 새가 울지 않으면 울게 만들고,
덕천가강은 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린다.

여기서 새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고 우는 것은 능력 발휘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직전신장의 능력본위 인재발탁의 예를 잘 보여준다. 울지 않으면 곧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울면 곧 능력을 발휘하면 신분과 계층과 직업과 지역에 관계없이 바로 발탁한다는 것이다. 중국 최초의 통일대왕 진시황과 비슷하다. 진시황에게 그랬던 것처럼 직전신장에게 인재가 구름처럼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직전신장은 인물(人物) 중에서 人은 버리고 物만 보았다고 할 수 있다. 현대 과학경영의 첫 걸음도 바로 이러했다. 직전은 천하통일에 쓸모 있는 자는 누구든 환영했다. 인간도 물건과 똑같았다. 상품의 효용성이 문제였지, 상품의 철학이나 미학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게 철포(조총) 한 자루는 장수의 작전을 따르지 않고 공명심에 불타 올라 말을 타고 쏜살같이 홀로 적진으로 달려드는 천하제일 칼잡이보다 훨씬 유용했다. 항우 장사의 힘을 자랑하는 무모한 말 탄 기사보다 밀집대형을 이루고, 그가 개발한 긴 창을 들고 방패로 빈 틈 없이 몸을 가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적을 향해 다가가는 졸병들이 그에게는 훨씬 유용했다.

각종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는 상인도 직전신장에게는 무사 못지 않은 상품이었다. 그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성 아래에 거리를 만들어 주고 그들에게는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새로운 무기와 새로운 정보도 똑같이 중요했다. 식량을 제공하는 농민도 싸우는 병졸도 똑같이 중요했다. 모름지기 상품의 가치만 있으면 되었다. 이 점에서 비렁뱅이 천황도 마찬가지였고 파리 장군(쇼군)도 마차가지였다. 그들은 아무런 힘이 없었지만 천하통일의 명분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줄도 모르고 까불면, 은혜를 저버리고 반역을 도모하면 바로 제거해 버렸다(1573). 그렇게 하여 족리(足利 아시카가) 막부는 영원히 사라졌다. 천하제일 미인으로 소문난 여동생도 상품이었다. 유력한 전국대명에게 시집 보냈다.

전쟁과 경제와 정치에 두루 유용한 도로도 크게 닦고 모든 것의 토대인 농지도 빼앗거나 새로 만들었다. 재정의 뼈이자 전쟁의 피인 조세를 확보하기 위해 토지조사도 새로 했다. 그렇게 하여 숨은 토지를 대대적으로 찾아냈다. 문화의 유용성도 알아서 다도회도 열었고 연극도 장려했다. 무엇보다 그는 법률을 엄격히 적용했다. 도둑과 강도 따위는 발도 못 붙이게 했다.

직전신장에게는 큰 약점이 있었다. 인물에서 人은 아니 보고 物만 보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사람으로 인식하고 주군(主君)이 머리를 툭툭 치고 다들 보는 앞에서 망신을 주는 것을 대범하게 보아 넘기지 못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자존심 붕괴로 인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는 반란을 꿈꾸게 된다. 결국 천하포무(天下포武)를 눈앞에 두고 직전신장은 누구보다 중용했던 부하에게 암살 당한다(1582). 동생을 시집 보낸 것으로 안심하다가, 정략 결혼보다 묵은 인정과 현실 외교를 중시했던 매제에게 기습당하여 몸만 간신히 빠져나가는 위기도 겪은 적도 있었다.

풍신수길은 직전신장이 죽기 전까지 속마음을 한 번도 들키지 않았거나 그 때까지는 속마음이 아예 없었을 것이다. 그는 직전신장에게 人은 아니고 物만 보였다. 주군의 영광을 자신의 영광에 우선시켰다. 그러나 일생일대의 기회가 오자, 5년간 싸우던 전쟁에서 포커 페이스를 십분 활용하여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전광석화처럼 달려가 안심하고 있던 반란자를 물리치고 단숨에 패권을 휘어잡았다.

풍신수길은 우는 새만으로는 천하포무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울지 않는 새는 울게 만들어야 함을 알았다. 능력이 없는 자도 능력을 발휘하게 만들어야 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음을 알았다. 새는 어떻게 하면 노래할까.

첫째, 먹이를 주어야 한다.
둘째, 짝을 찾아 주어야 한다.
셋째, 눈에 보이지 않는 천라지망(天羅之網)으로 한데 모아야 한다.

먹이는 경제다. 돈이다. 보급이다. 무기다.
짝은 유혹이다. 미끼다. 정보다. 공작(工作)이다. 선전선동이다.
그물은 조직이다. 연합이다. 질서다. 정의다. 관용이다.

전쟁은 곧 경제요, 보급이요, 무기임을 풍신수길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배부르면 필부도 용기백배하지만, 사흘 굶으면 천하제일 사무라이도 절로 고꾸라진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조총 한 자루 들면 졸장부도 호랑이가 되지만, 맨 손으로는 천하제일 사무라이도 비루먹은 강아지보다 못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 모든 것을 그는 직전신장보다 더 잘 알았다. 압도적인 물량으로 상대를 주눅들게 만들어 항복할 때까지 에워싸고 상대의 식량을 고갈시키고 전쟁의지를 꺾어 싸우지 않고 이기거나 싸워도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이기는 것이 풍신수길의 대원칙이었다. 그러면 새로운 성(城)의 식량과 의복과 무기를 고스란히 차지할 수 있고 패자로부터 원성도 듣지 않게 된다. 두 번의 큰 전쟁에서는 무려 25만 명을 동원하고 30만 명을 동원했다. 그것은 숫제 소풍이었다. 축제였다. 버티면 과연 얼마나 버틸까.

난공불락의 성곽을 짓는 것도, 강물을 막아 새로운 강의 물줄기를 바꾸는 것도 풍신수길을 따라갈 자가 없었다. 그런 성곽 안에서는 어린애와 아낙네도 깔깔거리며 싸울 수 있고 그런 강의 물줄기로 물에 잠긴 성곽 안의 사람들은 물에 빠진 생쥐보다 초라해진다는 것을 풍신수길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순신 장군에 의해 보급이 차단되자, 풍신수길이 전군에게 명령하여 일본으로부터 보급이 가능한 남해안에 성곽을 쌓고 농성하게 만들자, 명나라 6만 군대도 헛심만 빼다가 대패하고 천하의 이순신 장군도 발을 동동 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을 상기해 보자. 이순신 장군처럼 풍신수길도 전쟁은 경제요, 보급이요, 무기임을 잘 알았던 것이다.

풍신수길은 떠돌이 장사 시절부터 경제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농사도 중요하지만 상업도 그 못지않게 중요함을 알았다. 그래서 직전신장의 자유도시 계(堺 사카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상업도시를 조성했다. 그것이 바로 대판(大阪 오사카)이다. 전국의 모든 상품이 거기로 모여들고 거기서 흩어졌다. 동경(東京 도쿄)이 덕천가강의 도시라면, 대판은 풍신수길의 도시다. 오늘날도 이 두 도시는 경쟁 의식이 엄청나다. 이 두 도시간의 야구 경기는 전쟁이다.

풍신수길은 1583년 천악(賤嶽 시즈가타케) 싸움에서 이김으로 직전신장이 암살된 지 불과 1년 만에 직전신장의 이전 세력을 완전히 자기 수중에 넣는다. 그 후 그는 대대적인 태합검지(太閤檢地)에 들어간다. 여기서 태합은 수길의 새 직함을 뜻하는 말로 관백(關白)보다 한 품계 위다. 검지는 토지조사다. 직전신장의 검지는 다른 전국대명의 검지처럼 자진 신고제라서 누락의 경우가 많았지만, 풍신수길의 검지는 직접조사여서 누락의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1591년 전국을 통일한 지 1년 만이자,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1년 전에 이번에는 전국적인 토지조사에 들어간다. 이로써 농민은 전국적으로 항구적인 경작권을 보장받고 국가의 재정은 튼실해질 대로 튼실해진다. 정치적으로는 그로써 풍신수길과 지방영주는 직전시장 시절 동맹관계에서 주종관계로 바뀐다. 이래저래 해외원정의 준비가 물샐틈없이 이뤄진다.

1588년 풍신수길은 농민으로부터 무기를 빼앗아 버린다. 반란의 싹을 차단하는 동시에 평화를 정착시킨다. 이것은 또한 '개인 복수 금지법'을 어길 수 있는 물적 토대를 영구히 앗아가 버려, 현대적 의미의 사법권을 국가가 독점하는 계기가 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 군인과 경찰만 무기를 휴대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병든 평화로 흐느적거리던 조선에서는 상식이었던 이런 조치가 400년간의 전란시대를 겪은 일본에서는 누구도 상상 못하던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일이었다. 전국시대를 끝내고 평화시대를 제도화한 것은 바로 이 두 가지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후에 덕천가강에 의해 그대로 계승된다.

직전신장도 정보의 중요성을 잘 알았지만, 풍신수길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풍신수길은 수동적인 정부 입수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정보를 만들고 퍼뜨렸다. 공작(工作)의 대가였다. 유언비어를 적군에 퍼뜨리는 풍신수길의 정보전에는 귀신도 놀라서 저들끼리 수군거리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원숭이는 적을 매수하는 데도 귀신이었다. 그 덕분에 직전신장은 어렵지 않게 막강한 대명들을 차례차례 굴복시킬 수 있었다. 이순신만 제거하면 조선은 식은 죽 먹기로 접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서 풍신수길이 간첩 요시라를 내세워 선조 이하 조선 조정을 농락한 것은 그가 무엇보다 애용하던 전술이었다. '개인 복수 금지법'에서 보듯이,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이 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그들은 둘 다 사형이었다. 더군다나 해외원정 중임에랴! 조선은 당쟁에 날을 지새다보니까, 왜적도 자기들처럼 국가보다 패거리나 가문을 더 중시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풍신수길은 훤히 꿰뚫어 보았음에 틀림없다.

조직 관리도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도 풍신수길은 귀재였다. 어제의 적도 웬만하면 용서하고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영지를 이리저리 바꿈으로써 영주들의 힘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그들에 대한 지배력을 높였다. 예를 들면, 1585년 약 4만 ㎢인 아홉 개의 나라로 이뤄진 구주(九州 큐슈)를 정복한 후, 그는 수호대명으로서 전국대명이 된 아주 드문 경우인 명문 도진(島津 시마즈) 가문을 그대로 살려 주는 대신 영지를 대폭 축소시키고 그 주위를 소서행장과 가등청정과 흑전장정의 영지로 둘러싸 버린다. 후에 소서행장은 임진왜란 때 제1군, 가등청정은 제2군, 흑전장정은 제3군, 구주의 명문거족 도진의홍은 제4군을 맡는다. 또한 임진왜란 때 구주 지역에 석고(石高) 당 가장 많은 전비와 인력을 부담시킨다. 이처럼 풍신수길은 주도면밀했다.

풍신수길은 여자를 유난히 밝혔지만, 유전자 보존 능력이 아예 없었거나 현저히 떨어졌다. 뒤늦게 얻는 아들은 남의 씨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아무리 철통같은 조치를 취한들 임진왜란으로 힘이 대폭 감소된 풍신 가문의 어린 아들이 대를 이어간다는 것은 난망한 일이었다. 농민은 무기가 없었지만, 영주들은 여전히 무기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풍신수길과 이순신의 건곤일척 대혈투로 가장 큰 이득을 취한 자는 누르하치지만, 일본 국내로는 가장 큰 이득을 취한 자는 기다림의 대가 덕천가강이었다. 새는 봄이 오면 자연히 울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느긋이 기다리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덕천가강은 물리력으로는 무너뜨리는 것이 불가능했던 풍신수길의 대판성을 풍신수길에게서 배운 공작전(工作戰)으로 적의 마음을 훔쳐 풍신수길이 죽은 지 18년 되던 해에 250년 평화의 시대를 연다.


놀라운 것은 이순신 장군은 이들 세 명의 장점을 모두 갖췄다는 것이다. 그것도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어떤 새든지 저마다 우는 재주가 있음을 알아 보고 어떤 새든 모을 수 있으면 다 모으고(군법을 어긴 자만 벌주거나 처형했을 뿐, 울지 않는다고 새를 죽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듯이 갈 데 없는 백성과 군사를 다 품음), 당장 급하면 아니 우는 새도 달래거나 놀라게 하여 울리고, 휴전처럼 시간 싸움에 들어갈 경우엔 새가 울 때까지 한시를 읊고 '국화 아래서 술잔을 기울이며' 느긋이 기다렸다.

이순신 장군은 직전신장 이상으로 전쟁은 냉혹하고 잔인하다는 것을 알고 울지 못하는 새를 절대 전쟁터로 내몰지 않았다. 직전신장 이상으로 이순신 장군은 혹독한 훈련으로 불과 1년 2개월 만에 오와 열도 못 맞추던 수하의 장수와 군사들을 전쟁 기계로 만들었다. 전쟁은 경제요, 보급이요, 무기임을 풍신수길보다 잘 알고 관찰사가 빼앗아 가고 육군이 징발해 가고 조정에서는 쌀 한 톨 보태주지 않는 상황에서 둔전을 개발한다, 바다 통행세를 받는다, 고기를 잡는다, 소금을 굽는다, 기부미와 기부금을 받는다, 염초를 굽는다, 전선을 건조한다, 하여 풍신수길 이상으로 보급에 힘써서 군사들이 배곯지 않고 막강한 무기로 싸우는 데 만전을 기했다. 그래서 일단 이순신 장군이 전선(戰船)을 끌고 간다 하면, 일시에 전선을 모아서 감으로써 적을 무기든 전선이든 우선 물량면에서 대개 압도했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완봉승 아니면 퍼펙트승했던 것이다.

소수로 다수를 이기는 것은 원래 이순신 장군이 가장 꺼리던 전술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자신의 생명과 국가의 사직을 걸고 직전신장 이상으로 과감하고 용맹했고, 풍신신수길 이상으로 정보에 밝아서 아군과 적군의 장단점과, 아군과 적군의 심리와, 자연의 힘까지 꿰뚫어 보고, 덕천가강 이상의 인내력을 발휘하여 그냥 때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때를 창조하여 적을 조금씩 조금씩 유인하여 태산처럼 무겁게 묵묵히 기다리다가 전력을 다해 싸움으로써 10배의 적도 능히 물리쳤다.

김정일은 이순신 장군과 대척점에 있다. 이 자는 일본의 3대 영웅이 가진 나쁜 점만 고스란히 갖고 있다. 직전신장은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오는 수단으로 인간을 하나의 전쟁 수단으로 보았지만, 상업과 농업과 공업을 대대적으로 진작시켰지만, 백성들을 우선 편안하게 살게 했지만, 김정일은 평화를 끝내고 전쟁을 가져오기 위해서 또는 평화를 전쟁보다 못한 지옥으로 만들기 위해서 2천만 동족을 똥개보다 하찮은 동물 아니 물건으로 취급하고 있다. 풍신수길 역시 직전신장처럼 국내적으로는 지긋지긋한 전쟁의 시대를 끝내기 위해 공작과 선전선동을 서슴지 않았고 마침내 이웃 나라를 침략했는데, 김정일은 평화의 시대를 끝내기 위해 세계가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한국을 말살시키고 5천만의 노예를 더 얻기 위해 부자가 대를 이어 오로지 전쟁 준비에 광분하고 있다.

임진왜란에 이어 병자호란에 시달린 4백년 전 조선의 역사를 그대로 재현하려는지, 한 번의 동족상잔으로는 성이 안 차는지 부자가 대를 이어 오로지 한국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쳐들어가려면 기적을 이룬 동족이 아니라 미워 죽겠다는 일본이나 고구려의 고토를 차고 앉은 중국으로나 쳐들어갈 일이지, 못난 인간일수록 골목만 벗어나면 꼼짝도 못하는 주제에 만만한 가족만 못 살게 굴듯이 동족만 괴롭히고 동족만 학살하려고 아등바등한다. 적화통일을 꿈꾸고 끈질기게 기다리는 것은, 어느 날 절로 대한민국이 굴러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덕천가강을 능가한다.

한국도 한심한 것이 선조 같고 원균 같고 윤두수 같고 김응서 같은 인간들이 적이 공작 차원에서 내려보낸 요시라 같은 자들의 말만 믿고, 김정일한테는 절대 바른 말을 못하고, 풍선 한 개 못 띄우는 주제에, 한국의 위대한 성취만 흠집내기에 급급한 자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
(2009.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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