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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January 31, 2009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이야기-4(최성재)

기적을 믿지 않음으로 기적을 낳은 이순신

이순신 장군은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 안에서 방법을 찾아내어 기적을 양산했다.
최성재

선조는 밤낮으로 기적을 믿었지만, 이순신 장군은 꿈에도 기적을 믿지 않았다. 선조는 조상의 위패만 잘 모시고 명나라의 대인들에게 머리만 잘 조아리면 그들이 음으로 양으로 기적을 일으켜 제갈공명이 머리카락을 곤두세우고 두 손을 치켜들어 동남풍을 일으킴으로 조조의 백만 대군을 물리쳤듯이 여반장으로 왜적을 모조리 몽달귀신이나 물귀신으로 만들 줄 알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오로지 피와 땀으로 전쟁에서 이겨야만 왜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잘 알았다.

선조는 철석같이 기적만 믿고 발만 동동 구르거나 걸핏하면 임금 짓 못해 먹겠다고 목소리를 착 깔아 협박하거나(대통령 중에도 이런 자가 있었지, 아마!) 시도 때도 없이 아랫것들에게 짜증내고 벌컥벌컥 화를 냈지만, 이순신 장군은 절대 기적을 믿지 않고 촌음을 아끼고 땀 한 방울도 헛되이 버리지 않고 티끌을 모으고 또 모아 중국의 태산보다 큰 조선의 백두산을 쌓았다. 씨를 뿌려 곡식을 마련하고, 떠돌이를 모아 군사 훈련을 시키고, 나무를 베어 전선(戰船: 주력 함선)과 협선(挾船: 심부름 배)을 만들었다. 잔꾀를 부리거나 게으름 피우는 자는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엄히 꾸짖었지만, 성실하고 정직한 자는 아무리 신분이 낮아도 극진히 대접하여 누구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했다.

전선 한 척 건조하기가 얼마나 어렵고, 군대가 스스로 최대 29,000명 최소 14,000명의 군량미 마련하기가, 아니 군대가 스스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단 100명의 군량미 마련하기도 얼마나 어렵고, 대포 하나 만들기가 얼마나 어렵고 갯벌에서 염초를 구워 화약을 제조하기가 얼마나 어렵고, 화살 한 대라도 군대가 스스로 만들기가 얼마나 어렵고, 5분만 서 있어도 멀미가 나는 거친 바다에서 군사 훈련하기가 얼마나 어렵고, 고립무원에 처한 군사의 사기를 진작시키기가 얼마나 어렵고, 열의 아홉이 겁쟁이인 조선 사람을 데리고 전쟁의 달인 왜적을 상대로 실제로 맞붙어 싸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선조는 조금도 몰랐다. 그까짓 것 육지는 몰라도 바다에서는 조선의 수군이 원래 강하니까(왜적은 섬나라 사람이라 수군이 강하니까 수군을 몽땅 육군으로 만들자는 신립의 말에 귀가 솔깃해 하던 것은 까맣게 잊고!) 임금의 명을 받든 사람이면 도망가는 재주밖에 없는 자든 술김에 뻥뻥 큰소리치는 자든 아무나 지휘해도 무조건 이기는 줄로만 알았다. 출동만 하면 조선수군은 그까짓 것 야만족을 단숨에 일망타진할 줄 알았다.

...
양원(명나라의 총병): 군량이 넉넉해야만 성을 지킬 수 있습니다. 넉넉하지 못하면 3천 명의 군사(남원을 지킬 명나라 군)가 먹을 것을 어떻게 공급하겠습니까?
선조: 만일 3만 명이 반달쯤 먹을 것이라면 계속 대기 어렵겠지만, 3천 명이 먹을 것이라면 어찌 마련하지 못하겠습니까?
양원: 권율과 김응서가 거느린 군사는 얼마나 되며 또 어떤 일을 담당하고 있습니까?
(선조가 이항복을 불러서 물어보더니 대답하였다.)
이항복: 성윤문과 김응서가 거느린 군사가 각각 2천 명이며, 권율은 다만 휘하의 군사들만 거느리고 있고, 여러 장수들이 거느리고 있는 군사들은 좌도와 우도를 합쳐 겨우 1만 여명입니다.
...
임금이 절하는 의식을 하자고 청하니, 양원은 읍을 하고 그만두자고 청하였다. (선조실록 1597/5/8)

이 때는 이순신 장군이 백의를 입고 도원수 권율의 휘하로 가던 중이다. 당신의 목숨보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싸늘한 주검을 보고 펄쩍펄쩍 뛰며 하늘이 노랗게 눈물과 피를 비오듯 쏟다가 죽음보다 못한 삶을 한탄하며 죄인된 몸으로 허겁지겁 장례를 치르고 남으로 남으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길을 재촉하던 때다. 1593년부터 명과 왜의 해괴한 강화회담이 성립되어 4만 명의 명나라 군대는 1만 명만 남고 철수했다가 다시 이 때 6만 명이 들어온다. 그 중 전라도의 요충인 남원에 명나라 군대가 3천 명 주둔하는데,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은 유일한 지역인 호남에서조차 3천 명의 군량미 마련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명나라의 총병이 먼저 알고 걱정한다. 이에 선조는 3만 명은 몰라도 3천 명 정도는 문제없다고 큰소리친다. 여기서 보면 알겠지만, 육군은 조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음에도 다 합해야 1만 명밖에 안 된다. 이나마 그 이태 전 1595년 3월 순찰사 이원익의 건의에 따라 8천 명을 뽑아 규정대로 훈련한 결과이다. 남원에 투입된 조선군은 고작 1천 명!

후에 원균이 조선 전체 군사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수군을 하룻밤 사이에, 노(櫓)야 나 살려라, 도망 간 12척만 빼고 전멸시킨 다음, 왜적은 물밀 듯이 곡창 전라도로 쳐들어오는데, 나는 새도 우수수 떨어뜨리는 조총을 들고 남원을 에워싼 왜군이 무려 5만 명이었다.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삼가 상의드릴 일로 아뢰나이다.
전라좌우도 연해안 열 아홉 고을 안에서 열 고을은 수군에 전속되어 있는데, 변란이 일어난 후부터 육진(陸鎭)의 여러 곳에서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군량을 실어 날라 이미 바닥이 났으며, 좌도 네 고을과 우도 한 고을은 또 스스로 불태워 버린 화를 겪었습니다. 지금 좌우도의 배들 중에서 먼저 모인 것이 전선 110척, 탐색선 110척인데, 이들 배에 타고 있는 사부와 격군을 모두 합하면 무려 17,000명이나 되므로, 1명 당 아침저녁으로 각각 5홉씩만 나누어 주더라도 하루에 먹는 것이 적어도 100여 섬이며, 한 달이면 3천400섬이나 됩니다.
경상우도는 완전히 거덜난 뒤여서 군량을 마련할 길이 더욱 없으므로 믿을 곳이라고는 전라도 열 고을밖에 없는데, 열 고을에 남아 있는 군량도, 피난민 구제용 곡식을 제외하면, 수군에게 공급할 양식으로는 겨우 오월 보름까지밖에 대지 못할 형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그 전에 저 흉악한 왜적들을 소탕하지 못한다면, 그 후의 군량은 마련할 길이 전혀 없으니 참으로 답답하고 걱정스럽습니다. 부디 조정에서 헤아려 조처해 주시기 바라나이다.
(군량을 조처해 주시기를 청하는 장계 1594/3/10)

이 당시는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돌아 수군도 22,000명 정도의 군사가 17,000명으로 줄어 들었다. 군사 숫자는 줄었지만, 군인이든 농민이든 죽은 사람도 많고 병든 사람도 많아서 농사 짓기가 몹시 어려웠다. 더군다나 이 때는 춘궁기인데, 열 고을은 수군에게만 군량미를 공급해야 함에도 육군이 제멋대로 징발해 가는 바람에 이순신 장군이 도서 지방에서 아무리 장군 스스로 마련한 둔전에서 반은 농민에게 주고 반은 거둬서 충당했지만 군량미가 태부족했다. 최소한 하루에 두 끼는 먹어야 육체의 힘만이 아니라 정신의 힘도 살아나는데, 두 달 정도의 여분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순신 장군은 놀고먹으며 엉터리 명령이나 아닌 밤에 홍두깨처럼 마구 내던지는 조정에 군량미를 부탁한다. 명나라 군대에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군량미를 제공했지만, 선조가 육군도 아닌 조선의 수군에게 군량미를 제공했을 리가 없다. 이순신 장군은 조정에서 군량미를 보낼 것이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연해안 열 고을만이라도 제발 육군에서 뜯어가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달라고 엎드려 부탁한다. 또한 군량미를 마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아시고 앞으로는 육군도 전국에 둔전을 만들어 군량미를 자체 조달하라고 간접적으로 알려 준다. 그 전에 둔전에 관해서는 자세히 상소한 적이 있었다(1593/11/17).

선조 이하 조정 대신은 기적만 바라고 하늘만 쳐다보고 발만 동동 구를 뿐 이런 이순신 장군의 제안은 거들떠보지도 않아, 조선 육군은 다 합해야 고작 1만 명의 군대밖에 유지하지 못한다. 후에 조명 연합군을 결성하여 남해안의 왜적을 싹쓸이하려고 장한 계획을 세울 때도 명나라는 4만 명 조선은 1만 명이었다(1597/10). 주객이 전도된 전쟁이었다. 명나라는 이런 조선을 경멸하고 제대로 싸울 생각을 안 한 건 지극히 당연하다.

군인은 어떤가? 심지어 이순신 장군은 거지도 군인으로 모셔오기도 했다.

...
정월부터 2, 3, 4월까지 3도의 사망자 수와 현재 앓고 있는 환자 수는 전라좌도가 각각 406명과 1373명이고, 우도가 각각 603명과 1878명, 경상우도가 각각 344명과 222명이고, 충청도가 각각 351명과 286명으로 3도의 사망자 수 합계는 1704명이고, 현재 앓고 있는 자는 모두 3759명이나 됩니다.
...
형편상 어쩔 수 없어서(고을 수령들이 협조하지 않아서) 떠돌아다니며 얻어먹는 거지 무리들을 끌어 모아서 격군에 충당하였더니, 오랫동안 굶주렸던 사람들이어서 크게 앓지 않아도 돌아서면 곧바로 죽어버리니, 더욱 통분한 일입니다.
...(징병 업무를 태만히 하는 수령들을 처벌해 주시기를 청하는 장계 1594/4/20)

육군이 우선 징발해 가고 그나마 고을 수령들은 수군에 징발되는 것을 고의적으로 가로막고 있다. 틀림없이 뇌물을 받았을 것이다.

일본에 잡혀가서 성리학을 전하고 돌아온 강항의 <<간양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신이 엎드려 우리나라의 형편을 살펴보건데 평소에 인재를 기른 일도 없고, 백성을 가르친 일도 없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농민들을 긁어모아 싸움터로 몰아세우니, 그나마 권리나 돈푼이나 있으면 뇌물을 먹이거나 권력을 떠세하는 등 갖은 방법으로 다 내빼고 헐벗고 힘없는 백성들만 싸움터로 내몰리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한 사람의 장군이랬자 제 직속군이 없고 졸병들에게도 통솔자가 일정하지 않습니다. 한 고을 백성으로 절반은 순찰사에게 속하고 절반은 절도사에게 속하기도 하며, 한 졸병의 몸으로 아침에는 순찰사에게 붙었다가 저녁 녘에는 도원수를 따르기도 합니다. (이을호 역)

그러면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스스로 힘으로 군대를 양성했을까. 이것도 절대 기적이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티끌만한 실마리라도 있으면 그것을 놓치지 않고 오합지졸을 모아 세계최강의 군대로 양성했다. 첫째는 도서(島嶼)의 둔전법이고, 둘째는 질병에 의하지 않는 한 군인들을 잘 먹이고 잘 훈련하여 전투마다 이겨 일단 들어온 군대는 늘면 늘지 줄지 않게 했던 것이다. 전라도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이순신 장군만 믿고 몰려온 사람들 중에 장정은 군인으로 삼고 나머지는 농사를 짓거나 미역을 따거나 소금을 굽거나 물고기를 잡게 하여 모든 걸 자체 조달했던 것이다. 경상도 연안에서 무려 3년치의 식량을 확보해 두고 있었던 왜군과 크게 대조된다.

...
명나라 사신이 와서 철병이 지연되는 것에 대하여 그 이유를 묻자 행장은 대답하기를, '관백이 보낸 각 군영의 식량은 사람 숫자로 계산하여 3년 동안 먹을 것을 마련해 놓은 것인데, 군사를 동원시킬 때에는 관백이 보낸 식량을 먹게 하였으나, 주둔하고 있는 동안에는 각 장수와 군사가 자체로 마련해서 쓰도록 했던 것입니다. 현재 관백이 보낸 여유 식량의 수량이 너무 많아서 요즘 그것을 실사하느라 지연되었습니다.
... (선조실록 1595/7/24)

반면에 조선은 일본군이 남해안으로 물러간 후에도 부자와 형제끼리 잡아먹기도 하는 생지옥을 연출했다. 그러니 군량미를 어찌 마련하랴. 이순신 장군이 실시하고 건의한 둔전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전시 중 한시적으로 전국적으로 실시하기만 했어도 명나라의 힘을 빌 것도 없이 스스로 힘으로 왜군을 몰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최홍원: 굶주린 백성들이 요즘 더 많이 죽고 있습니다. 살은 다 베어 먹고 백골만 남은 것이 성 밖에 쌓였는데 그 높이가 성의 높이와 같습니다.
유성룡: 죽은 사람의 고기만 먹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도 서로 잡아먹고 있는데도 도적을 잡는 군사들은 전혀 이를 금지하지 못합니다.
이덕형: 아버지와 아들, 형제간에도 서로 잡아먹는데, 양주 백성들은 떼를 지어 도적이 되어 사람을 잡아먹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조치를 취하여 살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다음에야 서로 죽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금지하기 어렵습니다. (선조실록 1594/3/20)

패전의 달인 원균은 선조와 작당하여 이순신 장군을 모함하여 꿈에도 소원인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후에 한두 달 만에 군인을 반이나 뇌물 받고 제대시킨다. 그리고는 기껏 한다는 소리가 30만 대군으로 육지에서 해안의 왜군을 바다로 쓸어 버리면, 자신이 바다에서 호응하여 왜적의 씨를 말리겠다고 큰소리 친다. 이에 원균이라면 꽃 본 듯이 무조건 이뻐한 선조지만 너무 어이없어 피시식 웃는다.

3월 29일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원균(元均)이 서장(書狀)을 올리기를,
“신이 해진(海鎭)에 부임한 이후, 가덕도(加德島)· 안골포(安骨浦) · 죽도(竹島) · 부산(釜山) 을 드나드는 적들이 서로 거리가 가까워서 성세(聲勢)는 서로 의지되나 그 수가 수만에 불과한데도 병력도 외로운 듯하고 형세도 약합니다. 그중 안골포· 가덕도 두 곳의 적은 3∼4천도 차지 않으니 형세가 매우 고단합니다. 만약 육군이 몰아친다면 주사(舟師)의 섬멸은 대쪽을 쪼개듯이 쉬울 것이요, 그 뒤로 우리 군사가 전진하여 장수포(長藪浦) 등처에 진을 친다면 조금도 뒤를 돌아볼 염려가 없게 됩니다. ...
우신(愚臣)의 망령된 생각에는 우리 나라 군병이 그 수가 매우 많아서 노쇠한 자를 제하고 정병(精兵)을 추리더라도 30여 만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늦봄인데다 날씨가 가물어서 땅이 단단하니 말을 달리며 작전을 할 때는 바로 이 때입니다. 반드시 4∼5월 사이에 수륙 양군을 대대적으로 출동시켜 한 번 승부를 겨루어야 합니다. 만약 시일을 지연시키다가 7∼8월 께 비가 개지 않아 토지가 질척거리면 기병이나 보병이나 다 불편할 것이니 이 때는 육전(陸戰)도 되지 않을 듯합니다. 신이 이른바 4∼5월 안에 거사하자는 것도 이를 염려하여서입니다. 그리고 행장(行長) · 요시라(要時羅) 등이 거짓으로 통화(通和)하는 것이므로 그 실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 때를 타고 함께 공격하여 남김없이 섬멸한다면 일분의 수치나마 씻을 수가 있겠습니다. 조정(朝廷)에서 속히 선처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선조실록 1597/4/19)

1592년에는 제 말로는 왜선 10여 척을 깨뜨렸다고 주장하지만, 실지로는 싸움 한 번 않고(왜냐하면 당시 관할 지역이 전라좌수영보다 2.4배되는 경상우수영에는 전라좌수영의 전선 24척보다 두 배 이상 되는 53척의 전선이 있었는데, 만약 그가 싸웠다면 노 젓는 사람 몇 명이랑 달랑 3척만 끌고 도망 다녔으니까 大敗도 그런 대패가 없다. 따라서 그런 주장은 앞뒤가 전혀 안 맞는다.) 경상우수영의 군사 1만 여명, 삼도수군 2만5천 여명을 수장시킨 재주밖에 없을 뿐 단 100명의 군대도 직접 양성해 본 적이 없는지라, 왜군 16만 명군 6만 조선육군 1만 명 다 합한 것보다 많은 30만을 한두 달 안에 바로 양성할 수 있다는 기적을 아무렇지도 않게 언제든지 명령 한 마디면 기적을 낳을 수 있는 선조에게 부탁한다.

지극히 멀쩡한 사람들 중에 아직도 한국에는 원균 명장설을 태연히 주장하는 자들이 숱한데, 사료를 비판적으로 읽는 능력이 어찌 그리도 부족한지 모르겠다.

이순신 장군은 식량이든 군대든 무기든 전선이든 하나에서 열까지 마련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식량과 물품을 조정이나 통신사에게 올려 바쳐야 했다.

흐림. 여러 가지 장계와 단오절 진상품을 봉해 올렸다. <<난중일기 1595/4/15>>

삼가 아뢰나이다.
지난 9월에 순천에 사는 사람 정사준은 아직 상제의 몸으로 있으면서 임용된 사람으로서, 같은 고을의 의로운 선비 교생 정빈 등과 약속하고 각각 의연곡을 모아 한 배에 싣고 행재소로 올라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본영 및 수군 관할의 각 고을 순천, 광양, 낙안, 흥양 등 고을 수령들이 따로 봉하여 진상하려는 물건 등을 각각 물목을 기록하여 정사준에게 주어서 올려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서해 물길의 바람세가 좋지 못하여 정사준이 중도에 추위에 상하여 병세가 중해져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서 되돌아 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동생으로 신의 군관으로 있는 정사횡으로 하여금 가지고 올라가도록 하면서, 신이 따로 봉하여 진상하는 장편전 등 물건과 탄신일, 동지, 설 진상물들도 정사횡과 본영 진무 김양간에게 주어서 의연곡 실은 배에 같이 실어 올려 보냈습니다.
순천부사 권준이 봉하여 따로 진상하는 것까지도 물목을 만들어 같은 배에 실어 보냈습니다. 광양, 흥양, 낙안 등의 고을 수령들은 각각 자기 고을 배에 싣고 각자 모집한 사람들에게 주어서 올려 보냈습니다. <<군량과 진상품을 실어 보내는 장계 1592/12/25>>

맑음. 체찰사의 전령에, 황 첨지가 이제 명나라 사신을 따라가는 상사가 되고 권황이 부사가 되어 근일에 바다를 건너가려고 하니, 타고 갈 배 3척을 정비하여 부산에 와서 정박해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 <<난중일기 1596/7/10>>

맑음. 바다를 건너갈 격군들의 군량으로 백미 20섬, 중미 40섬을 차사원 변익성과 수사 군관 정존극이 받아갔다. <<난중일기 1596/7/12>>

식량이 얼마나 귀했는지, 관리 집안의 경우 100섬을 바치면 동반(문관)의 정3품 벼슬을 주던 시절이다(선조실록 1593/2/16). 문관 정3품은 무관인 종2품 3도 수군통제사보다 사실상 높았다. 눈물 반 한숨 반으로 살아가던 첩의 아들도 100섬을 바치면 동반의 6품 벼슬을 받았다. 그렇게 따지면 한 달에 3천 내지 4천 섬을 자체 조달한 이순신 장군은 그것만으로 평생 영의정이 되고 그 자손도 대를 이어 평생 영의정이 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선조는 이런 이순신 장군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공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조정의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순신 장군이 홀로 군대를 양성하고 식량과 무기까지 다 마련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동서고금을 통틀어 유일무이하다는 것은 아예 생각도 못하고, 여차하면 임금의 속마음을 읽고 이순신 장군의 기적 아닌 기적을 시기하여 헐뜯을 생각에 골몰했다.

입이 아닌 손과 발로 일하는 사람은 수치에 정확하다. 십만 대군, 백만 대군이란 말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는다. 이순신 장군처럼 한 자리 숫자까지 병으로 죽은 병사와 앓고 있는 병사의 숫자를 파악한다. 식량이 얼마나 필요하며 남은 식량으로는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도 정확하게 안다. 먹지 않고는 아무리 용감하고 지혜로운 군대도 싸울 수 없고, 무기가 제대로 갖추지 않고는 아무리 용감하고 지혜로운 군대도 싸울 수 없고, 평소 피나는 훈련을 하지 않고는 아무리 용감하고 지혜로운 군대도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소상히 안다. 인간사에 기적은 절대 없다는 것을 입이 아닌 손과 발로 일하는 사람은 잘 안다. 기적은 없고 다만 기적처럼 보이는 일만 있다는 것을 입이 아닌 손과 발로 일하는 사람은 잘 안다. 한두 번의 요행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제대로 준비를 갖춘 사람과 부딪치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는 것도 입이 아닌 손과 발로 일하는 사람은 잘 안다.

대한민국 사람이면 대부분 이순신 장군을 무척 존경하지만, 그가 한 일이 하나같이 기적적인 일이라 도무지 '인간 같지 않아서' 그저 하늘이 보낸 신장(神將)만 같아서 사람들은 배울 생각은 않고 그냥 찬탄만 하거나 배배꼬인 마음으로 괴상한 논리와 망측한 자료를 들이대어 헐뜯는 데 야릇한 쾌감을 맛본다. 이순신 장군은 꿈에도 기적을 믿지 않았다. 대신 호랑이 굴에 갇힌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고 동굴의 현실 안에서 방법을 찾아내어 그것을 극대화하여 호랑이를 일망타진하는 기적의 기적을 낳았던 것이다.
(2009.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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