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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January 24, 2009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이야기-3 (최성재)

종의 아픔도 졸병의 죽음도 못 견뎌한 이순신 (최성재)


이순신 장군은 종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졸병도 허투루 대하는 법이 없었다.
최성재

... 종 금(金)을 본영에 보냈는데, 바람이 몹시 사납게 불어 염려되었다. ...(1596/1/12)
... 종 경(京)이 병이 났다. (1596/7/27)
... 종 경이 심하게 앓는다고 하니 무척 걱정이 된다. ...(1596/7/28)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은 종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졸병도 허투루 대하는 법이 없었다. 종은 주인의 사유물이고 졸병은 상관의 종인 시절이었지만, 이순신 장군은 그들도 한결같이 진심으로 대했다. 그는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상관이라도 고개를 숙이는 법이 없었지만, 당신의 아랫사람이 정당한 사유 없이 노비를 홀대하거나 매를 들면 불같이 화를 내며 오히려 노비의 하늘에게 곤장을 치거나 그를 엄히 타일렀다.

... 저녁에 방답첨사[장린]가 성낼 일도 아닌데 성을 내어 지휘선의 무상(無上=舞上 사공과 비슷한 역할을 한 뱃사람) 흔전자에게 곤장을 쳤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에 곧 군관과 이방을 붙잡아 군관에게는 20대, 이방에게는 50대의 곤장을 쳤다. ... (1596/3/11) <<난중일기>>

첨사는 첨절제사(僉節制使)의 준말로 종3품으로서 정3품인 수사 곧 수군절제사 바로 다음 벼슬이었다. 1555년 을묘왜변 이후 이원 지휘체제인 진관법(鎭管法)이 단일 지휘체제인 제승방략제(制勝方略制)로 바뀌기 전까지는 첨사는 수사와 동등한 자격을 갖추어 수사의 명령을 받지 않았다. 그만큼 수군에서는 높은 지위였다. 이순신 장군도 한산대첩 이후에야 비로소 (전라좌)수사에서 새로 생긴 종2품인 통제사의 지위로 격상하였을 뿐이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이순신 장군은 3성 장군, 방답첨사 장린은 별 하나인 준장이다. 이런 장성이 전사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이등병도 아닌 훈련병쯤 되는 자에게 정당하지 않은 일로 곤장을 쳤다고 하여, 차마 장군을 곤장 칠 수는 없는지라 그 아랫것들을 불러 곤장을 20대, 50대나 쳤던 것이다. 일전의 글에서 밝혔듯이 이순신 장군은 범 같은 명나라 군도 행패를 부리면 본국의 군인과 똑같이 추상같이 처벌했던 사람이다.

이순신 장군은 당신의 아들도 예외로 두지 않았다. 종을 함부로 다루면 엄히 꾸짖었다.

... 이날 아들 회가 방자 수에게 곤장 쳤다고 하기에 아들을 뜰 아래로 불러다가 잘 타일렀다. ... (1596/7/21) <<난중일기>>

아들 회가 종에게 곤장을 친 이유를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종이 잘못한 게 있었던 모양이다. 앞 뒤 문맥으로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굳이 쓰지 않는 게 이순신 장군의 필법이다. 잘못하긴 했지만 아들의 처사가 좀 심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방으로 불러들인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다 보는 마당에 세워 두고 나직하지만 엄한 말로 꾸짖는다.

재미있는 것은, 진중의 여인들도 이순신 장군을 친정 아버지처럼 따라서 때로 쪼르르 일러바치기도 했다.

맑음. 이른 아침에 이영남과 좋아지내는 여인이 와서 말하기를, "권숙이 치근거리기에 피해 왔는데, (오늘 여기 온다니)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했다. 늦게 권수사와 우후, 사도첨사, 방답첨사가 오고 권숙도 왔다. ... (1596/1/7) <<난중일기>>

근무에 태만한 것에 대해서는 추상같이 엄했지만, 그와 관련 없이 누구든 지위와 권력을 남용하여 아랫사람을 괴롭히면 괴롭힘의 상대가 아무리 하찮은 인간일지라도 절대 그냥 보아 넘기지 않았다. 종도 졸병도 사생활을 존중하고 인격을 문무 양반과 똑같이 존중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니,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인간이면 누구나 이순신 장군을 하늘처럼 존경하면서도 자상한 아버지처럼 든든한 형님처럼 따랐던 것이다.

전투에 임한 졸병도 이순신 장군은 일일이 기억했다. 전쟁이 끝나면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 무명용사의 무덤이 그가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는 전혀 없었다. 언제나 완벽한 승전을 거두기도 했거니와 죽거나 다치면 빠짐없이 보고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승전 보고서는 아주 간략하게 최고사령관 중심으로 기술하기 마련이지만, 글자 한 글자도 아껴 쓰던 사람답지 않게 이순신 장군은 이례적으로 아주 자세하게 보고하면서 모든 공을 아랫사람에게 돌렸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하찮은 인물이라도 죽거나 다치면 임금에게 올려보내는 장계에 그 이름을 일일이 밝혔다.

지루한 다음의 명단을 보자. 000 외 몇 명 전사하고 XXX 외 몇 명 부상했다고 하면 될 것을, 왜 저렇게 자세히 일일이 기록했을까.
...
왜적과 맞붙어 싸울 때 군졸로서 화살과 총알을 맞은 사람 중에 신이 타고 있던 배의 정병(正兵)인 김말산, 우후선의 방포군인 진무 장언기, 순천 제1선의 사부(射夫:활이나 대포를 쏘는 사람)인 사노 배귀실, 제2선의 격군인 사노 막대, 보자기 내은석, 보성 제1선의 사부인 관노 기이, 흥양 제1선의 화살 제조 기술자인 관노 난성, 사도 제1선의 사부인 진무 장희달, 여도 사공인 지방 병사 박고산, 격군(格軍: 노 젓는 사람)인 박궁산 등이 총알에 맞아 죽었습니다.

흥양 제1선의 사부인 목동 손장수는 뭍으로 왜적을 쫓아가서 그 목을 베려다가 도리어 적의 칼날에 죽었으며, 순천 제1선의 사부인 보인 박훈, 사도 제1선의 사부인 진무 김종해 등은 왜적의 화살에 맞아 죽었으며, 순천 제1선의 사부인 유귀희, 광양선의 격군이 보자기 남산수, 흥양선의 선장인 수군 박배세, 격군인 보자기 문세, 훈도인 정병 진춘인, 사부인 정병 김복수, 노복 고붕세, 낙안 통선의 사부인 조천군, 수군 선진근, 무사의 사노 세손, 발포의 제1선 사부인 수군 박장춘, 지방 병사인 장업동, 방포인 수군 우성복 등은 총알에 맞았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방답첨사가 거느린 종 언룡, 광양선의 방포 장인 서천용, 사부인 백내은손, 흥양 제1선의 사부인 정병 배대검, 격군인 보자기 말손, 낙안 통선의 장흥 조방 고희성, 능성 조방 최란세, 보성 제1선의 군관 김익수, 사부인 오언룡, 무상사의 보자기 흔손, 사도 제1선의 군관 진무성과 임흥남, 사부인 수군 김억수와 진언량, 신병 허복남, 조방 전광례, 방포 장인 허원종, 지방 병사 정어금, 여도선의 사부 석천개과 유수선과 유석 등은 화살에 맞았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 <<당포에서 왜적을 쳐부순 장계>>

총이나 화살 또는 칼에 의해 죽거나 다친 사람들의 이름을 원인별로 일목요연하게 나열하면서 관노(官奴)나 사노(私奴)까지 일일이 다 기록했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을 홀로 처리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모두들 잠들은 늦은 밤에 쓸쓸히 앉아, 이순신 장군은 종과 졸병의 이름까지 하늘보다 높고 무섭던 왕에게 하나도 빼먹지 않고 아마 아무렇게나 불렀기 때문에 대부분의 종들은 한자로 그 이름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록되었겠지만, 그들에게 반 작명을 해 주며, 빠짐없이 이름을 밝혀 임금에게 고했던 것이다. 오늘날도 그 이름이 대통령이 친히 보는 공문서에 기록된다면 가문의 영광인데, 하물며 신분의 격차가 하늘과 땅이었던 조선시대에랴!

비록 죽거나 다쳤지만, 그들의 희생 덕분에 승전했음을, 나라를 지켰고 당신 임금의 목숨도 구했음을 잊지 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지 않았을까.

인민을 입에 달고 다니고 만민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자랑하던 공산주의자들이 때려 죽이고 굶겨 죽인 농민과 노동자와 기업가와 지주가 얼마나 되던가. 그 절대다수는 한 줌도 안 되는 기업가와 지주가 아니라 아무 죄 없고 힘없는 농민과 노동자였다. 무려 1억 명! 지금도 노동자와 농민의 지상낙원이라는 북한에서는 3백만이 굶어 죽고도 20만 명이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고 천만 명이 영양실조에 허덕인다. 아무 것도 아닌 일로, 그 땅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면서 민중을 입에 달고 다니고, 갖가지 문명의 혜택을 다 누리면서 자연보호를 이마에 대문짝만하게 써 붙이고 다니는 자들이 있다.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 어기는 것을 특권으로 여기는 무리들이 있다. 위선을 측은지심으로, 독선을 양심으로 확신하는 무리들이 있다. 일일이 이순신 장군에게 불려가서 빠짐없이 곤장 맞을 인간들이다.
(2009.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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