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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April 30, 2009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이야기(15) - 최성재

풍신수길, 이순신, 누르하치(5)

풍신수길과 누르하치는 각기 400년 동안 축적된 역사가 피워낸 꽃이요 열매였다.
최성재


이순신은 담력과 지략이 있고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다. --징비록, 유성룡--

이순신의 사람됨은 말과 웃음이 적었다. 용모는 단아하여 마음을 닦고 몸가짐을 삼가는 선비와 같았으나 속에 담력과 용기가 있어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이는 곧 그가 평소에 이러한 바탕을 쌓아 온 때문이다.

그의 형님 이희신과 이요신은 둘 다 먼저 죽었으므로, 이순신은 그들이 남겨 놓은 자녀들을 자기 아들딸처럼 어루만져 길렀으며, 무릇 시집보내고 장가들이는 일은 반드시 조카들을 먼저 한 뒤에야 아들딸을 결혼시켰다.

이순신은 재주가 있었으나 운수가 없어서 100가지의 경륜 가운데서 1가지도 뜻대로 베풀지 못하고 죽었다. --징비록, 유성룡--

수길의 용모는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얼굴은 검고 주름져 원숭이 형상이었다. 눈은 쑥 들어갔으나 동자가 빛나 사람을 쏘아보았는데, 사모(紗帽)와 흑포(黑袍) 차림으로 방석을 포개어 앉고 신하 몇 명이 배열해 모시었다. 사신이 좌석으로 나아가니, 연회의 도구는 배설하지 않고 앞에다 탁자 하나를 놓고 그 위에 떡 한 접시를 놓았으며 옹기사발로 술을 치는데 술도 탁주였다. 세 순배를 돌리고 끝내었는데 수작(酬酢)하고 읍배(揖拜)하는 예는 없었다.

--선조수정실록 1591/3/1--

秀吉容貌矮陋, 面色皺黑, 如猱玃狀。 深目星眸, 閃閃射人, 紗帽、黑袍, 重席地坐, 諸臣數人列侍。 使臣就席, 不設宴具, 前置一卓, 熟餠一器, 瓦甌行酒, 酒亦濁, 三巡而罷, 無酬酢拜揖之禮。

선조: 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

황윤길: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김성일: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선조수정실록 1591/3/1--


秀吉容貌矮陋, 面色皺黑, 如猱玃狀。 深目星眸, 閃閃射人, 紗帽、黑袍, 重席地坐, 諸臣數人列侍。 使臣就席, 不設宴具, 前置一卓, 熟餠一器, 瓦甌行酒, 酒亦濁, 三巡而罷, 無酬酢拜揖之禮。

上問秀吉何狀, 允吉言: “其目光爍爍, 似是膽智人也。” 誠一曰: “其目如鼠, 不足畏也。”


평수길은 살마주(萨摩州)의 종 출신인데, 남자답고 건장하며 활달하고 민첩하고 구변(口辯)이 좋더라. --明史, 일본열전--

平秀吉,萨摩州人之奴,雄健跷捷,有口辩。

이에 국왕이 거처하는 산성을 고쳐 큰 대궐을 짓고 성곽을 웅대하게 건축하고 궁전을 건립하니, 그 누각이 아홉 겹에 이르렀다. 그 안에는 실로 부녀자와 진귀한 보석이 있었다. 법률의 집행이 엄격했으니 군대가 나아감에 물러섬이 없었다. 이를 위반한 자는 아들과 사위라도 예외 없이 주살(誅殺)했다. 그래서 진격하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다. 이에 연호를 고쳐 문록이라 하고 중국을 침략하고 조선을 멸망시킬 욕망을 아울러 가졌다. --明史, 일본열전--

乃改国王所居山城为大阁,广筑城郭,建宫殿,其楼阁有至九重者,实妇女珍宝其中。其用法严,军行有进无退,违者虽子婿必诛,以故所向无敌。乃改元文禄,并欲侵中国,灭朝鲜而有之。

수길이 여러 성의 군사를 크게 정복한 후 3년치의 군량을 쌓아 두고 장차 중국을 침략할 야망을 품었다. --明史, 일본열전--

*诸三岁粮에서 ‘诸’는 ‘儲(저: 쌓다)’의 오기인 듯, 필자가 구한 사본은 간체자(簡體字) ‘诸’로 되어 있으니까, 오기라기보다 원문 ‘儲’를 이렇게 썼을지도 모름.

秀吉广征诸镇兵,诸三岁粮,欲自将以犯中国。--明史, 일본열전--

노추(奴酋 큰 두령: 누르하치)는 비대하거나 수척한 편도 아닌데, 체구가 건장하고 코는 곧고 크며, 얼굴은 야무지면서 길었습니다. --선조실록 1596/1/30--

奴酋, 不肥不瘦, 軀幹壯健, ? ?簅 面鐵而長

노추 형제의 처와 제장(諸將)의 처는 모두 남벽(南壁)의 온돌 밑에 섰는데, 노추의 형제는 남쪽의 동쪽 모퉁이 땅위에서 서북쪽을 향하여 검은 의자에 앉았고 제장은 모두 소추(누르하치의 동생)의 뒤에 시립하였습니다. 술이 두어 순배 돈 후에 올라부락(兀剌部落)의 새로 항복한 장수 부자태(夫者太)가 일어나 춤을 추었고, 노추도 문득 의자에서 내려와 비파를 퉁기면서 몸을 흔들었습니다. --선조실록 1596/1/30--

奴酋兄弟妻及諸將妻, 皆立於南壁炕下; 奴酋兄弟, 則南行東隅地上, 向西北, 坐黑漆倚子, 諸將俱立於奴酋後。 酒數巡, 兀剌部落新降將夫者太起舞, 奴酋便下倚子, 自彈琵琶, 聳動其身。

호인들의 말이 ‘전일에는 출입하는 자가 반드시 궁시(弓矢)를 휴대하여야만 서로 침해하며 노략질하는 환란을 피할 수 있었는데, 왕자(王子)가 단속한 후부터는 원근의 출행에 마편(馬鞭)만을 가지고 다녀도 되니 왕자의 위덕(威德)은 비길 데가 없다.’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전에는 자의에 맡겨 행동하게 하고 또 사냥으로 생업을 도왔는데, 지금은 행동을 속박하고 또 사냥한 것을 바치게 한다. 비록 그를 두려워하여 말하지는 못하나 마음속으로야 어찌 원망이 없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1596/1/30--

胡人等言: “在前日, 胡人之凡有出入者, 必佩持弓矢, 以避相侵害搶掠之患, 自王子管束之後, 遠近行走, 只持馬鞭。 王子威德, 無所議擬。” 或言: “前則一任自意行止, 亦且田獵資生, 今則旣束行止, 又納所獵。 雖畏彼不言, 中心豈無怨苦?” 云。

회첩(回帖) 속에 찍힌 인(印)을 살펴보니 ‘건주좌위의 인[建州左衛之印]’이라고 전각되어 있었습니다. --선조실록 1596/1/30--

觀回帖中印迹, 篆之以建州左衛之印。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걸쳐 동아시아의 향후 300년 역사를 송두리째 바꾼 세 인물, 이순신 장군, 풍신수길, 누르하치의 인물됨을 기록을 통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풍신수길과 누르하치가 확립한 새 질서는 초창기의 이 편린(片鱗)에서 많은 것이 드러난다. 그들은 무엇보다 수백 년간 ‘법보다 주먹이 앞서던’ 시대를 종식시키고 ‘주먹보다 법이 앞서는’ 새 시대를 만들었고, 여자를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었다.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빠졌던 1595년 12월 22일에서 12월 28일, 여진을 직접 찾아간 신충일(申忠一)이 자세하게 기록한 누르하치의 이모저모는 청나라를 연구함에 있어서 어떤 것보다 귀중한 1차 사료다. 후에 청나라 건국으로 누르하치는 신의 반열로 올라서기 때문에 이런 생생한 모습은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에서 보면, 신충일이 외국의 사신이 갔을 때, 여진 건주위의 주요 장군들이 총집합하는데, 거기엔 여자들도 당당히 참여한다. 남녀의 따로따로 앉기가 7세부터 시작되었던 조선에 비하면 하늘과 땅처럼 다른 풍습이다. 누르하치 형제를 포함하여 여러 장수의 부인들은 가장 따뜻한 남쪽에 그것도 온돌이 있는 곳에 서 있었다. 앉은 사람은 누르하치와 누르하치의 친동생뿐이다.

한편 풍신수길은 말 그대로 구중궁궐(九重宮闕)을 새로 지어 가장 깊숙한 곳에 부녀자와 보석을 할당하여 그들을 보호하거나 저장한다. 이것은 곧 다음을 상징한다.

‘전쟁 끝, 평화 시작!’

‘불행 끝, 행복 시작!’

‘증오 끝, 사랑 시작!’

일본은 12세기 말 이래로 약 400년간 전세계 어떤 곳보다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그것도 말도 다르고 옷도 다른 외국인을 상대로 한 전쟁이 아니라 친구도 사제(師弟)도 주종(主從)도 부모형제도 부부도 언제 어느 때 원수가 될지 모르는 내란이었다. 신라 통일로 따지면 1300년, 고려의 재통일로 따지면 1000년 만에 소련과 중공의 괴뢰가 그들의 무기와 군대를 대거 끌어들여 일으킨 동족상잔은 반세기가 지났지만, 남북의 7천만 마음속에서 아직도 증오의 용암이 부글부글 들끓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상황임을 생각해 볼 때, 내란이 얼마나 인간성을 말살하는지 알고 남음이 있다. 남북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재통일되지 않는 한, 이 저주스러운 증오는 그칠 리 없다.

누르하치의 여진족도 일본과 마찬가지였다. 중원에는 명(明)이 한반도에는 조선이 각각 들어서면서, 여진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남쪽으로는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으로 쫓겨났고, 서쪽으로는 요서 이동으로 쫓겨났다. 명나라의 분할통치(divide and rule) 정책에 따라 400여(衛384, 所20)개의 작은 부락으로 갈가리 찢어지고 갈라지고 흩어져서 서로 명나라의 고임을 받으려고 애쓰며 동족을 상대로 한 하늘을 머리에 둘 수 없는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증오의 수렁에 빠져, 나이 7살만 되면 누구든지 몸에 무기를 들고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다. 중원과 멀리 중앙아시아까지 세력을 떨쳤던 금(金)이 망한 이후로 치면, 무려 400여년 만에 그들은 드디어 민족의 영웅을 맞이하게 이르렀다. 머잖아 여진족을 통일하고 나면 싸워도 조선이나 중국을 상대로 싸우고, 황금처럼 빛나는 동족끼리는 법과 상식과 말로 분쟁을 해결하는 세상을 만들게 된다. 신충일이 여진의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간 때는 이런 통일(여진족의 완전한 통일은 1616년 후금을 건국한 지 3년째인 1619년)의 기운이 거세게 일던 무렵이었다.

이 해 1595년에 누르하치는 명이 여진에게 주는 최고의 영예인 용호(龍虎)장군이 된다. 일본으로 치면 직전신장이 우대신(우의정)이 되고 풍신수길이 관백(關白: 關은 관문, 白은 ‘주인 白’할 때의 그 ‘白’으로 ‘말하다’의 뜻임. 천황에게 하는 말은 모두 이 관문을 거쳐야 하므로 사실상 천황보다 높은 제1인자가 됨. 스탈린이 레닌이 병상에 눕게 되자 이런 역할로 독재 권력을 완벽히 장악했고, 김정일은 1985년 무렵 이런 식으로 김일성을 바지저고리로 만들고 사실상 유일한 독재자가 됨.)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군벌의 힘이 크게 차이나지 않는 상황에서 이렇게 명분을 장악하면, 통일의 절반이 이뤄진다.

왕건이 망해가는 신라에게 유화정책을 씀으로써 천명(天命)을 이어받아 자신보다 훨씬 강했던 후백제의 견훤을 물리치고 새 왕조를 개창한 것도 마찬가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남북통일도 인권과 자유와 평등, 법치와 전통과 역사 등 보편타당한 명분을 선점한 쪽이 통일의 주역이 될 것이다. 머릿속의 평등과 계급투쟁적 민족과 마르크스적 정통성에서 각각 수식어 ‘머릿속의’ ‘계급투쟁적’ ‘마르크스의’란 말을 교묘하게 감추고 막연하게 평등과 민족과 정통성을 앞세워 명분을 선점하려는 김씨공산왕조와 그 추종자나 ‘쓸모 있는 바보’들에게 알든 모르든 명분을 빼앗기면, 통일은 그만큼 요원해지고 그만큼 더 많은 피의 강이 흐른다.

신충일이 찾아갔을 때, 엉성하긴 하지만 누르하치가 머무는 성채는 세 겹으로 이루어졌음을 발견한다. 내성과 외성 그리고 외성 바깥, 이런 구조인데, 내성에는 누루하치 일족이 살고 외성에는 각 장군이자 부족장, 외성 바깥에는 군인이 산다.

외성 안에는 호가(胡家)가 겨우 3백 채, 내성 안에는 호가가 1백 채, 외성 밑 사면에는 호가가 4백여 채가 되었습니다.

내성 안에는 친근한 족류가 살며, 외성 안에는 모든 장수 및 족당(族黨)이 살고 외성 밑에 사는 자는 모두 군인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1595/1/30--

一, 外城中, 胡家纔三百餘; 內城中, 胡家百餘; 外城底四面, 胡家四百餘。

一, 內城中, 親近族類居之; 外城中, 諸將及族黨居之; 外城底居生者, 皆軍人云。

이건 바로 일본에서 직전신장이 처음으로 시작한 것인데, 저 유명한 안토(安土 아즈치)성이 바로 그것이다. 누르하치의 그것이나 직전신장의 그것이나 이것은 지방분권을 종식시키고 중앙집권으로 권력을 일원화하는 첫 걸음이다. 어제까지 칼을 겨누고 싸우던 무리들을 한 곳에 모아 이제는 한 식구로 살게 만든다. 아내와 자식도 포함하여 모두 한 곳에 모아서 산다. 이제 평화다, 우리는 이제 한 식구다, 서로 오순도순 살자, 더 힘을 길러 나라를 통일하자, 통일하면 그들도 용서하고 다 이처럼 살자, 우리는 전쟁이 목표가 아니라 평화가 목표다, 살인을 위한 살인은 더 이상 없다, 보라! 서로 매일 얼굴을 맞대고 인사하고 식사를 같이 하고 노래하고 춤추니 그 아니 즐거운가!

이렇게 한데 모여 삶으로써 언제든지 이해관계에 따라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할 수도 있다. 지방으로 부족장이나 영주나 장군이 흩어지면 언제 다시 실력을 길러 도전할지 모르지만, 엄격한 조직과 정다운 공동생활을 통해 친선을 다지다 보면, 반란의 싹은 절로 없어지고 설령 있더라도 금방 발각된다. 직전신장과 풍신수길은 처음부터 그랬지만 성 아래에는 시장을 조성하고 사통팔달 도로를 시원하게 뚫고 새로 편입한 모든 땅에서는 관세(關稅)도 없애서 상공업자가 자유롭게 이윤을 추구하여 멋진 신세계가 펼쳐지면서 경제가 활발해지도록 만들었다. 후에 누르하치도 그렇게 한다. 이들은 서로 벤치마킹한 적이 없지만, 본능적인 정치 감각으로 그렇게 할 줄 알았다. 평화가 봄바람처럼 불어오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새 세상을 만들었다. 군사적 재능만 있는 자는 절대 이런 새 세상을 만들지 못한다.

전쟁이 끝난 후 가장 비참한 자는 군인이 아니라 패자(敗者)의 가족이다. 여자는 유린당하고 어린이는 학살되거나 노예가 된다. 패자(敗者)의 여자는 원수의 씨를 뱃속에 길러야 하거나 한 순간 쾌락의 대상이 된 후 비참하게 살해된다. 신라와의 희망 없는 최후 결전을 앞두고, 계백 장군이 가족을 무참히 살해한 것은 그런 비극을 차마 가족에게 안겨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1000년이 흐르고 다시 300년이 흐른 후에도 누가 눈물을 흘리지 않으랴!

누르하치가 부녀자들에게 가장 좋은 자리를 내 준 것은, 승리한 수컷 사자가 암컷을 독차지하고 이전의 새끼를 물어 죽이는 것처럼 여자는 독차지하고 아이는 죽이던 악습에서 벗어나, 승자가 어제까지만 해도 원수였던 패자(敗者)의 부녀자들을 그들에게 고스란히 돌려 주고 각자의 가족은 각자가 보살피며 평등하게 오순도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관대함에 어느 누군들 심복하지 않으랴!

풍신수길이 여자를 구중궁궐에 보물과 함께 보호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제 더 이상 승자의 최대 쾌락인 강간은 없다. 설령 최후의 순간이 오더라도 보석으로 몸을 지킬 수 있다. 실지로 풍신수길은 어마어마한 황금을 대판(大阪 오사카)성에 보관하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석 자 칼보다 무서운 세 치 혀에 의해 가족이 언제든지 풍비박산(風飛雹散)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었다. 일본과 여진과 조선 중에서 겉보기에는 가장 평화로운 사회에 살고 있었지만, 풍신수길과 누르하치가 등장한 후 조선은 가장 불안한 세상에 살고 있었다. 그들 나라 사람들은 새로운 질서가 도입되고 새로운 법률이 칼같이 집행되어 올바르게 사는 사람, 양심 바르게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 법을 어긴 자는 최고 지도자의 아들이나 사위라 할지라도 용서받지 못했지만, 법을 지키는 자는 노비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세상을 만들게 이른다. 능력의 사회가 펼쳐진다. 누구든 능력을 발휘하면 어제의 종도 최고 지도자가 될 수 있고, 어제의 명나라 앞잡이(누르하치는 뜻을 세울 수 있을 때까지 철저히 명나라에 아첨하고 비굴하게 굴어 경제적 이권을 독점하고 군사적 역량을 몰래 키움)도 민족통일의 영웅이 되는 사회였다. 조선은 정반대다. 돈과 패거리와 아첨이 질서와 법과 양심을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이순신 장군은 혀와 붓의 도산검림(刀山劍林) 속에서 입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고 히히덕거리며 함부로 웃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양심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정의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아첨할 수는 없었고 뇌물을 바칠 수는 없었고 당쟁의 끈을 슬그머니 잡을 수는 없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능력을 발휘할수록 그는 질시와 모함의 대상이 되었다. 나라를 홀로 구한 것이 죄가 되어 서울로 압송된 경우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함경도에서 여진족과 싸우던 때도, 전라도 발포에서 성실하게 근무하던 때도 오히려 잘했기 때문에, 그러나, 뇌물을 안 바치고 아첨을 안 했기 때문에 조정에 끈을 대지 않았기 때문에, 삭관박탈 당하고 백의종군했다. 조카들까지 줄줄이 떠맡아 먹여 살릴 식구가 누구보다 많았지만, 물욕이나 명예욕이나 권력욕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 세 번이나 삭관박탈 당하고 두 번이나 백의종군했다. 만약 이순신 장군이 만주나 일본에 태어났다면, 하늘을 어루만지고 땅을 주무르는 그 재주로 보아 풍신수길이나 누르하치를 부하로 거느렸을 것이다. 중국의 황제가 되거나 일본의 장군(將軍 쇼군)이 되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은 삭관박탈 당하고 백의종군할 때 더욱 잘 나타난다. 너무도 담담하다. 생사를 초월한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변명 한 마디 않는다. 예, 아니오, 라고 하거나 물적 증거(함경도에선 적군에 비해서 아군의 숫자가 너무 적으므로 원병을 청한 후 그 사본을 보관했고, 전라도에선 휘하의 군사와 병기고가 이웃 고을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한 1등임을 기록해 두었음. 나중에 따로 자세히 밝힐 예정임.)를 댄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사랑하는 조국이 있음에 굴욕을 굴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묵묵히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계속한다. 그저 모기한테 한 방 물린 것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모기에게 물리고 칼을 빼드는 것만큼 우스운 인간도 없는 법이다. 철저한 신분 사회에서 그는 지위가 높든 낮든 개의치 않고 한결같은 생활을 계속한다.

놀랍게도 풍신수길과 이순신 장군과 누르하치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지만, 공통점이 많다. 그것은 각 민족의 이 영웅들이 아랫사람을 대할 때 가장 잘 나타난다. 7년 전쟁의 와중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선, 그 지방에 사는 백성들에겐

일사불란한 조직이 있었고,

누구나 승복하는 신상필벌(信賞必罰)이 있었고,

만인이 평등한 법이 있었고,

활발한 생업이 있었고,

능력의 만개가 있었고,

빛나는 눈동자가 있었고,

군침 도는 음식이 있었고,

물자를 아끼는 검소함이 있었고,

평등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고,

신뢰가 있었고,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허례의식(虛禮儀式)과 권위의식(權威意識)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풍신수길은 무려 3년치의 군량을 쌓아 놓고도 외국 사신에게 간단하게 탁주 몇 잔 대접할 뿐, 복잡한 의식으로 거들먹거리지 않았다. 풍신수길은 늦둥이 아들을 안고 나와서 옷에 오줌을 싸자,

깔깔 웃고는 안으로 들어가 사람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눈을 빛내며 조선에서 온 사신의 외교문서에 대해 긴밀히 의논했다. 누르하치는 항복한 장군이 춤을 추자, 자기도 거기에 답하여 친히 비파를 뜯으며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풍신수길은 직전신장이 살아 있을 때는 자식이 없는 몸으로 그의 아들을 입양함으로 자기가 죽으면 그 영지가 모조리 직전의 가문으로 가도록 하는 등 철저히 충성을 다 바쳤지만, 막상 일인자가 되자 일본이 옛날부터 중국과 동등한 황제국이라는 의미에서 연호(年號)를 새로 제정했다. 명나라에 조공을 바친다는 것은 애초에 생각도 않았던 일이다. 썩은 명나라에 기대어 일개 사신에게도 비굴하게 큰 절을 올리려고 애걸복걸하던 조선의 왕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한편, 누르하치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 보고 명나라에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하며 조선의 사신에게 보내는 외교문서에 고작 ‘건주 좌위(建州左衛)’라고 자신을 낮추었다. 그러나 그도 때가 되자, 저 유명한 7대한(大恨)을 외치며 원수의 나라 명을 멸망시키고 황제로 등극하려 했다. 그들은 권위는 절로 따로 오는 것이지 스스로 내세우면 도리어 천 리 만 리 달아난다는 것을 잘 알았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어떠했는가. 종의 아픔도 아파하고 졸병의 죽음도 못 견뎌 하면서, 운주당(運籌堂)을 상시로 개방해 놓고 장수만이 아니라 일개 병사도 노비도 농민도 어부도 목동도 누구나 와서 정보와 의견을 알려 주고 건의하게 했다. 또한 삭관박탈 당하고 백의종군해도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늘 한결같았다.

그러나 적을 대할 때는 이들 셋은 추상과 같았다. 아군은 가능하면 피해를 입히지 않고 적군에겐 가능하면 큰 피해를 주거나 숫제 무혈로 제압했다. 항복한 자는 어제의 죄를 묻지 않고 관대하게 대했다. 이순신 장군은 항복한 왜가 부탁하자, 그들끼리 민속놀이를 즐기는 것을 허용한 일도 있다.

어두워질 무렵 항복해 온 왜인들이 광대놀이를 벌였다. 장수된 자로서는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니었지만, 귀순하여 따르는 왜인들이 간절히 바라기에 금하지 않았다.

--난중일기 1596/7/13--

昏降倭等多張優戱 爲將者不可坐視而歸附之倭懇欲庭戱 故不禁也

일본과 여진(滿洲는 누르하치가 퍼뜨린 말로 지혜의 부처 문수보살의 文殊에서 왔다고 함)은 삶이 곧 전쟁이었으니까, 평소의 신체단련이, 평소의 성 쌓기가, 평소의 해자(垓字) 파기가, 평소의 사냥이 모두 전쟁 연습이었다. 따라서 재능이 탁월한 사람은 약간의 운만 따르면 장군으로서 입신출세하기가 식은 죽 먹기였다. 공차는 재주를 타고난 자가 브라질에서 프로 축구 선수되기처럼 쉽고 재미있었다.

조선은 정반대였다. 평소의 음주가무가, 평소의 독서가, 평소의 음모가, 평소의 눈치 보기가, 평소의 가렴주구가, 평소의 세금 포탈이, 평소의 병역 기피가, 평소의 패거리 짓기가, 평소의 멱살잡이가, 평소의 예절타령이, 평소의 시문 짓기가, 평소의 큰소리치기가 모조리 전쟁에서 도망치기 연습이었다.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도 장군으로 입신출세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인도에서 세계 최고 피겨스케이팅 선수되기보다 어렵고 무망(無望)했다. 너도나도 달아난 게 실은 정상이었다. 그것은 양떼가 늑대를 보면 본능적으로 달아나는 것과 같았다.

풍신수길과 누르하치가 전쟁 영웅이 되고 새로운 질서를 가져온 것은 각기 400년 동안 축적된 역사가 피워낸 자연스러운 꽃이요 열매였다. 굳이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보다는 못해도 누군가 그를 대신할 사람이 나올 기회의 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불세출의 영웅이 되고 고립무원의 작은 전라도의 섬과 해안에서 전쟁 중에 새로운 질서를 잠시나마 도입한 것은 아무리 봐도 기적이다.
(2009.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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