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k-projects

Saturday, January 17, 2009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이야기-2(최성재)

편지 1통을 10번이나 고쳐 쓴 이순신

이순신 장군은 글 한 줄 쓰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최성재

감정을 정화시키는 문학, 영혼을 고양시키는 종교, 오성(悟性)을 일깨우는 철학에서는 사실(事實) 여부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논리의 비약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들 영역에서는 언어가 가장 큰 도구이지만, 언어 너머의 숨은 뜻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실과 논리가 가장 중요시되는 분야는 과학이다. 이성의 날카로운 칼에도 베어지지 않을 정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지능력의 한계로 인해 과학에서는 아무리 확실하게 보이는 것도 진리라고 우기지 않는다. 그 대신 이론이라는 말을 쓴다. 반박의 가능성은 항상 열어놓는다. 정확성을 생명으로 하는 과학에서는 따라서 말이 무미건조하다. 원천적으로 과학의 논문은 명문(名文)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확하면 정확할수록 진솔하면 진솔할수록 명문이 되는 장르도 있다. 일기, 기록, 보고가 바로 그것이다. 내 어줍잖은 견해로는 이런 장르에서 최고의 명문이 동서양에 각각 하나씩 있는데, 그것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장계(狀啓)>>, 캐사르의 <<갈리아 전기(戰記)>>가 아닐까 한다.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갈리아 전기>>를 본 많은 글쟁이들이 붓을 꺾는다고 한다. 비록 평이하다고 하여 어린애한테도 라틴어 교재로 쓰이지만, 그것은 그만큼 명문이란 말이다. 갈리아 곧 오늘날 프랑스를 중심으로 삼는 지역을 정복한 캐사르가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기록한 이 전쟁 기록문은 군더더기 하나 없다. 전형적인 간결체다. 미사여구가 없다. 그럼에도 진주와 다이아몬드와 금실 대신 자갈과 돌과 흙을 풀과 띠와 나뭇가지 따위로 엮은 이 글은 보석보다 빛나고 비단보다 미려하다. 대학 때 라틴어를 배워 보려고 책만 사 두고 안 배운 것이 후회된다.

우리나라에는 캐사르에 조금도 못지않은 이순신이 있다. 군인으로서도 그렇고 문장가로서도 그렇다. 이순신 장군의 글은 <<난중일기>>만 보면, 그 진면목을 반 정도밖에 파악하지 못한다. <<난중일기>>가 메모 또는 암호라면 장계는 이 메모를 기초로 제대로 쓴 보고서 내지 암호해독문이다. <<난중일기>>가 짧지만 그 자체로 완벽한 곡인 쇼팽의 <<연습곡>>이나 <<전주곡>>이라면, <<장계>>는 길지만 더하거나 뺄 데가 전혀 없는 베토벤의 교향곡이다.

진중(陣中) 메모 수준의 글임에도 <<난중일기>>는 한 줄 한 줄이 때로는 단 한 문장이 그대로 명문의 명문이다. 예를 들면, <날씨는 맑았지만, 몸도 마음도 찌뿌드드했다. 晴 氣不平(1594/3/20> 같은 경우다. 이 때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3년째에 접어드는 해이다. 전쟁은 소강 상태에 들어갔지만, 조선이 대오각성하여 힘을 비축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왜군을 물리칠 수 있는 기회를 노리는 게 아니라 수군을 빼고는 고작 5천 명(1594년 6월 3일자 <<난중일기>> 참조. 아마 선조 이하 조정의 무리들이 하는 꼴을 봐서 이 때까지 정규군이 늘어났을 것 같지 않다.)의 군사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명나라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명나라는 조선은 아랑곳없이 강대국 왜와 외교전이나 벌이고 있다.

북핵을 두고 당사자인 한국은 사분오열한 가운데, 미국과 북한이 한쪽은 중국의 눈치를 보고 한쪽은 중국의 빽을 믿고 평화 운운하는 꼴과 같다.

홀로 나라 걱정 겨레 근심에 노심초사하던 이순신 장군은 만성 위장염에 걸린 듯한데, 날씨가 맑고 아무 일도 없는 날임에도 <氣가 고르지 못하다.>라는 한 마디로 하루의 일과와 심사와 몸의 상태를 뭉뚱그려 표현했다. 지금까지 이를 단지 <맑음. 몸이 불편하다.>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당시 상황과 앞뒤 일기를 보아 너무 미진하다. 기(氣)는 정(情)과 마찬가지로 다른 외국어로도 심지어 순수한 우리말로도 옮기기가 무척 어려운 낱말이다. 여기서 철학적인 의미까지는 없을 테니까 그것은 빼더라도, 기는 기운, 기분, 심기, 에너지, 몸의 상태(컨디션) 등을 두루 포괄하는 말이다. 따라서 단지 몸이 불편하다라고 새겨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아쉬운 대로 <몸도 마음도 찌뿌드드했다.>라고 새겨 봤다. 또한 날씨도 여기서는 그냥 <맑음>이라고 하지 않고 뒷부분과 연결하여 <날씨는 맑았지만>이라고 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선조에게 올려보낸 수많은 장계는 하나하나가 제갈공명의 전후(前後) <<출사표>> 같은 명문이다. 군더더기 하나 없지만, 거기에 조선 수군의 신나는 승전 소식뿐 아니라 나라를 구하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책이 곳곳에 들어 있다. 그래서 문장 하나하나가 명확한 뜻을 지니고 있음에도 행간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뜻이 숨겨 있다.

이순신 장군은 운문에도 능했지만, 산문에도 탁월했다. 타고난 재능이 비범했다고 신격화해 버리면, 범인들로서는 열등감만 생기거나 신앙심이 생겨나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이 가신 지 400년이 넘었지만, 당신을 개인이든 사회든 국가든 자랑하고 숭배했을 뿐 현실에 적응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연구를 안 하고 연구를 안 했기 때문에 도대체 무엇을 구체적으로 배워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노승석의 <<이순신의 난중일기>> 완역본에 보면,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노력하는 분이었나를 알려 주는 부분이 있다. <<난중일기>>의 여백에 쓰였던 것을 옮겨놓은 덕분이다. 계사년 곧 1593년 3월 23일부터 4월 그믐까지는 일기가 없는데, 그 사이에 휘갈긴 편지가 있다. 아마 영의정 유성룡에게 보낸 서찰의 사본 같다. 놀랍게도 무려 10번이나 같은 내용을 조금씩 바꾸어 되풀이하고 있다. 할 말이 너무나 많았지만, 과연 어떤 말을 할 것인지 고심하고 또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또한 글자 한 자 한 자를 이리 써 보고 저리 써 보며 계속 고쳤다. 이렇게 쓰든 저렇게 쓰든 다 훌륭한 글이지만, 최종의 글을 보면 역시, 하고 무릎을 치게 된다.

여기서 잠깐!
장계 초안을 수정했다는 표현도 곳곳에 있지만, 1594년 3월 7일에는 저 불후의 명문 <<답담도사종인금토패문答譚都司宗仁禁討牌文>>을 쓰는 과정이 잘 나와 있다. 당신이 글에 대해서 얼마나 까다로웠는지 안목이 높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맑음. 몸이 극도로 불편하여 뒤척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아랫사람을 시켜 패문에 대하여 답서를 작성하게 했건만 글꼴이 말이 아니었다. 원 수사가 손의갑을 시켜 지어 보내게 했지만 그 역시 못마땅하였다. 나는 병중에도 억지로 일어나 앉아 글을 짓고, 군관 정사립을 시켜 써 보내게 했다. ... (1594/3/7)

제1 편지는 다음과 같다.

더위가 극심한데 삼가 살피지 못하였지만 체후가 어떠하신지요? 전에 앓던 학질과 이질이 지금은 어떠하십니까? 밤낮으로 엎드려 사모하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가뭄이 너무 심하고 강의 여울도 매우 얕아져서 적에게만 도움되는 형세이니, 천지신명께서 도와주지 않으시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분한 마음을 품고도 할 말을 못하니 노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전에 안부 편지를 받았으나 탄환 맞은 자리의 통증 때문에 바로 나아가 배알하지 못했으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다만 지난번에 후퇴하여 돌아온 뒤로 얼마 안 가서 다시 병사를 징발하였지만 민심이 이미 무너져 있기에 세력을 모으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안부를 묻고 답장 못한 것은 1592년 5월 29일 처음으로 거북선을 출동시킨 사천해전에서 어깨에 조총을 맞고 칼로 생살을 도려 낸 다음 뼈를 깎아 총알을 빼낸 다음에도 제대로 치료도 못하고 계속 갑옷을 입고 있어서, 이 편지가 1593년 3월이나 4월에 쓴 것이라면, 상처가 1년이 다 되도록 낫지 않는 바람에 붓을 들기 어려웠다는 변명을 한다. 이어서 병사 징집의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조선 전체가 5천의 군사밖에 모으지 못할 때 이순신 장군은 육군이 먼저 징발해 간 다음에 그 찌꺼기 노비와 가난뱅이를 모으고(빽 있는 놈은 힘든 수군 대신 육군으로 빠지거나 육군으로 가는 척하고 징집을 기피하는 상황이었음), 무기와 식량도 스스로 다 마련하는 것도 모자라 식량과 소금을 도리어 왕에게 올려 보내면서도 전라좌수영보다 3배 큰 이억기가 이끄는 전라우수영의 군사까지 합하여 약 2만 명을 확보한다. 그보다 1년 전인 1593년 5월 14일의 장계를 보면, 전라좌수영의 전선(戰船)이 42척, 전라우수영의 전선이 54척 도합 96척이라고 했으니까, 전선 한 척 당 200명만 잡아도 약 2만 명이나 된다. 그런 상황에서 아마 임금으로부터 하루빨리 군사를 더 확보하여 적을 물리치라는 독촉을 받은 듯하다. 너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오지만, 누구에게도 울분을 풀 길 없어 <노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고 하소연한다. 철없는 임금을 설득하여 군사 징집을 미루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 편지인 것 같다.

제3 편지는 다음과 같다.

일찍 안부 편지를 받았으나 탄환 맞은 자리의 통증 때문에 바로 나아가 배알하지 못했으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다만 요즘 도내의 인심을 살펴보니, 지난번에 군사를 후퇴시킨 뒤로 군대의 사정은 근심에 괴로워하고 원망하는지라, 바로 군사를 징발하는 명령을 내릴지라도 모두 달아날 꾀만 낼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이와 같으니 어떻게 통제를 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우선 군사를 출전시킬 기한을 늦추고 한번이라고 휴가를 얻게 해 준다면, 인심은 필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저 역시 정예한 수군과 잡색군 중에 자원하는 자를 모집하여 이들로 하여금 힘을 기르도록 휴가를 가게 하였고, 8월 초에는 모두 거느리고 사또 앞에 달려가서 지휘를 받으며 죽음으로써 결전하고자 합니다. 군량과 군기는 경상도에서 재차 임전했을 때 거의 다 썼으니, 또한 움직이기가 어려운 걱정이 생겼습니다. 사또께서 미리 헤아려 명하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이제 사또께서 해가 뜰 때 전쟁에 나아가 국가의 수욕(羞辱)을 참지 못하고 다시 군사를 일으키어 나라의 치욕을 전부 씻어 주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무릇 혈기가 있는 자는 심력을 다하고자 하지 않음이 없건만, 인심은 이러하기만 하니 어찌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대장의 명령은 오히려 신중히 하여 가볍게 내려선 안 될 것이니, 일이 비록 뒤의 것을 생략할 만큼 급속히 해야 할 것일지라도 인심과 형세를 살피고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전쟁에 짓밟히고 가뭄으로 굶주린 백성의 사정은 전혀 헤아리지 않고 위에서 무조건 다그치기만 하는 것이 얼마나 민심을 이완시키는 것인지, 민심이 떠나면 어떠한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마음으로야 누군들 왜적을 물리치고 싶지 않겠나만, 구체적인 방법에 들어가서는 대장이 아니라 졸장부의 명령을 남발하는 조정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하지 못하면서도 흥분하지 않고 제갈공명의 금낭계(錦囊計)를 가르쳐 주고 있다.

제6의 편지를 보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가뭄과 더위가 너무나 혹심한데 살피지 못하였지만, 체후가 어떠하신지요. 전날에 앓던 이질이 지금은 어떠하십니까. 삼가 사모하는 마음 간절하여 담아두기에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곧 바로 나아가 문안을 드리고자 했으나 지난번 교전할 때에 격분하여 조심하지 않고 먼저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나아갔다가 거기서 적의 탄환을 맞은 자리가 매우 컸습니다. 비록 죽을 만큼 다치지는 않았으나 어깨 앞 우묵한 곳의 큰 뼈를 깊이 다쳐 고름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지 못하고 온갖 약으로 치료하지만 아직 차도가 없으며, 또한 활시위를 당길 수 없어 무척 걱정스럽습니다.

나라를 위해 힘쓰는 일이 지금의 급무이지만 몸의 병이 이렇게 되었으니 북쪽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할 때면 다만 스스로 눈물을 드리울 뿐입니다. 군사를 움직이는 시기는 어느 날로 정하셨습니까? 요즘 이 도의 민심을 보니, 한번 연해 지방에 징병한다는 소식을 듣기만 하면 모두 달아날 꾀만 낼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혹 말하는 자가 있다면 "물길을 따라 가서 적을 토벌하고 자리를 옮겨 싸우러 깊이 들어가면 되돌아 올 기약을 하기가 어렵다."고 하고, 또 "경상도와 인접한 땅에서 남김없이 징발한다면, 이는 곧 이 도를 왜적에게 넘겨주는 것이니, 수비하는 사람은 부모처자가 없게 되고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답니다. 인심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습니까. 순천부사가 힘을 다하여 사람을 취합해 보았지만 온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하니, 통분한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각 포구의 내용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 군대를 움직일 기한을 넉넉히 잡고 서서히 의리로써 깨우치어 취합해야 할 것입니다.

하삼도(下三道) 안에 겨우 온전한 것은 이 도만이 조금 그러한데, 만약 이 도를 잃는다면 회복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낮이나 밤이나 시름하느라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메입니다. 다만 더욱 사또께서 한번 실수를 과오라 여기지 마시고 회복을 도모하는 계책을 장구히 생각하여 빨리 종사(宗社)를 되찾는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이(李), 백(白) 두 장수(누군지 알 수 없음)의 죽음은 모두가 스스로 취한 것입니다. 요행과 만일이란 실로 병가의 장구한 계책이 아닙니다.

중상을 입고도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느라 제대로 치료도 못 받았는데, 이순신 장군 덕분에 전라도 하나가 겨우 온전히 남았는데, 조정에서는 군사든 식량이든 아귀같이 긁어 가는 바람에 적 소굴이 된 경상도보다 더 고단하다는 것을 임금 이하 조정은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도 민심이반, 임진왜란에 지고 있는 것도 민심이반인데, 전혀 뉘우치지 못하고 계속 민심이반을 부추기고 있으니, 그 답답한 처사에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온다. 그렇게 혹독하게 당하고도 나라와 겨레의 운명을 요행과 만일에 맡기는 조정을 은연중에 질타하고 있다.

제10 편지는 다음과 같다.

삼가 살피지 못하였지만 체후가 어떠하신지요. 마음의 그리움이 간절하여 담아두기에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일찍이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는 말을 듣고도 먼 바다에서 변방을 지키느라, 아직 문후를 드리지 못했으니 매우 근심스러울 따름입니다. 이 곳의 적세(賊勢)는 요즘 다른 흔적은 없고, 연일 정탐해 보면 굶주린 빛이 많이 있는데, 그들의 뜻이 반드시 곡식이 익으면 이를 저축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방비는 곳곳이 허술하여 도무지 방어하여 지키는 형세가 없습니다. 왜놈들이 기이하게 여기는 것은 수군인데 수군으로서 싸움에 나서는 자는 없고, 수령이 관찰사에게 공문을 보내어도 조금도 감독할 뜻을 가지지 않으며, 군량은 더욱 의뢰할 곳이 없어 온갖 생각을 해 봐도 조처할 방도가 없으니, 수군에 관한 한 가지 일도 그 형세상 장차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와 같은 이의 한 몸은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지만, 나라 일에 있어서는 어찌하오리까. 전라도에 새로 온 관찰사와 원수조차도 군관을 보내어 연해에 있는 수군의 양식을 곳간째 털어 싣고 가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도의 먼 바다에 나와 있어서 어떻게 조치할 길이 없고 사세가 이렇게까지 심하게 되었으니 어찌하오리까. 만약 특별히 수군 어사(御使)를 보내어 수군에 관한 일을 총괄하여 단속하게 한다면 그 형세는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장계를 올렸으나 아직 조정의 의사를 알 수가 없습니다. 종사관 정경달이 둔전(屯田)을 감독하는 일에 심력을 다하였지만, 전 관찰사의 공문에는 "관찰사 이외에는 둔전을 계속 경작할 수 없고 일체 검사하지 말라!"고 하니, 그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정경달이 이제 함양군수가 되었다고 하니, 그 감독하던 일도 앞으론 허사가 될 것 같아 근심스러울 따름입니다. 추수하는 동안만이라도 그대로 두도록 할 수는 없겠습니까.

앞의 여러 편지에서 어깨가 아픈 것에 대해 아주 자세히 썼지만, 결국은 이를 싹 빼 버렸다. 대신 '저와 같은 이의 한 몸은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지만'이란 말만 하고 만다.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에게조차 결국 자기 변명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일선의 장군에게 후방에서 병사를 징집해 주고 무기를 구입해 주고 군량미를 대 주는 것은 당연하고도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순신 장군은 이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동서양의 역사를 아무리 읽어도 이런 어려움에서 싸움마다 승리한 장군은 이순신 외에는 한 명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 대책 중에 하나가 둔전 제도를 실시하여 거기서 나오는 식량 중 일부는 농민이 갖고 일부는 군대에 내어 농민도 살고 군인도 살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마저 빼앗아갈 뿐만 아니라 심지어 둔전을 계속하지도 말라고 한다. 그런 상태에서 탐관오리의 가렴주구는 무차별로 가해지고 있고 조정에서는 군인을 징발하라고 야단이다.

임금 이하 문관들은 자신들이 나라를 망쳐 놓고도 뉘우치기는커녕 백성을 후려치고 야단칠 생각만 하고 압록강을 건너가 중국에서 마적떼에게 쫒길 신세에 이른 왕 이하 조정 대신들을 한양으로 불러들이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순신 장군에게는 쌀 한 톨 화살 한 개 보태 주지 않고, 도리어 빼앗아가고 관찰사라는 인간은 이순신 장군이 보급품을 자체 조달하는 둔전마저 못하게 위세를 부리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둔전 관리법을 자세히 배우면 민심을 얻고 10만 대군을 마련하는 것은 여반장인데도 배울 생각도 않고 돈 내놔라, 쌀 내놔라, 소금 내놔라, 빨리 군사를 몰고 가서 왜적을 한 놈도 없이 물리쳐라! 이렇게 다그치며, 오로지 임금 이하 사대부가 배불리 먹을 궁리나 하고 명나라 군대에게 댈 식량이나 걱정하고 있을 뿐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런 저간의 사정을 욕 한 마디 않고 흥분하지도 않고 운신도 하기 힘든 몸에 대해서는 끝내 한 마디도 않고, 조목조목 차근차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벼락같은 기세와 천둥 같은 목소리로 그 영혼의 문을 난타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편지 1통을 무려 10번이나 고쳐 썼다. 문장 하나하나의 완결성은 당연한 일이고 과연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여 마침내 더 이상 붓을 대지 않을 즈음에는 읽는 사람의 폐부를 찢어놓고 있다. 그토록 다방면에 위대한 재능을 타고난 분이지만, 이순신 장군은 글 한 줄 쓰는 데도 이렇게 심혈을 기울였다. 동서고금 누구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명문은 이렇게 하여 태어났던 것이다.
(2009. 1. 17.)

0 Comments:

Post a Comment

<<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