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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January 31, 2009

당신이 정말 대한민국 대통령인가?

다음은 2009년 1월 30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명박이 한 말이다.

“저 자신은 북에 삐라 뿌리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삐라는 오래전부터 보내왔던 것인데 근래에 신경을 쓰는 것은 그럴 이유가 있다. 가능하면 그런 것은 하지 않도록 강하게 건의하고 있다. 요즘 자제하는 것 같고 사소한 문제로 북한을 자극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다음은 2009년 1월 31일 재미교포 소시민 남아무개가 하고싶은 말이다.

“살인마 김정일이 싫어하는 일이라면 전부 찬성이다. 특히 북한괴뢰군 놈들이 발작발광하는 풍선삐라 날리는 일은 돈만 있으면 매일 매시간 날려보내야 한다. 김정일이 싫어하면 싫어할수록 더 많은 삐라를 더 자주 날려보내야 한다. 김하중, 박희태, 조용기, 이명박들이 삐라 자제를 강하게 건의하고 방해하면 할수록 더 많이 날려보내야 한다.

삐라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살인마 김정일을 뇌졸중으로 뒈지게 할 수도 있고, 북한주민들에게는 진짜 진실과 진짜 돈을 전할 수 있는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응급수혈이다. 풍선삐라 막는 놈들은 대통령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한나라당 대표도 아니다. 풍선삐라 막는 놈들은 김정일 김대중에게 아부하고 공조하는 빨갱이 역적들이다.”

“남북관계는 신뢰하고 존중하면서 서로 얘기할 수 있는 출발점에 서야 한다”고?

누구를 신뢰하고 누구를 존중하겠다는 말인가! 300만 인종학살 살인범 핵무기 국제깡패 김정일을 신뢰하자고? 존중하자고?

이념도 없고 북한주민들 굶어죽는 것 상관없는 당신이나 신뢰하고 존중해라! 돈도 없이 빽도 없이 지원도 없이, 북한형제들 살리겠다고 고군분투하는 탈북자유투사 박상학 대표에게 북한형제들 살리는 일을 자제하라고?

당신이 정말 대한민국 대통령인가?

2009년 1월 31일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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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장군 이야기-4(최성재)

기적을 믿지 않음으로 기적을 낳은 이순신

이순신 장군은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 안에서 방법을 찾아내어 기적을 양산했다.
최성재

선조는 밤낮으로 기적을 믿었지만, 이순신 장군은 꿈에도 기적을 믿지 않았다. 선조는 조상의 위패만 잘 모시고 명나라의 대인들에게 머리만 잘 조아리면 그들이 음으로 양으로 기적을 일으켜 제갈공명이 머리카락을 곤두세우고 두 손을 치켜들어 동남풍을 일으킴으로 조조의 백만 대군을 물리쳤듯이 여반장으로 왜적을 모조리 몽달귀신이나 물귀신으로 만들 줄 알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오로지 피와 땀으로 전쟁에서 이겨야만 왜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잘 알았다.

선조는 철석같이 기적만 믿고 발만 동동 구르거나 걸핏하면 임금 짓 못해 먹겠다고 목소리를 착 깔아 협박하거나(대통령 중에도 이런 자가 있었지, 아마!) 시도 때도 없이 아랫것들에게 짜증내고 벌컥벌컥 화를 냈지만, 이순신 장군은 절대 기적을 믿지 않고 촌음을 아끼고 땀 한 방울도 헛되이 버리지 않고 티끌을 모으고 또 모아 중국의 태산보다 큰 조선의 백두산을 쌓았다. 씨를 뿌려 곡식을 마련하고, 떠돌이를 모아 군사 훈련을 시키고, 나무를 베어 전선(戰船: 주력 함선)과 협선(挾船: 심부름 배)을 만들었다. 잔꾀를 부리거나 게으름 피우는 자는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엄히 꾸짖었지만, 성실하고 정직한 자는 아무리 신분이 낮아도 극진히 대접하여 누구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했다.

전선 한 척 건조하기가 얼마나 어렵고, 군대가 스스로 최대 29,000명 최소 14,000명의 군량미 마련하기가, 아니 군대가 스스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단 100명의 군량미 마련하기도 얼마나 어렵고, 대포 하나 만들기가 얼마나 어렵고 갯벌에서 염초를 구워 화약을 제조하기가 얼마나 어렵고, 화살 한 대라도 군대가 스스로 만들기가 얼마나 어렵고, 5분만 서 있어도 멀미가 나는 거친 바다에서 군사 훈련하기가 얼마나 어렵고, 고립무원에 처한 군사의 사기를 진작시키기가 얼마나 어렵고, 열의 아홉이 겁쟁이인 조선 사람을 데리고 전쟁의 달인 왜적을 상대로 실제로 맞붙어 싸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선조는 조금도 몰랐다. 그까짓 것 육지는 몰라도 바다에서는 조선의 수군이 원래 강하니까(왜적은 섬나라 사람이라 수군이 강하니까 수군을 몽땅 육군으로 만들자는 신립의 말에 귀가 솔깃해 하던 것은 까맣게 잊고!) 임금의 명을 받든 사람이면 도망가는 재주밖에 없는 자든 술김에 뻥뻥 큰소리치는 자든 아무나 지휘해도 무조건 이기는 줄로만 알았다. 출동만 하면 조선수군은 그까짓 것 야만족을 단숨에 일망타진할 줄 알았다.

...
양원(명나라의 총병): 군량이 넉넉해야만 성을 지킬 수 있습니다. 넉넉하지 못하면 3천 명의 군사(남원을 지킬 명나라 군)가 먹을 것을 어떻게 공급하겠습니까?
선조: 만일 3만 명이 반달쯤 먹을 것이라면 계속 대기 어렵겠지만, 3천 명이 먹을 것이라면 어찌 마련하지 못하겠습니까?
양원: 권율과 김응서가 거느린 군사는 얼마나 되며 또 어떤 일을 담당하고 있습니까?
(선조가 이항복을 불러서 물어보더니 대답하였다.)
이항복: 성윤문과 김응서가 거느린 군사가 각각 2천 명이며, 권율은 다만 휘하의 군사들만 거느리고 있고, 여러 장수들이 거느리고 있는 군사들은 좌도와 우도를 합쳐 겨우 1만 여명입니다.
...
임금이 절하는 의식을 하자고 청하니, 양원은 읍을 하고 그만두자고 청하였다. (선조실록 1597/5/8)

이 때는 이순신 장군이 백의를 입고 도원수 권율의 휘하로 가던 중이다. 당신의 목숨보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싸늘한 주검을 보고 펄쩍펄쩍 뛰며 하늘이 노랗게 눈물과 피를 비오듯 쏟다가 죽음보다 못한 삶을 한탄하며 죄인된 몸으로 허겁지겁 장례를 치르고 남으로 남으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길을 재촉하던 때다. 1593년부터 명과 왜의 해괴한 강화회담이 성립되어 4만 명의 명나라 군대는 1만 명만 남고 철수했다가 다시 이 때 6만 명이 들어온다. 그 중 전라도의 요충인 남원에 명나라 군대가 3천 명 주둔하는데,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은 유일한 지역인 호남에서조차 3천 명의 군량미 마련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명나라의 총병이 먼저 알고 걱정한다. 이에 선조는 3만 명은 몰라도 3천 명 정도는 문제없다고 큰소리친다. 여기서 보면 알겠지만, 육군은 조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음에도 다 합해야 1만 명밖에 안 된다. 이나마 그 이태 전 1595년 3월 순찰사 이원익의 건의에 따라 8천 명을 뽑아 규정대로 훈련한 결과이다. 남원에 투입된 조선군은 고작 1천 명!

후에 원균이 조선 전체 군사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수군을 하룻밤 사이에, 노(櫓)야 나 살려라, 도망 간 12척만 빼고 전멸시킨 다음, 왜적은 물밀 듯이 곡창 전라도로 쳐들어오는데, 나는 새도 우수수 떨어뜨리는 조총을 들고 남원을 에워싼 왜군이 무려 5만 명이었다.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삼가 상의드릴 일로 아뢰나이다.
전라좌우도 연해안 열 아홉 고을 안에서 열 고을은 수군에 전속되어 있는데, 변란이 일어난 후부터 육진(陸鎭)의 여러 곳에서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군량을 실어 날라 이미 바닥이 났으며, 좌도 네 고을과 우도 한 고을은 또 스스로 불태워 버린 화를 겪었습니다. 지금 좌우도의 배들 중에서 먼저 모인 것이 전선 110척, 탐색선 110척인데, 이들 배에 타고 있는 사부와 격군을 모두 합하면 무려 17,000명이나 되므로, 1명 당 아침저녁으로 각각 5홉씩만 나누어 주더라도 하루에 먹는 것이 적어도 100여 섬이며, 한 달이면 3천400섬이나 됩니다.
경상우도는 완전히 거덜난 뒤여서 군량을 마련할 길이 더욱 없으므로 믿을 곳이라고는 전라도 열 고을밖에 없는데, 열 고을에 남아 있는 군량도, 피난민 구제용 곡식을 제외하면, 수군에게 공급할 양식으로는 겨우 오월 보름까지밖에 대지 못할 형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그 전에 저 흉악한 왜적들을 소탕하지 못한다면, 그 후의 군량은 마련할 길이 전혀 없으니 참으로 답답하고 걱정스럽습니다. 부디 조정에서 헤아려 조처해 주시기 바라나이다.
(군량을 조처해 주시기를 청하는 장계 1594/3/10)

이 당시는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돌아 수군도 22,000명 정도의 군사가 17,000명으로 줄어 들었다. 군사 숫자는 줄었지만, 군인이든 농민이든 죽은 사람도 많고 병든 사람도 많아서 농사 짓기가 몹시 어려웠다. 더군다나 이 때는 춘궁기인데, 열 고을은 수군에게만 군량미를 공급해야 함에도 육군이 제멋대로 징발해 가는 바람에 이순신 장군이 도서 지방에서 아무리 장군 스스로 마련한 둔전에서 반은 농민에게 주고 반은 거둬서 충당했지만 군량미가 태부족했다. 최소한 하루에 두 끼는 먹어야 육체의 힘만이 아니라 정신의 힘도 살아나는데, 두 달 정도의 여분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순신 장군은 놀고먹으며 엉터리 명령이나 아닌 밤에 홍두깨처럼 마구 내던지는 조정에 군량미를 부탁한다. 명나라 군대에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군량미를 제공했지만, 선조가 육군도 아닌 조선의 수군에게 군량미를 제공했을 리가 없다. 이순신 장군은 조정에서 군량미를 보낼 것이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연해안 열 고을만이라도 제발 육군에서 뜯어가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달라고 엎드려 부탁한다. 또한 군량미를 마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아시고 앞으로는 육군도 전국에 둔전을 만들어 군량미를 자체 조달하라고 간접적으로 알려 준다. 그 전에 둔전에 관해서는 자세히 상소한 적이 있었다(1593/11/17).

선조 이하 조정 대신은 기적만 바라고 하늘만 쳐다보고 발만 동동 구를 뿐 이런 이순신 장군의 제안은 거들떠보지도 않아, 조선 육군은 다 합해야 고작 1만 명의 군대밖에 유지하지 못한다. 후에 조명 연합군을 결성하여 남해안의 왜적을 싹쓸이하려고 장한 계획을 세울 때도 명나라는 4만 명 조선은 1만 명이었다(1597/10). 주객이 전도된 전쟁이었다. 명나라는 이런 조선을 경멸하고 제대로 싸울 생각을 안 한 건 지극히 당연하다.

군인은 어떤가? 심지어 이순신 장군은 거지도 군인으로 모셔오기도 했다.

...
정월부터 2, 3, 4월까지 3도의 사망자 수와 현재 앓고 있는 환자 수는 전라좌도가 각각 406명과 1373명이고, 우도가 각각 603명과 1878명, 경상우도가 각각 344명과 222명이고, 충청도가 각각 351명과 286명으로 3도의 사망자 수 합계는 1704명이고, 현재 앓고 있는 자는 모두 3759명이나 됩니다.
...
형편상 어쩔 수 없어서(고을 수령들이 협조하지 않아서) 떠돌아다니며 얻어먹는 거지 무리들을 끌어 모아서 격군에 충당하였더니, 오랫동안 굶주렸던 사람들이어서 크게 앓지 않아도 돌아서면 곧바로 죽어버리니, 더욱 통분한 일입니다.
...(징병 업무를 태만히 하는 수령들을 처벌해 주시기를 청하는 장계 1594/4/20)

육군이 우선 징발해 가고 그나마 고을 수령들은 수군에 징발되는 것을 고의적으로 가로막고 있다. 틀림없이 뇌물을 받았을 것이다.

일본에 잡혀가서 성리학을 전하고 돌아온 강항의 <<간양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신이 엎드려 우리나라의 형편을 살펴보건데 평소에 인재를 기른 일도 없고, 백성을 가르친 일도 없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농민들을 긁어모아 싸움터로 몰아세우니, 그나마 권리나 돈푼이나 있으면 뇌물을 먹이거나 권력을 떠세하는 등 갖은 방법으로 다 내빼고 헐벗고 힘없는 백성들만 싸움터로 내몰리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한 사람의 장군이랬자 제 직속군이 없고 졸병들에게도 통솔자가 일정하지 않습니다. 한 고을 백성으로 절반은 순찰사에게 속하고 절반은 절도사에게 속하기도 하며, 한 졸병의 몸으로 아침에는 순찰사에게 붙었다가 저녁 녘에는 도원수를 따르기도 합니다. (이을호 역)

그러면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스스로 힘으로 군대를 양성했을까. 이것도 절대 기적이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티끌만한 실마리라도 있으면 그것을 놓치지 않고 오합지졸을 모아 세계최강의 군대로 양성했다. 첫째는 도서(島嶼)의 둔전법이고, 둘째는 질병에 의하지 않는 한 군인들을 잘 먹이고 잘 훈련하여 전투마다 이겨 일단 들어온 군대는 늘면 늘지 줄지 않게 했던 것이다. 전라도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이순신 장군만 믿고 몰려온 사람들 중에 장정은 군인으로 삼고 나머지는 농사를 짓거나 미역을 따거나 소금을 굽거나 물고기를 잡게 하여 모든 걸 자체 조달했던 것이다. 경상도 연안에서 무려 3년치의 식량을 확보해 두고 있었던 왜군과 크게 대조된다.

...
명나라 사신이 와서 철병이 지연되는 것에 대하여 그 이유를 묻자 행장은 대답하기를, '관백이 보낸 각 군영의 식량은 사람 숫자로 계산하여 3년 동안 먹을 것을 마련해 놓은 것인데, 군사를 동원시킬 때에는 관백이 보낸 식량을 먹게 하였으나, 주둔하고 있는 동안에는 각 장수와 군사가 자체로 마련해서 쓰도록 했던 것입니다. 현재 관백이 보낸 여유 식량의 수량이 너무 많아서 요즘 그것을 실사하느라 지연되었습니다.
... (선조실록 1595/7/24)

반면에 조선은 일본군이 남해안으로 물러간 후에도 부자와 형제끼리 잡아먹기도 하는 생지옥을 연출했다. 그러니 군량미를 어찌 마련하랴. 이순신 장군이 실시하고 건의한 둔전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전시 중 한시적으로 전국적으로 실시하기만 했어도 명나라의 힘을 빌 것도 없이 스스로 힘으로 왜군을 몰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최홍원: 굶주린 백성들이 요즘 더 많이 죽고 있습니다. 살은 다 베어 먹고 백골만 남은 것이 성 밖에 쌓였는데 그 높이가 성의 높이와 같습니다.
유성룡: 죽은 사람의 고기만 먹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도 서로 잡아먹고 있는데도 도적을 잡는 군사들은 전혀 이를 금지하지 못합니다.
이덕형: 아버지와 아들, 형제간에도 서로 잡아먹는데, 양주 백성들은 떼를 지어 도적이 되어 사람을 잡아먹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조치를 취하여 살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다음에야 서로 죽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금지하기 어렵습니다. (선조실록 1594/3/20)

패전의 달인 원균은 선조와 작당하여 이순신 장군을 모함하여 꿈에도 소원인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후에 한두 달 만에 군인을 반이나 뇌물 받고 제대시킨다. 그리고는 기껏 한다는 소리가 30만 대군으로 육지에서 해안의 왜군을 바다로 쓸어 버리면, 자신이 바다에서 호응하여 왜적의 씨를 말리겠다고 큰소리 친다. 이에 원균이라면 꽃 본 듯이 무조건 이뻐한 선조지만 너무 어이없어 피시식 웃는다.

3월 29일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원균(元均)이 서장(書狀)을 올리기를,
“신이 해진(海鎭)에 부임한 이후, 가덕도(加德島)· 안골포(安骨浦) · 죽도(竹島) · 부산(釜山) 을 드나드는 적들이 서로 거리가 가까워서 성세(聲勢)는 서로 의지되나 그 수가 수만에 불과한데도 병력도 외로운 듯하고 형세도 약합니다. 그중 안골포· 가덕도 두 곳의 적은 3∼4천도 차지 않으니 형세가 매우 고단합니다. 만약 육군이 몰아친다면 주사(舟師)의 섬멸은 대쪽을 쪼개듯이 쉬울 것이요, 그 뒤로 우리 군사가 전진하여 장수포(長藪浦) 등처에 진을 친다면 조금도 뒤를 돌아볼 염려가 없게 됩니다. ...
우신(愚臣)의 망령된 생각에는 우리 나라 군병이 그 수가 매우 많아서 노쇠한 자를 제하고 정병(精兵)을 추리더라도 30여 만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늦봄인데다 날씨가 가물어서 땅이 단단하니 말을 달리며 작전을 할 때는 바로 이 때입니다. 반드시 4∼5월 사이에 수륙 양군을 대대적으로 출동시켜 한 번 승부를 겨루어야 합니다. 만약 시일을 지연시키다가 7∼8월 께 비가 개지 않아 토지가 질척거리면 기병이나 보병이나 다 불편할 것이니 이 때는 육전(陸戰)도 되지 않을 듯합니다. 신이 이른바 4∼5월 안에 거사하자는 것도 이를 염려하여서입니다. 그리고 행장(行長) · 요시라(要時羅) 등이 거짓으로 통화(通和)하는 것이므로 그 실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 때를 타고 함께 공격하여 남김없이 섬멸한다면 일분의 수치나마 씻을 수가 있겠습니다. 조정(朝廷)에서 속히 선처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선조실록 1597/4/19)

1592년에는 제 말로는 왜선 10여 척을 깨뜨렸다고 주장하지만, 실지로는 싸움 한 번 않고(왜냐하면 당시 관할 지역이 전라좌수영보다 2.4배되는 경상우수영에는 전라좌수영의 전선 24척보다 두 배 이상 되는 53척의 전선이 있었는데, 만약 그가 싸웠다면 노 젓는 사람 몇 명이랑 달랑 3척만 끌고 도망 다녔으니까 大敗도 그런 대패가 없다. 따라서 그런 주장은 앞뒤가 전혀 안 맞는다.) 경상우수영의 군사 1만 여명, 삼도수군 2만5천 여명을 수장시킨 재주밖에 없을 뿐 단 100명의 군대도 직접 양성해 본 적이 없는지라, 왜군 16만 명군 6만 조선육군 1만 명 다 합한 것보다 많은 30만을 한두 달 안에 바로 양성할 수 있다는 기적을 아무렇지도 않게 언제든지 명령 한 마디면 기적을 낳을 수 있는 선조에게 부탁한다.

지극히 멀쩡한 사람들 중에 아직도 한국에는 원균 명장설을 태연히 주장하는 자들이 숱한데, 사료를 비판적으로 읽는 능력이 어찌 그리도 부족한지 모르겠다.

이순신 장군은 식량이든 군대든 무기든 전선이든 하나에서 열까지 마련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식량과 물품을 조정이나 통신사에게 올려 바쳐야 했다.

흐림. 여러 가지 장계와 단오절 진상품을 봉해 올렸다. <<난중일기 1595/4/15>>

삼가 아뢰나이다.
지난 9월에 순천에 사는 사람 정사준은 아직 상제의 몸으로 있으면서 임용된 사람으로서, 같은 고을의 의로운 선비 교생 정빈 등과 약속하고 각각 의연곡을 모아 한 배에 싣고 행재소로 올라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본영 및 수군 관할의 각 고을 순천, 광양, 낙안, 흥양 등 고을 수령들이 따로 봉하여 진상하려는 물건 등을 각각 물목을 기록하여 정사준에게 주어서 올려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서해 물길의 바람세가 좋지 못하여 정사준이 중도에 추위에 상하여 병세가 중해져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서 되돌아 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동생으로 신의 군관으로 있는 정사횡으로 하여금 가지고 올라가도록 하면서, 신이 따로 봉하여 진상하는 장편전 등 물건과 탄신일, 동지, 설 진상물들도 정사횡과 본영 진무 김양간에게 주어서 의연곡 실은 배에 같이 실어 올려 보냈습니다.
순천부사 권준이 봉하여 따로 진상하는 것까지도 물목을 만들어 같은 배에 실어 보냈습니다. 광양, 흥양, 낙안 등의 고을 수령들은 각각 자기 고을 배에 싣고 각자 모집한 사람들에게 주어서 올려 보냈습니다. <<군량과 진상품을 실어 보내는 장계 1592/12/25>>

맑음. 체찰사의 전령에, 황 첨지가 이제 명나라 사신을 따라가는 상사가 되고 권황이 부사가 되어 근일에 바다를 건너가려고 하니, 타고 갈 배 3척을 정비하여 부산에 와서 정박해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 <<난중일기 1596/7/10>>

맑음. 바다를 건너갈 격군들의 군량으로 백미 20섬, 중미 40섬을 차사원 변익성과 수사 군관 정존극이 받아갔다. <<난중일기 1596/7/12>>

식량이 얼마나 귀했는지, 관리 집안의 경우 100섬을 바치면 동반(문관)의 정3품 벼슬을 주던 시절이다(선조실록 1593/2/16). 문관 정3품은 무관인 종2품 3도 수군통제사보다 사실상 높았다. 눈물 반 한숨 반으로 살아가던 첩의 아들도 100섬을 바치면 동반의 6품 벼슬을 받았다. 그렇게 따지면 한 달에 3천 내지 4천 섬을 자체 조달한 이순신 장군은 그것만으로 평생 영의정이 되고 그 자손도 대를 이어 평생 영의정이 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선조는 이런 이순신 장군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공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조정의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순신 장군이 홀로 군대를 양성하고 식량과 무기까지 다 마련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동서고금을 통틀어 유일무이하다는 것은 아예 생각도 못하고, 여차하면 임금의 속마음을 읽고 이순신 장군의 기적 아닌 기적을 시기하여 헐뜯을 생각에 골몰했다.

입이 아닌 손과 발로 일하는 사람은 수치에 정확하다. 십만 대군, 백만 대군이란 말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는다. 이순신 장군처럼 한 자리 숫자까지 병으로 죽은 병사와 앓고 있는 병사의 숫자를 파악한다. 식량이 얼마나 필요하며 남은 식량으로는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도 정확하게 안다. 먹지 않고는 아무리 용감하고 지혜로운 군대도 싸울 수 없고, 무기가 제대로 갖추지 않고는 아무리 용감하고 지혜로운 군대도 싸울 수 없고, 평소 피나는 훈련을 하지 않고는 아무리 용감하고 지혜로운 군대도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소상히 안다. 인간사에 기적은 절대 없다는 것을 입이 아닌 손과 발로 일하는 사람은 잘 안다. 기적은 없고 다만 기적처럼 보이는 일만 있다는 것을 입이 아닌 손과 발로 일하는 사람은 잘 안다. 한두 번의 요행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제대로 준비를 갖춘 사람과 부딪치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는 것도 입이 아닌 손과 발로 일하는 사람은 잘 안다.

대한민국 사람이면 대부분 이순신 장군을 무척 존경하지만, 그가 한 일이 하나같이 기적적인 일이라 도무지 '인간 같지 않아서' 그저 하늘이 보낸 신장(神將)만 같아서 사람들은 배울 생각은 않고 그냥 찬탄만 하거나 배배꼬인 마음으로 괴상한 논리와 망측한 자료를 들이대어 헐뜯는 데 야릇한 쾌감을 맛본다. 이순신 장군은 꿈에도 기적을 믿지 않았다. 대신 호랑이 굴에 갇힌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고 동굴의 현실 안에서 방법을 찾아내어 그것을 극대화하여 호랑이를 일망타진하는 기적의 기적을 낳았던 것이다.
(2009. 1. 31.)

Wednesday, January 28, 2009

택시기사 김문수

김문수 지사가 어제 온종일 택시기사로 일한 다음 올린 글입니다. 링컨은 대통령이 된 다음에도 백악관에서 매일 반나절은 일반시민들을 만났다 합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왜 그런 별 볼일없는 사람들로 시간낭비를 하냐고 물으니까, 링컨은 "난 이런 식의 대중여론 목욕탕 Public Opinion's Bath 에서 목욕하기를 좋아합니다"라고 대답했다 합니다. 남신우 드림


하루 택시기사의 온갖 생각
김문수(경기도지사)

작년 12월 26일 택시자격시험을 보고, 1월 10일, 11일 이틀간 20시간의 교육 이수후, 1월 13일 운전적성정밀검사를 3시간 반이나 받아서, 드디어 오늘 처음으로 택시운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까짓 택시운전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말씀하실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나름대로 가슴이 설레었다.

설날 다음날인 오늘 1월 27일 오전 6시 50분에 도청 옆에 있는 광일운수에 도착했다.
우선 택시운전요령에 대해 다시 배웠다. 제일 어려운 것은 카드결제 방법이었다. 가스충전방법, 미터기 사용방법 등에 대해서도 배웠다.

7시 20분에 회사를 출발했다. 우선 수원역에서 손님을 기다렸다. 수원역앞에서는 택시줄이 두줄로 늘어 서서 수십대가 서있었다. 20분정도 지나서야 겨우 손님 한분을 태웠다. 상냥하게 “어서오세요. 어디로 모실까요?” 인사부터 드린 뒤, 내가 길을 잘 모르니, 네비게이션을 우선 찍겠다고 양해를 구하였다. 어떤분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시기도 했지만, 대체로 다 양해해 주셨다.

오늘은 11시간 조금 넘게 운전을 했는데, 총 21팀 손님을 모셨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6팀이 외국인 손님이었다. 중국동포가 2팀, 베트남출신 노동자가 2팀, 러시아 노동자가 한팀, 방글라데시 노동자가 한팀이었다. 명절을 맞아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왔다가 내려가는 외국인 노동자들도 4팀이나 되었다. 이들은 모두 20대나 30대였는데 우리나라 생활이 힘들기는 해도, 그들에겐 꿈과 희망과 활기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택시에서 내려, 마중 나온 20대 젊은 친구의 자전거 뒤에 타고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에서 내 젊었을 때, 공장 다니던 기억이 살아났다.

육체적으로 힘들지만, 그들의 젊음과 우리나라의 상대적 고임금, 귀국 후 그들 나라에서 펼쳐 나갈 그들의 희망찬 꿈 때문에, 그들이 어려움을 잘 견뎌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다민족사회가 되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는 날이었다.

손님을 확실하게 모실 수 있는 곳은 수원역과 시외버스터미널과 대형마트 뿐이었다. 나머지 길가를 다니거나, 등산객이 줄지어 내려오는 곳에서도 손님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수원역에는 특히 손님 모시기 위해 기다리는 줄이 교통질서를 크게 어지럽힐 만큼, 길고 어지러웠다. 택시줄이 길수록, 불경기의 골짜기가 깊다. 아무리 줄이 길더라도, 이곳에서 기다리지 않고 다른데 돌아 다녀 봐야, 손님 만나기가 기약 없는 일이니,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다.

택시손님 가운데 젊은 분들이 많았다. 노인분은 할머니 한분 밖에 없었다. 연세 드신 분들은 아무래도 버스를 많이 이용하시는 모양이다.

인접한 수원, 용인, 화성을 넘나들 때마다 시계외 할증요금이 적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님은 손님대로 불편해 하고, 기사는 기사대로 불편해 한다. 지금의 버스와 철도처럼, 서울과 경기도 전역을 묶어서 시행되는 통합환승할인제도를 도입할 수는 없을까?

택시기사는 택시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고, 시민들은 택시 잡기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 간격을 어떡하면 줄일 수 있을까?

사납금 6만 9천원 내고, 가스 충전 12,500원 내고, 남는 돈을 세어 보니, 겨우 만원뿐이었다. 회사에서 일당이라고 14,000원을 주었다. 오늘 11시간 동안에 총 24,000원을 번 셈이다. 처음 치고는 괜찮은 편이라고 위로해 주었다.

오늘 체험은 도지사 취임 이후 2년 7개월간의 활동 가운데 가장 강한 느낌을 남겼다고 생각된다.

우선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어떤 보고서나, 보도나, 이야기 보다도, 더욱 생생한 사람들의 삶을 느낄 수 있었다. 삶의 망망대해에서 11시간 헤엄 치다 나온 것 같다.

나는 최선을 다해 손님을 정성으로 모시고자 노력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모자라는 나의 모든 실력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정성을 다해 손님을 모시면서, 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느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모실 수 있는 삶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 하루였다.

(2009.1.27.)

Tuesday, January 27, 2009

김문수 지사님, 감사합니다.

작년 10월 수잔 숄티 여사가 서울평화상을 받게되어 서울에 나갔습니다.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하루 오후 일정을 모두 비우고 수잔과 함께 안성 하나원에를 들렸습니다.
김지사가 수잔과 함께 하나원을 찾은 것이 아마 세 번째였던 것 같았는데,
김지사는 국회의원 시절부터 추석이나 설은 물론 생각이 나면 하나원 탈북자들을 찾습니다.
엊그제 설 연휴에도 다시 하나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곤 탈북자들과 함께 실컷 울다가 옵니다.
벌벌 기어다니는 탈북자들의 어린애기들을 어깨 위에 올리고 함께 놀아줍니다.
그런 김지사를 보면서 우리나라 앞날에 희망을 갖어봅니다.
엊그제 김지사로부터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재미교포에게 김지사가 한국시간 새벽 한 시에 보낸 이-메일입니다.

남선생님,

하나원은 역시 눈물바다였습니다.
제가 교육생을 불러내서 발표기회를 주었더니,
그 말을 들으며 90% 이상이 모두 울었습니다.
거의 다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왔기 때문에 가족생각이 더 간절해진 탓이겠지요.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연이 눈물로, 울음으로 되어 쏟아지겠지요.
가슴에는 마르지 않는 눈물샘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우리는 좀 더 따뜻한 사랑을 가져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하나원에는 225명이 있습니다.
지난 12월까지 입국한 탈북자는 15,057명입니다.
그 중 여성이 9,950명으로 66%입니다.

며칠전 안성본원의 시설을 확충하여
300명 정원을 600명으로 2배 늘렸습니다.
시설도 많이 개선되어 생활여건이 좋아졌습니다.

사랑만이 남과 북을 하나로 통일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강력한 bond라고 생각합니다

남선생님,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2009.1.25 김문수 올림

김지사님, 허락도 안 받고 私信을 공개하여 죄송합니다.

2009년 1월 27일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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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January 24, 2009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이야기-3 (최성재)

종의 아픔도 졸병의 죽음도 못 견뎌한 이순신 (최성재)


이순신 장군은 종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졸병도 허투루 대하는 법이 없었다.
최성재

... 종 금(金)을 본영에 보냈는데, 바람이 몹시 사납게 불어 염려되었다. ...(1596/1/12)
... 종 경(京)이 병이 났다. (1596/7/27)
... 종 경이 심하게 앓는다고 하니 무척 걱정이 된다. ...(1596/7/28)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은 종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졸병도 허투루 대하는 법이 없었다. 종은 주인의 사유물이고 졸병은 상관의 종인 시절이었지만, 이순신 장군은 그들도 한결같이 진심으로 대했다. 그는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상관이라도 고개를 숙이는 법이 없었지만, 당신의 아랫사람이 정당한 사유 없이 노비를 홀대하거나 매를 들면 불같이 화를 내며 오히려 노비의 하늘에게 곤장을 치거나 그를 엄히 타일렀다.

... 저녁에 방답첨사[장린]가 성낼 일도 아닌데 성을 내어 지휘선의 무상(無上=舞上 사공과 비슷한 역할을 한 뱃사람) 흔전자에게 곤장을 쳤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에 곧 군관과 이방을 붙잡아 군관에게는 20대, 이방에게는 50대의 곤장을 쳤다. ... (1596/3/11) <<난중일기>>

첨사는 첨절제사(僉節制使)의 준말로 종3품으로서 정3품인 수사 곧 수군절제사 바로 다음 벼슬이었다. 1555년 을묘왜변 이후 이원 지휘체제인 진관법(鎭管法)이 단일 지휘체제인 제승방략제(制勝方略制)로 바뀌기 전까지는 첨사는 수사와 동등한 자격을 갖추어 수사의 명령을 받지 않았다. 그만큼 수군에서는 높은 지위였다. 이순신 장군도 한산대첩 이후에야 비로소 (전라좌)수사에서 새로 생긴 종2품인 통제사의 지위로 격상하였을 뿐이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이순신 장군은 3성 장군, 방답첨사 장린은 별 하나인 준장이다. 이런 장성이 전사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이등병도 아닌 훈련병쯤 되는 자에게 정당하지 않은 일로 곤장을 쳤다고 하여, 차마 장군을 곤장 칠 수는 없는지라 그 아랫것들을 불러 곤장을 20대, 50대나 쳤던 것이다. 일전의 글에서 밝혔듯이 이순신 장군은 범 같은 명나라 군도 행패를 부리면 본국의 군인과 똑같이 추상같이 처벌했던 사람이다.

이순신 장군은 당신의 아들도 예외로 두지 않았다. 종을 함부로 다루면 엄히 꾸짖었다.

... 이날 아들 회가 방자 수에게 곤장 쳤다고 하기에 아들을 뜰 아래로 불러다가 잘 타일렀다. ... (1596/7/21) <<난중일기>>

아들 회가 종에게 곤장을 친 이유를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종이 잘못한 게 있었던 모양이다. 앞 뒤 문맥으로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굳이 쓰지 않는 게 이순신 장군의 필법이다. 잘못하긴 했지만 아들의 처사가 좀 심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방으로 불러들인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다 보는 마당에 세워 두고 나직하지만 엄한 말로 꾸짖는다.

재미있는 것은, 진중의 여인들도 이순신 장군을 친정 아버지처럼 따라서 때로 쪼르르 일러바치기도 했다.

맑음. 이른 아침에 이영남과 좋아지내는 여인이 와서 말하기를, "권숙이 치근거리기에 피해 왔는데, (오늘 여기 온다니)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했다. 늦게 권수사와 우후, 사도첨사, 방답첨사가 오고 권숙도 왔다. ... (1596/1/7) <<난중일기>>

근무에 태만한 것에 대해서는 추상같이 엄했지만, 그와 관련 없이 누구든 지위와 권력을 남용하여 아랫사람을 괴롭히면 괴롭힘의 상대가 아무리 하찮은 인간일지라도 절대 그냥 보아 넘기지 않았다. 종도 졸병도 사생활을 존중하고 인격을 문무 양반과 똑같이 존중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니,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인간이면 누구나 이순신 장군을 하늘처럼 존경하면서도 자상한 아버지처럼 든든한 형님처럼 따랐던 것이다.

전투에 임한 졸병도 이순신 장군은 일일이 기억했다. 전쟁이 끝나면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 무명용사의 무덤이 그가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는 전혀 없었다. 언제나 완벽한 승전을 거두기도 했거니와 죽거나 다치면 빠짐없이 보고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승전 보고서는 아주 간략하게 최고사령관 중심으로 기술하기 마련이지만, 글자 한 글자도 아껴 쓰던 사람답지 않게 이순신 장군은 이례적으로 아주 자세하게 보고하면서 모든 공을 아랫사람에게 돌렸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하찮은 인물이라도 죽거나 다치면 임금에게 올려보내는 장계에 그 이름을 일일이 밝혔다.

지루한 다음의 명단을 보자. 000 외 몇 명 전사하고 XXX 외 몇 명 부상했다고 하면 될 것을, 왜 저렇게 자세히 일일이 기록했을까.
...
왜적과 맞붙어 싸울 때 군졸로서 화살과 총알을 맞은 사람 중에 신이 타고 있던 배의 정병(正兵)인 김말산, 우후선의 방포군인 진무 장언기, 순천 제1선의 사부(射夫:활이나 대포를 쏘는 사람)인 사노 배귀실, 제2선의 격군인 사노 막대, 보자기 내은석, 보성 제1선의 사부인 관노 기이, 흥양 제1선의 화살 제조 기술자인 관노 난성, 사도 제1선의 사부인 진무 장희달, 여도 사공인 지방 병사 박고산, 격군(格軍: 노 젓는 사람)인 박궁산 등이 총알에 맞아 죽었습니다.

흥양 제1선의 사부인 목동 손장수는 뭍으로 왜적을 쫓아가서 그 목을 베려다가 도리어 적의 칼날에 죽었으며, 순천 제1선의 사부인 보인 박훈, 사도 제1선의 사부인 진무 김종해 등은 왜적의 화살에 맞아 죽었으며, 순천 제1선의 사부인 유귀희, 광양선의 격군이 보자기 남산수, 흥양선의 선장인 수군 박배세, 격군인 보자기 문세, 훈도인 정병 진춘인, 사부인 정병 김복수, 노복 고붕세, 낙안 통선의 사부인 조천군, 수군 선진근, 무사의 사노 세손, 발포의 제1선 사부인 수군 박장춘, 지방 병사인 장업동, 방포인 수군 우성복 등은 총알에 맞았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방답첨사가 거느린 종 언룡, 광양선의 방포 장인 서천용, 사부인 백내은손, 흥양 제1선의 사부인 정병 배대검, 격군인 보자기 말손, 낙안 통선의 장흥 조방 고희성, 능성 조방 최란세, 보성 제1선의 군관 김익수, 사부인 오언룡, 무상사의 보자기 흔손, 사도 제1선의 군관 진무성과 임흥남, 사부인 수군 김억수와 진언량, 신병 허복남, 조방 전광례, 방포 장인 허원종, 지방 병사 정어금, 여도선의 사부 석천개과 유수선과 유석 등은 화살에 맞았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 <<당포에서 왜적을 쳐부순 장계>>

총이나 화살 또는 칼에 의해 죽거나 다친 사람들의 이름을 원인별로 일목요연하게 나열하면서 관노(官奴)나 사노(私奴)까지 일일이 다 기록했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을 홀로 처리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모두들 잠들은 늦은 밤에 쓸쓸히 앉아, 이순신 장군은 종과 졸병의 이름까지 하늘보다 높고 무섭던 왕에게 하나도 빼먹지 않고 아마 아무렇게나 불렀기 때문에 대부분의 종들은 한자로 그 이름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록되었겠지만, 그들에게 반 작명을 해 주며, 빠짐없이 이름을 밝혀 임금에게 고했던 것이다. 오늘날도 그 이름이 대통령이 친히 보는 공문서에 기록된다면 가문의 영광인데, 하물며 신분의 격차가 하늘과 땅이었던 조선시대에랴!

비록 죽거나 다쳤지만, 그들의 희생 덕분에 승전했음을, 나라를 지켰고 당신 임금의 목숨도 구했음을 잊지 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지 않았을까.

인민을 입에 달고 다니고 만민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자랑하던 공산주의자들이 때려 죽이고 굶겨 죽인 농민과 노동자와 기업가와 지주가 얼마나 되던가. 그 절대다수는 한 줌도 안 되는 기업가와 지주가 아니라 아무 죄 없고 힘없는 농민과 노동자였다. 무려 1억 명! 지금도 노동자와 농민의 지상낙원이라는 북한에서는 3백만이 굶어 죽고도 20만 명이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고 천만 명이 영양실조에 허덕인다. 아무 것도 아닌 일로, 그 땅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면서 민중을 입에 달고 다니고, 갖가지 문명의 혜택을 다 누리면서 자연보호를 이마에 대문짝만하게 써 붙이고 다니는 자들이 있다.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 어기는 것을 특권으로 여기는 무리들이 있다. 위선을 측은지심으로, 독선을 양심으로 확신하는 무리들이 있다. 일일이 이순신 장군에게 불려가서 빠짐없이 곤장 맞을 인간들이다.
(2009. 1. 24.)

Friday, January 23, 2009

무엇이 잘못 되었나? (에버슈타트)

몇 달동안 침묵을 지키던 미국 워싱턴의 한국通, 미국기업연구소의 닉 에버슈타트 박사가 지난 1월 21일, 더 위클리 스탠다드 잡지 인터넷에 “무엇이 잘못 되었나, What Went Wrong?” 란 장문의 논설을 실었습니다.

빌 클린턴의 대북 팀이 너무들 잘못해서 1994년 눈가리고 아웅식의 합의문 Agreed Framework으로 새버렸던 대북정책이, 조지 W. 부시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잠시 (약 2년간?) 제대로 가는 것 같더니, 부시 2기에 들어서서는 클린턴 시절의 눈가리고 아웅보다 더 한심한 갈팡지팡 정책으로 변했습니다. 부시 팀은 아예 눈가리고 아웅 하지도 않고, 무골충 직업외교관 크리스 힐을 6자회담이란 사기극에 내세워 김정일에게 시종일관 아부 굴종 양보하기에 바빴습니다.

답답하던 에버슈타트 박사가, 클린턴과 부시의 대북정책을 정확하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신임 오바마 대통령에게는 선임자들의 과거를 거울삼아 잘 해달라는 부탁인데, 지난 몇 해동안 북한에 관한 에버슈타트 박사의 논설 칼럼들을 거의 전부 번역해온 역자로서는 이 논설을 읽고 더 답답하기만 했지, 별 전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바마/힐러리/웬디 셔먼 팀은 클린턴/부시2기 + 김대중/노무현의 대북 햇볕포용정책을 또 그대로 승계 추진할 확률이 많습니다. 오바마는 6자회담도 계속할 것이고, 대북 퍼주기도 계속하겠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이 캄캄한 현실과 앞날을 보면서 답답하기 그지없지만, 북한인권 엔지오들과 탈북동지들은 북한인권 운동을 계속해야 합니다. 김정일의 장난감 핵을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오로지 북한인권만 떠들어대야 합니다. 등잔불이 꺼지고 뿌린 씨조차 없으면, 북한동포들은 물론 불쌍한 우리 후손들 설 땅이 없어집니다. 에버슈타트 박사도 마찬가지 생각일 것입니다. 가물가물 하더라도 등잔불은 지키자! 5년 후 10년 후 100년 후일을 위하여 오늘 씨앗을 하나라도 뿌리자!

2009년 1월 23일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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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참고로 말씀 드리자면, 에버슈타트 박사가 부시 팀에 대하여 배가 떠난 다음 시비를 가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에버슈타트는 부시 임기 때에도 아래에 적은 내용을 자주 주장했었고, 백악관 보좌관들에게도 이런 직언을 퍼부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논설이 무척 길어서 영어 원문은 실지 않습니다. 원문을 읽으실 분들은; http://www.weeklystandard.com/Content/Public/Articles/000/000/016/024opizu.asp 위클리 스탠다드 사이트에 실린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잘못 되었나? What Went Wrong?
더 위클리 스탠다드, 2009년 1월 26일자 논설
니콜라스 에버슈타트 씀


니콜라스 에버슈타트 박사는 이 논설에서,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왜 실패했나 분석 평가하면서 오바마 대통령이 대북정책을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나, 전략을 조언한다. – 더 위클리 스탠다드


후세 사람들이 조지 W. 부시정권의 실책(失策)을 논할 때, 그중 제일 두드러지게 잘못한 사례가 바로 부시정권의 대북정책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지난 8년간을 돌아보면 부시 팀은 간헐적으로 김정일과 그의 정권에 강경하게 나간 적도 있었지만, 사실 부시 팀의 대북정책은 거의 시종일관 패배와 후퇴의 연속이었다.

부시의 임기가 끝난 지금, 북한의 핵무기 보유는 그 어느 때보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더 많아지고 위험해진 것이 사실이다. 부시정권 기간, 북한은 공개적으로 핵보유국임을 선언했고,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핵실험까지 강행했다. 더 한심한 일은, 북한의 핵 확산을 막을 방도가, 부시가 취임했을 당시보다 지금 더 가망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더욱 한심한 것은 부시정권은, 김정일이란 괴물딱지가 꽉 틀어쥐고 있는 북한이란 노예국가를 조금도 바꿔놓지 못했다. 부시는 “악의 축”이라느니, “자유의 전진(前進) Freedom on March”이라고 말로만 떠들어대었지, 현 북한체제의 야만적 폭정은 하나도 바뀐 것이 없고, 북한은 그동안 개혁 개방하라는 인접국들의 권유를, 내 배 째라 하는 식으로, 들은 척도 안 한다.

도무지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나? 요즈음 워싱턴 정가(政街)에서는 부시의 대북실책(失策)에 관하여 “배울 것이 많다”고들 뒷공론이 많은데, 특히 새로 들어서는 오바마 정부 사람들이 이런 말들을 한다고 들었다.

오바마 진영(陳營)의 비판을 들어보면, 부시정권은 대북정책에서 3가지 잘못을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1) 부시 패거리들, 소위 더비아Dubya들은 북한문제를, 이전 클린턴 정권의 실용적이고(pragmatic) 유연 교묘(nuanced)했던 “포용정책 (engagement)”을 무시하고, 이념적 도덕적 측면에서만 접근했다; (2) 부시 수하들은 꼴보기 싫은 적들과는 협상하는 것조차 싫어했다, (3) 부시 팀은, 이런 힘든 문제가 꼬일 때 “최고위층 간의 직접대면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법을 생각조차 안 했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가 여러 번 말한대로 “사전(事前) 조건” 없이 상대방과 얼굴을 맞대고 협상할 수도 있었지 않은가?)

오바마 진용에 있는 부시 비판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새로 들어서는 오바마 정부가 앞으로 대북정책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 지 대충 감(感)이 잡힌다. 그러나, 부시정권 시절, 미국이 대북정책에서 무슨 이유로 갈팡질팡 했었나를 정확하게 분석해야 하는데, 도무지 그런 정확한 분석에는 신경들을 쓰지않는 것 같다. 모두가 피상적이고 부정확한 비판만 되푸리하고 있다. 워싱턴에 새로 들어오는 정권의 대북정책 팀이, 왜 부시의 대북정책이 실패했는가, 정확하게 분석하고 파악하지 않으면, 이들도 또 부시와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든지, 아니면 부시보다 더 큰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

이제 오바마 팀의 부시 비판을 조목조목 차례대로 따져 보자.

(앞으로 오바마 정권에서 대북정책을 주도할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이 사람들은 지난 역사를 열심히 다시 쓰려고 하는데, 정확히 말해서 클린턴 시절의 미북관계도 황금기는 아니었다. 클린턴 시절, 평양 정권과의 “포용정책”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의도적 자기기만(欺瞞)에 빠져있다. (그리고 이들의 자기기만은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보통 미국시민들까지 북핵문제에 관한 지난 역사를 착각하게 만들어 놓았다.)

클린턴의 2차 임기가 끝날 무렵, 클린턴 정권의 고위관리들이 북한과의 핵문제나 기타 여러가지 난제들을 외교적으로 일괄타결 breakthourgh 하게 되었다고 즐거워 했을 때, 북한은 미국과 국제사회의 핵확산 금지조약에 가입 약속해놓고도, 실제로는 몰래 우라니움 농축무기를 열심히 개발하고 있었다.

북한이 그때 저지른 불법행위들은 이제 모두가 다 인지하는 공공연한 사실이고, 이런 정보는 미정보기관에서 밝힌 것이 아니라, “이슬람 핵무기의 대부(代父)”라고 불리우던 파키스탄의 A.Q. 칸 박사란 자가 까발긴 진실이다. 그런데도 클린턴 정권의 “호전적 포용정책가 engagement hawks”들은 북한의 이러한 사기전술에 관한 증거를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신화, 즉, 김정일과 “최고위급 회담”을 추진하면 (2000년 10월, 미국무장관 올브라이트가 평양을 방문한 것 같이), 미북관계의 새로운 장을 열 수 있다고 믿는 쪽으로 일을 밀어부쳤다.

그러나 이런 신기루같은 미북관계의 진척(進陟)이란, 미국관리들이 자신들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사실들을 외면했을 때만 가능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 현재진행형인 “북한의 핵위기”란 부시정권의 외교관들이 2002년 북한 측에게, 너희들이 우리를 속여왔다는 증거를 내밀었을 때 터진 위기였다.

클린턴 정권의 1차 임기 때, 북한정권과의 속칭 “포용 합의”란 것은 미관리들의 이러한 자기기만으로 가능했었던 것이고, 당시에는 진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었지만 그 결과는 딴 합의나 마찬가지로 북한 측에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것이었다. 이런 것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예가 워싱턴과 평양의 사절단이 서명한 클린턴 팀의 1994년 “제네바 합의문 Agreed Framework”이란 것이 있었다. 당시 이 제네바 합의는 대단한 외교적 성과라고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고, 그후 클린턴 관리들은 이 합의문이야말로 “북한 비핵화”의 길잡이 roadmap 이라고 자부했었다. 안된 말씀이지만 이 합의문에는 작은 글씨로 쓴 주서(註書)가 달려 있었다. 미국이 종국에는 북한에게 핵발전소를 지어주겠다는 조건이 달려 있었다. 이 합의문에는 미국이 북한에 경수로(輕水爐) 2기를 지어주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은, 1992-1994년 첫 번째 “북핵위기”를 해결한다고 클린턴 정권이 한 일은 북한에 더 많은 핵물질을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었다. “제네바 합의문”에 관여했던 사람들중 몇몇은 당시 북한에 지어주기로 제안했던 원자로에서 나오는 플루토니움은 핵무기를 만들 수 없는 “안전한” 플루토니움이라고 떠버렸었는데, 이 세상에 “안전한” 플루토니움이란 있을 수가 없다.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핵폭탄도 이런 식으로 둘러댈 수 있는 “안전한” 플루토니움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 “제네바 합의문”은 북한이 2002년,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고 내지르는 통에 하루아침에 무산되어 버렸고, 지금까지 북한의 핵위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이런 한심한 전철, 미국이 북한에 계속 양보나 하고, 김정일 정권의 “평화적” 핵프로그램 개발을 지원하는 정책이 지금까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클린턴 시대의 “포용정책”에 관해서는 이제 그만 떠들기로 하자. 그런데 김정일과 “고위층 회담”으로 외교적 해결을 끌어낼 수 있다는 주장은 또 어떠한가?

지금 오바마 진영에 속한 사람들 일부가 친애하는 령도자와 “고위층 회담”을 할 기회를 만들어보자고 떠드는데, 북한에 있는 친애하는 령도자와의 고위층 회담은 벌써 여러 번 있었다. 지난 10여년간, 김정일은 미국무장관과도 직접 만나보았고, 일본 수상과도 만났고, 전직 남한 대통령은 두 사람 모두 만났었다. 이 “고위층 회담”은 클린턴 시절 두 번 있었고, 부시가 들어선 후 두 번 있었다. 그러나, 그런 “고위층 회담”은 모두 외교적으로 별볼 일 없는 결과, 특히 평양을 찾아간 외국 고위층들에게는 별볼 일 없는 회담이었다.

김정일은 2000년 북한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무장관에게 북한의 핵무기나 미사일에 관하여 거짓말을 했고, 2002년 북한을 방문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수상에게는 납북된 일본인들에 관하여 거짓말을 했다. 김정일은 2007년 평양 정상회담에 간 남한의 노무현 대통령을 모욕적으로 홀대했다. 이 정상회담에서 이렇다 할 외교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이런 정상회담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잘 모르고 있다.

노 대통령의 선임 김대중 대통령과 친애하는 령도자가 2000년 6월 평양 정상회담에서 만난 것은 정말 굉장한 “고위층 회담 합의”로 보이긴 했는데 (이 회담으로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정상회담은 두 정상이 “사진찍기 위하여 현찰을 갖다바친” 회담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김정일은 남한 대통령이 남한국민들의 세금 수억불을 갖다바치겠다고 몰래 약속한 후에야 남한 대통령을 만나겠다고 허락했고, 이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후일 전국 텔레비 방송에서 국민들에게 자신의 사기행각에 관하여 사과했고, 김대중 씨와 친애하는 령도자의 정상회담을 주선했던 김대중 씨의 수하들은 이후 남한 법정에서 징역형을 언도 받기도 했다. (김정일과의 고위층 회담에서 실제적 합의를 본 회담이 있기는 있었는데, 2001년 김정일이 모스코에 가서 블라디미르 푸틴과 만났을 때, 이 두 정상은 “한반도에서 더 이상 지체없이 미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제안에 합의했었다 – 이런 합의도 진전이라면 진전이라 할 수 있겠지만, 평양정권이 자신들의 이전 입장에서 딴 방향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외국 지도자들과의 “고위층 회담”에서 회담 후 김정일이 변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친애하는 령도자께서는 자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이런 고위층 회담에서는 북한정권에 이득이 되는 일, 사전에 이미 정해놓은 목표의 달성을 위하여 이런 회담을 최대한 이용했다. 김정일이 이러는 것은 하나도 놀랄 일이 아니다. 놀라운 일이 있다면 딴 사람들이 이런 회담으로 김정일이 변화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김정일이 미국대통령과 무릎을 맞대고 마주 앉으면 갑자기 김정일이 감화를 받아서 변할 지도 모르겠다는 망상 (지난 30년간 선군정치와 핵개발을 한 번도 늦춘 적이 없는 사람에게)은 망상이 아니고 굴욕이다.

마지막으로 부시정부의 대북정책이 외교적 활동의 부재(不在)로 실패했다는 비판을 다시 살펴보자. 부시 대통령이 취임한 후, 약 1년 반 동안 북한과 비교적 접촉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공백기는 부시정부의 외교 팀이 “대북정책 재고(再考)”랍시고 시간을 질질 끌었기 때문이고, 김정일도 부시의 외교관리들은 만날 필요가 없다고 수개월간 옹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미국과 북한은 셀 수 없을 없을 정도로 자주 만났다. 양적으로 보면 클린턴 정권 때보다 부시 임기 때 미국과 북한이 훨씬 더 자주 만난 것이 사실이다.

지난 5년 반 동안, 미국과 북한은 북한의 핵을 제거하기 위하여 “6자회담”이란 다자회담 형식(중국, 일본, 러시아, 남한을 포함하여)으로 계속 만나서 회의에 회의를 거듭했다. 두 나라 외교관들은 수천 시간을 들여서 본회담이다, 비공식 협상이다, 계속 직접 만나서 얘기들을 했고, 이 6나라 정부는 6자회담을 통하여 (미국무부가 “북한 핵제거 실행기획서”라고 명명한 합의까지 포함하여)
최소한 2개의 합의를 끌어 냈었다.

간단히 말해서, 부시 정부가 북한과 회담을 안 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이다. 부시정권 임기 말, 지난 2년간은 부시정부 외교관리들은 거의 풀타임으로 끝장이 안 보이는 이 회담에 매달렸었다. 문제는 두 나라, 여섯 나라가 그토록 열심히 만나서 열심히 “비핵화 회담”을 했는데도, 북한은 핵을 제거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핵을 제거하기는 커녕, 사실은 그와 정 반대이다. 이런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점점 더 진짜 핵보유국처럼 행동하게 되었고, 국제 회담으로 북한의 핵을 제거할 가망성이란 점점 더 희미해 보일 뿐이다. 지난 달 북경에서 열린 부시 팀의 마지막 6자회담에서는, 북한이 “외부의 핵검증 방법”에 반대한다는 생떼로 회담이 깨어졌고, 북한은 이제 부시가 임기초 북한에 주장했던 핵비확산 국제조약을 다 구겨접어서 휴지통에 처넣어 버렸다.

외교적 승리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인데 – 이 경우의 승자는 김정일과 김정일의 졸개들이었다.

이래도 오바마 팀이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버티면, 부시 정부가 왜 대북정책에 실패했나, 진짜 이유를 찾아보자.

부시가 대북정책에서 실패한 이유는, 정상회담을 안 해서도 아니고, 협상을 덜 해서도 아니고, 클린턴 식의 “포용”을 안 해서도 아니다. 그리고 부시의 비판세력들이 계속 들먹이는, 김정일 정권에 대한 부시의 이념적 아집(我執)도 아니다. 지난 일들을 돌아보면, 조지 W. 부시가 북한 김정일 정권의 진실과 북한의 숨은 의도를 인정사정 없이 매도했을 때, 북한은 믿을 수 없는 나라라고 몰아부쳤을 때가, 클린턴 정부 “북한 팀”의 판단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었다.

아니, 부시의 대북정책이 잘못된 이유는, 부시가 김정일 정권을 혐오해서가 아니다. 진짜 이유는, 부시 대통령과 부시 외교팀들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확실한 대북정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 이런 위험한 정권을 외교적으로 다룰 때는 방법과 목표가 처음부터 분명하고 치밀한 전략으로 접근해야 했었는데 부시 팀에게는 그런 전략이 전혀 없었다. 부시가 북한문제에 실패한 이유는 지난 8년간 임기 초부터 마지막 날까지, 북한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아무런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서, 모든 일을 일방적 강압적으로 밀어부쳤다고 (부당한) 비난을 받아온 부시 정권이, 가장 위험하달 수 있는 敵國 북한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는 것은 믿기힘들 정도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부시가 백악관에 들어섰을 때, 부시 관리들은 – 私的 公的 가릴 것 없이 – 클린턴 정권의 대북정책은 완전 실패작이라고 씹어대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신랄한 비판 뒤에는 확실하고 새로운 대북정책 대안이 있겠거니 믿었었다.

세월이 흐른 뒤 돌아보니까, 부시 팀은 자신들이 매도했던 클린턴 정권의 대북정책을 기본적으로 반대한 것이 아니라, 그저 클린턴이란 이름만 달렸으면 무조건 매도해버린 것이다. 이제는 비밀도 아니지만, 당시 부시 팀에게는 ABC, 즉 Anything But Clinton (클린턴만 아니면 아무 것도 괜찮다) 가 모든 정책의 기본방침이었다. 부시의 대북정책 팀도 이 “ABC”를 자신들의 금과옥조로 삼았다. 그러나 실제로 북한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북한이란 큰 문제를 어떻게 해야 작은 문제로 줄일 수 있을 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획이나 지침이 없었다.

이렇게 지난 일들을 돌아보면, 부시 정부에 대북정책이 부재했다는 조짐은 처음부터 보였었다. 부시 임기 초의 “대북정책 재고”가 그렇게 오랜 시간 질질 끌었을 때,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2002년 6월, 부시가 대통령으로 취임한지 거의 1년 반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리처드 아미티지 미국무부 부장관은 대북정책에 관하여 “우리가 마음을 정한 후에, 우리는 우리의 우방 남한과 일본에 가서 대북정책에 관한 의논을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부시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1년 반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때까지 분명한 대북정책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후 또 2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2004년 10월, 콜린 파월 미국무장관은 CNN 인터뷰에서 속내을 다 드러내 보였다. 그날 그 인상깊은 인터뷰에서 파월 장관은 CNN 기자의 질문에, “우리[부시 정부]는 북한에 대하여 [레드 라인 – 넘어서는 안 될 선]은 없다,”라고 대답했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없다는 것은 대북정책이나 전략이 없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 아닌가?

이렇게 역설적으로, 부시와 부시 보좌관들은 당시 김정일에게 공공연하게 적개심을 드러내 보이고 강경해 보였지만, 그들은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에 큰 위협이었던 북한정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아무런 기획도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친애하는 령도자 김정일과 그의 정권에는 철저하게 부정적이면서도, 부시 정권의 대북정책은 처음부터 중심을 잃고 표류하는 상태였다. 이렇게 중심을 잃고 목적지없이 표류하면서 미국정부의 대북정책은 실수에 실수를 거듭했다.

정책과 전략없이 국제무대에 나섰다가는 십중팔구, 상대방에게 깜짝 놀라거나 맥없이 당하기가 십상이다. 이와 반대로, 북한은 다국적 상대들에게 “장군” 장기수를 몇 수나 마련해놓고 나섰는데, 부시 팀은 “멍군”은 커녕 북한이 “장군”을 부르리란 것조차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깜짝깜짝 놀라기만 하는 아마추어들이었다.

예를 하나 들자면, 2002년 말, 미국은 북한에게, 너희들은 비핵 약속을 어기고 몰래 우라니움 프로그램을 개발연구해왔다고 내질렀는데, 북한이 핵확산 금지조약에서 탈퇴하고 영변의 플루토니움 원자로를 다시 가동하자, 그에 대한 후속대책이 전혀 없었다. 결국 이 대결은 6자회담이란 다국 협상회의로 이어졌으나, 부시 정부가 처음부터 확실한 목표나 철저한 준비가 없기 때문에 북한에 질질 끌려다닌 것은 나중에 더욱 분명해졌다.

북한의 핵위협을 축소시키고 미국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겠다고 펼친 부시 외교가 한심하게 계속 실패한 것은 이 6자회담만이 아니었다. 미국은 이에 관련된 딴 나라들과의 외교에서도 계속 기회와 실리를 놓지고 잃었다. 부시 임기 초, 김정일 정권에 제일 많은 지원을 퍼준 나라는 중국과 남한이었고, 이 두 나라가 당시 미국의 대북정책에 동조하지 않았더라도, 이 두 나라를 미국의 대북정책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외교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국제무대의 외교에서 이런 일들은 항상 일어나는 일들이고, 유능한 외교관들이라면 이런 일들을 해낼 수 있어야 한다.) 중국은 북한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지대한 관심과 득실이 있었다 –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이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로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중국정부가 미국정부에게 협력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더라도, 미국이 중국을 잘 설득했으면, 북한으로 인한 더 나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하여, 중국이 미국과 협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끔 만들 수도 있었다.

남한의 “햇볕정책” 정권들을 돌아보자. 이 정권들은 자신들을 괴멸시키겠다는 북한정권보다 자신들을 보호해온 미국을 더 의심한 정권들이었다. 그러나 열린 사회였던 남한에서 반미 친미 세력들이 대결했을 때, 미국은 남한의 애국 친미세력과 손잡아 남한의 대북정책을 미국 편으로 돌릴 생각은 안 하고, 남한정권이 왜들 저러나, 속은 상하면서도 팔장을 끼고 구경만 했다. 그래서 결국 남한 유권자들은 지난 선거에서 반미세력을 내몰고,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지만, 일이 이렇게 진전되자, 이제는 오히려 부시의 대북 팀이, 남한에서 햇볕정책을 반대하는 지도자가 2007년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세월이 되었다.) 이렇게 무정책 무전략으로 일관한 부시정권이 중국이나 한국과의 양자외교에서도 갈팡질팡 실수한 것은 전적으로 인과응보라 할 수 있겠다.

부시정권이 이라크 전쟁으로 정신이 없고 재정도 바닥이 났지만, 미국에게는 그래도 북한의 핵위협에 국제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여러가지 있었고, 아직도 갖고있다: 미리 강조를 해야겠지만, 전쟁이 아닌 딴 방법들이 있었다. 부시 팀이 전략적 비전이 있는 지도자들이었다면, 북한과의 외교협상도 이런 방법중 한 가지일뿐 북한의 핵위협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었다.

그러나 중심을 못찾고 갈팡지팡해온 부시의 대북정책 팀에게는, 북한과의 협상에서 “성공”이란 말이 딴 의미를 갖게 되었다. (부시 팀에게는 대안 “plan B”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첫 번째 계획이 망가지면 그 다음 어떻게 해야할 지 아무련 준비가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미국의 대북 외교협상에서는 북핵을 제거하자는 기본 목표는 점점더 변질하여 오로지 외교협상만 깨뜨리지 않고 계속하면 된다는 이상한 목표로 방향이 바뀌었다.

북한이 대량학살무기를 불법적으로 딴 나라들에 파는 것을 막기 위하여 만든 우리 정부의 PSI (핵무기 확산방지 이니셔티브), 그 좋은 국제적 방지수단도, 북한과의 “협상을 계속하는데” 방해가 된다하여 그동안 어디론가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지난 2년간 PSI란 말을 들은 사람이 있나? 아무도 없다.)

그리곤 저 “방코 델타 아시아 은행” 사건이 있었다. 김정일 정권은 위조지폐 양산, 불법마약 암거래 등 수입으로 바닥난 체재운영 재원을 충당하고 있다. 부시정권 딴 관리들의 신중하고 끈질긴 탐정식 수사로 북한의 검은 돈을 추적할 수 있었다. 이런 추적 끝에, 마타오의 방코 델타 아시아 은행이 미리 겁을 먹고 북한 돈이라고 추정되는 미화 2천만불을 동결시켰다. 북한관리들은 미친 듯 펄펄 뛰면서, 자기들 돈자루를 돌려주기 전에는 핵협상 회의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겠다고 얼러대었다. 부시 대북 팀이 사전에 전략을 철저히 세워 놓았더라면, 이것이야말로 김정일의 아킬레스 건이란 것을 직감하고, 김정일을 더 세차게 몰아부쳐 양보를 받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국무부 대북 팀은 오히려 미재무부 관리들과 머리 터지게 싸우더니 결국 대통령의 재가까지 받아 (미국법을 몇 가지 우회하면서) 이 돈을 전액 찾아서, 심통난 평양 깡패들에게 돌려줬다.

우리 정책수립가들이 눈을 똑바로 뜨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제대로 파악했더라면, 북한정권은 대량학살무기로 딴 나라 사람들을 위협했을 뿐만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자국민을 학대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눈을 돌렸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인권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북의 핵제거 문제와 연계하여 북한을 몰아 세웠어야 했다. 그러나 눈에 핵밖에 보이지 않던 부시의 대북 팀은 북한의 인권문제를 눈엣 가시로 취급하거나 심지어는 그보다 더 귀찮은 문제로만 생각했었다 – 자신들의 보스인 대통령은 계속 인권문제를 제기했는데도 이들은 북한인권 문제에 아랑곳 없었다.

조지 W. 부시 2차 임기 때, 대북 협상에서 앞장을 섰던 크리스토퍼 힐은, 2008년 12월, “각 나라는, 우리 미국까지 포함하여, 인권 신장을 위하여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곤 부시 대통령의 북한인권특사가 지난 해 1월, 평양정권과의 모든 협상에서 북한인권을 따져야 한다고 주장하자,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그 사람은 6자회담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다”라고 발칵 핀잔을 주었다.

이렇게 나침판도 없이 정처없이 표류하던 부시의 대북정책 팀은, 결국 북한과의 협상만 계속하면 된다는 식, 갈아앉는 배에서 발버둥치는 선객들같은 신세가 되어, 알맹이는 없어도 괜찮으니 회의만 계속해달라고 김정일에게 졸라대는 식이었다. 이렇게 협상을 위한 협상을 계속하면서, 그들은, 북한의 비밀 우라니움 농축 프로그램도 그냥 내버려 두고, 북한이 시리아에 핵원자로들 지어주었는데도 한 마디 따지지도 않았으며, 계속되는 북한의 도발에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인내심을 발휘했다. 미국 외교관들이 부지런히 뛰어서, 2006년, 유엔안보위원회 결의안 1718조치를 통과시켰는데 – 이 1718 조치에는, 유엔은 북한의 핵무기 실험을 매도하고 북한에 경제봉쇄를 가하겠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는데도 - 부시의 대북 팀은 “대북협상의 진전”을 위해서는 이런 유엔 조치에도 딴지를 걸었다. 급기야 지난 10월, 이 자들은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다시 불러내기 위하여 북한을 미국무부의 테러지원국 명단에서도 삭제해줬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희한한) 일은, 6자회담이 절뚝거리며 여기까지 오면서, 6자회담의 우리 편 동맹국들에게는 미국이 오히려 북한보다 더 위험하고 예측할 수 없는 상대가 되어버렸다. 예를 들자면, 미국이 북한의 불법자금을 추적한다고 해서 딴 나라들이 미국에 협조를 했는데, 미국이 갑자기 변덕을 부리면서 방향을 바꾸어 자신들이 시작한 대북 경제압박을 풀어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이 더 나쁘게 군 추태는, 6자회담에서 미국에 더 열심히 협조하면 할수록, 자국의 안보는 불안해지고 자국민들이 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에 관하여 치명적 손해를 본 나라도 있다. (지난 해, 미국 정부는 일본의 피납북자 문제에 관하여 동맹국인 일본을 윽박지르고 적국인 북한에 이롭게 일을 처리했다.)

6자회담이란 연극이 오래 끌면 끌수록 미국협상팀은 본래의 협상 목표와 목적에서 영 딴 데로 이탈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러 해 협상 끝에 이제는 “CVID, 완전 검증 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핵무장 해제, complete, verifiable and irreversible disarmament” 말은 어디론가 숨어 버렸다. 또한, 북한은 “완전하고 정확하게 complete and correct” 과거의 모든 핵활동을 신고해야 한다는 말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북한의 비밀 우라니움 프로그램도 외교협상 안건에서 슬그머니 떨어져 나갔다 – 애초에 6자회담을 소집하게 만든 바로 그 우라니움 문제가 이제는 문제가 안 된다는 말씀이다. 부시정부가 6자회담의 성과로 내세울 것은 영변의 플루토니움 시설에 있던 냉각탑을 없애버린 것, 그리고 눈요기들이나 하라고 북한이 건네준 플루토니움 프로젝트 서류들 뿐이다. 이중 가장 괴상했던 일은, 북한이 넘겨준 서류 종이에 고농축 우라니움의 흔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라니움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건네준 서류에 북한이 우라니움 증거를 묻혀 보낸 것이다.

부시의 대북 팀이 이름 값이라도 할만한 전략을 갖고 있었더라면, 이따위 협상은 수년 전에 빨리 털어버리고 끝장을 냈어야 했다 - 협상을 계속하면 할수록 미국에게는 손해, 북한에게는 이득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끝장냈어야 했다. 그런데 부시 팀에는 딴 후속대안이 없었던 것이 분명한 게, 이런 한심한 6자외교를 미국의 대북정책이랍시고 – 부시 정권이 종칠 마지막 순간까지 벌려온 것이다.

2001년, 부시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들은 前 정권이 이런 골치아픈 국제문제를 선임자들이 차기정권에 그냥 내팽겨쳤다고 비난했었다. 그런 북한문제를 부시 정부는 정권을 내놓으면서 클린턴 외교관리들이 했던 짓 그대로, 아니, 그보다 더 한심한 지경으로, 이 문제를 차기 정권으로 내팽겨치곤 이삿짐을 싸들고 떠나버렸다.

미국의 대북 전략적 입지는, 부시가 처음 집권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훨씬 더 열악한 상황이다. 오바마 팀은, 2001년 부시가 직면했던 북한의 핵위기 때보다 더 심각한 위기를 떠맡게 되었다. 부시 팀은 클린턴 팀의 대북정책을 입에 침을 튀기면서 비난했었다 – 북한을 회의에 끌어내기 위하여 뇌물을 바쳤다는 둥, 이전에 합의한 사항들을 북한이 위반하면서 도발적 행동으로 나와도 거기에 상응하는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는 둥, 그렇게까지 비난을 하더니 이제는 부시 팀에서도 이런 짓거리들을 다반사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 오바마 팀은 부시 팀 덕분에, 앞으로 북한과 맞대결을 해본다든지, 북한의 고약한 버르장머리를 고친려 한다든지, 그저 모든 일이 더욱 어렵게만 되었다. 더 한심한 것은, 북한은 자신들에게 – 해리 S. 트루만 이후 - 제일 적대적이었던 미국 대통령을 명실 공히 진짜로 제압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부시에게 외교적으로 완승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부시가 자신의 부시 닥트린을 주머니에 접어넣고 꼬리를 내리게끔 만들었다. 북한은 지난 8년간의 경험을 살려서, 아직 검증되지도 않은 오바마 정부에게 더욱 오만불손하고 과감하게 나올 수도 있다.

이제까지 잘못되고 부정적인 면만 적었지만, 미국이 앞으로 도전적이고 핵무장한 북한을 상대하는 전망이 완전히 캄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면, 북한이 국제사회로부터 지탄을 받은 것은 사실이고, 북한은 그런 상황에서 기가 막힐 정도의 고수(高手)로 위기를 넘겼다. 그와 반대로 미국은 이 경쟁에서 이길 수도 있는 패를 얻었다. 단지 그동안 우리는 이 게임에서 형편없을 정도로 한심하게 경기운영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앞으로 수년간 미국이 대북정책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오바마 정부는 지금까지의 상황을 직시하여 북한의 위기를 둘도 없는 기회로 만들 수 있다. 미국의 이익과 국제사회의 인도적 목표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오바마 정부가 이렇게 주어진 기회를 잡으려면, 우선 클린턴 시대의 대북정책 신화를 더 이상 진실로 착각하지 말고, 부시 시대의 대북정책 실패의 이유를 정확히 분석하고 이해하여야만 한다. (끝)

Monday, January 19, 2009

하나님, 제발!

내일 바락 후세인 오바마가 미합중국 44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정말 대단한 일이다.

링컨 탄생 200주년 기념 해인 2009년, 흑인 오바마가 미국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기막힌 우연의 일치인가?

미국뿐만이 아니라 全세계가 오바마를 환호한다.
오바마, 오바마, 오바마…링컨 오바마, 오바마 링컨…

오바마는 링컨처럼 기차타고 어제 워싱턴에 입성했다.
오바마 지지자들이 어제 링컨 기념관에서 오바마 취임축하 음악잔치를 벌였다.
오바마는 내일 링컨 성경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한다.
오바마 취임연설에도 분명 링컨이 들어갈 것이다.

사반세기 25년간 링컨과 살아온 링컨狂 필자도 딴 사람들보다 더 크게 환호하고 싶은데,
영 그게 안 된다.
이게 링컨이 바라던 사람일까?
오바마가 과연 링컨일까?

오바마 대통령이 잘 해주기를 바란다.
정말 진심으로 빈다.

오바마 링컨?
링컨 오바마?
도무지 헷갈리는 이 소용돌이 잔치 속에서,

영하 20도 만주 땅에서 오늘도 헤메는
현대판 노예 북한동포들이 눈에 밟힌다.

하나님, 저들은 언제 해방됩니까?
하나님, 워싱턴에만 오지 마시고 저 요덕수용소에도 가 주소서!
하나님, 제발!

2009년 1월 19일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씀
http://nkgenocide.net
http://nk-projects.blogspot.com

Saturday, January 17, 2009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이야기-2(최성재)

편지 1통을 10번이나 고쳐 쓴 이순신

이순신 장군은 글 한 줄 쓰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최성재

감정을 정화시키는 문학, 영혼을 고양시키는 종교, 오성(悟性)을 일깨우는 철학에서는 사실(事實) 여부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논리의 비약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들 영역에서는 언어가 가장 큰 도구이지만, 언어 너머의 숨은 뜻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실과 논리가 가장 중요시되는 분야는 과학이다. 이성의 날카로운 칼에도 베어지지 않을 정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지능력의 한계로 인해 과학에서는 아무리 확실하게 보이는 것도 진리라고 우기지 않는다. 그 대신 이론이라는 말을 쓴다. 반박의 가능성은 항상 열어놓는다. 정확성을 생명으로 하는 과학에서는 따라서 말이 무미건조하다. 원천적으로 과학의 논문은 명문(名文)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확하면 정확할수록 진솔하면 진솔할수록 명문이 되는 장르도 있다. 일기, 기록, 보고가 바로 그것이다. 내 어줍잖은 견해로는 이런 장르에서 최고의 명문이 동서양에 각각 하나씩 있는데, 그것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장계(狀啓)>>, 캐사르의 <<갈리아 전기(戰記)>>가 아닐까 한다.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갈리아 전기>>를 본 많은 글쟁이들이 붓을 꺾는다고 한다. 비록 평이하다고 하여 어린애한테도 라틴어 교재로 쓰이지만, 그것은 그만큼 명문이란 말이다. 갈리아 곧 오늘날 프랑스를 중심으로 삼는 지역을 정복한 캐사르가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기록한 이 전쟁 기록문은 군더더기 하나 없다. 전형적인 간결체다. 미사여구가 없다. 그럼에도 진주와 다이아몬드와 금실 대신 자갈과 돌과 흙을 풀과 띠와 나뭇가지 따위로 엮은 이 글은 보석보다 빛나고 비단보다 미려하다. 대학 때 라틴어를 배워 보려고 책만 사 두고 안 배운 것이 후회된다.

우리나라에는 캐사르에 조금도 못지않은 이순신이 있다. 군인으로서도 그렇고 문장가로서도 그렇다. 이순신 장군의 글은 <<난중일기>>만 보면, 그 진면목을 반 정도밖에 파악하지 못한다. <<난중일기>>가 메모 또는 암호라면 장계는 이 메모를 기초로 제대로 쓴 보고서 내지 암호해독문이다. <<난중일기>>가 짧지만 그 자체로 완벽한 곡인 쇼팽의 <<연습곡>>이나 <<전주곡>>이라면, <<장계>>는 길지만 더하거나 뺄 데가 전혀 없는 베토벤의 교향곡이다.

진중(陣中) 메모 수준의 글임에도 <<난중일기>>는 한 줄 한 줄이 때로는 단 한 문장이 그대로 명문의 명문이다. 예를 들면, <날씨는 맑았지만, 몸도 마음도 찌뿌드드했다. 晴 氣不平(1594/3/20> 같은 경우다. 이 때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3년째에 접어드는 해이다. 전쟁은 소강 상태에 들어갔지만, 조선이 대오각성하여 힘을 비축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왜군을 물리칠 수 있는 기회를 노리는 게 아니라 수군을 빼고는 고작 5천 명(1594년 6월 3일자 <<난중일기>> 참조. 아마 선조 이하 조정의 무리들이 하는 꼴을 봐서 이 때까지 정규군이 늘어났을 것 같지 않다.)의 군사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명나라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명나라는 조선은 아랑곳없이 강대국 왜와 외교전이나 벌이고 있다.

북핵을 두고 당사자인 한국은 사분오열한 가운데, 미국과 북한이 한쪽은 중국의 눈치를 보고 한쪽은 중국의 빽을 믿고 평화 운운하는 꼴과 같다.

홀로 나라 걱정 겨레 근심에 노심초사하던 이순신 장군은 만성 위장염에 걸린 듯한데, 날씨가 맑고 아무 일도 없는 날임에도 <氣가 고르지 못하다.>라는 한 마디로 하루의 일과와 심사와 몸의 상태를 뭉뚱그려 표현했다. 지금까지 이를 단지 <맑음. 몸이 불편하다.>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당시 상황과 앞뒤 일기를 보아 너무 미진하다. 기(氣)는 정(情)과 마찬가지로 다른 외국어로도 심지어 순수한 우리말로도 옮기기가 무척 어려운 낱말이다. 여기서 철학적인 의미까지는 없을 테니까 그것은 빼더라도, 기는 기운, 기분, 심기, 에너지, 몸의 상태(컨디션) 등을 두루 포괄하는 말이다. 따라서 단지 몸이 불편하다라고 새겨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아쉬운 대로 <몸도 마음도 찌뿌드드했다.>라고 새겨 봤다. 또한 날씨도 여기서는 그냥 <맑음>이라고 하지 않고 뒷부분과 연결하여 <날씨는 맑았지만>이라고 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선조에게 올려보낸 수많은 장계는 하나하나가 제갈공명의 전후(前後) <<출사표>> 같은 명문이다. 군더더기 하나 없지만, 거기에 조선 수군의 신나는 승전 소식뿐 아니라 나라를 구하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책이 곳곳에 들어 있다. 그래서 문장 하나하나가 명확한 뜻을 지니고 있음에도 행간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뜻이 숨겨 있다.

이순신 장군은 운문에도 능했지만, 산문에도 탁월했다. 타고난 재능이 비범했다고 신격화해 버리면, 범인들로서는 열등감만 생기거나 신앙심이 생겨나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이 가신 지 400년이 넘었지만, 당신을 개인이든 사회든 국가든 자랑하고 숭배했을 뿐 현실에 적응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연구를 안 하고 연구를 안 했기 때문에 도대체 무엇을 구체적으로 배워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노승석의 <<이순신의 난중일기>> 완역본에 보면,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노력하는 분이었나를 알려 주는 부분이 있다. <<난중일기>>의 여백에 쓰였던 것을 옮겨놓은 덕분이다. 계사년 곧 1593년 3월 23일부터 4월 그믐까지는 일기가 없는데, 그 사이에 휘갈긴 편지가 있다. 아마 영의정 유성룡에게 보낸 서찰의 사본 같다. 놀랍게도 무려 10번이나 같은 내용을 조금씩 바꾸어 되풀이하고 있다. 할 말이 너무나 많았지만, 과연 어떤 말을 할 것인지 고심하고 또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또한 글자 한 자 한 자를 이리 써 보고 저리 써 보며 계속 고쳤다. 이렇게 쓰든 저렇게 쓰든 다 훌륭한 글이지만, 최종의 글을 보면 역시, 하고 무릎을 치게 된다.

여기서 잠깐!
장계 초안을 수정했다는 표현도 곳곳에 있지만, 1594년 3월 7일에는 저 불후의 명문 <<답담도사종인금토패문答譚都司宗仁禁討牌文>>을 쓰는 과정이 잘 나와 있다. 당신이 글에 대해서 얼마나 까다로웠는지 안목이 높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맑음. 몸이 극도로 불편하여 뒤척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아랫사람을 시켜 패문에 대하여 답서를 작성하게 했건만 글꼴이 말이 아니었다. 원 수사가 손의갑을 시켜 지어 보내게 했지만 그 역시 못마땅하였다. 나는 병중에도 억지로 일어나 앉아 글을 짓고, 군관 정사립을 시켜 써 보내게 했다. ... (1594/3/7)

제1 편지는 다음과 같다.

더위가 극심한데 삼가 살피지 못하였지만 체후가 어떠하신지요? 전에 앓던 학질과 이질이 지금은 어떠하십니까? 밤낮으로 엎드려 사모하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가뭄이 너무 심하고 강의 여울도 매우 얕아져서 적에게만 도움되는 형세이니, 천지신명께서 도와주지 않으시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분한 마음을 품고도 할 말을 못하니 노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전에 안부 편지를 받았으나 탄환 맞은 자리의 통증 때문에 바로 나아가 배알하지 못했으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다만 지난번에 후퇴하여 돌아온 뒤로 얼마 안 가서 다시 병사를 징발하였지만 민심이 이미 무너져 있기에 세력을 모으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안부를 묻고 답장 못한 것은 1592년 5월 29일 처음으로 거북선을 출동시킨 사천해전에서 어깨에 조총을 맞고 칼로 생살을 도려 낸 다음 뼈를 깎아 총알을 빼낸 다음에도 제대로 치료도 못하고 계속 갑옷을 입고 있어서, 이 편지가 1593년 3월이나 4월에 쓴 것이라면, 상처가 1년이 다 되도록 낫지 않는 바람에 붓을 들기 어려웠다는 변명을 한다. 이어서 병사 징집의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조선 전체가 5천의 군사밖에 모으지 못할 때 이순신 장군은 육군이 먼저 징발해 간 다음에 그 찌꺼기 노비와 가난뱅이를 모으고(빽 있는 놈은 힘든 수군 대신 육군으로 빠지거나 육군으로 가는 척하고 징집을 기피하는 상황이었음), 무기와 식량도 스스로 다 마련하는 것도 모자라 식량과 소금을 도리어 왕에게 올려 보내면서도 전라좌수영보다 3배 큰 이억기가 이끄는 전라우수영의 군사까지 합하여 약 2만 명을 확보한다. 그보다 1년 전인 1593년 5월 14일의 장계를 보면, 전라좌수영의 전선(戰船)이 42척, 전라우수영의 전선이 54척 도합 96척이라고 했으니까, 전선 한 척 당 200명만 잡아도 약 2만 명이나 된다. 그런 상황에서 아마 임금으로부터 하루빨리 군사를 더 확보하여 적을 물리치라는 독촉을 받은 듯하다. 너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오지만, 누구에게도 울분을 풀 길 없어 <노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고 하소연한다. 철없는 임금을 설득하여 군사 징집을 미루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 편지인 것 같다.

제3 편지는 다음과 같다.

일찍 안부 편지를 받았으나 탄환 맞은 자리의 통증 때문에 바로 나아가 배알하지 못했으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다만 요즘 도내의 인심을 살펴보니, 지난번에 군사를 후퇴시킨 뒤로 군대의 사정은 근심에 괴로워하고 원망하는지라, 바로 군사를 징발하는 명령을 내릴지라도 모두 달아날 꾀만 낼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이와 같으니 어떻게 통제를 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우선 군사를 출전시킬 기한을 늦추고 한번이라고 휴가를 얻게 해 준다면, 인심은 필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저 역시 정예한 수군과 잡색군 중에 자원하는 자를 모집하여 이들로 하여금 힘을 기르도록 휴가를 가게 하였고, 8월 초에는 모두 거느리고 사또 앞에 달려가서 지휘를 받으며 죽음으로써 결전하고자 합니다. 군량과 군기는 경상도에서 재차 임전했을 때 거의 다 썼으니, 또한 움직이기가 어려운 걱정이 생겼습니다. 사또께서 미리 헤아려 명하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이제 사또께서 해가 뜰 때 전쟁에 나아가 국가의 수욕(羞辱)을 참지 못하고 다시 군사를 일으키어 나라의 치욕을 전부 씻어 주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무릇 혈기가 있는 자는 심력을 다하고자 하지 않음이 없건만, 인심은 이러하기만 하니 어찌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대장의 명령은 오히려 신중히 하여 가볍게 내려선 안 될 것이니, 일이 비록 뒤의 것을 생략할 만큼 급속히 해야 할 것일지라도 인심과 형세를 살피고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전쟁에 짓밟히고 가뭄으로 굶주린 백성의 사정은 전혀 헤아리지 않고 위에서 무조건 다그치기만 하는 것이 얼마나 민심을 이완시키는 것인지, 민심이 떠나면 어떠한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마음으로야 누군들 왜적을 물리치고 싶지 않겠나만, 구체적인 방법에 들어가서는 대장이 아니라 졸장부의 명령을 남발하는 조정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하지 못하면서도 흥분하지 않고 제갈공명의 금낭계(錦囊計)를 가르쳐 주고 있다.

제6의 편지를 보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가뭄과 더위가 너무나 혹심한데 살피지 못하였지만, 체후가 어떠하신지요. 전날에 앓던 이질이 지금은 어떠하십니까. 삼가 사모하는 마음 간절하여 담아두기에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곧 바로 나아가 문안을 드리고자 했으나 지난번 교전할 때에 격분하여 조심하지 않고 먼저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나아갔다가 거기서 적의 탄환을 맞은 자리가 매우 컸습니다. 비록 죽을 만큼 다치지는 않았으나 어깨 앞 우묵한 곳의 큰 뼈를 깊이 다쳐 고름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지 못하고 온갖 약으로 치료하지만 아직 차도가 없으며, 또한 활시위를 당길 수 없어 무척 걱정스럽습니다.

나라를 위해 힘쓰는 일이 지금의 급무이지만 몸의 병이 이렇게 되었으니 북쪽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할 때면 다만 스스로 눈물을 드리울 뿐입니다. 군사를 움직이는 시기는 어느 날로 정하셨습니까? 요즘 이 도의 민심을 보니, 한번 연해 지방에 징병한다는 소식을 듣기만 하면 모두 달아날 꾀만 낼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혹 말하는 자가 있다면 "물길을 따라 가서 적을 토벌하고 자리를 옮겨 싸우러 깊이 들어가면 되돌아 올 기약을 하기가 어렵다."고 하고, 또 "경상도와 인접한 땅에서 남김없이 징발한다면, 이는 곧 이 도를 왜적에게 넘겨주는 것이니, 수비하는 사람은 부모처자가 없게 되고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답니다. 인심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습니까. 순천부사가 힘을 다하여 사람을 취합해 보았지만 온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하니, 통분한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각 포구의 내용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 군대를 움직일 기한을 넉넉히 잡고 서서히 의리로써 깨우치어 취합해야 할 것입니다.

하삼도(下三道) 안에 겨우 온전한 것은 이 도만이 조금 그러한데, 만약 이 도를 잃는다면 회복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낮이나 밤이나 시름하느라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메입니다. 다만 더욱 사또께서 한번 실수를 과오라 여기지 마시고 회복을 도모하는 계책을 장구히 생각하여 빨리 종사(宗社)를 되찾는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이(李), 백(白) 두 장수(누군지 알 수 없음)의 죽음은 모두가 스스로 취한 것입니다. 요행과 만일이란 실로 병가의 장구한 계책이 아닙니다.

중상을 입고도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느라 제대로 치료도 못 받았는데, 이순신 장군 덕분에 전라도 하나가 겨우 온전히 남았는데, 조정에서는 군사든 식량이든 아귀같이 긁어 가는 바람에 적 소굴이 된 경상도보다 더 고단하다는 것을 임금 이하 조정은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도 민심이반, 임진왜란에 지고 있는 것도 민심이반인데, 전혀 뉘우치지 못하고 계속 민심이반을 부추기고 있으니, 그 답답한 처사에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온다. 그렇게 혹독하게 당하고도 나라와 겨레의 운명을 요행과 만일에 맡기는 조정을 은연중에 질타하고 있다.

제10 편지는 다음과 같다.

삼가 살피지 못하였지만 체후가 어떠하신지요. 마음의 그리움이 간절하여 담아두기에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일찍이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는 말을 듣고도 먼 바다에서 변방을 지키느라, 아직 문후를 드리지 못했으니 매우 근심스러울 따름입니다. 이 곳의 적세(賊勢)는 요즘 다른 흔적은 없고, 연일 정탐해 보면 굶주린 빛이 많이 있는데, 그들의 뜻이 반드시 곡식이 익으면 이를 저축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방비는 곳곳이 허술하여 도무지 방어하여 지키는 형세가 없습니다. 왜놈들이 기이하게 여기는 것은 수군인데 수군으로서 싸움에 나서는 자는 없고, 수령이 관찰사에게 공문을 보내어도 조금도 감독할 뜻을 가지지 않으며, 군량은 더욱 의뢰할 곳이 없어 온갖 생각을 해 봐도 조처할 방도가 없으니, 수군에 관한 한 가지 일도 그 형세상 장차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와 같은 이의 한 몸은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지만, 나라 일에 있어서는 어찌하오리까. 전라도에 새로 온 관찰사와 원수조차도 군관을 보내어 연해에 있는 수군의 양식을 곳간째 털어 싣고 가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도의 먼 바다에 나와 있어서 어떻게 조치할 길이 없고 사세가 이렇게까지 심하게 되었으니 어찌하오리까. 만약 특별히 수군 어사(御使)를 보내어 수군에 관한 일을 총괄하여 단속하게 한다면 그 형세는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장계를 올렸으나 아직 조정의 의사를 알 수가 없습니다. 종사관 정경달이 둔전(屯田)을 감독하는 일에 심력을 다하였지만, 전 관찰사의 공문에는 "관찰사 이외에는 둔전을 계속 경작할 수 없고 일체 검사하지 말라!"고 하니, 그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정경달이 이제 함양군수가 되었다고 하니, 그 감독하던 일도 앞으론 허사가 될 것 같아 근심스러울 따름입니다. 추수하는 동안만이라도 그대로 두도록 할 수는 없겠습니까.

앞의 여러 편지에서 어깨가 아픈 것에 대해 아주 자세히 썼지만, 결국은 이를 싹 빼 버렸다. 대신 '저와 같은 이의 한 몸은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지만'이란 말만 하고 만다.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에게조차 결국 자기 변명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일선의 장군에게 후방에서 병사를 징집해 주고 무기를 구입해 주고 군량미를 대 주는 것은 당연하고도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순신 장군은 이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동서양의 역사를 아무리 읽어도 이런 어려움에서 싸움마다 승리한 장군은 이순신 외에는 한 명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 대책 중에 하나가 둔전 제도를 실시하여 거기서 나오는 식량 중 일부는 농민이 갖고 일부는 군대에 내어 농민도 살고 군인도 살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마저 빼앗아갈 뿐만 아니라 심지어 둔전을 계속하지도 말라고 한다. 그런 상태에서 탐관오리의 가렴주구는 무차별로 가해지고 있고 조정에서는 군인을 징발하라고 야단이다.

임금 이하 문관들은 자신들이 나라를 망쳐 놓고도 뉘우치기는커녕 백성을 후려치고 야단칠 생각만 하고 압록강을 건너가 중국에서 마적떼에게 쫒길 신세에 이른 왕 이하 조정 대신들을 한양으로 불러들이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순신 장군에게는 쌀 한 톨 화살 한 개 보태 주지 않고, 도리어 빼앗아가고 관찰사라는 인간은 이순신 장군이 보급품을 자체 조달하는 둔전마저 못하게 위세를 부리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둔전 관리법을 자세히 배우면 민심을 얻고 10만 대군을 마련하는 것은 여반장인데도 배울 생각도 않고 돈 내놔라, 쌀 내놔라, 소금 내놔라, 빨리 군사를 몰고 가서 왜적을 한 놈도 없이 물리쳐라! 이렇게 다그치며, 오로지 임금 이하 사대부가 배불리 먹을 궁리나 하고 명나라 군대에게 댈 식량이나 걱정하고 있을 뿐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런 저간의 사정을 욕 한 마디 않고 흥분하지도 않고 운신도 하기 힘든 몸에 대해서는 끝내 한 마디도 않고, 조목조목 차근차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벼락같은 기세와 천둥 같은 목소리로 그 영혼의 문을 난타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편지 1통을 무려 10번이나 고쳐 썼다. 문장 하나하나의 완결성은 당연한 일이고 과연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여 마침내 더 이상 붓을 대지 않을 즈음에는 읽는 사람의 폐부를 찢어놓고 있다. 그토록 다방면에 위대한 재능을 타고난 분이지만, 이순신 장군은 글 한 줄 쓰는 데도 이렇게 심혈을 기울였다. 동서고금 누구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명문은 이렇게 하여 태어났던 것이다.
(2009. 1. 17.)

에이브러햄 링컨 오바마라고?

남북전쟁 前 링컨이 공화당 후보로 대선에 뛰어든 후, 그는 연설할 때마다 남부사람들에게 자신은 절대로 建國父들이 헌법에서 묵인한 남부노예제도에 간섭할 의사가 없고, 다만 새로 편입되는 서부에서는 그 괴상한 노예제도 peculiar institution를 확산하지 말자고 계속 설득 노력했다.

링컨은 1861년 3월 4일, 대통령 제1차 취임연설에서도 “불만에 찬 남부사람들이여! 당신들이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는 전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정부는 절대로 당신들을 먼저 공격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다시 확인했었다.

그러나 남부반란세력은 1861년 4월 12일, 연방소속이었던 南캐롤라이나州의 섬터 요새를 포격함으로서 미국은 남북전쟁의 불바다 속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악의 세력에게는 아무리 전쟁하지 말자고 호소해도 소용없는 짓이다. 악의 세력은 전쟁준비가 다 되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면 전쟁을 일으킨다. 나치 히틀러가 그랬고, 일제의 도조 히데키가 그랬고, 북괴의 김일성이 그랬고, 중동의 테러리스트들이 그러다가, 미국에서는 2001년 9월 11일, 뉴욕과 워싱턴에서 제2의 진주만 습격이 일어났다. 악의 세력은 절대로 가만있지 않는다.

바락 오바마가 링컨 흉내를 철저히 내면서 오늘부터 필라델피아로부터 시작하여 워싱턴까지 기차를 타고 내주 화요일 취임식에 내려간다 한다. “세계의 독재자들이여, 당신들이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는 전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마주 앉아서 평화를 얘기합시다. 미국은 절대로 당신들을 먼저 공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슬람 테러리스트 자살폭탄대가 에이브러햄 링컨 오바마에 감화되어 몸에 감았던 폭탄을 몽땅 풀어버릴 것이다. 하마스, 헤즈볼라, 알 카에다들이 오바마에 감화되어 모두 오바마 미국과 평화조약을 맺을 것이다. 북한의 김정일이 핵무기를 몽땅 동해바다 서해바다에 水葬시키고 에이브러햄 링컨 오바마와 불가침 평화조약을 맺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하마스는 이스라엘과의 휴전약속을 어기고 계속 이스라엘 땅에 로케트 폭탄을 퍼부었다. 일방적으로 얻어맞던 이스라엘이 자위권을 발동하여 가자를 때리니까, 유엔의 반기문을 비롯하여 세상 머저리들이 들고일어나 이스라엘더러 더 얻어맞고 참으라고 지랄들이다.

오늘 아침 뉴스에 보니, 북괴가 드디어 일갈했다. 이제까지 우리가 예수님처럼 부처님처럼 참아왔는데 이제는 도저히 리명박 역도들의 도발을 좌시할 수 없다. 링컨 오바마가 취임하기 전에라도 우리는 남조선 사대친미 반민족세력에게 맛을 보여줄 것이다. 위대한 김정일 수령동지의 뜻을 받들어 우리 민족끼리 평화통일을 해야한다! 남한의 친북좌파 역적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희소식이다.

김정일 김대중이 오바마를 지지했다.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오바마를 지지했다.
南美의 惡童 베네수엘라의 휴고 차베스도 오바마를 지지했다.
미국 안에서 악명높은 루이스 파라칸이 오바마를 지지했다.
오바마의 목사였던 제레마이어 라이트는 God Damn America라고 일갈했다.
오바마의 동지였던 미국극좌 테러리스트 빌 에이어스는 펜타곤을 폭파시키려 했다.

그런 것들 다 상관없다!
바락 오바마가 링컨을 존경하고 흉내내기만 하면 미국도 살아나고 경제위기도 다 풀리고 세계는 하나로 된다. 희망과 변화! 우리는 할 수 있다! Hope and Change! Yes, We Can Do It!

145년간 일리노이州 스프링필드 오크 리지에 묻혀있는 진짜 에이브러햄 링컨이 탄생 200주년 기념일에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이여! 제발 정신들 차리시오! 전쟁을 하고싶지 않아도 전쟁은 닥아옵니다. 김정일은 이미 핵무기를 테러지원국 시리아에 팔고있고, 미국과 이스라엘을 지구상에서 지워버리겠다는 이란의 아마디네자드는 낼모레면 핵을 갖게 됩니다.

제발 헛소리들 하지 말고, 전쟁 준비 하시오!

오바마가 당선되면 한반도 전쟁확률이 두 배로 뛸 거란 예언이 현실로 닥아왔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나도 오바마의 미국은 눈 하나 깜빡 안 한다. 제네바에서 만나던지, 평양에서 만나던지, 북경에서 만나던지, 오바마는 김정일과 마주 앉아서 美朝 불가침 평화조약을 맺을 것이다. 그런데도 에이브러햄 링컨 오바마? 오바마의 이름은 에이브러햄 링컨이 아니고 바락 후세인 오바마 Barack Hussein Obama이다.

2009년 1월 17일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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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January 11, 2009

링컨과 오바마

링컨이 남북전쟁 바로 前 美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설 목적으로 본격적 선거운동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는 연설이, 1860년 2월 27일, 뉴욕市에 있는 쿠퍼 유니언에서 한 저 유명한 “LET US HAVE FAITH THAT RIGHT MAKES MIGHT, AND IN THAT FAITH, LET US, TO THE END, DARE TO DO OUR DUTY AS WE UNDERSTAND IT. 우리 모두 正義는 莫强하다는 信念을 갖입시다. 그리고 그 신념으로 우리 모두 우리가 이해하는 우리의 義務를 용감하게 끝까지 밀어 부칩시다!”란 연설이었다.

이 연설로 일리노이州의 일개 촌닭 변호사가 美대륙 全域에 알려졌고, 링컨은 공화당 거물들, 뉴욕州의 윌리엄 수워드 前주지사 당시 美연방국회 상원의원, 오하이오州의 샐먼 체이스 前주지사 당시 美연방국회 상원의원, 미조리州의 에드워드 베이츠를 물리치고 공화당 대선후보에 선출되며 美합중국 16대 대통령이 된다. 요즈음 바락 오바마 때문에 더 유명해진 링컨 책, 도리스 컨즈 구드윈 여사의 “Team of Rivals 政敵들 틈에서”란 책의 내용이다.

바락 오바마가 1월 20일 대통령 취임선서에서, 링컨이 148년전 대통령 취임선서에 썼던 성경책을 美연방국회 도서관에서 빌려 쓰기로 했다 한다. 참으로 의미깊고 좋은 일이다.

바락 오바마는 이번 달 대통령 취임식의 주제를 “New Birth of Freedom, 새로운 자유의 탄생”으로 정했다 한다. “새로운 자유의 탄생”이란 링컨이 게티스버그 연설문에서 쓴 말로 남북전쟁과 노예해방을 한 마디로 定意한 말이다. “-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하나님이 보우하시는 이 나라가 새로운 자유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또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존속되도록…” 흑인으로 처음 美대통령에 취임하는 바락 오바마로서는 이보다 더 이상 좋은 주제가 없을 터이다. 정말 좋은 着想이다.

오늘(1/11) 뉴스를 보니, 오바마는 일정에도 없었는데, 어제 저녁(1/10) 안해 미셸과 두 딸아이를 데리고 워싱턴에 있는 링컨기념관을 찾았다 한다. 아마 두 어린 딸에게 링컨 할아버지를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참 잘한 일이다. 필자도 기회만 있으면 미국에 다닐러 온 탈북자들과 함께 링컨기념관을 찾았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자랑스러울 때, 미국사람들은 링컨기념관을 찾아본다. 오바마도 그랬기를 바란다.

다시 링컨의 쿠퍼 유니언 연설문으로 돌아가서, 링컨은 美헌법을 기초한 美建國父들이 기존의 노예제도를 헌법에서는 묵인했지만, 과연 國父들이 노예제도에 찬성했었나, 노예제도가 永續하기를 원했었나,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고 조목조목 따졌다. 그리곤, 당시 미국의 행정-입법-사법부 지도자들이 노예제도의 영속을 위하여 共謀하고 있다고 몰아부쳤다. 당시 美민주당의 巨頭, 일리노이州의 스티븐 더글러스 美연방국회 상원의원은, 노예제도의 가부를 연방에 편입되는 변방주 주민들이 自定하도록 하자는 “캔자스-네브라스카 법안”으로,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과 로저 터니 美연방 대법원장은, “흑인은 자유州에 들어가 살아도 아무런 권리도 누릴 수없는 노예이다”란 [Fugitive Slave Law퓨지티브 슬레이브 법]의 대법원 판결로 셋이 공모하여, 노예제도의 永續과 변방확산을 공모하고 있다고 몰아부쳤다. 링컨은 이 공모를 까부수고 진정한 자유민주국가를 만들자!라고 부르짖었다.

악의 세력이나 악의 세력과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자들은 항상 공모 共謀 Conspiracy와 부화뇌동 Collaborate에 능하다.

더글러스 민주당 대선후보와 뷰캐넌 대통령과 터니 대법원장이 공모하여 노예제도의 영속과 확산을 企圖했다가 링컨에게 들켜서 작살이 났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와 도조가 공모해서 제2차 대전을 일으키고 세계를 불바다로 만들었다가 처칠과 루즈벨트에게 작살이 났다.

김일성과 모택동과 스탈린이 공모하여 한반도에서 큰 전쟁을 일으켰다가, 맥아더 장군에게 작살이 났다.

김정일과 김대중과 친북좌파들이 공모하여 남한을 90프로 赤化했다. 누가 이 악의 세력을 작살낼 것인가? 우리 북한인권 엔지오들과 탈북자들은 지난 5년간 미국의 W. 부시만 바라보다가 닭좇던 개신세가 되었다. 그러니, 김정일 김대중 노무현의 공모는 우리 힘으로 까부숴야 한다.

미국에서는 지금 민주당과 오바마와 좌파언론이 反美 共謀하고 있다. 연방국회가 상하원 모두 좌파 민주당 국회로 바뀌었고, 좌파언론들이 공모하여 좌파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바락 오바마는 임기중 연방대법원을 좌파일색으로 바꿀 것이다. 그러면 남북전쟁 직전 링컨이 말한대로 미국의 행정-입법-사법부가 좌파 일색으로 바뀔 것이다. 무슨 공모를 꾸밀 지 모른다.

바락 오바마가 링컨을 닮겠다고 한다. 성경책도 링컨, 취임식 테마도 링컨, 가족에게도 링컨을 만나게 했으니, 오바마는 정말 링컨을 좇아 링컨이 시키는대로 할 것인가? 아니면, 144년 전 암살 당한 링컨이 흑인대통령 오바마를 바른 길로 이끌 것인가?

오바마, 좌파들과 공모하면 자멸이다! 링컨이 시키는대로 해라! 악의 화신 김정일을 때려잡아 호금도의 중국공산당을 막아라! 흑인 대통령 오바마가 노예해방 대통령 링컨을 따라하면 미국은 앞날이 천만년 더 창창할 것이고, 우리 나라도 죽은 링컨 덕분에 살아있는 마귀 김정일의 저주에서 벗어날 것이다.

“LET US HAVE FAITH THAT RIGHT MAKES MIGHT, AND IN THAT FAITH, LET US, TO THE END, DARE TO DO OUR DUTY AS WE UNDERSTAND IT. 우리 모두 正義는 莫强하다는 信念을 갖입시다. 그리고 그 신념으로 우리 모두 우리가 이해하는 우리의 義務를 용감하게 끝까지 밀어 부칩시다!”

2009년 1월 11일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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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January 09, 2009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이야기(최성재)

명나라가 이순신에게 군사지휘권을 넘긴 내력
최성재

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누가 되느냐, 하는 문제는 전시(戰時)에 주권을 다른 국가에 일시적으로 양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공동의 적을 상대로 치르는 전쟁 못지않게 중요하다. 대개 연합군 중에서 가장 강한 나라의 장수가 그 역을 맡는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의 장수는 당연지사 조.명 연합군의 군사지휘권을 독점했다. 이에 대해 조선은 언감생심 뒷공론도 한 적이 없다. 조선은 아예 명군(明軍)을 하늘이 보낸 천사인 양 천병(天兵)이라 불렀다. 쓸개 빠진 임금 선조는 명의 일개 장수에게도 만나기만 하면 그냥 읍도 아니고 큰절을 올리려고 애걸복걸할 정도였다.

평양성 탈환에 명의 이여송이 동원한 군대는 4만 명, 여기에 도원수 김명원은 겨우 오합지졸 1만 명을 거느리고 뒤따랐다. 후에 평양을 떠나 남으로 내려갈 때 조선은 명의 4만 대군 뒤에 순변사 이빈에게 겨우 3천의 군사를 딸려 보냈다. 명의 심부름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시 작전권 운운한다는 것은 애초에 말도 안 되었다. 동맹군 사이도 전력이 너무 차이나면 무시당하기 마련이다. <<징비록>>에 이런 구절이 있다. 기세등등하던 이여송이 벽제전투에서 왜병에게 참패한 후 혼비백산하여 남쪽이 아닌 북쪽으로 멀찌감치 꽁무니 빼던 때였다.

여러 장수 가운데 장세작이 더욱 도독 이여송에게 퇴병(退兵)하기를 권하였으며, 우리들이 굳이 간청하며 물러가지 않는다고 해서 발로 순변사 이빈을 차며 꾸짖었다. (징비록 2권)

전쟁으로 초토화된 조선은 명군에게 군량미와 말먹이용 풀을 제공하는 것도 피 말리는 일이었다. 명군의 횡포는 점령군의 그것이었다.

하루는 명나라의 여러 장수들이 군량이 다 떨어졌다는 것을 핑계삼아 제독 이여송에게 군사를 돌리자고 청하였다. 이여송은 노하여 나(유성룡)와 호조판서 이성중과 경기좌감사 이정형을 불러 뜰 아래 꿇어앉히고는 큰 소리로 꾸짖으며 군법으로 다스리려 하였다. 나는 사과를 하면서도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징비록 2권)

유성룡은 이 당시 시기적으로 보아 영의정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명군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조선의 최고위직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도 가차없이 꿇어앉혔던 것이다.

조선실록 선조 31년 1598년 6월 26일자 기록을 보면, 임금 이하 만조백관이 한강에서 약 5천 명의 병사를 거느린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을 위해 일종의 장행회(壯行會)를 베풀어 주고 있다. 약 한 달간 진린은 한강에 배를 세워놓고 점령군의 위세를 떨친 후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바야흐로 이순신 통제사의 군대를 접수하러 가는 길이었다. 기고만장한 진린은, 두 번이나 읍하며 잘 봐 주십사고 부탁하는 선조에게 대뜸 이렇게 말한다.

“배신(임금을 제외한 조선의 모든 사람)들 중에 혹 명(命)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일체 군법으로 다스려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조선실록 선조 31년 1598/6/26

요새 식으로 말하면, 무소불위의 평시 작전권과 전시 작전권을 왕에게 부탁하는 것도 아니고 대명(大明)의 장수 마음대로 행사할 테니 알고나 있으란 통고이자 협박이었던 것이다. 진린과 선조의 사이가 고양이와 쥐의 그것과 같았던 당시 상황은 다음 기록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진린은 성질이 사나워서 남과 거스르는 일이 많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였다. 임금께서는 그를 내려보낼 때 청파 들판까지 나와서 전송하였다. 나는 진린의 군사가 고을의 수령을 때리고 욕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새끼줄로 찰방 이상규의 목을 매어 끌고 다녀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 통역관을 통하여 풀어 주도록 하라고 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징비록 2권)

선조도 말귀를 전혀 못 알아듣지는 않아서 비변사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여 좋은 안을 내놓으라고 지시한다. 이에 비변사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조선의 장수들은) 각각 부하 장수들을 거느리고 소속 군병을 단속케 하여 모든 군기(軍機)와 대사(大事)를 대인의 분부대로 따르고 감히 태만히 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으로 회첩(回帖)하시고, 또 이러한 뜻으로 별도로 유서(諭書)를 마련하여 수군의 제장들에게 하송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준행하게 하소서. 이렇게 하시면 설령 제독이 직접 군병을 통솔하려고 하더라도 제장들은 아마도 이해할 것입니다. (선조 31년 1598/6/27)

선조는 한 마디 항의도 못하고 명의 수군보다 훨씬 강한 조선의 수군에 대해서 진린이 마음 내키는 대로 생사여탈권을 휘두르도록 추인한 것이다.

여기서 잠시, 신라를 고구려의 일개 지방보다 못한 양 우습게 여기는 무지몽매한 한국의 소위 지식인에게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 지휘권 문제는 어땠는가를 살펴보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신라의 김유신이 거느린 군사는 5만 명, 당의 소정방이 거느린 군사는 13만 명이었다.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당연히 당나라가 가졌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황산벌 전투에서 김유신은 계백의 5천 결사대에 멱살을 잡혀 식겁하고 사비성 앞에서 당나라의 군대와 만난다. 이 때 소정방은 바로 김유신과 기세 싸움에 들어갔다. 그의 목적은 신라를 돕는 척하고 백제에 이어 신라마저 삼켜서 고구려를 유린하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양군이 만나는 날짜를 어겼다는 이유로 소정방은 신라의 독군(督軍) 김문영의 목을 베려고 했다. 그러자 66세의 김유신은 머리카락 10만 올을 일제히 꼿꼿이 세우며 그 자리에서 칼을 빼어 들고 소정방에게 겨누었다.

대장군은 황산벌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너 소정방은 싸우지도 않고 여기 온 게 아니더냐란 속뜻), 날짜가 늦은 것을 죄라고 하는구나. 나는 죄 없이 욕을 당할 수 없노라. 나는 필히 먼저 당나라와 결전을 벌인 후에 백제를 멸하리라.
(大將軍不見黃山之役 將以後期爲罪 吾不能無罪以受辱 必先與唐軍決戰 然後破百濟)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기세등등하던 소정방이 즉시 꼬리를 내렸다. 당연히 그 이후로 신라와 당은 군사 작전권을 공유했다. 실지로는 신라의 김유신이 잡았다. 황산벌 전투 이후에는 전투다운 전투가 없었기 때문이다. 큰 전투에서 이긴 군대가 강한 군대고 강한 군대가 지휘권을 잡는 게 당연하다.

군사가 적으면서도 총사령관이 된 경우는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시에도 있었다. 저 유명한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의 연합함대는 총 380척이었는데, 그 중 아테네가 180척을 냈고 그 다음으로 코린토스가 40척을 냈다. 반면에 육군은 최강이었지만 해군이 약했던 스파르타는 겨우 16척밖에 못 냈다. 그럼에도 총사령관은 스파르타의 에우리비아데스였다.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들이 아테네의 입김이 너무 커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테네의 장군이 총사령관이 될 바에야 각자 흩어져서 되돌아가겠다고 협박했다.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는 거나 아테네의 지배를 받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보았던 것이다.

아테네는 현명하게도 지휘권을 양보했다. 우선 당장 자신을 포함하여 헬라스(그리스)를 구하는 것이 급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대신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는 뛰어난 전략과 멋진 논리와 빛나는 언변으로 연합함대가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했다. 설령 만장일치로 내린 결정에 따라 에우리비아데스가 내린 명령도 교묘하게 수를 써서 어쩔 수 없이 파기하고 1천200척의 페르시아의 함대를 물리치는 테미스토클레스의 필승 전법을 따르게 만들었다. 페르시아에 몰래 간첩을 보내어 정보를 주는 척하고 살라미스 섬 양쪽을 틀어막게 하여 도망갈 곳 없게 된 그리스 연합함대가 잠재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과연, 하늘을 어루만지고 땅을 주물럭거리는 신기막측의 재주를 가졌던(經天緯地之材: 진린이 후에 한 말로 중국 역사상 강태공과 제갈량 두 사람에게만 썼던 최대의 찬사)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했을까.

유성룡은 진린의 안하무인을 보고 여간 걱정하지 않았다.

나는 함께 앉아 있던 재신(宰臣)들에게 말했다.
"애석하게도 이순신의 군사가 장차 패할 것 같습니다. 진린과 함께 군중에 있으면 행동하는 것이 억눌리고 의견이 서로 맞지 않겠으며, 그는 반드시 장수의 권한을 침탈하고 군사들을 마음대로 학대할 것인데, 이를 거스르면 더욱 성낼 것이고, 그대로 따라주면 꺼리는 일이 없을 것이니, 이순신의 군사가 어찌 패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징비록 2권)

원균의 참담한 패전 후에 단 12척의 빈 전함을 발판으로 삼아 적진에서 군대를 모으고 적진에서 식량을 모아 기적의 기적을 이룬 이순신은 진린이 올 무렵 다시 오로지 혼자 힘으로 한산도보다 훨씬 큰 고금도에 터를 잡고 불가사의하게(이 과정도 어떤 소설보다 극적임) 수군을 재건하는 데 성공하였다. 판옥선 42척에 군사 8천명으로 늘렸던 것이다. 원균에게 134척 2만6천명의 군사를 인계했던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지만(선조실록을 보면 조선 수군은 불과 2개월 사이에 1만3천2백 명으로 줄어든다. 오늘날도 선조와 조선의 90% 사대부의 농간에 속아 용장이라 일컬어지기도 하는 원균은 통제사가 된 지 불과 2개월 만에 당시 조선 전체 군사의 3분의 2를 차지하던 수군의 절반을 뇌물 챙기고 마음대로 제대시켜 버린 것이다! 선조30년 1597/5/13), 명의 수군과 합치면 아쉬운 대로 싸워 볼 만했다.

이순신은 진린을 두 번에 걸친 필승전략으로 선조의 호랑이에서 이순신의 사냥개로 만들었다. 심리전의 대가 이순신의 솜씨가 유감없이 드러난다. 이순신은 무엇보다 명군 5천 명을 극진하게 접대한다. 고기, 술, 밥, 국, 떡, 피리, 장고 등 조국을 떠나고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음식과 풍류로 진린 이하 명나라 군대의 혼을 빼놓는다. 예의를 차리되 비굴하지 않게 그들을 적당히 띄워 주면서 극진하게 접대하자, 옛날부터 먹는 걸 유난히 밝히고 중화족 외에는 모조리 오랑캐라고 시건방 떨기를 좋아하는 중국인이 아니던가. 명나라 군대는 입이 귀밑을 휙 지나 머리꼭지까지 쭉 찢어졌다. 축제도 이런 축제가 없었다. 전시 상황이란 걸 까맣게 잊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충무공전서 행록>>과 <<징비록>을 참고하여 재구성한다.) 며칠 지나자, 명군은 점령군의 본색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차마 눈뜨고 지켜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서울에서 약 한 달 동안 보였던 그 작태가 되살아난 것이다. 선조실록에 이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구절이 있다.

유 제독 접반사 김수가 중국군의 민폐에 대해 치계하다
“아문의 각 장수들이 전라도 지방에 도착하여 많은 군정(軍丁)을 조발하여 도처에서 수색하였는데, 머리카락이 없는 자는 모두 결박하여 끌고 갔습니다(*왜군은 머리를 깎았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없는 조선 사람의 머리를 잘라 왜군을 목벤 것이라 명나라에 보고하기 위해서였음). 그리하여 병으로 머리가 빠진 자나 승려들 역시 모두 잡혀가 하루에만 무려 수백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를 기회로 중국 군사들이 마을에 출입하면서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였으며, 심지어는 소녀까지도 강간하였습니다. 일이 발각되자 제독이 그 중에 심한 자를 효수하였습니다.”-선조31년 1598/8/1

이에 조선 수군과, 이순신만 믿고 고금도로 피난 온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을 찌르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가슴이 찢어질 듯했지만 못 본 척 가만 내버려두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때가 찼다고 여기는 순간, 진린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조선의 모든 군사와 백성에게 추상 같은 명령을 내렸다. 대대적인 철수 작전에 들어간 것이다. 짐 보따리만이 아니라 솥과 요강까지 뜯고 들고서 피난길에 나선 것이다. 처음에는 장난치는 줄 알았다가 진짜 남부여대하고 소까지 끌고 강아지도 앞세워 일제히 선착장으로 걸어가자, 명군은 기겁했다. 진린이 버선발로 통제사에게 찾아왔다.

"저, 이순신, 아니 통제사, 아니 통제사 어르신,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당가요잉?"
"보시다시피 이사갑니다."
"왜요?"
"명나라 군대의 횡포에 못 살겠습니다. 조선을 구원하러 왔다는 대국의 군대가 도적보다 더합니다."
"아, 그것 말입니까? 제가 단단히 혼내겠습니다."
"혼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조선 사람이든 명나라 사람이든 따를 법도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제게 평시 작전권을 주십시오."
"... 좋습니다."

이렇게 하여 엄한 법도에 따라 조선 사람 명나라 사람 가리지 않고 칼같이 집행하니, 명나라 군사가 진린보다 이순신을 더 무서워하게 되었다. 슬그머니 이순신은 사실상 전시 작전권도 챙겼다. 이순신이 군사훈련을 시키는 것을 보고, 이순신 장군 말이라면 어머니 말씀처럼 아버지 말씀처럼 기꺼이 따르는 것을 보고, 조총을 장난감으로 만드는 조선의 화포를 보고, 명의 수군이 도저히 앞장설 엄두를 못 냈던 것이다. 진린은 나중에 슬그머니 전선(戰船)도 100명이 타는 명나라 사선(沙船)이 아니라 190명이 타는 말 그대로 집채만한 조선의 판옥선(板屋船)을 달라고 하여 거기에 탔다.

이순신은 조선의 해역을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아 그가 암초투성이인 조선의 다도해에서 멸치의 밥이 되기 십상인 것도, 물 한 모금 밥 한 공기도 이순신이 없으면 마실 수 없고 먹을 수 없다는 것도 진린이 이순신에게 꼼짝 못한 이유가 되었다. 명나라 군대가 말만 거창하지 왜군과의 싸움에서 이순신에 의해 해로가 막혀 식량이 끊어져 굶어 죽게 된 평양성의 소서행장 군대에게 이긴 것 외에는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는 것도, 이순신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는 것도 진린이 이순신을 충심으로 따른 이유였다. 적에 대한 정보도 이순신을 통하지 않고는 거의 알 수 없었던 것도 이순신에게 감복한 이유였다. 군대를 보태주기만 하면 자신의 공이 절로 올라간다는 것을 안 것도 이순신에게 평시 작전권과 전시 작전권을 모두 넘긴 이유였다. 후에 이순신은 그 마음이 다도해를 넘어 태평양같이 넓어서 조선군의 공적도 슬쩍 진린에게 넘기기도 했다. 이순신은 인간의 마음을 귀신같이 헤아렸던 것이다.

1992년 노태우 대통령은 주한미군으로부터 평시 작전권을 이양 받았다. 잘한 일이다. 민족의 자존심을 내세워 또 다른 노씨 대통령은 2012년에 미군과 국군이 공유하는 전시 작전권을 각각 따로 나눠 갖기로 했다. 한미동맹을 사실상 깨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 전시에 명령권이 두 개 있게 된다. 국군과 미군이 명령권이 달라서 여차하면 전투를 벌일 수도 있다. 나라 말아 먹을 일이다. 한국은 이순신이나 테미스토클레스나 김유신의 군대처럼 군사력이 강한 것도 아니고 정보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군사정보의 95%를 미군에 의존한다. 미군이 없으면 허공이나 아군에게 총질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설령 장비를 고스란히 한국에 넘겨준다고 한들 그걸 다룰 사람이 없다. 여전히 기세등등한 친북좌파가 내세우는 '민족'은 한국의 국민만이 아니라 동족 2천만을 노예로 삼은 한 줌밖에 안 되는 김정일 집단도 포함한다. 대신 거기에는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의 역대 대통령은 한 명도 포함되지 않는다.

명나라도 당나라도 연합군이 아니라 점령군 행세를 하면 악마인 것과 마찬가지로, 같은 민족도 내 형제자매를 못 살게 굴면 총질하고 대포질하고 굶겨 죽이면 그것은 민족이 아니라 원수요 주적이다.

경제위기라고 한다. 그러나 안보위기는 그것과 차원이 다르다. 이보다 더 어려운 시기가 숱하게 많았다. 1인당 국민소득 2만 불의 국가에게 이 정도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군사력이든 정신력이든 정보력이든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과 땅굴과 사상전과 통일전선에 속수무책인 한국이 고작 이 정도의 경제위기에 함몰되어, 이른바 정권이 바뀌고 1년이 다 되어 감에도, 2012년 4월 17일에 맞춰진 안보위기의 시한폭탄에 대해 한 마디 중얼거리는 소리도 않는 것은 두 눈 뻔히 뜨고 수백만이 강제수용소에 끌려가고 수천만 명이 굶어 죽으려고 5천만이 작정한 거나 마찬가지다. (2009. 1. 9.)

Thursday, January 08, 2009

오늘부터 우리 모두 정치하자!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가는 혼돈의 세상에서 바른 길을 걷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힘들고 또한 외로운 길이다. 그래도 바른 길은 있다. 분명히 있다. 김정일을 없애고 북한주민들을 구하는 일은 옳고 바른 길이다. 김정일을 없애는 것이 이토록 힘든 줄 알았으면 내가 이 일에 뛰어들지 않았을까? 아니다, 뛰어들었을 것이다. 이것은 옳은 일이기 때문에 해야만 하는 일이다.

박근혜가 요즈음 동네북이다. 말 안 한다고 얻어맞고 말 한마디 잘못 했다고 매일 얻어맞는 사람이, 바로 찻떼기 한나라당을 천막당사와 손붕대로 살려낸 박근혜 의원이다.

재미교포 남아무개의 북한인권 10년에, 제일 믿음직한 남한 정치인이 김문수 지사와 박근혜 의원이다. 김문수는 골수좌파 운동권이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들 하고, 박근혜는 김정일을 만나고 김대중에게 사과했기 때문에, 또 독재자(?)의 딸이라고 지금까지도 계속 얻어맞지만, 그래도 북한인권 일에 탈북자 엔지오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고 손을 잡아준 정치인들은 김문수 박근혜 뿐이다. 그래서 필자는 한나라당 경선 때부터 박근혜를 지지했는데, 승복하고 가만있는 박근혜를 계속 씹어대는 정권교체 보수우익들이 아직도 너무 많다.

왜 사깃꾼 이명박으로 정권교체를 해야 합니까?
왜 박근혜는 안 됩니까?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이란 명찰이 달려있어서 안 되네.
박근혜는 김정일을 만나서 희희낙낙했기 때문에 안 됩니다.
박근혜는 김대중을 만나서 아버지 잘못을 사과했기 때문에 안 되요.
박근혜는 너무 비싼 옷을 입어서 안 됩니다.
박근혜는 대중들에게 너무 지지를 받아서 안 됩니다.
박근혜는 말이 없기 때문에 속을 알 수 없다!
박근혜는 허튼 소리를 하기 때문에 정체성이 없다!

필자가 서울에서 박근혜 의원을 두어 번 만나보았을 때는 따듯하고 고마운 추억밖에 없다. 북한인권을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때, 2004년 11월 김문수 前 국회의원이 여의도 국회의원 회관에서 [북한인권 홀로코스트 전시회]를 열도록 주선해주었고, 박근혜 의원은 전시회에 참석해서 기념사도 해주었고, 탈북난민 기록영화 [서울기차]를 함께 보면서 함께 눈물을 흘린 분이다. 그 후 박근혜 의원은 [뮤지컬 요덕스토리]를 참관했고, 탈북난민 영화 [크로싱]도 보았고, 그후 박근혜는 납북자 가족들과 함께 임진각 소나무에 납북자 귀환을 비는 노란 리본도 달아 맨 분이다.

그런데 이명박은 북한인권이라면 철저히! 아주 철저히 외면해왔다. 서울시장 때부터 대선후보가 될 때까지 북한인권이라면 아주 철저히 외면해왔다. 그래서 한나라당 경선 때부터 필자는 이명박은 아니고 박근혜다! 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바뀐 것이 무언가? BBK 뻐꾸기 이명박이 갑자기 정체성 따지고 이념 따지고 북한인권 따지는 대통령으로 바뀌었단 말인가? 박근혜를 얼싸안고 우리 둘이 힘을 합쳐서 김정일 김대중 노무현 때려잡자고 공개제안이라도 했단 말인가? 박근혜 옷차림을 씹어대면서 이명박으로 정권교체 만세를 부른 보수우익 양반들, 왜 실용주의 겁쟁이 사깃꾼 실세 이명박 대통령을 계속 씹어대지, 왜 툭하면 박근혜는 아니다! 라고 야단들이신가? 사실 박근혜는 지금 아무 것도 아니다. 그냥 일개 국회의원이다. 이명박이 대통령이지, 박근혜가 대통령이 아니다. 왜 박근혜더러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난리법석들이신가?

바다 건너 재미교포가 박근혜를 백프로 알고 백프로 신임하는 것이 아니다. 링컨 대통령이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다. 정치란 나 자신도 보증을 할 수 없는 건데, 나더러 남을 보증하란 말이요? 그렇다, 정치에는 보증이란 단어가 없다. 우리는 정치인을 사람 됨됨이로 판단을 해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대한민국에서 지금 사람 됨됨이로, 소위 나라 살리고 북한주민들 살릴 준비가 된 사람은 김문수 박근혜 이외에는 없다. 위장취업 골수좌파였던 김문수를 믿어? 그렇다, 필자는 김문수를 믿는다. 김문수는 나라를 사랑하고 북한주민들의 수난에 진정 눈물을 흘리는 정치인이다. 정치하면서 땡전 한 푼 챙기지 않고 벌거숭이 가난뱅이 국회의원으로 대통령 노무현과 죽기살기로 싸운 사람이 바로 김문수이다.

김정일을 만나고 김대중에게 아버지 사과한 박근혜를 믿어? 필자는 믿는다. 북한인권에 관한 일이라면 소문 내지않고 부지런히 챙겨주고 도와준 박근혜를 믿는다. 사실은 지금 보수우익이란 글쟁이들이 박근혜를 기회있을 때마다 씹어대도 괜찮기는 괜찮은 일이다. 박근혜가 그 정도의 시련에 넘어질 사람이 아니다. 어머니가 빨갱이 흉탄에 맞아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충견에게 암살을 당하고 그후 거의 20년간 혼자 내공을 쌓아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선 불사조가 바로 박근혜이다.

박근혜는 이명박 이재오 정형근 김영삼 김종필 조-중-동의 엉터리 한나라당 경선에서 억울하게 지고도 깨끗이 승복한다고 말했고, 이명박 같으면 어림도 없을 터이지만, 뻐꾸기 이명박의 대선운동에도 거들었었다. 그런데 이명박은 한나라당 공천에서 민주당이 아니라 오히려 박근혜와 싸우기에 급급했다. 박근혜 죽이자! 이명박은 대통령이 되고서도 주적은 김정일 김대중 노무현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엉터리 경선에서 승복하고 자신의 대선운동에도 나섰던 박근혜가 주적이었다. 아직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죽이자! 이명박은 김정일 김대중 노무현을 만나서는 웃을 지 몰라도 박근혜만 보면 웃던 얼굴도 찌끄러 든다. 열등의식인가? 뻐꾸기 죄책감인가? 대통령이 국회의원을 얼싸 안아야지, 어떻게 일개 국회의원더러 대통령을 얼싸 안으란 말인가! 그건 얼싸 안는 것이 아니라 아부요 굴종이다. 박근혜는 참을 줄은 알아도 아부 굴종은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북한인권한다는 소시민 재미교포가 왜 남한정치에 이렇게 말이 많은가? 남한정치가 북한인권이고 북한인권이 남한정치이다. 필자는 이것을 통감하는데 10년이 걸렸다. 정치 안 따지고 북한인권 할 수 없다. 모든 게 정치로 통한다. 그래서 링컨은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정치가였다. 정치 안 하고 무슨 나라를 살리고 북한노예들을 해방시킨단 말인가! 우리 모두 정치 하자! 깽판국회 한나라당 민주당보다 일개 소시민 일개 재미교포가 훨씬 더 정치 잘할 것이다. 5천만 남한국민들이 모두 올바른 생각으로 정치하면 김정일 때려잡고 김대중 때려잡을 수 있다. 올바른 생각이 무엇인가? 바로 북한인권이다.

오늘부터 우리 모두 정치하자!

2009년 1월 8일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 씀
http://nkgenocide.net
http://nk-projects.blogspot.com

Sunday, January 04, 2009

우리에게는 험난한 앞길만이 가로 놓여있다(존 볼턴)

우리에게는 험난한 앞길만이 가로 놓여있다

오바바의 對北韓 對이란 정책은 부시정권 3期 정책이 될 것임
2009년 1월 2일, 월스트리트 저널 칼럼 – 존 볼턴 前 유엔대사

최근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세상에 북한을 믿는 바보천치가 어디 있겠나”란 발언을 했다 한다. 라이스 장관은 그런 말을 해놓고도, 엉뚱하게 북한 핵무기에 관한 6자회담 협상이 종국적으론 성공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바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는 美외교의 일대 전환을 약속해왔고, 부시정권의 외교정책의 내용이나 방식을 부단히 비판해왔다. 오바마 씨는 보다 더 집중적 협상과 다자회담 방식을 주장하면서, 자신은 미리 칼부터 빼어든다든지, “싫으면 말고” 식의 단독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오바마 씨는 선거운동 기간, 이라크 문제에 촛점을 맞추었지만,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어떻게 막느냐란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는,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문제에 對處하는 방식이, 오바마 씨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부시 씨의 최근 행적을 돌아보면, 오바마 씨가 W. 부시의 정책을 승계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오바마 씨가 부시 씨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오바마 씨는 앞으로 평양이나 테헤란에 있는 깡패 정권들에게 부시보다도 더욱 우호적일 것이다. 우리들에게 이건 정말 안 좋은 소식이다.

6자회담이 얼마 전 창피하게 무너졌는데, 이걸 보면, 앞으로 오바마 정권에서도 똑같은 정책에 새로운 간판을 내걸고 반복할 것이 분명하다. 6자회담은 2003년부터 북한정권에게 각별한 예의를 차리면서 진행해온 전형적 다자외교였다. 그동안 미국은 북한에게 국가對 국가 間에 허용되는 범주 안에서 최대한 양보를 하면서 회담을 진행해왔다.

이런 식의 次期 오바마 식 외교의 결과란 무엇일가? 세상에서 제일 큰 정치범수용소 간수와 이제까지 벌려온 협상 결과와 한결같이 똑 같을 것이다. 북한은 협상 테이블에 나오는 것까지 보상을 원했고, 협상 상대국들에게 계속 양보를 갈취했으며, 합의한 안건도 다시 재협상하자면서, 우리 쪽에서는 결국 아무 것도 성취한 것이 없는 협상이었다.

북한은 궁지에 몰리면 툭하면 남한을 쑥밭으로 만들겠다고 으름짱을 놓았다. 이럴 때면 북한 “전문가”란 사람들은 북한은 항상 이런 식으로 공갈을 치지만 별 일 없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부시 정권은 이런 식으로 북한에 계속 당근만 주면서 북한의 깡패짓을 조장해온 꼴이다.

최근 북경에서 열린 회담에서, 평양정권은, 미국협상대표들이 북한이 말로 동의했었다는 사항을 문서화하기를 거부했다 한다. 북한은 핵무기 폐기의 검증 방식에 합의했다가 또 거부한 것이다. 미국대표단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이런 식의 검증은 진짜 검증이 아니다. 북한은 이렇게 숨박꼭질을 하면서 계속 미국에게 양보를 강요했고, 부시의 협상대표들은 양보에 양보를 거듭했다.

지난 5년간 이란 문제를 놓고보아도, 부시 씨는 유럽식 외교를 부지런히 지지해왔다. 유럽 나라들은 이란정권에게 핵무기 프로그램만 중단하면 유럽이나 미국과의 관계가 호전될 것이라며, 가능한 당근을 모두 동원해왔다. 그러나 이란은 자신들의 핵무기 개발에 한 치의 양보나 변화도 없었다. 5년간에 걸친 외교의 결과는 이란이 핵무기 보유에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것 밖에는 없고, 이란은 핵연료 숨박꼭질에 능란한 선수가 되었다.

그럼 오바마의 代案이란 무엇인가? 이란에게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라고 종용하면서, 당근과 채찍을 한꺼번에 내보이면서, 이란정권에게 확실한 선택을 요구할 것이란다. 도무지 오바마 씨는 그동안 부시 씨와 유럽 국가들이 무엇을 해왔다고 생각하는가? 오바마 씨의 감언이, 우리들 대신 이란에게 계속 부드럽게 권유하던 유럽 국가들의 감언보다 훨씬 더 달다고 생각하는가?

오바마 씨가 아직까지는 북한에 대해서 일반론만 얘기해왔지만, 오바마 씨의 對이란 정책은 부시 씨의 對이란 정책보다 더 한심할 것이다. 오바마 씨의 얘기를 들어보면, 수년간 실패만 거듭해온 對이란 유화정책 외교가 전혀 없었다는 식의 발상이다. 이건 장님式 구상이지, 정책의 승계라 할 수 없다. 오바마 씨는 이란 지도자들과 개인적으로 만나보겠다는 공약까지 했는데,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받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이 이란 정권의 정체성을 인정해주겠다는 끔찍한 발상이다.

북한이나 이란이 자발적으로 핵무기와 탄도유도탄 프로그램을 포기할 리 없다. 부시 정권의 정책이나 외교가 非효과적 非타협적이라 실패한 것이 아니다. 부시가 이들에게 너무 강압적이었기 때문에 실패한 것도 아니고, 인내심이 없어서 실패한 것도 아니다. 부시 정책의 치명적 결함은, 상대방 측에서는 전혀 그 반대인데도, 협상과 쌍방의 양보를 통하여 美정부의 목적 – 평양과 테헤란의 핵확산을 막을 수 있다 - 을 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북한과 이란의 목적은 무엇인가? 협상으로 시간을 질질 끌면서 핵무기 프로그램을 더욱 추진하고 확산하자는 것이다. 협상을 통하여 당근을 더 많이 뺏어먹자는 것이다. 협상을 통하여 세계 무대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더 확실히 하겠다는 것이다.

이란과 북한은 이런 외교를 통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했고, 부시는 실패했다. 오바마가 어떻게 더 잘할 수 있을까? 우선 중국을 더 압박해야 한다. 북한에 실제적 영향력을 갖고있는 중국이, 김정일에게 6자회담식 회유 양보가 아니라 진짜 압박을 가하라고 대결하는 것이다. 이란의 경우는 더 어려운 상황이지만, 정권교체를 위한 실제적 노력과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시설을 정밀폭격하겠다면 그렇게 하라고 도와주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오바마 씨가 이런 정책을 추진할 확률은 부시 정부가 뒤늦게나마 제 정신 차릴 확률과 비슷하게 전혀 가망이 없다. 깡패국가들에 대한 오바마 씨의 정책은 – 최고로 나은 경우를 생각해보아도 – 핵확산 방지에 실패한 부시 정권의 외교정책을 이어 갈 것이다. 우리에게는 험난한 앞날만이 가로 놓여있다.

존 볼턴 씨는 미국기업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서, “항복이란 선택은 없다”란 책의 저자임. (남신우 번역)


OPINION JANUARY 2, 2009
Obama Promises Bush III on Iran
By JOHN R. BOLTON

"You'd have to be an idiot to trust the North Koreans," Secretary of State Condoleezza Rice said recently. Apparently unaware of the irony, she then predicted eventual success for the six-party talks on the North's nuclear weapons program.

President-elect Barack Obama has promised major changes in U.S. diplomacy and repeatedly criticized the Bush administration on both substance and style. Mr. Obama has pledged more negotiation and multilateralism -- less saber-rattling and "take it or leave it" unilateralism. While Iraq was Mr. Obama's focal point in the campaign, the biggest problem ahead is countering the proliferation of weapons of mass destruction.

But on proliferation, what is striking are the similarities between Mr. Obama and President George W. Bush's second term. Given Mr. Bush's recent record, continuity between the two presidencies is hardly reassuring. And where Mr. Obama differs with Mr. Bush, he is only more accommodating to the intractable rogues running Pyongyang and Tehran. This is decidedly bad news.

The recent, embarrassing collapse of the six-party talks starkly underlines how, under Mr. Obama, everything old will be new again. The talks are classic multilateral diplomacy, pursued since 2003 with notable deference to North Korea. There's been about as much engagement with Pyongyang as consenting adults can lawfully have.

The outcome of this Obama-style diplomacy was the same as all prior negotiations with the leaders of the world's largest prison camp. North Korea charged even for the privilege of sitting at the negotiating table, extracted concession after concession, endlessly renegotiated points that had been resolved, and ultimately delivered nothing of consequence in return.

When pressed, North Korea would bluster and threaten to rain destruction on South Korea. "Experts" on North Korea would observe that this was just its style, nothing to worry about. Thus did the Bush administration enable the North's bullying behavior by proclaiming even greater willingness to offer further carrots.

Most recently in Beijing, Pyongyang refused to put in writing what U.S. negotiators say it committed to verbally -- namely, verifying its commitment to abandon its nuclear program. But even taking U.S. negotiators at their word, this did not constitute real verification. The charade of verification was only one more ploy to squeeze out U.S. concessions, which Mr. Bush's negotiators seemed prepared to give.

On Iran, also for over five years, Mr. Bush has endorsed vigorous European diplomacy. The Europeans offered every imaginable carrot to persuade Iran to drop its nuclear program in exchange for a different relationship with Europe and America. This produced no change in Iran's strategic objective of acquiring deliverable nuclear weapons. The only real consequence is that Iran is five years closer to achieving that objective. It now has indigenous mastery over the entire nuclear fuel cycle.

The Obama alternative? "Present the Iranian regime with a clear choice" by using carrots and sticks to induce Iran to give up its nuclear aspirations. What does Mr. Obama think Mr. Bush and the Europeans have been doing? Does he really think his smooth talking will achieve more than Europe's smoothest talkers, who were in fact talking for us the whole time?

While Mr. Obama has uttered only generalities on North Korea, his Iran policy will be worse than Mr. Bush's. He acts as though the years of failed efforts to dissuade Iran from going nuclear simply didn't happen. That is blindness, not continuity. And that's without Mr. Obama's pledge to meet personally with Iran's leaders, an incredible act of legitimization he seems willing to give away for nothing.

Neither North Korea nor Iran is prepared to voluntarily give up nuclear or ballistic missile programs. The Bush policy was flawed not because its diplomacy was ineffective or disengaged, not because it was too intimidating to its adversaries, and not because it lacked persistence. Mr. Bush's flaw was believing that negotiation and mutual concession could accomplish the U.S. objective -- the end of proliferation threats from Pyongyang and Tehran -- when the objectives of our adversaries were precisely the opposite. They sought to buy valuable time to improve and expand their nuclear programs, extract as many carrots as possible, and play for legitimacy on the world stage.

Iran and North Korea achieved their objectives through diplomacy. Mr. Bush failed to achieve his. How can Mr. Obama do better? For starters, he could increase the pressure on China, which has real leverage over North Korea, to press Kim Jong Il's regime in ways that the six-party talks never approached. Options on Iran are more limited, but meaningful efforts at regime change and assisting Israel should it decide to strike Iran's nuclear facilities would be good first steps.

Sadly, the chances Mr. Obama will adopt these policies are far less than the steadily dwindling possibility that the Bush administration might yet come back to reality. Mr. Obama's handling of the rogue states will -- at best -- continue the Bush policies, which failed to stop nuclear proliferation. Get ready for a dangerous ride.

Mr. Bolton, a senior fellow at the American Enterprise Institute, is the author of "Surrender Is Not an Option: Defending America at the United Nations" (Simon & Schuster,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