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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March 21, 2009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이야기(11) - 최성재

풍신수길, 이순신, 누르하치(1)

동시대 세계의 중심이던 동아시아에서 그들은 발군의 전쟁 영웅이었다.
최성재

16세기에서 18세기에 걸친 시기는 바다의 시대였고 유럽이 세계로 뻗어가던 시대였다. 유럽의 시대는 18세기 후반부터 펼쳐진다. 혹자는 이를 세계화 1.0시대라고 한다. 내 어리석은 생각은 다르다. 그건 어디까지나 서양 위주의 사고방식이다. 일찍이 세계는 사실상 하나로 연결된 적이 있었다. 목숨을 내놓고 10년, 20년 동안 가야 했던 비단의 길이자 초원의 길이 한 달 정도로 축소되었다. 상인이든 승려든 농민이든 동서를 오가려면, 작건 크건 새 나라 새 고을이 나타날 때마다 이승과 저승에 양다리를 걸쳐야 했던 가슴 조마조마함이 사라지고, 깨끗한 여관, 날렵한 말, 상냥한 미소, 다양한 풍물을 대하는 가슴 설렘이 꿈결처럼 다가왔다. 종교도 따지지 않았고 인종도 국적도 꼬치꼬치 묻지 않았다. 그리고 유럽까진 미치지 못했지만 나침반의 도움을 받아 중국 남부에서 인도지나해와 인도양을 거쳐 '일 한국'의 페르시아까지 바다로도 연결되기도 했다. 명나라의 정화는 이 바다의 비단길을 극히 짧은 기간 동안 조금 더 연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시절은 20세기 후반부나 21세기초와 가장 비슷하던 시기였다.

13세기의 혁명이었다. 징기스칸의 몽골족에 의해 세계 뭍의 절반, 인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유라시아가 마침내 하나로 연결된 것이다. 아프리카도 있고 남북 아메리카도 있고 오세아니아도 있지만, 당시 그들의 문화는 유라시아에 비해 몇 백 년 내지 수천 년 뒤떨어져 있던 상황이라 세계화 1.0의 영광은 모름지기 몽골족에 돌려야 할 것이다.

육지의 길과 말에 의해서 세계가 하나로 연결된 13세기를 세계화 1.0시대라고 한다면, 16세기부터 20세기초(18세기가 아니라)는 세계화 2.0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다의 물과 배에 의해 유럽과 아시아에게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던 세계도 비로소 하나로 연결되었으니까.

세계화 3.0시대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라고 본다. 공중의 공기와 비행기에 의해서 육지와 바다가 급속하게 축지(縮地)되고 축수(縮水)된 시기가 바로 이 때다. 저항이 거의 없는 공기로부터 오히려 양력(揚力)을 받아 비행기가 과거엔 꿈에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새보다 빠른 속도를 인류에게 제공함으로써, 공간은 과거에 비해 5분의 1, 10분의 1로 축소되고 반대로 시간은 5배, 10배 늘어났다.

세계화 4.0시대는 20세기후반에 찾아왔다. 도구는 인터넷이다. 이제 세계는 가상 공간이긴 하지만, 상대성이론에 나오는 빛의 속도로 좁아져서 개인의 한 손안에 들어가게 이르렀다. 인류는 이제 누구나 정보에 관한 한, 부처님이 되어 세계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 있다. 세계화 5.0은 매트릭스 시대가 될 것이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초에 당시 세계 최정상급 문화와 경제를 자랑하던 동아시아에서 걸출한 세 인물이 활약한다. 그들은 일본의 풍신수길(1536~1598)과 조선의 이순신(1545~1598)과 만주의 누르하치(1559~1626)다. 이들 세 명 중에 가장 늦게 태어난 누르하치가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가장 큰 성취를 이루었다. 그의 위업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아들들이 당시 지구상 가장 크고 가장 인구가 많고 가장 부유했던 명나라를 차지한 후, 그 후손이 약 260년 동안 만주족과 한족을 한 집안처럼 다스렸다.

16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의 가장 걸출한 이들 세 전쟁 영웅을 살펴보려면, 잠시 세계화 1.0시대와 세계화 2.0시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싫건 좋건 알든 모르든 그들은 그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몽골족은 동부 유럽에서 연해주까지 광동에서 시베리아까지 차지한 후, 중심부를 원(元)이라고 부른다. 중국 왕조는 이 때부터 국호가 추상명사로 바뀐다. 이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이전에는 통일왕조를 개창한 태조의 고향 이름을 국호로 삼았었다. 진·한·수·당·송(秦漢隋唐宋)이 바로 그것이다. 몽골은 이민족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중국인이 멸시하는 뜻으로 한자로 음차(音借)한 '어리석을 몽'(蒙)을 국호로 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몽골족은 이에 한 차원 달리했다. 지금까지는 중국의 통일왕조는 고작 중원만 차지한 그림자요 엉터리고, 새 왕조는 전세계를 아우르는 실체요 진짜라는 뜻에서 원(元)이라고 한 것이다. 으뜸이자 시작이란 뜻이다. 건원칭제(建元稱帝)할 때 쓰는 원(元)이다. 천하의 새 주인인 황제로서 새 시대를 여는 것이 건원칭제다. 이렇게 한 번 정해 버리니까, 주원장도 황태극도 '밝다, 맑다'라는 뜻의 명(明)과 청(淸)을 국호로 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뜻으로 보면 원(元)이나 대동소이하다.

몽골족의 세계화 1.0이 미친 영향은 어마어마하다.
첫째 징기스칸의 후예들은 실용주의를 널리 전파했다. 종교와 사상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널리 인간에게 이로우면 족했다. 그들은 출세의 지름길이던 과거제도를 폐지했다. 말은 향기로우나 권력과 명예와 부를 위해 혀의 검(劍)과 도(刀)로 사람을 찌르고 베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유교경전은 종교와 사상의 자유에 따라 수신용(修身用)으로 족하다고 보았다. 유일무이한 통치이념은 절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렇게 해서는 나라를 다스릴 유능한 인재를 뽑을 수 없다고 보았다.

대신 그들은 실용적인 지식을 가르쳤다. 전국에 약 2만 개의 학교를 세우고 거기서 오늘날 실업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가르쳤다. --<<징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잭 웨더포드
나폴레옹의 국민교육과 실업교육보다 500년 이상 앞선 교육개혁이었다.

둘째, 동양과 서양의 문화와 과학기술을 당시로 보면 과히 빛의 속도로 교류시켰다. 징기스칸은 어떤 경우에도 전쟁시나 평화시나 두루 유용한 기술자는 죽이지 않았다. 국적 불문(不問), 인종 불문, 종교 불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중국의 화약과 나침반과 인쇄술이 차례로 서양으로 흘러갔다. 당시 중국과 아랍의 문화가 가장 앞섰기 때문에 유럽에서 아시아로 흘러온 것은 거의 없다. 문화도 물처럼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아랍은 달력을, 정확한 양력을 동아시아에 전해 주었다. 곽수경을 그 덕에 수시력을 만드는데, 1년을 365.2425까지 정확히 계산했다. (세종대왕은 이순지를 시켜 이보다 더 정확하게 1년을 365.2422까지 계산했다. 1582년의 그레고리력과 같은 수준이다. 서양보다 약 150년 빠르다. 거기에 더하여 <<칠정산내외편>>은 음력도 정확무비하다.)

세계화 1.0으로 가장 득을 많이 본 대륙이 야만과 답답함이 가득하던 유럽이다.
첫째, 그들은 동양에서 흘러온 화약으로 칼과 창과 방패를 들고 무거운 갑옷을 입고 설치던 기사 시대를 끝냈다.
둘째, 역시 동양에서 들어온 나침반을 믿고 통통배를 타고 겁도 없이 대서양을 건너고 태평양을 건너기 시작했다.
셋째, 코리아보다는 한 200년 늦지만 역시 동양에서 들어온 인쇄술을 개량하여 보통 사람도 하나님과는 직접, 인간과는 직간접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의사소통하기 시작했다. 1424년 케임브리지 대학은 122권의 책밖에 없었지만, 1500년대 중반이면 영국보다 훨씬 낙후되었던 독일에서도 황금보다 귀하던 작은 책자가 수백 만 권 넘쳐 났다. 루터에 의해 독일어로 번역된 성경과 독일어로 쓰여진 루터의 책은 일 주일만에 5천 권이 팔려나갔다. 루터는 깊은 성에 틀어 막혀서 온 유럽을 흔들었다. 바야흐로 유럽은 야성과 지성이 한꺼번에 폭발하기 시작했다. 모험가와 악당과 사기꾼과 천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화약은 송나라에서 금나라로, 금나라에서 몽골로, 몽골에서 이슬람으로, 이슬람에서 유럽으로 흘러가면서 그 성능이 급격히 향상되었다. 몽골이 난공불락의 사마르칸트를 눈 깜짝할 사이에 무너뜨린 것은 화약이었다. 대포였다. 초원을 달리는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밀면 밀리고 때리던 맞던 송나라가 양양(襄陽)에서 끄덕도 않았다. 김용의 무협소설 <<영웅문>>에서 곽정이 맹활약하던 그 양양이다. 역사왜곡의 세계 챔피언 중국인답게 이를 신나게 허구화한 것이 그 소설이다. 양양성은 사마르칸트보다 더 튼튼했다! 마침내 이를 해결한 것은 아랍인이었다. 그들은 중국의 아르키메데스였다. 쿠빌라이의 조카가 다스리던 중동의 '일 한국'에서 온 두 기술자가 만든 대포는 5년간의 포위 공격에도 가볍게 재치기나 하던 양양의 골리앗을 한 방에 쓰러뜨렸던 것이다. 어느새 이슬람교도의 화약기술이 몽골을 능가하게 이른 것이다. --<<쿠빌라이 칸>> 모리스 로사비--

이번에는 유럽 차례다. 1543년 이순신 장군이 태어나기 2년 전에 전쟁으로 수백 년간 날을 지새던 일본에 포르투갈 상인이 철포(鐵砲)를 선보인다. 중국에서 전해진 나침반을 들고 유럽의 릴리푸스(Lilliput)들이 오대양을 누비다가 '황금의 나라' 일본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아마 그들은 철포 한 정을 그만큼의 금과 바꿨을 것이다. 화약을 대포가 아닌 개인 화기(火器)로 개발했다는 데 유럽인의 창의력이 돋보인다. 이로써 지긋지긋하던 일본의 전란 시대에 종말의 씨앗이 뿌려진다. 화승총의 위력을 가장 먼저 알아챈 직전신장(織田信長 오다 노부나가)과 풍신수길이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다. 또 그것 때문에 일본은 유사이래 처음으로 조선과 명을 상대로 해적의 약탈이 아닌 국가간 전면전을 벌인다. 동아시아판 세계대전의 개막이다.

40년 전쟁에서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던 누르하치는 1626년 드디어 산해관을 넘어 명나라를 접수하러 나선다. 20만(실지로는 10만이었을 듯) 마리 호랑이가 1만 마리 강아지를 향해 질풍같이 내달렸다. 그러나 강아지가 그 덩치에 어디서 그런 소리가 나는지 천지가 무너지듯 컹컹 짖자, 하늘에서 번개같이 빠르게 불덩이가 떨어졌다. 원숭환은 산해관(山海關: 만리장성의 출발점으로 산山과 바다海 사이에서 병의 목처럼 지키는 關문)의 영원성(寧遠城)에서 선교사 탕약망(아담 샬)이 설계했다는<<명 숭정제>> -사전융신(寺田隆信 테라다 타카노부) 홍이포(紅夷砲)를 곳곳에 설치하고 태산처럼 우뚝 서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불똥 하나가 누르하치의 옷섶에도 튀었다. 누르하치는 그 후 얼마 후 양만춘의 화살을 눈에 맞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이세민처럼 천명을 다하고 쓰러진다.

--짐은 25세부터 군사를 일으켜 정벌해 온 이래 싸워서 이기지 못한 것은 없고, 공격하여 무찌르지 못한 바 없었다. 어찌하여 이 영원성은 끝내 함락하지 못하는가.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여진(女眞)은 그 숫자가 1만에 차면 감당하지 못한다."
이 말은 중국에 옛날부터 전해오는 속담이라고 한다. (<<중국의 역사>> 진순신)
이런 여진이 1577년에는 총인구가 10만밖에 안 되었다.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통일시킨 데 이어 인근 부족들을 점령한 뒤에는 40만에서 50만을 헤아리게 되었다.(<<淸史>> 임계순) 몽골족도 한족도 섞여 있었지만, 그들은 여덟 깃발 아래 한 몸처럼 움직였다. 그러나 그런 누르하치도 성능이 대폭 향상된 서양의 대포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몇 년 후 누르하치의 여덟 째 아들 청태종은 풍신수길과 똑같은 작전을 쓴다. 유교경서만이 유일무이한 진리라며 죽자고 공부만 하여 평균 35세에 급제하는 자들이 조정을 쥐락펴락하던 명나라는 송나라나 조선과 마찬가지로 건국 후 150년 가량 흐르자 당쟁이 극심하였다. 누구도 지킬 수 없는 높은 도덕을 가리키며 마치 자기 패거리들은 완벽히 지키는 것처럼 큰 소리 치면서 정적(政敵)을 몰아내는 것에 목숨을 거는 자들이 어떤 약점을 갖고 있는지, 한 눈 팔면 코가 베이고 두 눈 팔면 목이 잘리는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어진 장군들은 한 눈에 알아본다. 입에 꿀 머금은 간첩을 보내 적대국의 천하명장을 눈을 끔벅끔벅하며 나긋나긋 모함하면, 자칭 청의파(淸議派)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어 붓의 창을 휘두르고 혀의 비수를 날리고 눈총을 쏘아 충신을 역적으로 만드는 것은 여반장이다. 원숭환은 그렇게 누명을 쓰고 시장바닥에서 처형되었는데, 그가 죽자 성난 군중이 '매국노'의 유체에 달려들어 핏자국 외에는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살과 뼈를 너도나도 잘근잘근 씹어먹어 버린 것이다.
--<<명 숭정제>> -사전융신(寺田隆信 테라다 타카노부)
얼마나 '애국자'들이 악독하게 모함했던지!

이순신 장군도 그렇게 모함을 받았지만, 개돼지처럼 끌려가서 옥에 갇혔지만, 오호라, 천명이 있음에 곤장 아래 쓰러지지 않고 백의종군할 수 있었다. 황제의 명을 기다리지 않고 내부의 적이자 뇌물의 달인 모문룡을 전격적으로 처형해 버린 원숭환과 달리, 이순신 장군은 원균이 아무리 조정에 뇌물을 바리바리 바치며 모함을 해도 남몰래 일기에만 울분을 표할 뿐 둘째가라면 발끈할 패장(敗將)을, 군사도 없고 전함도 없는 패장을 동료 장군이자 선배로 대우해 주고 장계에 그 공을 부풀려 기록해 주는 한편,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 지역과 도서벽지에 인망을 하늘에 닿도록 높이 쌓아 두었기 때문에, 수백만 백성의 목숨을 구해 주고 백성을 먹여 살려 주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는 보이든 아니 보이든 눈물 세례를 받았다. 당신이 흰옷을 입고 지나가면 백성들은 너도나도 다투어 다가와서 손을 잡고 다리를 붙들고 하염없이 울었다. 당신 몸에 향유를 뿌리지는 못했지만, 남녀노소 빈부귀천 가리지 않고 너도나도 눈물로 당신의 부르튼 발을 씻어 드렸다.

청태종 황태극(皇太極 홍타이지)은 짜릿한 정보전을 펼치는 한편 아버지의 용기와 조직력을 조롱하고 와해시킨 홍이포를 개발하게 한다. 단, 기분 나쁘다며 '오랑캐' 이(夷)는 '옷' 의(衣)로 바꾸어 홍의포(紅衣砲)라 부른다. 명나라 군대도 다투어 홍이포를 들고 귀순하기도 한다. 천하무적 군대가 천하제일 대포로 무장하고 오랑캐로 오랑캐를 잡는다(以夷制夷)는 정보 전략으로 몸을 감췄으니, 인구 1억 5천이라 하지만, 전세계 부의 30&per;를 차지한다고 하지만, 스스로 무너지는 말기 암 환자는 새 왕조를 개창할 명의의 집도를 기다리며 시나브로 수술대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이순신 시대에도 세계화는 돌이킬 수 없었다. 세계화 2.0시대였다. 그를 거부하는 자는 약간의 시간을 벌 수는 있겠지만, 처절한 멸망의 거대한 입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1910년 조선이 왜적에게 강제로 무릎을 꿇게 된 것은 이미 이 때 예정되어 있었다.

(2009.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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