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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March 27, 2009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이야기(12) - 최성재

풍신수길, 이순신, 누르하치(2)


풍신수길과 이순신이 싸우자, 누르하치가 어부의 이익을 취하였다.
최성재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국가도 홀로 설 수 없다. 국가는 싫든 좋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인구 2만 명이 넘으면 국가를 형성한다고 한다.--<<총, 균, 쇠>> 제레드 다이아몬드--
인구 2만 명이 넘으면, 이해관계가 너무 복잡해져서 객관적 기준과 그 기준을 강제할 수 있는 권력과 권위가 없이는 인간 사회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은 한국사에서 특이한 시대다. 거의 자급자족 체제였다.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서, 고려와 통일신라와 삼국과 고조선은 대륙과 섬 사이에서 평화적 교류든 국가의 운명을 건 전쟁이든 국경이 항상 열려 있었다. 국경도 수시로 변했다. 곳곳에 성곽이 들어차 있었다. 힘이 약하면 언제든지 침략 당했고, 힘이 강하면 언제든지 침략했고, 힘이 균형을 이루면 수백 년간 문물을 교환하며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평화를 구가했다. 고인 물이 썩는 것처럼 중국의 평화가 병들어 백성이 도탄에 빠지면 중원의 사슴을 쫓는 내란이 일어났고, 그 여파는 그대로 삼한(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르는 개념)에 밀려와 삼한도 내란에 휩싸였다. 중국이 통일되면 새 통일세력은 마지막으로 삼한으로 힘을 배출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의 통일세력과 동맹을 맺은 신라가 600년 전쟁의 시대를 끝내고 통일의 시대를 열었다. 장한 신라가 어제의 동맹국이자 당시 세계최대 강대국인 당(唐)을 당당히 무력으로 쫓아낸 후, 동아시아에는 유례없는 긴 평화의 시대가 찾아왔다.



당과 신라, 발해와 일본은 각기 중앙집권적 통일 국가를 이루고 당나라의 법률과 제도(율령체제)를 기본으로 하여, 국내의 이해관계를 객관적으로 조정하는 제도적 틀을 마련했다. 이 시대에 동아시아의 네 나라는 요순시대보다 평화로워서 그들끼리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인도, 중동, 시베리아, 로마와도 비록 속도도 늦고 위험부담도 많았지만 두루 교류했다.



평화가 오래 지속되면 평화도 병든다. 그게 왕조의 말기 증상이다. 당과 신라와 발해의 평화가 병든 시기는 거의 일치한다. 평화가 병들었다는 것은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객관적이고 제도적인 기준이 허물어지고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기준이 판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왕족이나 귀족이나 신흥 무력집단이 저마다의 기준으로 각 집단의 이익을 최우선한다. 국고(國庫)는 텅 비고 백성은 피부와 뼈가 딱 붙어 버린다(皮骨相接). 그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근육과 지방이 사라진다.



서로가 바빠 중국은 중국대로 삼한은 삼한대로 새로운 통일국가를 형성하기 위해 내란에 휩싸인다. 송(宋)과 고려가 최종 승리자가 된다. 고려가 중국 세력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라, 중국에는 그럴 힘이 있는 나라가 없었다. 15개의 나라가 명멸했으니까(5代10國 시대). (우습게도 이걸 갖고 고려의 자주성을 찬양하고 신라의 사대성을 질타하는 자들이 있다. 속셈이 따로 있는 반민족적이고 반이성적이고 몽상적인 작자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세력 균형에 지나지 않았다. 발해를 계승한 요나라와 금나라가, 상대적으로 물자가 부족한 요와 금이 중원과 고려를 향해 약탈과 정복의 매서운 동북풍과 서북풍을 씽씽 불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고려는 눈부신 방어전을 펼친다. 모조리 오는 족족 물리친다. 오히려 고려는 영토를 조금이나마 서북과 동북으로 넓힌다. 문무(文武)가 조화를 이루고 유불(儒彿)의 대문이 서로를 향해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송은 성리학의 교조주의에 빠져 무(武)를 경시하고 백성들을 등 따습고 배부르게 하는 국정의 기본을 도외시한 결과, 양자강 이북을 다 빼앗겨 버린다. 중국 역사상 중원(中原)이 아닌 남만(南蠻)의 땅으로 쫓겨난다. 황제도 두 명이나 잡혀간다.



난공불락의 바다 덕분에 일본은 상대적으로 대륙의 영향을 늦게 받는다. 평화가 병드는 시기가 좀 늦어진다. 그러나 원나라가 중원과 고려를 도모한 후 바다를 건너기 시작할 무렵에는 이미 일본도 중국과 삼한 이상으로 격렬한 내분에 휩싸인다. 무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 1180년경이다. 무인은 더 이상 왕족과 귀족의 장식품이 아니었다. 칼의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송과 원에 이어 명이 들어서고, 삼한에는 조선이 들어서서 긴 평화를 구가할 때도, 바다의 금성철벽에 둘러싸여 일본은 200명에서 300명의 지방영주들이 각각 사실상 한 국가를 다스리고 있었다. 전쟁은 일상사였다. 언제 누가 쳐들어오고 쳐들어갈지 몰랐다. 특히 1467에서 1474년에 걸친 '응인의 난'을 계기로 전쟁은 삶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이 시대를 특히 전국(戰國)시대라 부른다.



일본이 400년에 걸친 칼의 시대에 종말을 고하게 된 때는 1590년이다. 그 기쁨의 정점(聚樂第 주라꾸다이)에서 풍신수길이 금 찻잔을 들고 복사꽃을 감상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이전으로 돌아가면, 임진왜란은 역사의 필연으로 볼 수도 있다. 조선과 명나라는 왕조 말기 증상을 앓으면서 병든 평화로 귀족들이 백성들을 기름 짜듯 두 번 세 번 네 번 쥐어짜고 있었다. 국고는 텅텅 비었다. 군대는 몽둥이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몇 명 되지도 않은 군인은 하루 두 끼 밥도 얻어먹기 어려웠다.




이항복: 요동의 병사들은 본래 병기가 없습니다. 전에 조 총병(祖摠兵: 조승훈)이 주둔하고 있는 곳에 가 보았더니 활과 화살을 가진 자는 겨우 천 명에 백 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모두 몽둥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조실록 1597/5/15>>
恒福曰: “遼兵本無器械。 前見祖總兵所屯處, 帶弓箭者, 僅千之百, 其餘皆持杖矣。”


다지(多之: 여진족 장수)가 우리나라 사람의 용약(勇弱) 여부를 동양재(?羊才: 여진족)에게 묻자, 동양재의 말이
‘만포(滿浦)에서 연회를 베풀었을 때 나열한 군사가 3백∼4백 명이 있었다. 등에는 화살통을 지고 앞에는 활집을 안았는데, 화살은 깃이 떨어지고 활촉이 없으며 활은 앞이 터지고 뒤가 파열되어 타국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이와 같은 무리에게는 궁전(弓箭)을 쓰지 않고 한 자 되는 검(劍)만 가지고도 4백∼5백 명을 벨 수 있는데, 오직 팔의 힘에 한계가 있음이 유감일 뿐이다.’고 하면서
두 사람이 서로 낄낄대며 웃었습니다. <<선조실록 1596/1/30>> --신충일이 누르하치를 만나고 와서 보고한 글에서--
多之問我國人勇弱與否於?羊才, ?羊才曰: “滿浦宴享時, 列立軍數, (弱)〔略〕有三四百。 背負矢服, 前抱弓?, 箭則羽落而無鏃, 弓則前?而後裂, 只爲他國笑資。 如此等輩, 不用弓箭, 只將一尺?, 可斫四五百。 但恨臂力有限。” 兩人相與大?。




사상도 유교의 교조주의(명나라에는 양명학이 일어났지만, 그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도 당쟁은 수그러들지 않음)에 빠져, 조선과 명은 오랑캐 땅 일본과 요동에서 새 왕조를 개창할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세력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국가보다는 계급적 이익과 집단적 이익이 우선했다. 황제도 왕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더 이상 천자(天子: 하늘의 대리인)나 임금(백성의 어버이)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백성을 더 많이 착취하는 독재자에 지나지 않았다. 독재자이되 귀족을 압도하는 게 아니라 그저 가장 크게 부패한 귀족의 하나였다.





명나라는 세종(가정제)부터 기강이 쇠퇴하여 신종(만력제) 말년 극에 이르렀다. 강명영무(剛明英武)의 임금이 있다 해도 이미 다시 떨쳐 일어나기 어렵게 되었다. 또한 천계제는 용렬하고 나약함으로 유모 객씨와 환관 위충현은 권력을 도둑질하고, 어떠한 기준도 없이 함부로 상을 주며, 부당한 형벌을 주고, 충성스럽고 선량하면 참혹한 화를 당하니, 백성은 마음을 돌렸다. 망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어찌 망하지 않을 수 있으랴. <<明史 天啓帝 본기>>





1572년 10살에 등극하여 1620년 죽을 때까지 48년간 황제의 자리에 있었던 만력제(萬曆帝)의 개인적 사치를 살펴보면, 명나라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한 눈에 들여다볼 수 있다. 만력제의 엄격한 스승이자 명나라의 대학사(명나라의 재상)였던 장거정은 중구삭금(衆口 金)의 언로(言路)는 막았지만, 국가재정은 반석 위에 올려 놓았다. 조세 대상 토지가 400만 경(頃)에서 700만 경으로 늘어났다. 식량은 10년치나 비축되었고 만성적자이던 재정은 400만 냥의 흑자로 돌아섰다. 그러나 1582년 장거정이 죽자, 고분고분하고 착하고 영민하던 만력제는 돌변했다. 젊디젊은 인간이 어디서 풍문으로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이야기를 들었는지, 자신의 무덤(定陵: 현재 개방되고 있으며 '지하궁전'이라 불림) 하나에 20살부터 6년간 800만 냥이나 쓰고, 황태자도 아닌 일개 왕자의 결혼식에 30만 냥을 썼다. 소실된 궁전의 재건에도 900만 냥을 썼다. 그나마 건설과정에서 건축비가 과다계상되어 돈들은 대부분 환관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여러 황자를 봉하는 데만 1천2백만 냥을 썼다.



조선 출병으로 군량에 수백만 냥을 쓰고<<明史 일본전>>, 누르하치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요동 군비에 만력제는 말기에 520만 냥을 증세했다. 상대적으로 만력제가 개인적으로 쓴 돈에 비하면 군사비는 얼마 되지 않는다. 이래저래 국가 재정은 거덜났다.



만력제는 이상하게 돈에 유난히 집착한 인간인데, 국가 재정에는 지극히 인색하여 관리의 자리가 비면 새 사람으로 채우지도 않았다. 13성(省) 중 9성의 어사(御史)가 공석으로 남았다. 지방의 관리도 마찬가지였다. 만력제는 장거정의 사후에 환관을 상대로 정사를 돌보았을 뿐, 황태자에 대한 자신의 의혹을 풀려는 자작극에 출연하기까지 무려 25년간 신하는 아예 만나지도 않았다. 구중궁궐에 쳐 박혀 개인적으로 돈 쓰는 일과, 뼈와 살이 녹는 환락에만 몰두했다. 제 몸 하나와 제 가족 하나 챙기는 것밖에 모르던 선조와 꽤 닮았다. 둘 다 머리도 좋았고 글도 잘했다. 사서오경을 달달 외웠다. 그러나 국가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만력제와 선조에게 국가와 백성은 황제 또는 왕을 위해 존재하는 사전(私田)이요 사노(私奴)였다.



풍신수길이 조선으로 쳐들어오자 조선은 말 그대로 칼 앞의 대나무처럼 무너졌다. 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대도 1차는 실패하고 2차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지친 평양성의 왜적을 '외교 반 군사 작전 반'으로 유유히 남하하게 만든 것 외에는 7년 내내 맥을 추지 못했다. 평양성 탈환 외에는 의미 있는 승리가 없었다. 패전 또는 지루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이 때 유일한 예외가 이순신 장군이었다. 그는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기고 또 이겼다. 일회적 승전이 아니었다. 이겨도 압도적으로 이겼다. 바다의 나라에서 바람같이 번개같이 날아온 군대를 상대로 다름 아닌 바다에서 나가면 반드시 이겼고 물러나면 반드시 지켰다. 왜적의 병참선을 거의 끊어버렸다. 부산에서 서울로 평양으로 식량을 운반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거의 불가능했다. 이순신 장군 덕분에 호남 곡창은 그대로 온존했다. 그리하여 일본에서는 1593년 쌀값이 58%나 급등했다. --<<풍신수길의 조선침략>> 북도만차(北島万次 기타시마 만지)--



또한 1593년 평양성에서 패전한 왜적은 벽제관전투에서 명예를 회복했지만, 그 세력이 30~40% 감소되었다. 편야차웅(片野次雄 가다노 쯔기오)의 <<이순신과 풍신수길>>에 따르면, 소서행장의 군대는 서울을 떠날 때는 1만1천 명이 넘었는데, 6천6백 명밖에 안 남았다. 왜적은 전투보다 굶주림으로 죽은 자가 더 많았다. 평양 전투 외에는 전투다운 전투도 없었고, 명과 왜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벽제관에 이르기까지 소풍갔다 돌아오는 아이들처럼 털끝 하나 안 다치고 내려왔던 것이다. 코 베이고 귀 베이기는커녕 코털 하나 안 뽑히고 평양에서 서울까지 룰루랄라 무사히 내려온 것이다. 거기서 다시 경상도 해안까지 사실상 명나라 군의 호위를 받으며 무사히 내려갔다. 기고만장하던 이여송의 간을 떨어뜨리던 벽제관에서도 왜적은 거의 피 흘리지 않았다. 평양탈환전에서도 죽은 사람은 대부분 조선 백성이었다. 그런데도 그처럼 왜적의 망실률이 높았던 것이다. 남해와 서해가 박홍과 원균이 지키던 수역(水域)처럼 무인지경으로 뚫려 있었으면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풍신수길이 대노하여 1593년 1월말에 20만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온다고 하자, 한양의 왜적들은 기겁한다. 그래서 그 해 2월 27일 개전 이래 처음으로 대회의를 열어 17명 장군 전원이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아 꾹꾹 서명하여 극구 만류한다. 이 때 가장 크게 내세운 것이 식량이다.



...
一, 서울에서 군량미를 구해다가 잡탕죽을 먹고 있사오며, 오는 4월 11일까지 충분히 견딜 만하오며, 모든 병사에 관한 것은 웅곡반차(熊谷半次 구마타니 한지)가 보고할 것입니다.
一, 부산포의 군량도 어려운 사장에 있어 그 곳의 보급은 5, 6일이 걸려도 도착하기 어려운 사정에 있습니다. 올 봄에 바다를 건너오신다는 그 인원수가 강을 이용하여 거슬러 올라오는 데도 5, 6일 내에는 어려운 사정에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 달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10일로는 도저히 자유로운 행동이 어려운 형편입니다.
... 1593. 3. 3.
(전쟁에 환장한 가등청정 포함 17명 연대서명)
-- <<이순신과 풍신수길>> 편야차웅(片野次雄 가다노 쯔기오)



풍신수길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보아도 '전쟁은 곧 보급'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장수다. 그는 17장군이 연대서명한 이 건의서를 보자마자, 임진왜란이 어떠한 상황에 처했는지 바로 알아차린다. 명나라 침략에 앞선 여흥(餘興) 정도로 생각했던 조선침략이, 조총 부대가 한 달도 안 되어 한양을 무혈점령하는 것을 보고 이를 거듭 확신했던 조선침략이 깊이와 폭을 알 수 없는 수렁에 빠졌음을 즉시 알아차린다. 병참선이 천 리나 뻗쳐 있어서는 '한 칼'거리도 안 되는 줄로 알았던 조선을 상대로 승전은커녕 상상도 끔직한 패전의 쓴맛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즉각 알아차린다. 그 후로 그는 조선으로 건너간다는 계획을 깨끗이 단념한다. 상황판단이 비상하게 빠르고 위기상황에서 취하는 행동은 천리마보다 빠른 풍신수길은 바로 이순신의 손길이 닿지 않는 경상도 해안으로 대대적인 철수를 명한다. 거기서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절대 무너지지 않을 천하무적 왜성을 쌓고 다음을 기약하고 기다리게 명한다.--일본군의 그 후 행동을 미루어 내가 짐작한 것으로 사료는 발견 못함.
우선 당장 군량미와 무기를 보충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이건 편야차웅의 책에도 나옴.



선조실록과 <<징비록>>을 보면, 1587년에 귤강광(橘康廣)이란 자가 조선에 사신으로 온다. 일본 측 기록을 보면, 그 자의 원래 이름은 유곡강광(柚谷康廣)이라고 한다. 이 자는 오만방자하다. <<천하가 짐(왕보다 한 급 높은 황제의 칭호)의 주먹 안에 들어왔도다>>라고 풍신수길은 큰소리친다. 선조실록에는 자세히 안 나오지만, 원래는 다음과 같은 취지란다.




조선 국왕은 일본으로 건너와 우리 조정을 알현토록 하라. 만일 듣지 않는 날이면 내 곧 군사를 내어 치러 가리니! 지금 천하는 짐의 한 주먹 안에 들어왔도다. ...
-- <<이순신과 풍신수길>> 편야차웅(片野次雄 가다노 쯔기오)




일본 국사(日本國使) 귤강광(橘康廣)이 내빙(來聘)하였다. 일본에 천황(天皇)이 있어 참람하게 기원(紀元)을 호칭하나 국사에는 간여하지 않고 국사는 관백(關白)이 청단(聽斷)한다. 관백을 대장군(大將軍)이라 부르기도 하고 대군(大君)이라 부르기도 한다. 황(皇)과 왕(王)의 칭호가 같기 때문에 관백을 왕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이다. 원씨(源氏)가 관백 노릇한 지 2백여 년이 되었는데 평수길(平秀吉)이 그를 대임하였다.

평수길은 본디 천례(賤隷)로 조상의 유래를 모르는 사람이다. 관백이 품팔이하며 빌어먹는 것을 발탁하여 군사로 삼았는데 전투를 잘하여 많은 공로를 쌓았기 때문에 대장이 되었다. 관백의 정월(旌鉞: 깃발)을 빌어서 먼 지방의 반역자를 토벌하기에 이르렀는데 국인이 그의 참월(僭越)함에 분노하여 도리어 관백을 공격해 죽였다. 수길이 회군하여 전쟁에 승첩하고 이어서 원씨(源氏)를 대대적으로 살해하고 스스로 관백이 되었다. 군사를 동원하여 사방에서 승리를 거두어 제도(諸島)를 병탄하였는데 영토가 66주이며 정병 1백만을 훈련하였으니, 일본이 이처럼 성대함은 옛날에 없었던 일이다. 평수길은 오만하여 의기양양한데다가 또 국내의 환란을 염려한 나머지 드디어 중국을 침범하려 하였다. 그러나 전세(前世)에 뱃길로 절강(浙江)을 침범하려 하다가 끝내 뜻대로 되지 않았으므로 먼저 조선을 점거하여 육지로부터 진병(進兵)하여, 요계(遼 : 요동과 북경 일대)를 엿보려 하였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들어 아는 바가 없었으니, 이는 그 나라는 법이 엄하여 행인(行人: 사신)이 한 마디 말도 누설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평수길이 자기의 임금을 시해하고 나라를 찬탈한 것을 처음 들었으나 또한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평수길이 말하기를,

"우리 사신은 매양 조선에 갔으나 조선의 사신은 오지 아니하니, 이는 우리를 얕보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귤강광을 보내어 통신(通信)을 구청(求請)하였는데, 서신의 사연이 매우 거만하여 '천하가 짐(朕)의 손아귀에 돌아왔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귤강광도 사납고 거만하여 우리나라 사람을 대하여 말할 적에는 문득 조롱하고 비난하였다. 이때 교리 유근(柳根)이 선위사(宣慰使)였고 예조 판서가 압연관(狎宴官)이었다. 귤강광이 고의로 연회석상에서 호초(胡椒)를 흩어놓으니, 기공(伎工)이 앞을 다투어 그것을 줍고 전혀 질서라고는 없었다. 귤강광이 객관에 돌아와 역관에게 말하기를,
"이 나라의 기강이 이미 허물어졌으니 거의 망하게 되었다."
하였다. 귤강광이 돌아갈 적에 그 서계(書契)에 답하되 '수로(水路)가 아득하여 사신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자 수길이 크게 노하여 귤강광을 멸족하였는데, 귤강광이 우리나라에 편을 들어서 그 소청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의심해서였다.
<<선조수정실록 1587/9/1>>
○日本國使橘康廣來聘。 日本有天皇, 僭號紀元, 而不預國事, 國事聽於關白。 關白稱大將軍, 或稱大君, 以皇王同稱, 故關白不得稱王。 源氏爲關白二百餘年, 而平秀吉代之。 秀吉者, 本賤隷人, 不知自出。 關白拔之於傭?, 爲卒伍, 善戰積功爲大將, 至假關白旌鉞, 討叛遠道, 國人怒其僭越, 反攻關白殺之。 秀吉回軍戰捷, 仍大殲源氏, 自立爲關白。 用兵四克, 幷呑諸島, 提封六十六州, 鍊精兵百萬, 日本之盛, 古未有也。 秀吉志滿意得, 又慮內患, 遂欲侵犯中國, 以前世舟犯江浙, 終不得意, 欲先據朝鮮, 從陸進兵, 以窺遼、?, 而我國邈然無聞知。 蓋由其國法嚴, 行人不洩一辭也。 我國初聞秀吉弑君簒國, 而亦不詳其故矣。 秀吉言: “我使每至朝鮮, 而朝鮮使不至, 是, 卑我也。” 遂使康廣, 來求通信, 書辭甚倨, 有天下歸朕一握之語。 康廣亦傑?, 對我人語, 輒嘲諷。 時, 校理柳根爲宣慰使, 禮曹判書狎宴。 康廣故散胡椒於席上, 伎工爭取之, 無復倫次。 歸館語譯官曰: “此國紀綱已毁, 幾亡矣。” 康廣之還, 但答其書契, 而稱以水路迷昧, 不許送使。 秀吉大怒, 族殺康廣, 疑康廣右我國, 不遂其請也。




대체로 1587년 이 해부터 풍신수길이 명과 조선을 도모하기 시작한 걸로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 그보다 2년 전인 1585년에 이미 명나라와 조선을 포함한 천하통일 곧 제1차대동아공영권을 꿈꾸기 시작했다. 이를 증빙하는 문서가 발견된 것이다.
--<<풍신수길의 조선침략>> 북도만차(北島万次 기타시마 만지)--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정두희--



1585년이라면, 구주(九州)도 정복 못했다. 5대의 전통으로 관동에 뿌리박은 북조(北條 호죠) 가문을 멸망시키기 5년 전이다. 겉보기에 통일은 아직 요원했다. 그런데도 풍신수길은 통일을 기정사실화하고 그 다음 단계의 웅지를 펼치고 있다. 조선침략이 일시적인 과대망상이 아니라는 증거다. 1587년 풍신수길은 25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구주를 복속시킨다. 이어서 1590년 풍신수길은 덕천가강과 연합하여 30만 대군 곧 조선침략에 동원된 16만의 약 두 배를 이끌고 조총도 수만 정 준비하여 북조 가문을 완벽하게 제압한다. 그로써 기나긴 전쟁 시대가 종말을 고한다. 백성들로부터 무기를 회수한다. 그 사이에 그는 대마도의 종의지(宗義智)를 앞세워 조선에 계속 압력을 가한다. 다음 기회에 자세히 밝히겠지만, 종의지는 풍신수길의 요구가 터무니없다는 판단과 나름대로 중간자적 입장으로 풍신수길의 외교문서를 위조한다.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아닌 제3자의 입장에서 볼 때, 풍신수길은 전혀 다른 면모를 갖는 듯하다. 네덜란드인 W.J. Boot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권좌에 오른 첫 10년간, 문제의 그 인물은 통찰력 있고 용의주도하며 체계적인 계획에 따라 움직였다. 그는 압도적인 군세를 보유한 상황에서, 의심할 바 없이 적법하며 뭔가 현실적인 목표가 있는 전쟁이 아닌 한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역사의 기록을 볼 때, 우리는 풍신수길의 행동이 현대적인 이성의 기준에 부합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의 몇몇 행동이 동시대인들에게는 놀라움이나 충격으로 다가왔겠지만,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릴 만큼 비정상적인 것은 절대 아니었다. 분명히 당시의 이성적 판단 및 계산에 따르면, 그를 섬기는 편이 그에게 맞서 궐기하는 위험에 비해 훨씬 유익했다.

풍신수길은 말년에 후궁들과 놀아나며 부하들에게 나라를 맡기거나 하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직접 국정을 관리했다. <<'조선정벌기' 속의 임진왜란>>





조선과 명이 왕조 말기 증상을 앓고 있어서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 봉사하는 지도자들이 극히 드물었고, 양국 모두 국가 재정이 이미 파탄 난 지 오래되었고, 군대는 장부상으로 존재할 뿐 숫자도 터무니없이 적은 데다 하나같이 오합지졸이었고, 민심이 극도로 이반되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풍신수길은 충분히 제1차대동아공영권을 꿈꿀 만했다. 당시는 전쟁에 대한 도덕적 기준도 그리 엄격하지 않았다. 군사력이 약한 송과 명과 조선이 입과 손가락만으로 분기탱천했을 따름이다. 자신들은 힘없는 백성을 상대로 탐관오리의 길을 걸으면서! 조선이 강했으면, 만주에 이어 중국을 삼켜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었다. 일본을 조선의 속국으로 만들어도 대들 사람도 없었다. 승자가 곧 법이었다. 제1차대동아공영권의 가능성은 지난번에도 언급했듯이 일본에 비하면 인구나 군대나 새 발의 피처럼 보잘것없었던 여진족이 조선과 중국을 어린애 팔 비틀기로 유린하고 통치하고 신복(臣服)시켰던 것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592년 5월부터 1598년 11월 사이에 조선에서 너무도 이질적인 역사의 기적이 일어났다. 지금 생각해도 냉정한 이성적 판단에 따르면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일이기에 기적이다. 그것은 이순신 장군의 위업이다. 그는 붓의 나라에서 칼도 아닌 총의 나라를 상대로 싸웠다 하면 모조리 압도적으로 이겨 버렸던 것이다. 성(城)이 있어도 지킬 줄 모르고(제1차 진주성 싸움과 행주산성 싸움 등은 희귀한 예외) 화포가 있어도 사용할 줄 모르는 나라에서, 나라 전체가 1만 명의 정병도 훈련시키고 유지하지 못하던 나라에서, 일본처럼 소속 백성에 대해 생사여탈권을 가진 영주의 신분도 아니고 왕의 인사권에 의해 언제든지 파면될 수 있는 일개 변방 장수로서 군대도 식량도 무기도 스스로 마련하면서, 그런 승첩을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간 것이다. 왜적의 보급로를 끊어 그들이 전쟁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도록 풍신수길의 대망을 저지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풍신수길과 이순신 장군은 누르하치에게 가장 큰 도움을 주었다. 누르하치가 어부의 이익을 취하게 만들었다. 누르하치는 죽어서도 구름 위에서 이순신 장군의 뜻을 이어받지 못한 조선을 상대로 아들 대에 두 번이나 어린애 손가락 부러뜨리기로 유린하여 아예 신하의 나라로 만들어 버렸다. 이순신 장군이 없는 조선은 그처럼 순식간에 두 번이나 궤멸했다. 실지로 임금이 이마에 피를 철철 흘리며 항복했다. 선조가 하늘에서 그 장면을 내려다봤다면, 이순신 장군에게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감사하다고, 적으로부터 치욕을 겪지 않게 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처첩과 더불어 후세의 김정일이나 노무현처럼 성질 다 부리며 살고도 천수를 다하게 해서 감사하다고.
(2009.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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