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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March 28, 2009

요지경 세상

2009년 3월 25일, 샘 브라운백 미연방국회 상원의원(캔자스 주/공화당)은 연방국회 상원회의장 연단에 우뚝 서서 25분간 6자회담 미국측 대표 크리스 힐의 駐이라크 美대사 임명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결연히 선언했습니다. 바로 그 전날, 3월 24일, 韓민족 수천년 역사에서 최고의 악질이자 역적인 도요타 제갈 대중은 하버드 대학교에 와서 그 추한 늙은 아가리로 자신의 상전 살인마 김정일을 변호 두호하는 새빨간 거짓말 발언을 했습니다. 선과 악의 대결, 거짓과 진실의 대결은 한반도에서는 물론 미국에서도 매일 벌어지고 있습니다.

샘 브라운백 상원의원의 발언 요지:

본인과 美국회에게 북한인권을 따지겠다고 제 입으로 약속하곤 북한주민들을 기아와 정치범수용소로 학살하는 김정일 편에 서서 북한인권을 외면 묵살하고 미국의 안보를 벼랑끝으로 몬 크리스 김정힐을 주이라크 대사로 임명한다는 것은 미국법(2004년 북한인권법)을 무시하고, 미국의 기본이념(자유 인권)을 외면하는 짓이며, 미국의 안보를 거짓말쟁이에게 맡기겠다는 짓이다. 절대로 수긍할 수 없다!

샘 브라운백 의원, 파이팅!

빨갱이 개대중의 발언 요지:

김정일 위원장님께서 미사일이 아니라 인공위성을 곧 날리실텐데, 그것은 미국과 협상하기 위한 전주곡으로, 미국과 북한이 앞으로는 6자회담에서 잘 협상하여 한반도는 평화적으로 통일될 것입니다.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소련과 미국에 있으며, 한반도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남한을 통째로 김위원장님께 갖다 바쳐야 전쟁을 막을 수 있습니다. 전쟁은 절대로 안 됩니다!

만고의 역적 사깃꾼 개대중은 늙은 아가리좀 닥쳐라!

필자가 샘 브라운백 의원을 안 지도 7년이 넘었습니다. 2002년 9월, 탈북소년 장길수 그림 북한인권 전시회를 미국회 건물 럿셀 로툰다에서 주관해주시고, 2003년 10월, 워싱턴에 오신 황장엽 선생과 단독면담을 하시고, 2004년 미국회의 북한인권법 통과에 제일 앞장 서시고, 북한인권 탈북자 일이라면 만사를 제치고 우리 엔지오들을 도와주신 분입니다. 엊그제 연설에서도 북한에서 굶어죽은 어린아이들의 사진은 물론,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인공위성 사진과 나치의 아우슈비츠 사진들을 들고 나와, 북한인권 참상을 다시 고발하셨습니다. 우리가 저들을 그냥 내버려 두면 우리는 나치들의 홀로코스트에 맞먹는 인종학살에 또 외면하는 것입니다. 김정일의 핵이 아니라, 북한인권입니다!

미국 정치가 샘 브라운백 상원의원이 북한인권운동에 앞장 서서 김정일, 김정-힐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前 대통령이란 개대중은 미국에까지 날아와서 김정일의 핵미사일 공갈협박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現대통령이란 이명박은 무엇이 그리 무서운지 청와대에 숨어서 빨갱이 사깃꾼 개대중의 개소리에 찍소리 한 마디도 못하고 있습니다.

부시 정책은 몽땅 쓰레기통에 쳐박겠다고 공언하던 바락 오바마가 유독 대북정책에서만은 부시 2기의 완패정책 6자회담을 그대로 유지하고, 6자회담의 사깃꾼 크리스 힐을 이라크로 영전시키겠다고 옹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요지경 거꾸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2009년 3월 28일
김대중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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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March 27, 2009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이야기(12) - 최성재

풍신수길, 이순신, 누르하치(2)


풍신수길과 이순신이 싸우자, 누르하치가 어부의 이익을 취하였다.
최성재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국가도 홀로 설 수 없다. 국가는 싫든 좋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인구 2만 명이 넘으면 국가를 형성한다고 한다.--<<총, 균, 쇠>> 제레드 다이아몬드--
인구 2만 명이 넘으면, 이해관계가 너무 복잡해져서 객관적 기준과 그 기준을 강제할 수 있는 권력과 권위가 없이는 인간 사회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은 한국사에서 특이한 시대다. 거의 자급자족 체제였다.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서, 고려와 통일신라와 삼국과 고조선은 대륙과 섬 사이에서 평화적 교류든 국가의 운명을 건 전쟁이든 국경이 항상 열려 있었다. 국경도 수시로 변했다. 곳곳에 성곽이 들어차 있었다. 힘이 약하면 언제든지 침략 당했고, 힘이 강하면 언제든지 침략했고, 힘이 균형을 이루면 수백 년간 문물을 교환하며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평화를 구가했다. 고인 물이 썩는 것처럼 중국의 평화가 병들어 백성이 도탄에 빠지면 중원의 사슴을 쫓는 내란이 일어났고, 그 여파는 그대로 삼한(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르는 개념)에 밀려와 삼한도 내란에 휩싸였다. 중국이 통일되면 새 통일세력은 마지막으로 삼한으로 힘을 배출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의 통일세력과 동맹을 맺은 신라가 600년 전쟁의 시대를 끝내고 통일의 시대를 열었다. 장한 신라가 어제의 동맹국이자 당시 세계최대 강대국인 당(唐)을 당당히 무력으로 쫓아낸 후, 동아시아에는 유례없는 긴 평화의 시대가 찾아왔다.



당과 신라, 발해와 일본은 각기 중앙집권적 통일 국가를 이루고 당나라의 법률과 제도(율령체제)를 기본으로 하여, 국내의 이해관계를 객관적으로 조정하는 제도적 틀을 마련했다. 이 시대에 동아시아의 네 나라는 요순시대보다 평화로워서 그들끼리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인도, 중동, 시베리아, 로마와도 비록 속도도 늦고 위험부담도 많았지만 두루 교류했다.



평화가 오래 지속되면 평화도 병든다. 그게 왕조의 말기 증상이다. 당과 신라와 발해의 평화가 병든 시기는 거의 일치한다. 평화가 병들었다는 것은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객관적이고 제도적인 기준이 허물어지고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기준이 판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왕족이나 귀족이나 신흥 무력집단이 저마다의 기준으로 각 집단의 이익을 최우선한다. 국고(國庫)는 텅 비고 백성은 피부와 뼈가 딱 붙어 버린다(皮骨相接). 그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근육과 지방이 사라진다.



서로가 바빠 중국은 중국대로 삼한은 삼한대로 새로운 통일국가를 형성하기 위해 내란에 휩싸인다. 송(宋)과 고려가 최종 승리자가 된다. 고려가 중국 세력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라, 중국에는 그럴 힘이 있는 나라가 없었다. 15개의 나라가 명멸했으니까(5代10國 시대). (우습게도 이걸 갖고 고려의 자주성을 찬양하고 신라의 사대성을 질타하는 자들이 있다. 속셈이 따로 있는 반민족적이고 반이성적이고 몽상적인 작자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세력 균형에 지나지 않았다. 발해를 계승한 요나라와 금나라가, 상대적으로 물자가 부족한 요와 금이 중원과 고려를 향해 약탈과 정복의 매서운 동북풍과 서북풍을 씽씽 불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고려는 눈부신 방어전을 펼친다. 모조리 오는 족족 물리친다. 오히려 고려는 영토를 조금이나마 서북과 동북으로 넓힌다. 문무(文武)가 조화를 이루고 유불(儒彿)의 대문이 서로를 향해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송은 성리학의 교조주의에 빠져 무(武)를 경시하고 백성들을 등 따습고 배부르게 하는 국정의 기본을 도외시한 결과, 양자강 이북을 다 빼앗겨 버린다. 중국 역사상 중원(中原)이 아닌 남만(南蠻)의 땅으로 쫓겨난다. 황제도 두 명이나 잡혀간다.



난공불락의 바다 덕분에 일본은 상대적으로 대륙의 영향을 늦게 받는다. 평화가 병드는 시기가 좀 늦어진다. 그러나 원나라가 중원과 고려를 도모한 후 바다를 건너기 시작할 무렵에는 이미 일본도 중국과 삼한 이상으로 격렬한 내분에 휩싸인다. 무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 1180년경이다. 무인은 더 이상 왕족과 귀족의 장식품이 아니었다. 칼의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송과 원에 이어 명이 들어서고, 삼한에는 조선이 들어서서 긴 평화를 구가할 때도, 바다의 금성철벽에 둘러싸여 일본은 200명에서 300명의 지방영주들이 각각 사실상 한 국가를 다스리고 있었다. 전쟁은 일상사였다. 언제 누가 쳐들어오고 쳐들어갈지 몰랐다. 특히 1467에서 1474년에 걸친 '응인의 난'을 계기로 전쟁은 삶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이 시대를 특히 전국(戰國)시대라 부른다.



일본이 400년에 걸친 칼의 시대에 종말을 고하게 된 때는 1590년이다. 그 기쁨의 정점(聚樂第 주라꾸다이)에서 풍신수길이 금 찻잔을 들고 복사꽃을 감상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이전으로 돌아가면, 임진왜란은 역사의 필연으로 볼 수도 있다. 조선과 명나라는 왕조 말기 증상을 앓으면서 병든 평화로 귀족들이 백성들을 기름 짜듯 두 번 세 번 네 번 쥐어짜고 있었다. 국고는 텅텅 비었다. 군대는 몽둥이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몇 명 되지도 않은 군인은 하루 두 끼 밥도 얻어먹기 어려웠다.




이항복: 요동의 병사들은 본래 병기가 없습니다. 전에 조 총병(祖摠兵: 조승훈)이 주둔하고 있는 곳에 가 보았더니 활과 화살을 가진 자는 겨우 천 명에 백 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모두 몽둥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조실록 1597/5/15>>
恒福曰: “遼兵本無器械。 前見祖總兵所屯處, 帶弓箭者, 僅千之百, 其餘皆持杖矣。”


다지(多之: 여진족 장수)가 우리나라 사람의 용약(勇弱) 여부를 동양재(?羊才: 여진족)에게 묻자, 동양재의 말이
‘만포(滿浦)에서 연회를 베풀었을 때 나열한 군사가 3백∼4백 명이 있었다. 등에는 화살통을 지고 앞에는 활집을 안았는데, 화살은 깃이 떨어지고 활촉이 없으며 활은 앞이 터지고 뒤가 파열되어 타국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이와 같은 무리에게는 궁전(弓箭)을 쓰지 않고 한 자 되는 검(劍)만 가지고도 4백∼5백 명을 벨 수 있는데, 오직 팔의 힘에 한계가 있음이 유감일 뿐이다.’고 하면서
두 사람이 서로 낄낄대며 웃었습니다. <<선조실록 1596/1/30>> --신충일이 누르하치를 만나고 와서 보고한 글에서--
多之問我國人勇弱與否於?羊才, ?羊才曰: “滿浦宴享時, 列立軍數, (弱)〔略〕有三四百。 背負矢服, 前抱弓?, 箭則羽落而無鏃, 弓則前?而後裂, 只爲他國笑資。 如此等輩, 不用弓箭, 只將一尺?, 可斫四五百。 但恨臂力有限。” 兩人相與大?。




사상도 유교의 교조주의(명나라에는 양명학이 일어났지만, 그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도 당쟁은 수그러들지 않음)에 빠져, 조선과 명은 오랑캐 땅 일본과 요동에서 새 왕조를 개창할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세력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국가보다는 계급적 이익과 집단적 이익이 우선했다. 황제도 왕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더 이상 천자(天子: 하늘의 대리인)나 임금(백성의 어버이)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백성을 더 많이 착취하는 독재자에 지나지 않았다. 독재자이되 귀족을 압도하는 게 아니라 그저 가장 크게 부패한 귀족의 하나였다.





명나라는 세종(가정제)부터 기강이 쇠퇴하여 신종(만력제) 말년 극에 이르렀다. 강명영무(剛明英武)의 임금이 있다 해도 이미 다시 떨쳐 일어나기 어렵게 되었다. 또한 천계제는 용렬하고 나약함으로 유모 객씨와 환관 위충현은 권력을 도둑질하고, 어떠한 기준도 없이 함부로 상을 주며, 부당한 형벌을 주고, 충성스럽고 선량하면 참혹한 화를 당하니, 백성은 마음을 돌렸다. 망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어찌 망하지 않을 수 있으랴. <<明史 天啓帝 본기>>





1572년 10살에 등극하여 1620년 죽을 때까지 48년간 황제의 자리에 있었던 만력제(萬曆帝)의 개인적 사치를 살펴보면, 명나라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한 눈에 들여다볼 수 있다. 만력제의 엄격한 스승이자 명나라의 대학사(명나라의 재상)였던 장거정은 중구삭금(衆口 金)의 언로(言路)는 막았지만, 국가재정은 반석 위에 올려 놓았다. 조세 대상 토지가 400만 경(頃)에서 700만 경으로 늘어났다. 식량은 10년치나 비축되었고 만성적자이던 재정은 400만 냥의 흑자로 돌아섰다. 그러나 1582년 장거정이 죽자, 고분고분하고 착하고 영민하던 만력제는 돌변했다. 젊디젊은 인간이 어디서 풍문으로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이야기를 들었는지, 자신의 무덤(定陵: 현재 개방되고 있으며 '지하궁전'이라 불림) 하나에 20살부터 6년간 800만 냥이나 쓰고, 황태자도 아닌 일개 왕자의 결혼식에 30만 냥을 썼다. 소실된 궁전의 재건에도 900만 냥을 썼다. 그나마 건설과정에서 건축비가 과다계상되어 돈들은 대부분 환관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여러 황자를 봉하는 데만 1천2백만 냥을 썼다.



조선 출병으로 군량에 수백만 냥을 쓰고<<明史 일본전>>, 누르하치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요동 군비에 만력제는 말기에 520만 냥을 증세했다. 상대적으로 만력제가 개인적으로 쓴 돈에 비하면 군사비는 얼마 되지 않는다. 이래저래 국가 재정은 거덜났다.



만력제는 이상하게 돈에 유난히 집착한 인간인데, 국가 재정에는 지극히 인색하여 관리의 자리가 비면 새 사람으로 채우지도 않았다. 13성(省) 중 9성의 어사(御史)가 공석으로 남았다. 지방의 관리도 마찬가지였다. 만력제는 장거정의 사후에 환관을 상대로 정사를 돌보았을 뿐, 황태자에 대한 자신의 의혹을 풀려는 자작극에 출연하기까지 무려 25년간 신하는 아예 만나지도 않았다. 구중궁궐에 쳐 박혀 개인적으로 돈 쓰는 일과, 뼈와 살이 녹는 환락에만 몰두했다. 제 몸 하나와 제 가족 하나 챙기는 것밖에 모르던 선조와 꽤 닮았다. 둘 다 머리도 좋았고 글도 잘했다. 사서오경을 달달 외웠다. 그러나 국가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만력제와 선조에게 국가와 백성은 황제 또는 왕을 위해 존재하는 사전(私田)이요 사노(私奴)였다.



풍신수길이 조선으로 쳐들어오자 조선은 말 그대로 칼 앞의 대나무처럼 무너졌다. 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대도 1차는 실패하고 2차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지친 평양성의 왜적을 '외교 반 군사 작전 반'으로 유유히 남하하게 만든 것 외에는 7년 내내 맥을 추지 못했다. 평양성 탈환 외에는 의미 있는 승리가 없었다. 패전 또는 지루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이 때 유일한 예외가 이순신 장군이었다. 그는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기고 또 이겼다. 일회적 승전이 아니었다. 이겨도 압도적으로 이겼다. 바다의 나라에서 바람같이 번개같이 날아온 군대를 상대로 다름 아닌 바다에서 나가면 반드시 이겼고 물러나면 반드시 지켰다. 왜적의 병참선을 거의 끊어버렸다. 부산에서 서울로 평양으로 식량을 운반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거의 불가능했다. 이순신 장군 덕분에 호남 곡창은 그대로 온존했다. 그리하여 일본에서는 1593년 쌀값이 58%나 급등했다. --<<풍신수길의 조선침략>> 북도만차(北島万次 기타시마 만지)--



또한 1593년 평양성에서 패전한 왜적은 벽제관전투에서 명예를 회복했지만, 그 세력이 30~40% 감소되었다. 편야차웅(片野次雄 가다노 쯔기오)의 <<이순신과 풍신수길>>에 따르면, 소서행장의 군대는 서울을 떠날 때는 1만1천 명이 넘었는데, 6천6백 명밖에 안 남았다. 왜적은 전투보다 굶주림으로 죽은 자가 더 많았다. 평양 전투 외에는 전투다운 전투도 없었고, 명과 왜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벽제관에 이르기까지 소풍갔다 돌아오는 아이들처럼 털끝 하나 안 다치고 내려왔던 것이다. 코 베이고 귀 베이기는커녕 코털 하나 안 뽑히고 평양에서 서울까지 룰루랄라 무사히 내려온 것이다. 거기서 다시 경상도 해안까지 사실상 명나라 군의 호위를 받으며 무사히 내려갔다. 기고만장하던 이여송의 간을 떨어뜨리던 벽제관에서도 왜적은 거의 피 흘리지 않았다. 평양탈환전에서도 죽은 사람은 대부분 조선 백성이었다. 그런데도 그처럼 왜적의 망실률이 높았던 것이다. 남해와 서해가 박홍과 원균이 지키던 수역(水域)처럼 무인지경으로 뚫려 있었으면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풍신수길이 대노하여 1593년 1월말에 20만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온다고 하자, 한양의 왜적들은 기겁한다. 그래서 그 해 2월 27일 개전 이래 처음으로 대회의를 열어 17명 장군 전원이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아 꾹꾹 서명하여 극구 만류한다. 이 때 가장 크게 내세운 것이 식량이다.



...
一, 서울에서 군량미를 구해다가 잡탕죽을 먹고 있사오며, 오는 4월 11일까지 충분히 견딜 만하오며, 모든 병사에 관한 것은 웅곡반차(熊谷半次 구마타니 한지)가 보고할 것입니다.
一, 부산포의 군량도 어려운 사장에 있어 그 곳의 보급은 5, 6일이 걸려도 도착하기 어려운 사정에 있습니다. 올 봄에 바다를 건너오신다는 그 인원수가 강을 이용하여 거슬러 올라오는 데도 5, 6일 내에는 어려운 사정에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 달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10일로는 도저히 자유로운 행동이 어려운 형편입니다.
... 1593. 3. 3.
(전쟁에 환장한 가등청정 포함 17명 연대서명)
-- <<이순신과 풍신수길>> 편야차웅(片野次雄 가다노 쯔기오)



풍신수길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보아도 '전쟁은 곧 보급'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장수다. 그는 17장군이 연대서명한 이 건의서를 보자마자, 임진왜란이 어떠한 상황에 처했는지 바로 알아차린다. 명나라 침략에 앞선 여흥(餘興) 정도로 생각했던 조선침략이, 조총 부대가 한 달도 안 되어 한양을 무혈점령하는 것을 보고 이를 거듭 확신했던 조선침략이 깊이와 폭을 알 수 없는 수렁에 빠졌음을 즉시 알아차린다. 병참선이 천 리나 뻗쳐 있어서는 '한 칼'거리도 안 되는 줄로 알았던 조선을 상대로 승전은커녕 상상도 끔직한 패전의 쓴맛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즉각 알아차린다. 그 후로 그는 조선으로 건너간다는 계획을 깨끗이 단념한다. 상황판단이 비상하게 빠르고 위기상황에서 취하는 행동은 천리마보다 빠른 풍신수길은 바로 이순신의 손길이 닿지 않는 경상도 해안으로 대대적인 철수를 명한다. 거기서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절대 무너지지 않을 천하무적 왜성을 쌓고 다음을 기약하고 기다리게 명한다.--일본군의 그 후 행동을 미루어 내가 짐작한 것으로 사료는 발견 못함.
우선 당장 군량미와 무기를 보충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이건 편야차웅의 책에도 나옴.



선조실록과 <<징비록>>을 보면, 1587년에 귤강광(橘康廣)이란 자가 조선에 사신으로 온다. 일본 측 기록을 보면, 그 자의 원래 이름은 유곡강광(柚谷康廣)이라고 한다. 이 자는 오만방자하다. <<천하가 짐(왕보다 한 급 높은 황제의 칭호)의 주먹 안에 들어왔도다>>라고 풍신수길은 큰소리친다. 선조실록에는 자세히 안 나오지만, 원래는 다음과 같은 취지란다.




조선 국왕은 일본으로 건너와 우리 조정을 알현토록 하라. 만일 듣지 않는 날이면 내 곧 군사를 내어 치러 가리니! 지금 천하는 짐의 한 주먹 안에 들어왔도다. ...
-- <<이순신과 풍신수길>> 편야차웅(片野次雄 가다노 쯔기오)




일본 국사(日本國使) 귤강광(橘康廣)이 내빙(來聘)하였다. 일본에 천황(天皇)이 있어 참람하게 기원(紀元)을 호칭하나 국사에는 간여하지 않고 국사는 관백(關白)이 청단(聽斷)한다. 관백을 대장군(大將軍)이라 부르기도 하고 대군(大君)이라 부르기도 한다. 황(皇)과 왕(王)의 칭호가 같기 때문에 관백을 왕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이다. 원씨(源氏)가 관백 노릇한 지 2백여 년이 되었는데 평수길(平秀吉)이 그를 대임하였다.

평수길은 본디 천례(賤隷)로 조상의 유래를 모르는 사람이다. 관백이 품팔이하며 빌어먹는 것을 발탁하여 군사로 삼았는데 전투를 잘하여 많은 공로를 쌓았기 때문에 대장이 되었다. 관백의 정월(旌鉞: 깃발)을 빌어서 먼 지방의 반역자를 토벌하기에 이르렀는데 국인이 그의 참월(僭越)함에 분노하여 도리어 관백을 공격해 죽였다. 수길이 회군하여 전쟁에 승첩하고 이어서 원씨(源氏)를 대대적으로 살해하고 스스로 관백이 되었다. 군사를 동원하여 사방에서 승리를 거두어 제도(諸島)를 병탄하였는데 영토가 66주이며 정병 1백만을 훈련하였으니, 일본이 이처럼 성대함은 옛날에 없었던 일이다. 평수길은 오만하여 의기양양한데다가 또 국내의 환란을 염려한 나머지 드디어 중국을 침범하려 하였다. 그러나 전세(前世)에 뱃길로 절강(浙江)을 침범하려 하다가 끝내 뜻대로 되지 않았으므로 먼저 조선을 점거하여 육지로부터 진병(進兵)하여, 요계(遼 : 요동과 북경 일대)를 엿보려 하였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들어 아는 바가 없었으니, 이는 그 나라는 법이 엄하여 행인(行人: 사신)이 한 마디 말도 누설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평수길이 자기의 임금을 시해하고 나라를 찬탈한 것을 처음 들었으나 또한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평수길이 말하기를,

"우리 사신은 매양 조선에 갔으나 조선의 사신은 오지 아니하니, 이는 우리를 얕보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귤강광을 보내어 통신(通信)을 구청(求請)하였는데, 서신의 사연이 매우 거만하여 '천하가 짐(朕)의 손아귀에 돌아왔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귤강광도 사납고 거만하여 우리나라 사람을 대하여 말할 적에는 문득 조롱하고 비난하였다. 이때 교리 유근(柳根)이 선위사(宣慰使)였고 예조 판서가 압연관(狎宴官)이었다. 귤강광이 고의로 연회석상에서 호초(胡椒)를 흩어놓으니, 기공(伎工)이 앞을 다투어 그것을 줍고 전혀 질서라고는 없었다. 귤강광이 객관에 돌아와 역관에게 말하기를,
"이 나라의 기강이 이미 허물어졌으니 거의 망하게 되었다."
하였다. 귤강광이 돌아갈 적에 그 서계(書契)에 답하되 '수로(水路)가 아득하여 사신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자 수길이 크게 노하여 귤강광을 멸족하였는데, 귤강광이 우리나라에 편을 들어서 그 소청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의심해서였다.
<<선조수정실록 1587/9/1>>
○日本國使橘康廣來聘。 日本有天皇, 僭號紀元, 而不預國事, 國事聽於關白。 關白稱大將軍, 或稱大君, 以皇王同稱, 故關白不得稱王。 源氏爲關白二百餘年, 而平秀吉代之。 秀吉者, 本賤隷人, 不知自出。 關白拔之於傭?, 爲卒伍, 善戰積功爲大將, 至假關白旌鉞, 討叛遠道, 國人怒其僭越, 反攻關白殺之。 秀吉回軍戰捷, 仍大殲源氏, 自立爲關白。 用兵四克, 幷呑諸島, 提封六十六州, 鍊精兵百萬, 日本之盛, 古未有也。 秀吉志滿意得, 又慮內患, 遂欲侵犯中國, 以前世舟犯江浙, 終不得意, 欲先據朝鮮, 從陸進兵, 以窺遼、?, 而我國邈然無聞知。 蓋由其國法嚴, 行人不洩一辭也。 我國初聞秀吉弑君簒國, 而亦不詳其故矣。 秀吉言: “我使每至朝鮮, 而朝鮮使不至, 是, 卑我也。” 遂使康廣, 來求通信, 書辭甚倨, 有天下歸朕一握之語。 康廣亦傑?, 對我人語, 輒嘲諷。 時, 校理柳根爲宣慰使, 禮曹判書狎宴。 康廣故散胡椒於席上, 伎工爭取之, 無復倫次。 歸館語譯官曰: “此國紀綱已毁, 幾亡矣。” 康廣之還, 但答其書契, 而稱以水路迷昧, 不許送使。 秀吉大怒, 族殺康廣, 疑康廣右我國, 不遂其請也。




대체로 1587년 이 해부터 풍신수길이 명과 조선을 도모하기 시작한 걸로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 그보다 2년 전인 1585년에 이미 명나라와 조선을 포함한 천하통일 곧 제1차대동아공영권을 꿈꾸기 시작했다. 이를 증빙하는 문서가 발견된 것이다.
--<<풍신수길의 조선침략>> 북도만차(北島万次 기타시마 만지)--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정두희--



1585년이라면, 구주(九州)도 정복 못했다. 5대의 전통으로 관동에 뿌리박은 북조(北條 호죠) 가문을 멸망시키기 5년 전이다. 겉보기에 통일은 아직 요원했다. 그런데도 풍신수길은 통일을 기정사실화하고 그 다음 단계의 웅지를 펼치고 있다. 조선침략이 일시적인 과대망상이 아니라는 증거다. 1587년 풍신수길은 25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구주를 복속시킨다. 이어서 1590년 풍신수길은 덕천가강과 연합하여 30만 대군 곧 조선침략에 동원된 16만의 약 두 배를 이끌고 조총도 수만 정 준비하여 북조 가문을 완벽하게 제압한다. 그로써 기나긴 전쟁 시대가 종말을 고한다. 백성들로부터 무기를 회수한다. 그 사이에 그는 대마도의 종의지(宗義智)를 앞세워 조선에 계속 압력을 가한다. 다음 기회에 자세히 밝히겠지만, 종의지는 풍신수길의 요구가 터무니없다는 판단과 나름대로 중간자적 입장으로 풍신수길의 외교문서를 위조한다.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아닌 제3자의 입장에서 볼 때, 풍신수길은 전혀 다른 면모를 갖는 듯하다. 네덜란드인 W.J. Boot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권좌에 오른 첫 10년간, 문제의 그 인물은 통찰력 있고 용의주도하며 체계적인 계획에 따라 움직였다. 그는 압도적인 군세를 보유한 상황에서, 의심할 바 없이 적법하며 뭔가 현실적인 목표가 있는 전쟁이 아닌 한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역사의 기록을 볼 때, 우리는 풍신수길의 행동이 현대적인 이성의 기준에 부합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의 몇몇 행동이 동시대인들에게는 놀라움이나 충격으로 다가왔겠지만,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릴 만큼 비정상적인 것은 절대 아니었다. 분명히 당시의 이성적 판단 및 계산에 따르면, 그를 섬기는 편이 그에게 맞서 궐기하는 위험에 비해 훨씬 유익했다.

풍신수길은 말년에 후궁들과 놀아나며 부하들에게 나라를 맡기거나 하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직접 국정을 관리했다. <<'조선정벌기' 속의 임진왜란>>





조선과 명이 왕조 말기 증상을 앓고 있어서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 봉사하는 지도자들이 극히 드물었고, 양국 모두 국가 재정이 이미 파탄 난 지 오래되었고, 군대는 장부상으로 존재할 뿐 숫자도 터무니없이 적은 데다 하나같이 오합지졸이었고, 민심이 극도로 이반되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풍신수길은 충분히 제1차대동아공영권을 꿈꿀 만했다. 당시는 전쟁에 대한 도덕적 기준도 그리 엄격하지 않았다. 군사력이 약한 송과 명과 조선이 입과 손가락만으로 분기탱천했을 따름이다. 자신들은 힘없는 백성을 상대로 탐관오리의 길을 걸으면서! 조선이 강했으면, 만주에 이어 중국을 삼켜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었다. 일본을 조선의 속국으로 만들어도 대들 사람도 없었다. 승자가 곧 법이었다. 제1차대동아공영권의 가능성은 지난번에도 언급했듯이 일본에 비하면 인구나 군대나 새 발의 피처럼 보잘것없었던 여진족이 조선과 중국을 어린애 팔 비틀기로 유린하고 통치하고 신복(臣服)시켰던 것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592년 5월부터 1598년 11월 사이에 조선에서 너무도 이질적인 역사의 기적이 일어났다. 지금 생각해도 냉정한 이성적 판단에 따르면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일이기에 기적이다. 그것은 이순신 장군의 위업이다. 그는 붓의 나라에서 칼도 아닌 총의 나라를 상대로 싸웠다 하면 모조리 압도적으로 이겨 버렸던 것이다. 성(城)이 있어도 지킬 줄 모르고(제1차 진주성 싸움과 행주산성 싸움 등은 희귀한 예외) 화포가 있어도 사용할 줄 모르는 나라에서, 나라 전체가 1만 명의 정병도 훈련시키고 유지하지 못하던 나라에서, 일본처럼 소속 백성에 대해 생사여탈권을 가진 영주의 신분도 아니고 왕의 인사권에 의해 언제든지 파면될 수 있는 일개 변방 장수로서 군대도 식량도 무기도 스스로 마련하면서, 그런 승첩을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간 것이다. 왜적의 보급로를 끊어 그들이 전쟁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도록 풍신수길의 대망을 저지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풍신수길과 이순신 장군은 누르하치에게 가장 큰 도움을 주었다. 누르하치가 어부의 이익을 취하게 만들었다. 누르하치는 죽어서도 구름 위에서 이순신 장군의 뜻을 이어받지 못한 조선을 상대로 아들 대에 두 번이나 어린애 손가락 부러뜨리기로 유린하여 아예 신하의 나라로 만들어 버렸다. 이순신 장군이 없는 조선은 그처럼 순식간에 두 번이나 궤멸했다. 실지로 임금이 이마에 피를 철철 흘리며 항복했다. 선조가 하늘에서 그 장면을 내려다봤다면, 이순신 장군에게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감사하다고, 적으로부터 치욕을 겪지 않게 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처첩과 더불어 후세의 김정일이나 노무현처럼 성질 다 부리며 살고도 천수를 다하게 해서 감사하다고.
(2009. 3. 29.)

김대중을 잡아 없애자!

우리 韓민족 수천년 역사에서 최고의 악질 역적이자 자국민 인종학살범 김정일의 수하 방조범인 김대중이 엊그제 또 미국에까지 와서 그 추하게 늙은 아가리로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해댄다. 개대중의 개소리가 웬만큼만 하더라도 더러워서 그냥 외면해버리고 싶은데, 개대중을 욕하다보면 내 목청과 내 손가락이 너무 더러워지니 그냥 지나치고 싶은데, 개대중의 이따위 개소리 망언을 들으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김대중은 지난 24일 하버드 대학교에 와서 시종일관 핵깡패 살인마 김정일의 대변인 노릇을 했다.

“북한의 인공위성 또는 미사일 발사가 북미간 직접 대화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북한은 4월 초에 그들이 말하는 인공위성, 일부에서 말하는 미사일을 발사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문제로 인해 무력충돌과 긴장이 고조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계기로 6자회담을 중심으로 미국과 북한이 직접 나서서 문제를 풀어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번 미사일 사태가 지나면 6자회담을 진행키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 같다. 6자회담이 재개되면 북한은 핵을 포기하고 우리는 북한과 외교하고, 한반도 평화 정착은 실천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

“북한도 핵 포기와 국교 정상화에 대해 이미 동의했으며, 이는 2005년 9월 19일 발표된 6자회담 공동선언에 들어있는 내용이며 모든 것이 사실상 합의돼 있으므로 (남은 것은) 실천의 문제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은 막아야 한다. 우리 민족이 없어질 수도 있고, 동아시아 지역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반드시 우리는 모든 것을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한반도 통일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1300년 역사에서 두 번의 분열을 겪고 다시 통일을 이루었고, 우리의 분단은 우리 스스로 초래한 것이 아니라 2차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편의에 의한 것”
(이상 개대중의 개소리를 대충 전재함)

(남신우의 대답 및 욕지거리)
“이 늙은 여우 개대중아, 북괴가 대포동 미사일을 쏘아올리는 것이지, 무슨 빌어먹을 인공위성 타령이냐! 그 미사일도 바로 네가 김정일에게 갖다바친 돈으로 만든 대포동 미사일이다!”

“뭐? 북괴가 미사일을 쏘아도 긴장이 고조되는 것이 아니라 북핵문제 해결의 시작이라고? 다시 6자회담을 중심으로 미국이 북괴와 회담할 것이라고? 네 놈이 그러라고 시켰는지, 뒷돈을 줬는지, 미국의 크리스 김정힐이 지난 6년간 북괴와 6자회담, 양자회담을 계속해왔다. 그런데 작년 12월 북괴는 6자회담을 아주 작살내 버렸다. 그런데도 다시 계속할 거라고? 미친 놈!”

“북한이 핵포기에 동의했다고? 언제? 누가? 김정일이? 네 놈이 평양에 다녀와서 한다는 개소리 거짓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뭐? 김정일 위원장이 통일 후에도 주한미군의 한반도 주둔에 동의했다고? 에라 이 사깃꾼 거짓말쟁이야! 네가 인간이냐?”

“한반도 분단이 미국과 소련의 편의에 의한 것이라고? 2차대전 끝에 미군이 달려오지 않았으면 대한민국 5천만도 지금 네 상전 김일성-김정일 밑에서 요덕수용소 지옥살이를 하고있을 것이다. 그나마 남쪽 반만이라도 빨갱이들의 마수에서 건져준 미국에게 분단책임이 있다고? 네 놈이 빨갱이 역적질 할 때, 죽게된 것을 살려준 머저리들도 바로 미국사람들이다. 그 때, 네 놈을 죽게 내버려 두었어야 할 것을, 미국사람들이 살려준 것, 그게 바로 우리 한민족의 악운이요, 천추의 한이다!”
(남신우의 욕지거리 끝)

김정일을 때려잡기 전에 우선 김대중을 죽여야 한다. 김정일이 그냥 내버려 둘 수없는 악마이긴 하지만 본래 악마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김정일은 악마노릇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런데 개대중은 제 성도 모를 정도로 비천하게 태어나긴 했으나, 자유민주 대명천지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대한민국 대통령도 해보고, 노벨평화상도 타보고, 돈도 끔찍하게 챙긴 도둑놈이다. 그런 사깃꾼이 어떻게 저런 역적질을 하고 개소리를 계속 해대는지, 그리고 그런 역적을 왜 그냥 내버려 두는지, 정말 자다가도 도요타 윤가 제갈대중 이름만 들어도 오장육부가 뒤집힌다.

수십번 골백번 말했지만 김대중을 없애면 남한의 친북좌파들이 가붙을 곳이 없고, 남한에서 친북좌파들이 사라지면 김정일이 아무리 핵무기 미사일로 공갈협박을 하더라도 대한민국은 끄덕도 없다. 이것이 나라 살리고 북한주민들 구하는 만고의 진리이다.

김대중을 잡아 없애자!

2009년 3월 27일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씀
http://nkgenocide.net
http://nk-projects.blogspot.com

Saturday, March 21, 2009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이야기(11) - 최성재

풍신수길, 이순신, 누르하치(1)

동시대 세계의 중심이던 동아시아에서 그들은 발군의 전쟁 영웅이었다.
최성재

16세기에서 18세기에 걸친 시기는 바다의 시대였고 유럽이 세계로 뻗어가던 시대였다. 유럽의 시대는 18세기 후반부터 펼쳐진다. 혹자는 이를 세계화 1.0시대라고 한다. 내 어리석은 생각은 다르다. 그건 어디까지나 서양 위주의 사고방식이다. 일찍이 세계는 사실상 하나로 연결된 적이 있었다. 목숨을 내놓고 10년, 20년 동안 가야 했던 비단의 길이자 초원의 길이 한 달 정도로 축소되었다. 상인이든 승려든 농민이든 동서를 오가려면, 작건 크건 새 나라 새 고을이 나타날 때마다 이승과 저승에 양다리를 걸쳐야 했던 가슴 조마조마함이 사라지고, 깨끗한 여관, 날렵한 말, 상냥한 미소, 다양한 풍물을 대하는 가슴 설렘이 꿈결처럼 다가왔다. 종교도 따지지 않았고 인종도 국적도 꼬치꼬치 묻지 않았다. 그리고 유럽까진 미치지 못했지만 나침반의 도움을 받아 중국 남부에서 인도지나해와 인도양을 거쳐 '일 한국'의 페르시아까지 바다로도 연결되기도 했다. 명나라의 정화는 이 바다의 비단길을 극히 짧은 기간 동안 조금 더 연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시절은 20세기 후반부나 21세기초와 가장 비슷하던 시기였다.

13세기의 혁명이었다. 징기스칸의 몽골족에 의해 세계 뭍의 절반, 인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유라시아가 마침내 하나로 연결된 것이다. 아프리카도 있고 남북 아메리카도 있고 오세아니아도 있지만, 당시 그들의 문화는 유라시아에 비해 몇 백 년 내지 수천 년 뒤떨어져 있던 상황이라 세계화 1.0의 영광은 모름지기 몽골족에 돌려야 할 것이다.

육지의 길과 말에 의해서 세계가 하나로 연결된 13세기를 세계화 1.0시대라고 한다면, 16세기부터 20세기초(18세기가 아니라)는 세계화 2.0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다의 물과 배에 의해 유럽과 아시아에게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던 세계도 비로소 하나로 연결되었으니까.

세계화 3.0시대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라고 본다. 공중의 공기와 비행기에 의해서 육지와 바다가 급속하게 축지(縮地)되고 축수(縮水)된 시기가 바로 이 때다. 저항이 거의 없는 공기로부터 오히려 양력(揚力)을 받아 비행기가 과거엔 꿈에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새보다 빠른 속도를 인류에게 제공함으로써, 공간은 과거에 비해 5분의 1, 10분의 1로 축소되고 반대로 시간은 5배, 10배 늘어났다.

세계화 4.0시대는 20세기후반에 찾아왔다. 도구는 인터넷이다. 이제 세계는 가상 공간이긴 하지만, 상대성이론에 나오는 빛의 속도로 좁아져서 개인의 한 손안에 들어가게 이르렀다. 인류는 이제 누구나 정보에 관한 한, 부처님이 되어 세계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 있다. 세계화 5.0은 매트릭스 시대가 될 것이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초에 당시 세계 최정상급 문화와 경제를 자랑하던 동아시아에서 걸출한 세 인물이 활약한다. 그들은 일본의 풍신수길(1536~1598)과 조선의 이순신(1545~1598)과 만주의 누르하치(1559~1626)다. 이들 세 명 중에 가장 늦게 태어난 누르하치가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가장 큰 성취를 이루었다. 그의 위업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아들들이 당시 지구상 가장 크고 가장 인구가 많고 가장 부유했던 명나라를 차지한 후, 그 후손이 약 260년 동안 만주족과 한족을 한 집안처럼 다스렸다.

16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의 가장 걸출한 이들 세 전쟁 영웅을 살펴보려면, 잠시 세계화 1.0시대와 세계화 2.0시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싫건 좋건 알든 모르든 그들은 그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몽골족은 동부 유럽에서 연해주까지 광동에서 시베리아까지 차지한 후, 중심부를 원(元)이라고 부른다. 중국 왕조는 이 때부터 국호가 추상명사로 바뀐다. 이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이전에는 통일왕조를 개창한 태조의 고향 이름을 국호로 삼았었다. 진·한·수·당·송(秦漢隋唐宋)이 바로 그것이다. 몽골은 이민족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중국인이 멸시하는 뜻으로 한자로 음차(音借)한 '어리석을 몽'(蒙)을 국호로 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몽골족은 이에 한 차원 달리했다. 지금까지는 중국의 통일왕조는 고작 중원만 차지한 그림자요 엉터리고, 새 왕조는 전세계를 아우르는 실체요 진짜라는 뜻에서 원(元)이라고 한 것이다. 으뜸이자 시작이란 뜻이다. 건원칭제(建元稱帝)할 때 쓰는 원(元)이다. 천하의 새 주인인 황제로서 새 시대를 여는 것이 건원칭제다. 이렇게 한 번 정해 버리니까, 주원장도 황태극도 '밝다, 맑다'라는 뜻의 명(明)과 청(淸)을 국호로 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뜻으로 보면 원(元)이나 대동소이하다.

몽골족의 세계화 1.0이 미친 영향은 어마어마하다.
첫째 징기스칸의 후예들은 실용주의를 널리 전파했다. 종교와 사상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널리 인간에게 이로우면 족했다. 그들은 출세의 지름길이던 과거제도를 폐지했다. 말은 향기로우나 권력과 명예와 부를 위해 혀의 검(劍)과 도(刀)로 사람을 찌르고 베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유교경전은 종교와 사상의 자유에 따라 수신용(修身用)으로 족하다고 보았다. 유일무이한 통치이념은 절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렇게 해서는 나라를 다스릴 유능한 인재를 뽑을 수 없다고 보았다.

대신 그들은 실용적인 지식을 가르쳤다. 전국에 약 2만 개의 학교를 세우고 거기서 오늘날 실업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가르쳤다. --<<징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잭 웨더포드
나폴레옹의 국민교육과 실업교육보다 500년 이상 앞선 교육개혁이었다.

둘째, 동양과 서양의 문화와 과학기술을 당시로 보면 과히 빛의 속도로 교류시켰다. 징기스칸은 어떤 경우에도 전쟁시나 평화시나 두루 유용한 기술자는 죽이지 않았다. 국적 불문(不問), 인종 불문, 종교 불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중국의 화약과 나침반과 인쇄술이 차례로 서양으로 흘러갔다. 당시 중국과 아랍의 문화가 가장 앞섰기 때문에 유럽에서 아시아로 흘러온 것은 거의 없다. 문화도 물처럼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아랍은 달력을, 정확한 양력을 동아시아에 전해 주었다. 곽수경을 그 덕에 수시력을 만드는데, 1년을 365.2425까지 정확히 계산했다. (세종대왕은 이순지를 시켜 이보다 더 정확하게 1년을 365.2422까지 계산했다. 1582년의 그레고리력과 같은 수준이다. 서양보다 약 150년 빠르다. 거기에 더하여 <<칠정산내외편>>은 음력도 정확무비하다.)

세계화 1.0으로 가장 득을 많이 본 대륙이 야만과 답답함이 가득하던 유럽이다.
첫째, 그들은 동양에서 흘러온 화약으로 칼과 창과 방패를 들고 무거운 갑옷을 입고 설치던 기사 시대를 끝냈다.
둘째, 역시 동양에서 들어온 나침반을 믿고 통통배를 타고 겁도 없이 대서양을 건너고 태평양을 건너기 시작했다.
셋째, 코리아보다는 한 200년 늦지만 역시 동양에서 들어온 인쇄술을 개량하여 보통 사람도 하나님과는 직접, 인간과는 직간접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의사소통하기 시작했다. 1424년 케임브리지 대학은 122권의 책밖에 없었지만, 1500년대 중반이면 영국보다 훨씬 낙후되었던 독일에서도 황금보다 귀하던 작은 책자가 수백 만 권 넘쳐 났다. 루터에 의해 독일어로 번역된 성경과 독일어로 쓰여진 루터의 책은 일 주일만에 5천 권이 팔려나갔다. 루터는 깊은 성에 틀어 막혀서 온 유럽을 흔들었다. 바야흐로 유럽은 야성과 지성이 한꺼번에 폭발하기 시작했다. 모험가와 악당과 사기꾼과 천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화약은 송나라에서 금나라로, 금나라에서 몽골로, 몽골에서 이슬람으로, 이슬람에서 유럽으로 흘러가면서 그 성능이 급격히 향상되었다. 몽골이 난공불락의 사마르칸트를 눈 깜짝할 사이에 무너뜨린 것은 화약이었다. 대포였다. 초원을 달리는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밀면 밀리고 때리던 맞던 송나라가 양양(襄陽)에서 끄덕도 않았다. 김용의 무협소설 <<영웅문>>에서 곽정이 맹활약하던 그 양양이다. 역사왜곡의 세계 챔피언 중국인답게 이를 신나게 허구화한 것이 그 소설이다. 양양성은 사마르칸트보다 더 튼튼했다! 마침내 이를 해결한 것은 아랍인이었다. 그들은 중국의 아르키메데스였다. 쿠빌라이의 조카가 다스리던 중동의 '일 한국'에서 온 두 기술자가 만든 대포는 5년간의 포위 공격에도 가볍게 재치기나 하던 양양의 골리앗을 한 방에 쓰러뜨렸던 것이다. 어느새 이슬람교도의 화약기술이 몽골을 능가하게 이른 것이다. --<<쿠빌라이 칸>> 모리스 로사비--

이번에는 유럽 차례다. 1543년 이순신 장군이 태어나기 2년 전에 전쟁으로 수백 년간 날을 지새던 일본에 포르투갈 상인이 철포(鐵砲)를 선보인다. 중국에서 전해진 나침반을 들고 유럽의 릴리푸스(Lilliput)들이 오대양을 누비다가 '황금의 나라' 일본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아마 그들은 철포 한 정을 그만큼의 금과 바꿨을 것이다. 화약을 대포가 아닌 개인 화기(火器)로 개발했다는 데 유럽인의 창의력이 돋보인다. 이로써 지긋지긋하던 일본의 전란 시대에 종말의 씨앗이 뿌려진다. 화승총의 위력을 가장 먼저 알아챈 직전신장(織田信長 오다 노부나가)과 풍신수길이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다. 또 그것 때문에 일본은 유사이래 처음으로 조선과 명을 상대로 해적의 약탈이 아닌 국가간 전면전을 벌인다. 동아시아판 세계대전의 개막이다.

40년 전쟁에서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던 누르하치는 1626년 드디어 산해관을 넘어 명나라를 접수하러 나선다. 20만(실지로는 10만이었을 듯) 마리 호랑이가 1만 마리 강아지를 향해 질풍같이 내달렸다. 그러나 강아지가 그 덩치에 어디서 그런 소리가 나는지 천지가 무너지듯 컹컹 짖자, 하늘에서 번개같이 빠르게 불덩이가 떨어졌다. 원숭환은 산해관(山海關: 만리장성의 출발점으로 산山과 바다海 사이에서 병의 목처럼 지키는 關문)의 영원성(寧遠城)에서 선교사 탕약망(아담 샬)이 설계했다는<<명 숭정제>> -사전융신(寺田隆信 테라다 타카노부) 홍이포(紅夷砲)를 곳곳에 설치하고 태산처럼 우뚝 서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불똥 하나가 누르하치의 옷섶에도 튀었다. 누르하치는 그 후 얼마 후 양만춘의 화살을 눈에 맞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이세민처럼 천명을 다하고 쓰러진다.

--짐은 25세부터 군사를 일으켜 정벌해 온 이래 싸워서 이기지 못한 것은 없고, 공격하여 무찌르지 못한 바 없었다. 어찌하여 이 영원성은 끝내 함락하지 못하는가.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여진(女眞)은 그 숫자가 1만에 차면 감당하지 못한다."
이 말은 중국에 옛날부터 전해오는 속담이라고 한다. (<<중국의 역사>> 진순신)
이런 여진이 1577년에는 총인구가 10만밖에 안 되었다.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통일시킨 데 이어 인근 부족들을 점령한 뒤에는 40만에서 50만을 헤아리게 되었다.(<<淸史>> 임계순) 몽골족도 한족도 섞여 있었지만, 그들은 여덟 깃발 아래 한 몸처럼 움직였다. 그러나 그런 누르하치도 성능이 대폭 향상된 서양의 대포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몇 년 후 누르하치의 여덟 째 아들 청태종은 풍신수길과 똑같은 작전을 쓴다. 유교경서만이 유일무이한 진리라며 죽자고 공부만 하여 평균 35세에 급제하는 자들이 조정을 쥐락펴락하던 명나라는 송나라나 조선과 마찬가지로 건국 후 150년 가량 흐르자 당쟁이 극심하였다. 누구도 지킬 수 없는 높은 도덕을 가리키며 마치 자기 패거리들은 완벽히 지키는 것처럼 큰 소리 치면서 정적(政敵)을 몰아내는 것에 목숨을 거는 자들이 어떤 약점을 갖고 있는지, 한 눈 팔면 코가 베이고 두 눈 팔면 목이 잘리는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어진 장군들은 한 눈에 알아본다. 입에 꿀 머금은 간첩을 보내 적대국의 천하명장을 눈을 끔벅끔벅하며 나긋나긋 모함하면, 자칭 청의파(淸議派)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어 붓의 창을 휘두르고 혀의 비수를 날리고 눈총을 쏘아 충신을 역적으로 만드는 것은 여반장이다. 원숭환은 그렇게 누명을 쓰고 시장바닥에서 처형되었는데, 그가 죽자 성난 군중이 '매국노'의 유체에 달려들어 핏자국 외에는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살과 뼈를 너도나도 잘근잘근 씹어먹어 버린 것이다.
--<<명 숭정제>> -사전융신(寺田隆信 테라다 타카노부)
얼마나 '애국자'들이 악독하게 모함했던지!

이순신 장군도 그렇게 모함을 받았지만, 개돼지처럼 끌려가서 옥에 갇혔지만, 오호라, 천명이 있음에 곤장 아래 쓰러지지 않고 백의종군할 수 있었다. 황제의 명을 기다리지 않고 내부의 적이자 뇌물의 달인 모문룡을 전격적으로 처형해 버린 원숭환과 달리, 이순신 장군은 원균이 아무리 조정에 뇌물을 바리바리 바치며 모함을 해도 남몰래 일기에만 울분을 표할 뿐 둘째가라면 발끈할 패장(敗將)을, 군사도 없고 전함도 없는 패장을 동료 장군이자 선배로 대우해 주고 장계에 그 공을 부풀려 기록해 주는 한편,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 지역과 도서벽지에 인망을 하늘에 닿도록 높이 쌓아 두었기 때문에, 수백만 백성의 목숨을 구해 주고 백성을 먹여 살려 주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는 보이든 아니 보이든 눈물 세례를 받았다. 당신이 흰옷을 입고 지나가면 백성들은 너도나도 다투어 다가와서 손을 잡고 다리를 붙들고 하염없이 울었다. 당신 몸에 향유를 뿌리지는 못했지만, 남녀노소 빈부귀천 가리지 않고 너도나도 눈물로 당신의 부르튼 발을 씻어 드렸다.

청태종 황태극(皇太極 홍타이지)은 짜릿한 정보전을 펼치는 한편 아버지의 용기와 조직력을 조롱하고 와해시킨 홍이포를 개발하게 한다. 단, 기분 나쁘다며 '오랑캐' 이(夷)는 '옷' 의(衣)로 바꾸어 홍의포(紅衣砲)라 부른다. 명나라 군대도 다투어 홍이포를 들고 귀순하기도 한다. 천하무적 군대가 천하제일 대포로 무장하고 오랑캐로 오랑캐를 잡는다(以夷制夷)는 정보 전략으로 몸을 감췄으니, 인구 1억 5천이라 하지만, 전세계 부의 30&per;를 차지한다고 하지만, 스스로 무너지는 말기 암 환자는 새 왕조를 개창할 명의의 집도를 기다리며 시나브로 수술대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이순신 시대에도 세계화는 돌이킬 수 없었다. 세계화 2.0시대였다. 그를 거부하는 자는 약간의 시간을 벌 수는 있겠지만, 처절한 멸망의 거대한 입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1910년 조선이 왜적에게 강제로 무릎을 꿇게 된 것은 이미 이 때 예정되어 있었다.

(2009. 3. 21.)

Thursday, March 19, 2009

낙동강 오리알이 된 크리스 힐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지난 6년간 콘디 라이스 美국무장관과 크리스 힐 대사가 6자회담에서 왜 김정일과 호금도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바보짓을 했는가, 이해가 안 갑니다. 살인마 김정일을 존경하거나 사랑한 것도 아니고, 국제깡패 김정일이 핵을 포기할 거라고 자신한 것도 아니고, 자신들의 왕초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그러라고 윽박지른 것도 아니고, 왜들 그랬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러나 지난 6년동안 그들의 바보짓 때문에 김정일은 핵을 포기하기는 커녕 아직도 건재 발광 중이시고, 북한주민들은 매일 배가 고파서 난리들입니다. 6자회담을 계속하겠다는 오바마가 크리스 힐을 駐이라크 대사로 영전 임명하겠다니까, 샘 브라운백 상원의원이, 절대로 안 된다!고 나섰습니다. 다음은 브라운백 외 5명의 공화당 상원의원들이 3월 17일,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낸 공개서한입니다. 3/19/2009 남신우 드림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김정일 장군의 동무 크리스 힐 대사

SENATORS SEND LETTER TO OBAMA IN OPPOSITION TO HILL
Letter outlines concerns over Chris Hill's nomination to serve as Ambassador to Iraq

美연방국회 공화당 상원의원들이 크리스토퍼 힐 대사의 駐이라크 대사 임명에 반대하여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낸 공개서한

Dear Mr. President:

We write to express our concern about your decision to nominate Ambassador Christopher Hill as the next U.S. ambassador to Iraq. While we respect Ambassador Hill's long and distinguished career in the Foreign Service, we believe that he is the wrong choice for this post, and we respectfully request that you withdraw this nomination.

저희 下記 서명 연방국회 상원의원들은 대통령 각하께서 크리스토퍼 힐 대사를 次期 駐이라크 美대사로 임명하신다는 것에 우려를 표하려고 이 편지를 드립니다. 저희들은 힐 대사의 뛰어나고 오랜 세월에 걸친 외교경력을 존경하지만, 힐 대사를 이 자리에 보내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라 믿으며, 이번 임명추천 件을 철회하여 주시기를 정중히 요청하는 바입니다.

The U.S. mission in Iraq is the world's largest and, along with our embassy in Kabul, one of the two most important. Choosing the right individual to lead the embassy in Baghdad is of critical importance, particularly at this delicate moment in the history of our war effort. As the security situation stabilizes and U.S. troops at last begin to withdraw from the country, skillful and effective diplomacy will assume an ever greater role in securing American national interests in Iraq and ensuring that the country does not backslide into violence. (略譯: 이라크 대사 자리는 책임이 막중한 자리입니다)

Ambassador Ryan Crocker is, we believe, the model for the kind of individual who should next serve as ambassador to Iraq. Ambassador Crocker had career-length experience in the Middle East and in working closely with the U.S. military in the context of counterterrorism and counterinsurgency operations. He had served in Baghdad twice before he became ambassador, including in the Coalition Provisional Authority, and as ambassador to several neighboring countries. He knew the region, its players, and its trajectory, and he speaks fluent Arabic. (略譯: 크리스 힐 대사가 아니라 라이언 크로커 대사가 적입니다)

Ambassador Hill, on the other hand, has a long record of service outside the Middle East and outside the sphere of civil-military relations. He has served in at least seven overseas posts, but none in or around Iraq. He speaks three foreign languages, none of them Arabic. Nothing in his resume suggests more than a basic familiarity with the complicated issues at hand in Iraq and in the region, nor does he have any experience in working closely with the U.S. military in counterinsurgency or counterterrorism operations. (略譯: 크리스 힐 대사는 중동에 관하여 아무 것도 모릅니다)

We do not believe that now is the time to appoint an ambassador who may need the equivalent of a crash course in Iraqi affairs. There are today, both within the Foreign Service and outside it, a number of individuals who possess much greater qualifications for this post than does Ambassador Hill. As our next representative must arrive in Baghdad ready to tackle an array of difficult and potentially explosive issues, including Arab-Kurdish tensions, refugee resettlement, and oil distribution to name only a few, America must have an ambassador who has the requisite knowledge and experience with Iraq, the Middle East, and the military to ensure that we do not repeat the many costly mistakes that previous misjudgments have produced. (略譯: 크리스 힐 대사를 주이라크 대사로 보내면 일이 크게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Moreover, we found aspects of Ambassador Hill's most recent work in the Six Party Talks for North Korean nuclear disarmament to be deeply troubling. Whatever one thinks about the overall thrust of the Bush administration's North Korea policy, Ambassador Hill engaged in evasive and unprofessional activities, including sidelining key officials at the State Department and breaking commitments made for the record before congressional committees.

더구나, 최근 힐 대사가 북한의 핵무기를 제거하겠다고 주관해온 6자회담의 경과를 살펴보면 매우 걱정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부시 대통령의 대북정책 전반에 관하여는 논난(찬반)의 여지가 있겠지만, 힐 대사는 6자회담을 주관하면서 여러가지 회피적이고 비양식적 행동을 했습니다. 그는 국무부에 있는 주무담당 관리들을 무시하고 연방국회 청문회에서 의원들에게 공식적으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For example, on July 31, 2008, in testimony before the Senate Armed Services Committee, he told Senator Brownback that "I would be happy to invite [North Korea special envoy Jay Lefkowitz] to all future negotiating sessions with North Korea." This did not occur. Other diplomats also complained of being shut out of the Six Party process by Secretary Hill. In a cable reported in the Washington Post, U.S. Ambassador to Japan Thomas Schieffer warned of irreparable harm to U.S.-Japan relations resulting from deals with North Korea that did not address Japanese interests, adding that he could play no role in assuaging such concerns as he had been cut out entirely from the flow of information on North Korea by Secretary Hill.

예를 들자면, 지난 2008년 7월 31일, 연방국회 상원 국방위원회에서 증언했을 때, 힐 대사는 브라운백 상원의원에게, “앞으로 북한과의 모든 회담에 제이 레프코위츠 북한인권특사를 꼭 초청하겠습니다,”라고 약속해놓고는, 그는 이 약속을 어겼습니다. 또한 딴 외교관들도, 힐 대사의 6자회담에서 전적으로 소외 당했다고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 지에 실린 기사를 보면, 토머스 쉬퍼 주일 미대사는, 대북정책에서 미국이 일본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독주하면 미일관계에 치명적 금이 갈 수도 있다고 경고했었는데, 힐 대사는 자신(쉬퍼 대사)을 대북관계 정보에서 완전히 따돌리고 무시했다고 말했습니다.

In testimony before the House Foreign Affairs Subcommittee on October 25, 2007, Secretary Hill said, "Clearly, we cannot be reaching a nuclear agreement with North Korea if at the same time they are proliferating. It is not acceptable." Yet only months after making these statements, Ambassador Hill succeeded in reaching such an agreement before Congress had a chance to answer key questions about North Korea's alleged nuclear proliferation to Syria, taking place during Mr. Hill's own negotiations.

2007년 10월 25일, 힐 대사는 연방국회 하원 외교분과위원회 증언에서 말하기를, “북한이 핵을 확산하면, 우리는 북한과의 핵협정에 합의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합의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힐 대사는 이렇게 단언해놓고 몇 달도 지나지 않아서, 북한이 시리아에 핵확산을 하는데도, 국회에서 검증할 기회도 주지않고, 북한과의 핵협상에 합의해버렸습니다. 이 모두가 힐 대사가 6자회담을 주관하면서 한 짓입니다.

Finally, it has come to our attention that Ambassador Hill cooperated in a series of interviews for a recent book by New York Times reporter David Sanger. In that book, Ambassador Hill is quoted as referring to his superiors in the Administration in dismissive and derogatory terms, conduct wholly unbecoming a sitting US official. While we prefer not to list the statements in this letter, we would be happy to furnish you with specific examples, as necessary. (略譯: 사실 크리스 힐 대사는 인간적으로도 많이 치사한 사람입니다)

Mr. President, the United States needs an ambassador in Iraq at this crucial juncture. Moreover, we require an ambassador who will deal with the American people, our President and Congress with frankness, honesty and professionalism. Ambassador Hill, we are afraid, has proven otherwise.

대통령 각하, 미국은 이 중요한 시기에 주이라크 대사를 새로 임명해야 합니다. 신임 주이라크 대사는 국민들에게, 대통령에게, 연방국회에 솔직하고 정직하게, 전문외교인으로 일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힐 대사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For the reasons we have outlined above, we would request that you withdraw the nomination of Ambassador Hill for this particular post.

이런 여러가지 이유들 때문에 저희들은 각하께서 힐 대사의 추천을 철회하여 주시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Thank you for your attention to this matter.

U.S. Senator Sam Brownback (R-KS)
U.S. Senator John Ensign (R-NV)
U.S. Senator James Inhofe (R-OK)
U.S. Senator Kit Bond (R-MO)
U.S. Senate Republican Whip Jon Kyl (R-AZ)

Sunday, March 15, 2009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이야기(10) - 최성재

제1차 대동아공영권을 저지시킨 이순신

이순신 장군이 아니었으면 조선과 명은 풍신수길을 황제로 모셨으리라.
최성재

이순신 장군의 거짓말 같은 연전연승은 당시부터 지금까지 400년이 넘도록 질시와 폄하와 과소평가의 대상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나무가 너무 크면 바람도 그만큼 많이 받고, 산이 너무 높으면 일년 내내 구름에 휩싸이는 이치와 같다. 큰 나무는 직접 찾아가서 보고, 큰 산은 직접 올라가 봐야 그 높이와 크기를 알 수 있다. 혀의 칼로 전쟁하고 발의 날개로 줄행랑치던 선조도 이순신 장군의 승전이 처음에는 너무 반가워 전라도로 파천할 생각까지 한다. 명의 만력제가 이르되, 이연(선조)이 굳이 요동에 들어오려면 일개 사또 변학도로 취급하여 100명 이하의 신하만 거느리고 오라고 하자, 죽더라도 천자의 나라에서 죽겠다고 어리광을 피우다가 너무 큰 충격에 기가 팍 죽어 중국으로 도망갈 생각은 영영 단념하고 이순신 장군이 승승장구하는 전라도로 피난 갈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던 것이다. 1592년 5월 23일 이순신 장군이 올려 보낸 '옥포에서 적을 무찌른 장계'를 받아들고 대성통곡하던(징비록) 마음이 그 때까지 변함없었다.

상이 대신들에게 하문하기를,
“이곳으로 온 것은 오로지 요동으로 가기 위해서였는데 이미 요동으로 갈 수 없다면, 수상(水上)도 지극히 위험하니 항해(航海)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은밀히 의논하여 아뢰라.”
하자, 윤두수 등이 아뢰기를,
“왜적이 평양에 있으니 바닷길로 가게 되면 왜적에게 저지 당할까 두렵습니다. 황해 감사에게 바닷길을 정탐하고 와서 보고하도록 한 뒤에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약 왜적이 가까이 오면 창성(昌城)으로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렇게 하면 더딜 것 같다. 끝내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이 좋으니 지금 배를 준비하도록 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1592/6/26)
○甲寅/上問大臣曰: “來此全爲赴 遼 , 旣以赴 遼 爲不可, 則水上亦爲極危。 航海何如? 密議以啓。” 尹斗壽 等曰: “賊在 平壤 , 若由海路, 則恐爲賊?。 令 黃海 監司, 哨探海路來報, 然後決之, 何如? 若賊迫, 則可避 昌城 。” 答曰: “然則似遲, 雖終不行, 有備而待, 可也。 今可措置船隻。”

윤두수가 선천(宣川) · 곽산(郭山) 등의 바닷길을 경유하여 남쪽 지방으로 갈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만약 간다면 수로를 따라 갈 것이고 다시 선천 · 곽산을 경유하여 가지는 않겠다. 이 곳 의주로부터 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충청 · 전라도로 가서 정박하면 역시 군사들을 모집하여 부흥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이에 반드시 육지로 올라가 가야 할 곳도 있을 터이니, 이 곳 의주에서부터 가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인근 고을의 수령들에게 배와 격군(格軍)을 준비하도록 하라. 비록 준비하였다가 쓰지 않더라도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윤두수 등이 아뢰기를,
“다시 생각해보니 장산곶(長山串) 근처는 뱃길이 대단히 험하여 평상시에도 평안도 배들이 언제나 장산곶에서 파선 당하곤 했으니, 대가가 이 곳을 지나서는 안 됩니다. 용천(龍川)을 경유하여 급히 안악(安岳)에 정박하고 육로로 올라가 해주(海州)를 지나 아산(牙山)에 도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편으로는 선전관을 보내어 사공들을 소집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그와 같이 하겠으니, 실행하든 않든 간에 속히 준비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1592/6/26)
尹斗壽 請由 宣川 、 郭山 之海路, 以達南方。 答曰: “若去, 則當由水路以往, 今不更由 宣川 、 郭山 以往。 自此州以往何如? 往泊於 忠淸 、 全羅道 , 則亦可以召募, 以圖興復。 其間必當有登陸以行處, 不可自此以往乎?” 又曰: “令近官守令, 措置船隻及格軍。 雖備而不爲, 預備可也。” 尹斗壽 等曰: “更思之, 則 長山串 近處, 水路甚險, 常時 平安道 船隻, 每於 長山串 見破, 大駕不可過此。 由於 龍川 , 急泊於 安岳 , 登陸路, 過 海州 , 到 牙山 可也。 一邊發遣宣傳官, 召集水手。” 答曰: “知道。 如是爲之, 爲不爲間, 速爲措置。”

명나라에서 우리나라가 내부(內附)를 청한 자문(咨文)을 보고 장차 우리 나라를 관전보(寬奠堡)의 빈 관아에 거처시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상이 드디어 의주에 오래 머물 계획을 하였다. (선조실록 1592/6/26)
○聞天朝見本國內附咨, 將處本國於 寬奠堡 空?, 上遂爲久住 義州 之計。

만일 해국(該國)이 위급하여 참으로 도망해 오면 정리에 있어 막기가 어렵다. 당연히 여러 해 공순했던 점을 생각하여 칙령(勅令)으로 용납할 것이니, 반드시 인원수를 짐작하여 1백 명을 넘지 않도록 하게 하라. (선조실록 1592/7/11)
萬一該國危急固奔, 情難盡拒。 宜俯念恭順有年, ?令容納, 亦須酌量名數, 無過百人。

배은망덕(背恩忘德)은 범인의 본성이요, 결초보은(結草報恩)은 위인의 한 조각 붉은 마음이다. 선조와 윤두수와 원균 등은 바로 그런 범인으로서 너무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이다. 그래서 살 만해지자 처음에는 은혜를 망각했고 다음에는 엉뚱한 마음이 들었다. 이윽고 그까짓 것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겨져서, 스스로 위대한 공을 세워 보겠다는 야심을 품다가 패가망신(敗家亡身)하고 나라도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하게 만든다.

선조 이하 조선의 집권층은 전쟁 책임에 대한 죄의식도 강했다. 더불어 전쟁이 끝난 후 권력과 명예과 부를 한꺼번에 잃어버릴 것 같은 위기의식도 새록새록 일어났다. 이를 동시에 극복하는 방법은 영웅의 뒤통수를 치는 것과 승전의 공을 제3자에게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기를 쓰고 의병장 김덕령과 정문부 등이나 상승장군 이순신을 죽이거나 하옥하거나 무시한다. 또한 제3자인 명나라 군대의 공은 굽신굽신 하늘 끝까지 높인다. 중국군이 있으면 전쟁은 승리로 끝난다는 확신을 갖고, '충성 없는 효도'밖에 모르는 썩은 유학도(儒學徒)인 선조 이하 문관들이 전쟁 후 자신들의 위로 오를 수도 있는 국내의 '천한' 무인들이 이룬 구국의 공로를 온갖 꼬투리를 잡아 벌떼같이 폄하한다.

오늘날도 이런 현상은 그대로 적용된다. 군인 출신 대통령과 대기업은 현대의 선조 이하 문관들에겐 눈엣가시다. 그들의 공이 없다면, 있어도 보잘것없다면 그렇게 대를 이어 이를 갈고 거품을 품으며 박정희와 이건희를 폄하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입을 벙긋하기도 전에 국민이 일찌감치 단죄해 줄 테니까! 국민은 다르다. 국민은 요상한 이론이나 알쏭달쏭한 정통성에는 관심 없다. 그들에게 가장 이익을 많이 준 지도자와 경제인이 누구냐,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먹고살기 바쁜 그들은 봄바람과 겨울바람을 피부로 느낀다. 나날이 살림이 늘어나던 때가, 희망이 넘치던 때가, 집안에 웃음꽃이 만발하던 때가 언제인지 그들은 몸으로 안다. 어디에 취직하면 돈도 많이 벌고 배움도 많이 얻고 인간 대접도 제대로 받는지 본능적으로 안다. 김씨공산왕조는 이들보다 더 다급하다. 한국의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인정하면 설 땅이 없어진다. 친북좌파와 김씨공산왕조는 이 점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을 인정하되, 그것이 그렇게 호들갑을 떨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객관적인 관점에서 나름대로 신화와 역사를 구별하려고 한다. 언뜻 보면 대단히 합리적인 사람들 같다. 그런데 그들이 내세우는 근거를 들어보면, 어디서 대충 얻어듣고 좋은 머리로 얼렁뚱땅 조합한 것들이다. 이순신 장군을 처음으로 성웅이라 한 사람은 이은상이 아니라 신채호다. 신채호와 이은상은 각각 일제시대와 한강의 기적 시대에 현실을 타개하고 이상의 별을 바라보기 위해 이순신 장군에게 최상의 찬사를 보냈지만, 그들도 이순신 장군을 제대로 연구하고 이해한 것은 아니다. 이순신 장군의 겉을 보았지 속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반감을 갖는다. 그들의 느낌표 만발은 도리어 설득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의 서론과 총평에서 꼭 언급되는 말이 있다. 그것은 풍신수길의 과대망상이 빚은 비극이라는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황소한테 덤비기 전에 어린애의 우연한 돌팔매에 맞아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비유다. 언감생심 제까짓 게 어떻게 조선한테 이기고, 설령 조선한테 이기더라고 어떻게 일본의 마흔 배(당시에 북해도는 일본의 통치권이 미치지 못함)나 큰 대명(大明)을 이긴단 말인가. 하, 하, 하!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후 명나라는 곧 망한다. 그것도 만주벌판에서 뿔뿔이 흩어져 토끼나 쫓고 물고기나 잡고 어쩌다 호랑이를 잡아 가죽을 명나라의 변방 장수에게 팔던 자들이 10만도 안 되는 군사로 눈 깜짝할 사이에 중국 대륙을 석권한다. 이들과 풍신수길의 군대를 비교해 보라. 조선의 군대도 형편없었지만, 명나라의 군대도 엉망이었다. 군기(軍紀), 무기, 식량 등이 왕조 초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해졌고 무디어졌고 부실해졌다. 둘 다 왕조 말기 증상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일본은 400년 전란 시대를 막 끝내어 새 왕조 초기로 원기왕성했다. 공성전(攻城戰), 수성전(守城戰), 대회전(大會戰), 백병전 어느 것 하나 능치 못한 것이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400년 전란을 끝내는 결정적 무기인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화승총 100자루만 있으면 약졸(弱卒)도 천하무적의 보병 1만, 공포의 기병 1천은 식은 죽 먹기로 이길 수 있었다. 명나라에는 화포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미 녹슬었다. 또한 일본도 그보다 작지만 화포가 있었다.

풍신수길의 16만 조선 침략군과 누르하치의 10만 명나라 침략군 중 어느 군대가 강했을까. 더구나 일본에는 주력부대는 출동도 하지 않았다. 명고옥(名古屋 나고야)에 대기한 군대만 10만이 넘었다. 이순신 장군이 바다를 제패하지 못했으면, 당시 일본군은 능히 조선을 한 달 안에 정복했을 것이고 수륙 양면으로 요동과 하북으로 짓쳐 들어가 자금성을 무너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이순신 장군이 바다들 제패하지 못했으면, 명나라는 구원하러 올 시간도 없었다.

명의 만력제는 조선에 최대 6만 명을 파병했지만, 이순신 장군의 해로 장악으로 식량이 떨어진 평양성의 소서행장을 물리친 것 외에는 일본군과 싸워 이긴 전투가 없다. 무엇보다 군인 숫자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명나라 군대의 공을 의도적으로 하늘 높이 치켜세우던 선조 이하 집권층이 직산대첩이라고 우러러 받들던 것은 지난번 글에서 밝혔듯이 누가 이겼는지도 모르는 전초전에 지나지 않았다. 서울의 턱밑까지 다가왔던 10만 왜적이 거짓말같이 물러간 것은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전선으로 열 배의 적선을 깨뜨린 명량대첩 때문이었다. 일단 그들이 남해안에 구축해 둔 난공불락의 왜성(倭城)으로 들어가자, 명나라와 조선의 대포도 화살도 아무 짝에도 쓸모 없었다. 전쟁 아마추어에게는 초전에 조금 유리하게 보였을 따름이다.

실로 이순신 장군의 압승 또 압승은 일본의 제1차 대동아공영권을 저지한 위업이다. 동양삼국의 300년 평화를 가져온 위업이다. 400년 전 조선이 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저지한 위업이다.

해전(海戰)의 중요성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둔필(鈍筆)이나마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고대 그리스는 경이의 문화다. 인류 문화의 보고다. 특히 아테네가 그러하다. 아테네는 멸망한 후 2천 년이 흘러서야 부활의 날갯짓을 하여 손바닥 대륙 유럽으로 하여금 세계를 정복하게 했다. 현대의 철학, 과학, 문화, 경제, 정치 등 어느 것이나 그 원류는 그리스에 있고 아테네에 있다.

아테네는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그리스의 맹주로 부상한다. 그 원동력은 해군이다.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한 후, 아테네는 횡재한다. 그것은 라우레이온 광산에서 은에 이어 금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시민들은 이를 골고루 10드라크마씩 분배하자고 했다. 이 때 단 한 사람 아테네의 박정희 테미스토클레스가 이에 반대했다. (박정희는 일본으로부터 받은 대일청구자금을 사이좋게 껌 값으로 가르지 않고 포항제철 등 산업화의 종자돈으로 사용했다.) 그 돈으로 함대를 건설하자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200척을 건조했다. 이것은 살라미스해전에서 그리스 연합함대가 동원한 총 380척의 절반이 넘는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는 10년 전 부왕(父王)이 당한 마라톤 전투의 패배를 설욕할 겸 그리스 전체를 정복하기 위해 국가 총동원력을 내린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전투병력만 264만 명이다. 심부름 부대와 구경꾼 부대까지 합하면 528만이었다고 한다. 부풀리는 것도 전략의 하나니까,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100만 명은 되었을 것 같다. 이 중에서 해군은 대소 군선 3천 척이었다. 그 중에 살라미스해전에는 전쟁사가들에 따르면 600척에서 1,200척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살육과 문명>> 핸슨-- 그리스 연합함대의 2배 내지 3배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신탁을 멋지게 해석하여 안전한 나무 성채란 나무로 만든 배이라고 주장하여 아테네 시민들을 몽땅 배에 싣고 살라미스섬에 피신시킨다. 육전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안 됨을 알았던 것이다. 아테네는 이내 폐허가 되었다.

살라미스해전에서 페르시아군 가운데 약 4만 명이 헤엄을 못 쳐 죽었다고 한다. 실지 전투에서는 몇 천 명 죽었을 것이다. 맞은 편의 산 중턱에 설치한 거대하고 화려한 단상에서 크세르크세스는 왕비와 함께 목젖을 오르내리며 구경하다가 페르시아군이 패전하자, 바로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수십 만의 육군을 뒤에 남겼지만, 그들은 그리스 연합군에게 패배한다. 이로써 아테네의 황금시대가 도래한다.

에누리해서 100만 대군이라고 하더라도 그 중에서 고작 4만이 죽었는데, 크세르크세스는 왜 부리나케 도망갔을까. 그것은 직접 보고 해군의 위력을 제대로 알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오늘날의 보스포러스 해협을 막아 버리면, 100만 페르시아 대군은 독 안의 든 쥐가 된다. 무엇보다 식량을 구할 수 없다. 한 번 지나갈 때마다 각 도시와 촌락의 나무뿌리까지 다 캐 먹는 밤하늘의 별보다 많은 대군은 막상 해군이 없으면, 본국에서 식량을 가져오지 못하면 척박한 그리스 반도에서는 가만 두어도 굶어 죽는다.

1853년 일본 덕천 막부의 수도 앞에 검은 배 4척이 나타났다. 그 중에 둘은 당시 일본인의 상상 세계를 넘어섰다. 페리 제독이 몰고 온 증기선이었다. 이전 같으면 작은 배로 에워싸고 불화살을 쏘고 구식 총으로 쏘면 불태울 수 있겠는데, 이 두 척은 어림도 없었다. 만약 이 두 척의 배(미시시피호와 서스키해너호)가 강호(江戶 에도)만을 가로막으면 100만 인구가 그들의 사정거리에 들어가고 전국에서 바다로 공급되는 식량이 끊긴다. 덕천막부는 어쩔 수 없었다. 한 가닥 자존심을 살려 다음 해에 대답을 주기로 한다. 1854년 이번에는 페리가 8척을 끌고 온다. 그 중에 세 척이 증기선이었다. 그것은 미국의 전 함대 중 4분의 1이었다.--<<동양문화사>>라이샤워-- 떠오르는 제국 미국의 해군이 보유한 전 함대가 32척밖에 안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개항하기로 한다. 자기들도 그런 배를 만들기로 한다.

1894년 육군도 없고 해군은 더더욱 없는 조선에 비해 조선의 종주국 청은 총 65척의 근대 함선을 보유한다. 일본은 총 32척을 보유한다. 이들이 서로 조선을 삼키기 위해 압록강 하구에서 결전을 벌인다. 이 때 동원된 함선은 양국이 똑같은 12척! 이 해전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청일전쟁은 일본 쪽으로 결정적으로 기운다. 이 전쟁으로 일본은 실질적으로 조선의 종주국이 되었고 청으로부터 전쟁 배상금 2억 냥을 받는다. 청의 1년 재정수입이 8천만 냥일 때의 일이다. 일본이 조선을 삼키기 위해선 러시아도 물리쳐야 한다. 1904년 이들은 대한해협에서 맞붙는다. 이 때 일본의 주력 함선은 35척이고 러시아의 그것은 36척이었다. 비슷한 전력이었지만, 이순신 장군의 '일시 집중타'를 그대로 본받아 동향(東鄕 도고)은 압승한다.

놀라운 것은 일본 함선의 발전이다. 10년 사이에 주력함선이 4,270톤에서 15,200톤으로 늘어난 것이다. 중량은 3배 이상 늘었음에도 속도가 도리어 시속 17노트에서 19노트로 늘었다. 대포는 12.5인치 1문, 4.7인치 11문에서 12인치 4문, 6인치 14문으로 늘었다. 청일전쟁 시 중국은 일본보다 낡긴 했지만, 주력함 두 척은 모두 7,430톤에 12인치 포 4문, 6인치 2문이었다. 단, 속도가 13노트로 일본보다 훨씬 느렸다. -->> -- Ballard

선조와 같은 시기에 영국은 엘리자베드 여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1588년 그녀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영국의 바다로 유인하여 대포와 폭풍우로 무찌른다. 이 때 영국은 197척, 스페인은 130척이었다. 영국은 왕과 귀족과 국민만이 아니라 해적도 마음을 모으고 힘을 모으고 깡을 모아 130척 아르마다 함대를 상대로 싸워 11척을 격침시킨다. 셰익스피어와 베토벤의 폭풍우(Tempest)가 53척을 깨뜨려서 겨우 66척이 돌아간다. 스페인 해군은 약 2만6천 명이 죽는다. --<<서구 해전사>> 김주식--
세계 최강국에게 64척의 전함과 2만6천 명의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다. 아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스페인은 영국에도 뒤지고 프랑스에도 뒤지고 네덜란드에도 뒤진다.

영국의 아성에 도전한 것은 프랑스다. 나폴레옹이다. 현대전은 바로 나폴레옹에서 시작된다. 그의 한 발 두 발 세 발 앞선 전략에 유럽은 유사이래 처음으로 통일 직전에 이른다. 작은 섬나라 영국이 이를 가로막았다. 넬슨이 그 주인공이다.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으로 영국을 고립시키고 유럽을 한 손안에 쥐려고 했지만, 영국의 해군은 이를 씩 비웃으며 식량과 옷과 사치품을 요리조리 사고 팔았다. 마침내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을 침공하기로 만반의 작전계획을 세운다. 넬슨이 가만두지 않았다. 1798년 이집트 해안에서 나폴레옹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안긴 바로 그 원수였다.

영국은 27척, 프랑스는 18척, 프랑스의 연합군 스페인은 15척--영국 27척 대 프랑스 연합함대 33척으로 대등했다. 트라팔가에서 넬슨은 프랑스 연합함대 5척을 격침하고 17척을 나포한다. 그로써 프랑스의 영광은 서산으로 급격히 기운다. 넬슨은 비록 이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영국의 영광은 100년 더 지속된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로 진격한 것도 영국과 러시아가 바다를 통해 서로 사랑을 나눴기 때문에 질투에 불타서 동장군(冬將軍)의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덤벼들었던 전쟁이다.

세계의 운명이 이처럼 해전으로 결정된 예가 많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이순신 장군처럼 고립무원이었던 적은 없었다. 왕도 안 도와 주고! 사대부도 안 도와 주고! 양반도 안 도와 주고! 왜적보다 더 흉악한 내부의 적은 왕과 사대부와 손잡고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그런 경우는 어디에도 없다. 13척(나중에 1척 더 구함)으로 무려 10배나 되는 133척을 물리친 경우는 더더욱 없다. 거의 대등하거나 많아야 2배 내지 3배 많은 경우일 뿐이다.

이순신 장군의 위업은 지금껏 최고의 찬사를 늘어놓은 사람도 최상급의 찬사는 바치지 못했다. 제1차 대동아공영권을 저지한 위업 하나만으로도, 그는 한국의 바다와 세계의 바다 위에서 찬연히 빛난다. 인품은 더 아름다웠으니!
(2009.3.15.)

Saturday, March 14, 2009

우리 일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며칠 전 우연히 텔레비에서 “아미스타드 Amistad”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여러 해 전에 만든 영화인데 그동안 볼 기회가 없다가, 영화에 완전히 빨려들어가 눈물을 흘리며 보았습니다. 아프리카에서 큐바로 끌려왔다가 미국으로 온 아프리카 흑인노예들을 구해주는 로저 벌드윈이란 젊은 변호사와 당시 이미 은퇴하였던 존 퀸시 아담스 前 美대통령의 얘기였습니다. 그 당시 아프리카에서 납치 당하여 잡혀오는 흑인노예들의 참상에 관하여 아무 것도 몰랐던 벌드윈 변호사가 어쩌다가 그들의 변호를 맡은 후 흑인노예들의 참상을 조사하면서 자신이 바뀌는 과정, 처음에는 흑인들 변호를 거부하다가 흑인노예 싱크를 만난 후, 美대법원까지 올라간 이 송사에서 흑인들의 변호를 직접 맡겠다고 나선 美합중국 6대 대통령 존 퀸시 아담스가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싱크란 흑인노예가 자신의 변호를 맡아주겠다고 결심한 아담스 대통령에게 통역을 통하여 한 말이 며칠동안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수만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때부터 살아온 내 조상들이 지금도 나를 지켜주고 있습니다. 그분들 모두가 나와 나의 자유를 위하여 살았던 것입니다.” 싱크는 갖배운 영어로 “Give us Free!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고 법정에서 절규합니다.

이 흑인들은 美대법원에서 자유인으로 인정 받고 1840년경 西아프리카의 자기들 출신지인 시에라 리온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담스 대통령은 마지막 변론에서, “노예들을 사람으로 인정하면 남부세력이 연방에서 떨어져 나가겠다고,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공갈협박을 하는데, 그렇다면 전쟁을 하는 수 밖에 없다!”고 남부출신 대법관들에게 일갈합니다. 그후 20년이란 세월이 흘러, 1860년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터지고 흑인노예들은 법적으로 “영원한 자유인, Forever Free”으로 만들어주면서 미국이 다시 태어납니다. 2008년 11월, 아프리카 흑인은 아니지만 피부색이 검은 바락 오바마가 미국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젊은 변호사 로저 벌드윈과 野人이 된 前대통령 존 퀸시 아담스가 돈도 벌리지 않는 이 송사에서 인간의 자유를 찾아주기 위하여 끈질기게 끝까지 싸우는 것을 보면서 북한인권운동을 생각했습니다.

필자는 8년 넘게 북한인권운동을 해왔는데 요즈음에는 더 힘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믿었던 W. 부시 대통령은 6자회담 사기극만 오바마에게 넘겨주고 텍사스로 돌아갔습니다. 오바마는 김정일과 조건없이 만나겠다는 사람입니다. 미국사람들에게 북한인권을 챙겨달라고 졸라댄 것이 잘못입니다. 우리 일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며칠 전 김문수 지사가 외자유치 건으로 뉴욕에 다녀 갔습니다. 교민들 모인 저녁식사 자리에서 어쩌다가 북한인권 얘기가 나왔는데, 김지사 말씀이 “북한인권 진실은 정말 너무나 참혹합니다. 그런데 당사자인 한국인들이 미국사람들보다 북한인권에 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헌법에 북한주민들은 엄연히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우리 국민들 일을 남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우리 일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저 자신이나 美금융위기로 시작된 세계경제 쓰나미로 정신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오늘도 수백만 동포들이 매일 굶주리고 있고, 중국에는 탈북난민들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살인마 김정일은 내달 초에 미사일을 쏘아올리겠다고 발광입니다. 미국이나 일본이 미사일을 쏘아 떨어뜨리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공갈협박입니다. 제 주머니에 생돈을 퍼주어온 개성공단에서 수백명 남한국민들을 인질로 묶어 놓았습니다. 그런데도 이명박 대통령은 김정일에게 상생 공영 염불을 외우고 있습니다. 이게 미친 세상이 아니면 어느게 미친 세상인지, 해도 해도 너무들 합니다.

북한주민들은 아미스타드의 흑인들보다 더 참혹합니다.
존 퀸시 아담스 대통령은 흑인들을 살리기 위하여 직접 변호에 나섰습니다.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남부 흑인노예주들에게, 우리도 전쟁 불사다! 내질렀습니다.
김문수 지사가 말했습니다. “결국 우리 일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우리 일이란 것은 우리가 살인마 김정일과 친북좌파 김대중 역적들을 때려잡아 북한주민들을 구하고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자는 것입니다.

2009년 3월 14일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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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March 08, 2009

Sack Lunch 비행기 안에서 일어난 일

비행기 안에서 일어난 일

비행기에 올라타서 내 자리를 찾아 짐을 머리 위 짐칸에 올려놓고 앉았습니다. 한참을 날아가야 하는 여행이었습니다. “책을 한 권 갖고오기를 잘 했지. 책 읽다가 한숨 자야겠다.” 혼자서 생각했습니다. 비행기가 출발하기 직전, 군인들 여럿이 일렬로 서서 복도를 걸어오더니 내 주위 빈 자리에 모두들 앉았습니다.

군인들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어디로들 가시나?”
바로 내 근처에 앉은 군인 한 명에게 물었습니다.

“페타와와란 곳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2주간 특수훈련을 받은 후, 아프가니스탄 전선에 배치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 시간쯤 날랐을까, 기내 스피커에서 점심 박스를 하나에 5불씩에 판다는 안내 메시지가 들렸습니다. 동쪽 해안에 도착하려면 아직 한참 남았기에, 시간도 보낼 겸 점심 박스를 하나 사기로 맘먹었습니다. 돈을 꺼내려고 지갑을 찾는데, 근처에 앉아있던 군인 한 명이 친구에게 하는 말이 들렸습니다.

“점심 박스가 5불이라니 너무 비싸다. 기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냥 참고 가야겠다.”

딴 군인도 동의하면서 점심을 안 사먹겠다고 합니다. 주위를 돌아보니 군인들중 아무도 점심 박스를 사먹겠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는 비행기 뒤 편으로 걸어가서 승무원 아주머니에게 50불짜리 돈을 건네주곤 “저기 군인들에게 모두 점심 박스를 하나씩 나누어 주세요,” 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녀는 내 손을 꼭 감싸 잡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습니다.
“제 아들도 이라크에 가서 싸웠습니다. 손님께서는 내 아들에게 점심을 사주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승무원 아주머니는 점심 박스를 열 개 집어들고, 군인들이 앉아있는 쪽으로 가서 점심 박스를 한 개 한 개 나누어줬습니다.

그리곤 내 자리에 오더니, “손님은 어떤 걸 드실래요 – 쇠고기, 아니면 닭고기?” 이 아주머니가 왜 이러시나, 의아하면서도, 나는 닭고기를 먹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비행기 앞쪽으로 걸어가더니 일등칸에서 나오는 저녁식사 쟁반을 들고 내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으로 손님께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이렇게 점심을 먹고, 화장실에를 가려고 비행기 뒷쪽으로 걸어갔습니다.
어떤 남자가 저를 막았습니다.
“좀 전에 하신 일을 보았습니다. 저도 돕고 싶으니 이것을 받으시지요.”

그 사람은 저에게 25불을 쥐어주었습니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내 자리로 돌아오는데, 機長이 좌석번호를 둘러보면서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나를 찾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오는데, 기장은 바로 내 자리 앞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기장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손님과 악수하고 싶습니다.”
나는 안전벨트를 풀고 일어서서 기장이 내민 손을 잡았습니다. 기장은 큰 목소리로 승객들에게 말했습니다. “저도 전에는 군인으로 전투기 조종사였습니다. 오래 전, 어떤 분이 저에게 점심을 사주셨는데, 그때 고마웠던 기억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이구, 이를 어쩌나 하면서 쑥스러워하고 있는데, 기내 모든 승객들이 박수를 치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더 날라가고, 나는 다리를 좀 움직이려고 비행기 앞쪽으로 갔습니다. 앞에서 6번째 줄인가, 앉아있던 승객이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하더니, 나에게 또 25불을 건넸습니다.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해서 짐을 꺼내고 비행기 문으로 걸어가는데, 어떤 사람이 암말없이 내 셔츠 주머니에 무언가를 쑤셔놓고 부지런히 걸어가버렸습니다. 이런! 또 25불이네!

비행기에서 내려서 터미널에 들어가니까, 아까 그 군인들이 한 곳에 모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걸어가서 승객들로부터 받은 75불을 전했습니다. “당신들 기지까지 도착하려면 한참 남았으니까, 이 돈으로 샌드위치나 사들 먹어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가호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렇게 군인 열 명이, 비행기에 동승했던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느끼며 떠났습니다. 나는 내 자동차로 걸어가면서 이 군인들을 위하여 무사히 귀환하라고 빌었습니다. 이 군인들은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점심 박스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합니까. 작아도 너무 작은 선물이었습니다.

현역군인이나 재향군인이나, 그분들 모두가 사는 동안 언젠가, 나라에다 “미합중국 受取”라고 적은 수표를 바친 사람들입니다. 수표의 금액 란에는 “내 모든 것, 내 목숨까지라도” 적어서 말입니다.

이것은 비할 데 없는 영광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는 이런 영광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 우리들의 남녀 군인들을 모두 축복해주시오. 아멘.

영어원문 작자: 미상 (미주에 사시는 선배님 한 분이 보내주신 글)
한글로 번역: 남신우

2009년 3월 8일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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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k-projects.blogspot.comSack Lunches


Sack Lunch

I put my carry-on in the luggage compartment and sat down in my assigned seat.
It was going to be a long flight.
'I'm glad I have a good book to read. Perhaps I will get a short nap' I thought.
Just before take-off, a line of soldiers came down the aisle and filled all the vacant seats, totally surrounding me.

I decided to start a conversation.

"Where are you headed?"
I asked the soldier seated nearest to me.
"Petawawa. We'll be there for two weeks for special training, and then we're being deployed to Afghanistan."

After flying for about an hour, an announcement was made that sack lunches were available for five dollars. It would be a while before we reached the east coast and I quickly decided a lunch would help pass the time. As I reached for my wallet, I overheard soldier ask his buddy if he planned to buy a lunch.
"No, that's a lot of money for just a sack lunch. Probably wouldn't be worth five bucks. I'll wait till we get to the base."
His friend agreed. I looked around at the other soldiers. None were buying lunch.

I walked to the back of the plane and handed the flight attendant a fifty dollar bill.
"Take a lunch to all those soldiers."
She grabbed my arms and squeezed tightly. Her eyes wet with tears, she thanked me.
"My son was a soldier in Iraq; it's almost like you are doing it for him."

Picking up ten sacks, she headed up the aisle to where the soldiers were seated and handed them each a sack lunch.

Then she stopped at my seat and asked, "Which do you like best - beef or chicken?" "Chicken" I replied, wondering why she asked. She turned and went to the front of plane, returning a minute later with a dinner plate from first class. "This is your thanks."

After we finished eating, I went again to the back of the plane, heading for the rest room.
A man stopped me.
"I saw what you did. I want to be part of it. Here, take this."
He handed me twenty-five dollars. Soon after I returned to my seat, I saw the Flight Captain coming down the aisle, looking at the aisle numbers as he walked, I hoped he was not looking for me, but noticed he was looking at the numbers only on my side of the plane.

When he got to my row he stopped, smiled, held out his hand and said,
"I want to shake your hand."
Quickly unfastening my seatbelt I stood and took the Captain's hand. With a booming voice he said, "I was a soldier and I was a military pilot. Once, someone bought me a meal. It was an act of kindness I never forgot."
I was embarrassed when applause was heard from all of the passengers.

Later I walked to the front of the plane so I could stretch my legs. A man who was seated about six rows in front of me reached out his hand, wanting to shake mine. He left another twenty-five dollars in my palm. When we landed I gathered my belongings and started to deplane. Waiting just inside the airplane door was a man stopped me, put something in my shirt pocket, turned, and walked away without saying a word. Another twenty-five dollars!

Upon entering the terminal, I saw the soldiers gathering for their trip to the base. I walked over to them and handed them seventy-five dollars.
"It will take you some time to reach the base. It will be about time for a sandwich.
God Bless You."

Ten young men left that flight feeling the love and respect of their fellow travelers. As I walked briskly to my car, I whispered a prayer for their safe return. These soldiers were giving their all for our country. I could only give them a couple of meals. It seemed so little.

A soldier/veteran is someone who, at one point in his life, wrote a blank check made payable to 'United States of America' for an amount of 'up to and including my life.'
That is Honor and there are way too many people in this country who no longer understand it.

May God bless and protect our servicemen and women.

Saturday, March 07, 2009

세종대왕과 충무공 이순신(9) - 최성재

세종대왕과 충무공 이순신

세종대왕의 총통등록은 호랑이 이순신에게 이빨과 발톱과 날개를 달아 주었다.
최성재

1597년 4월 1일 옥문에서 나온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를 새로 쓰지만, 매달 초하루 또는 보름에 꼬박꼬박 기록하던 의식(儀式)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실행하지 않은 일이어서 기록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망궐례(望闕禮)로 멀리 북녘의 임금 계신 곳을 바라보며 절하면서 임금에게 충성을 다짐하고 임금의 만수무강을 비는 의식이었다. 선조가 직접 국문(鞠問)하진 않았으니까, 이순신 장군이 그 전에 하늘처럼 우러러 봤던 선조와 대면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여간 그는 선조에 대한 실망이 여간 크지 않았을 것이다. 선조가 알고 보니, 지방의 수령 직분도 감당 못할 소인배임을 간파했던 것 같다. 그 후로 이순신 장군의 충성은 오로지 국가와 백성으로 향했다.

조선의 스물 일곱 왕 중에서 군사 부문에서 가장 탁월한 왕은 누굴까. 다들 태조 이성계라고 할 것이다. 장군으로서는 왕조를 새로 세운 이성계의 발끝도 따라갈 왕이 없다. 그러나 업적으로 말하면, 단연 동시대 서양의 르네상스를 무색하게 하는 문치(文治)로 태양처럼 빛나는 세종대왕이다. 신라의 삼국 통일 후 우리나라의 강역(彊域)을 가장 크게 넓힌 왕이 세종대왕이니까. 그 때 이후로 조선은 단 한 뼘도 국토를 넓히지 못했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동서 양쪽에서 아작냈던 여진족은 임진왜란에서 아무 교훈도 못 얻은 조선을 두 번이나 유린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고토(故土)에 이어 중국 대륙 전체를 정복했다. 새삼 눈을 비비고 다시 보면, 세종대왕은 문무 양쪽에서 탁월한 군주였다. 세종대왕의 군사상 위대한 업적은 150년 후 이순신 장군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당대의 왕으로부터는 당신이 신하도 아닌 종 취급이나 받았지만, 승하한 지 150년이나 되는 왕으로부터는 음덕(陰德)을 듬뿍 받았다.

세종실록에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가 곳곳에 보이는데, 그 중에서 다음은 온 몸에 저릿저릿 전율을 일으키고 눈가에 이슬이 절로 송알송알 맺히게 한다.

조선이 압록강을 국경선으로 삼게 된 데는 최윤덕(1376~1445) 장군의 공이 가장 크다. 1410년(태종 10년) 무과에 급제한 최윤덕은 1419년(세종 1년)에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 이방원의 명을 받들어 이종무와 함께 대마도를 평정한다. 그 공으로 최윤덕은 삼정승 바로 아래인 종1품 우찬성(右贊成)으로 승진한다. 세종대왕은 이처럼 무(武)도 문(文)과 똑같이 대우했다. 이순신 장군이 홀로 나라를 구하고도 죄 없는 죄인이 되고 벼슬도 끝내 종2품에서 더 올라가지 못한 것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세종대왕 당시 상대도 안 되던 고작 총인구 30만의 여진족에게 후에 인조가 머리를 바위에 찧어 피를 철철 흘리며 항복한 것은 철저한 문존무비(文尊武卑) 사상이요 정책이었다. 16년 전 모양만 살짝 바꾸어 이런 뿌리깊은 병폐가 되살아나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한국의 장래는 암담하기만 하다.

최윤덕은 대마도 정벌에 이어 오늘날 평안북도의 여진족을 진압하고 백성을 대대적으로 옮겨 그 땅을 영구히 우리 땅으로 만드는 데도 혁혁한 공을 세운다. 승전 소식을 듣자마자, 세종대왕은 최전선에 있는 최윤덕을 바로 정1품 우의정으로 승진시킨다. 정말 파격적이다. 철저한 신분 사회에서 이보다 큰 상은 없다. 마침내 우의정 최윤덕이 돌아온다고 하자, 세종대왕은 사람을 보내 도성 밖 멀리 홍제원에서 대왕이 친히 내리신 술로써 성심성의껏 환영하게 한다.

내가 작은 벼슬을 제수할 적에도 반드시 마음을 기울여서 고르는데 하물며 정승이리오. 윤덕은 비록 배우지 않아서 건백(建白: 윗사람에게 의견을 드리는 것)의 일에 어두우나, 밤낮으로 게으르지 아니하고 일심봉공(一心奉公)하여 족히 그 지위를 보전할 것이다. (세종실록 1433/5/16)

우의정 최윤덕이 평안도에서 돌아오자, 지신사 안숭선에게 명하여 선온(宣온)을 가지고 홍제원에 가서 맞이하게 하고, 임금이 사정전에 나아가 윤덕을 인견하고 간략한 술자리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세종실록 1433/5/25)

○丁丑/右議政 崔閏德 回自 平安道 , 命知申事 安崇善 , 齎宣온往迎于 洪濟院 。 上御 思政殿 , 引見 閏德 , 仍設小爵以慰.

온몸을 짜릿하게 하는 장면은 이 미담 다음에 나온다. 바로 다음 날 정식으로 개선식이 베풀어진다. 왕세자와 문무백관이 참여한 근정전에서 세종대왕은 친히 우의정 최윤덕에게 술을 따르는데, 다른 무장과 달리 가장 공이 큰 최 장군만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임금은 공손히 서서 술을 따르고 신하는 턱 버티고 앉아서 술을 받도록 한 것이다. 문맥을 보면, 왕세자에게도 술을 따르게 한다는 말 다음에 이 말이 있어서 마치 왕세자가 술을 따를 때만 최 장군이 일어서지 못하게 한 듯하지만, 임금이 술을 따르는 것과 왕세자가 술을 따르는 것은 내용이 비슷하기 때문에 구문이 따로 떨어질 수 없다. 만약 이 부분을 왕자가 술을 따르는 것보다 앞에 두면, 임금이 술을 따를 때는 앉아서 받고 왕자가 술을 따를 때는 일어서서 받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따라서 최 장군이 앉아서 술을 받는 것은 임금이 술을 따를 때나 왕자가 술을 따를 때나 똑같이 적용된다. 이 기사에는 또 다른 미담도 전한다. 한 장수가 공무상 늦게 오는 바람에 예복을 갖추지 못하여 참가하기 난감하게 되자, 세종대왕은 임금의 옷(御衣)을 하사하고 신발도 하사하여 잔치의 원래 뜻이 사사로운 예절로 손상되지 않게 한다.

근정전에 나아가 잔치를 베풀고 출정한 장수들을 위로하였다. 우의정 최윤덕 · 판중추원사 이순몽 · 중추원사 이징석 · 중추원 부사 김효성 · 홍사석 등과 왕세자 및 여러 종친과 대언들이 연회에 입시하였다. 전 상호군 서침(徐?) 등 62명은 동쪽 월랑[廊]에 앉고, 전 판사 김재(金滓) 등 66명은 서쪽 월랑에 앉았다. 이에 앞서 상의원(尙衣院)에 명하여 옷과 신을 만들게 하고, 이날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모두 입고 잔치에 나오게 하였다. 김효성은 영변에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옷과 신을 준비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날 막 연회를 시작하려고 할 때 효성이 평안도에서 왔다. 임금이 승정원과 의논하기를,
“오늘의 잔치는 오로지 출정한 장수를 위로하기 위함인데, 효성이 올 것을 알지 못하고 옷과 신을 준비하지 아니하였으니 어떻게 처리할까.”
하매, 여러 대언들이 논의해 아뢰기를,
“만약 옷과 신을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연회를 나오지 못하게 하면 옳지 못하고, 만약 연회에 나오게 한다면 지위가 사석의 위에 있는데, 도리어 옷과 신을 하사하지 아니하는 것도 불가하오니, 우선 연회에 나오게 하고 옷과 신은 뒤에 하사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어의(御衣)와 신을 내어 주면서 즉시 입고 연회에 참예하게 하였다. 임금이 친히 술잔을 잡아 윤덕 · 순몽 · 효성 · 징석 · 사석 등에게 주고, 또 세자로 하여금 윤덕 등의 앞에 나아가서 술잔을 돌리게 하고, 인해 윤덕에게 명하여 일어나서 술을 받지 말게 하였다. 군관(軍官)에게 명하여 마주 대하여 일어나서 춤을 추게 하니, 윤덕도 술이 취하여 일어나 춤을 추고 임금에게 술잔을 드렸다. (세종실록 1433/5/26)

○御 勤政殿 , 設宴慰赴征將帥, 右議政 崔閏德 、判中樞院事 李順蒙 、中樞院使 李澄石 、中樞院副使 金孝誠 · 洪師錫 、王世子諸宗親諸代言侍宴, 前上護軍 徐침 等六十二人坐於東廊, 前判事 金滓 等六十六人坐於西廊。 前此, 命尙衣院, 造衣及靴, 是日分賜將帥, 皆令服以赴宴。 金孝誠 在 寧邊 未還, 未備衣靴。 是日將宴, 孝誠 來自 平安道 , 上議於承政院曰: “今日之宴, 專慰赴征將帥也。 未知 孝誠 之來, 未備衣靴, 處之何如?” 諸代言議啓: “若以未備衣靴, 不令赴宴, 則不可, 若令赴宴, 則位在 師錫 之上, 而反不賜衣靴, 亦且不可, 姑令赴宴, 從後賜之何如?” 上乃出御衣及靴以賜, 卽令衣以參宴。 上親執爵, 賜 閏德 、 順蒙 、 孝誠 、 澄石 、 師錫 等, 又命世子就 閏德 等之前行酒, 仍命 閏德 勿起受酒。 命軍官相對起舞, 閏德 亦酒?, 起舞獻爵。

이런 왕 아래서 어떤 신하인들 충성을 다하지 않으랴! 세종대왕은 가서 싸우고 오라, 이렇게 빈말로 충성을 도둑질하지도 않았다. 군사와 무기와 군량미를 충분히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이 중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 무기다. 최무선의 화포는 세종대왕의 정책에 의해 성능이 크게 향상되었다. 문종실록 1450년 10월 5일자에 따르면, 화포가 1리(釐) 단위로 정확해졌다. 박재광의 <<화염조선>>에 따르면, 1리(釐)는 0.3mm라고 한다. 그래서 천자총통은 사거리가 개량 전 400보 내지 500보(약 550m~690m)에서 1300보(약 1800m)로 약 2.5배 늘어났다. 지자총통은 사거리가 500보에서 800~900보(약 1100m~1250m)로 약 2배 늘어났다. 왜적 조총의 사거리가 약 100m였던 것과 대조해 보면, 후에 이순신 장군이 세종대왕에게 얼마나 큰 음덕을 입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세종대왕은 1448년 <<총통등록(銃筒謄錄)>>을 펴낸다. 조선의 무기를 집대성한 기념비적 서적이다. 이는 단지 각종 무기에 대해 주섬주섬 설명한 책이 아니다. 박재광에 따르면, 이를 통해 한 나라의 무기 체제에서 제일 중요한 무기의 표준화와 규격화와 전문화를 달성한 것이라고 한다.

유성룡의 <<서애집 중 잡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한양에는 화약이 무려 2만7천 근이나 있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한 번 출전할 때, 화약을 1천 근 정도 썼음을 알 수 있는데(유황을 보내 달라는 장계), 정광수는 <<이순신과 임진왜란>>에서 이순신 장군이 원균에게 인수인계한 화약이 4천 근이었다고 한다. 이에 비추어 보면, 2만7천 근은 어마어마한 양이다. 그런데 이걸 단 한 번도 못 쓰고 울화통이 터진 조선의 백성들이 폭파시켰다고 한다. 그 후에 화약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애쓰지만, 염초 만드는 전문가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중국한테 잘 배우지도 못하여, 바다에서는 조선의 주무기였던 화포가 육전(陸戰)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못했다. 진주와 행주와 경주와 울산에서 일부 사용되었을 따름이다.

이 무렵에는 염초가 심히 귀하였으니, 국초(國初)에 군기시에서 보유하고 있는 것은 겨우 화약 6근이었다. 뒤에 해마다 보태어 준비하니 임진 난리가 있기 전까지는 군기시의 창고에 화약 2만7천 근이 비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적이 경성에 미치자 성안 백성들이 먼저 군기시와 다른 무기를 불사르니, 하루저녁에 다 타 버리고 말았다. <<서애집>>
是時焰硝甚貴。國初軍器寺只有火藥六斤。後逐年加備。壬辰變前。軍器庫有火藥二萬七千斤。及賊入京。城中之民。先焚軍器寺。與他器械一夕(火+畏)燼。

고려 말 무신란 때보다 10배는 심한 무인 천시 사상과 정책 때문에, 조선은 세종대왕에 의해 군사강국으로 거듭나고 체제도 완벽하게 갖추었지만, 150년 후에는 간신히 그 명맥이 이순신 장군에게만 전해졌다.

이순신 장군이 태어나기 4년 전인 1541년(중종 36년), 조선은 망국의 주춧돌을 놓았다.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가 시행된 것이다. 암묵적인 관행을 합법화한 것이다. 군(軍)에 가는 대신 포(布)를 조금 내다가 이 법령과 더불어 이제 양반은 아예 군 면제자가 되어 입대하지도 않고 돈도 안 내어도 되었던 것이다. 군 복무가 특권이었던 유럽과 일본과 여진족에 비해, 조선은 군 면제가 특권으로 자리잡음으로써 문약(文弱)의 나라로,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완전히 괴리(乖離)된 나라로, 누구든 국경을 넘어 1만 명만 쳐들어오면 나라가 바로 망하게 될 정도로 허약한 나라로 전락했다.

군사체제가 더 망가질 수 없을 만큼 망가진 나라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룩한 일은 하나에서 열까지 기적 아닌 것이 없다. 그런 사정을 알아야만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며, 그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시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었는지를 알 수 있다. 천하제일 명장 충무공 이순신도 만약 세종대왕이 없었더라면, 왜적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다. 한두 번의 싸움에서 장렬히 전사했을 것이다.
(2009. 3. 7.)

Friday, March 06, 2009

역적 김대중의 상전은 살인마 김정일

이제는 서울이나 워싱턴에서 대북정책 관계한답시고 떠드는 사람들이 모두 역겹게 보일 정도로 한심하다. 지난 달 중순에도 워싱턴에 내려가서 美기업연구소에서 열린 “오바마의 對北정책은?”이란 토론회를 참관했었다. 니콜라스 에버슈타트 박사가 토론회를 주재하고 데이비드 애셔와 고든 플레이크, 피터 액커맨이란 사람들이 한 마디 열 마디씩 했다. 시간 반 동안 이 분들 얘기를 듣다듣다 하도 답답해서 질문시간 마지막에 일어나서 질문이 아니라 질타를 했다. 제네바 회담이다, 6자회담이다, 남북회담이다, 무어다 해서 지난 수십년간을 회의만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이룬 것은 무엇이고 결과는 무엇인가? 북한사람들을 살렸나? 아니면, 김정일의 핵을 없앴나? 말잔치로 허송세월 하는 동안에 김정일은 핵보유국이 되었고, 북한에서는 수백만이 굶어죽었다! Talk, talk, talk, to death!

국제깡패 김정일이 핵실험을 하고, 깡패나라 시리아에 핵원자로를 지어주고, 깡패중의 깡패나라 이란에는 미사일 기술을 전해주다가, 이제는 미사일인지 갖잖게 인공위성을 동해바다로 쏘아 올리겠다는데도, 美국무부에서나 한국정부에서는 기껒 한다는 소리가, 그러면 It will be unhelpful, 도움이 안 될 테니까 우리 만나서 대화 좀 하잔다. 도무지 만나서 무얼 하겠다는 건가? 김정일 위원장님, 뇌졸중으로 앓으셨었다는데 요즈음 건강은 어떠신지요? 김정일 위원장님, 아드님들 중에서는 누가 King Kim III(김씨왕조 3세)로 등극하실 건지요? 요즈음 세계경제가 이렇게 힘든데, 아직 프랑스 꼬냑을 마실 여유는 있으신지요? 남조선의 리명박 역도가 반성하지 않으면 남한을 잿더미로 만드시겠다는데, 그게 정말이신지요?

김정일은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 소시민 남아무개가 하는 소리가 아니라, 김정일을 잘 아는 존 볼턴 前 유엔대사, 前 국무부 차관이 기회만 있으면 주장해온 소리이다. 김정일은 절대로 개혁개방 안 한다! 김정일이 핵을 포기하거나 개혁개방하면 제 목숨이 끝장나는데, 왜 핵을 포기하고 왜 개혁개방을 하겠는가?

그러면 어쩌자는 것이냐?

김정일에게 전쟁하자고 맞서야 한다! 김정일은 주한미군과 진짜 전쟁하면 그날이 제 목숨 끝장이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미군이 남한에 버티고 있는 한, 김정일은 절대로 전쟁 못한다. 그러니 김정일에게 전쟁하자고 맞서면 전쟁 못하는 겁쟁이 김정일은 영용한 인민군들에게 개망신을 당한다. 저 똥배 난쟁이가 장군님이 아니었구나! 김정일의 통제력은 수직하강이다. 남한의 친북좌파들도 개망신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전쟁하자는데, 남한의 친북좌파 개들이 국회에서 개판을 치고 깽판을 놔? 김정일, 김대중, 친북좌파 개들이 모두 꼬리를 내릴 것이다. 다시 충무공 말씀을 옮기지만 死卽生이고 生卽死다.

미국의 오바마는 한반도에 관심 없다. 전혀 없다. 북한주민들 죽는 것에도 관심 없다. 그날 워싱턴 토론회에서 들은 얘기인데, 오바마에게는 지금 관심事의 90프로가 미국경제이다. 나머지 10프로가 미국안보인데, 그나마 안보 관심사에서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이란, 중동이 걱정거리이지, 핵을 업은 김정일과는 6자회담만 질질 끌면 만사 오케이란 식이다. 시간이 갈수록 김정일은 더 강폭해지고, 남한의 친북좌파 역적들은 갈수록 더 기고만장이다. 빨갱이들에게는 국회의원들도 눈에 보이지 않는데, 이제 빨간 완장이나 차고나서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어쩔 셈인가? 목을 조르고 눈을 후벼파도, 그냥 당하기만 하겠다는 건가? 동해바다에 미사일을 쏘아올려도, 구경만 하겠다는 건가? 북한사람들이 또 수십만 수백만 굶어죽어도 나만 살아나면 괜찮다는 건가?

김정일이 전쟁하겠다니까, 남한을 잿더미로 만들겠다니까, 우리도 전쟁 不辭다!로 맞받아치고, 김정일을 고립시키면 우선 희망은 생긴다. 전쟁불사 정신이면, 친북좌파들과도 한 번 싸워 볼만 하다. 전쟁은 절대로 못한다! 안 하겠다! 하면, 김정일은 커녕 친북좌파들과의 싸움에서도 전혀 승산이 없다. 민주당 민노당 빨갱이들과 대화는 무슨 대화이고, 협상은 무슨 협상을 하겠다는 것인가? 저런 한나라당과 이명박 대통령을 믿고 나라를 어떻게 살리겠다는 건가?

전쟁 절대不可!로 핵깡패 김정일을 살려놓고는 친북좌파 빨갱이들에게 우리나라마저 빼았긴다. 친북좌파 빨갱이들 뒤에는 역적 김대중이 있고, 역적 김대중의 상전은 살인마 김정일이다.

2009년 3월 6일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씀
http://nkgenocid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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