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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February 06, 2009

비서 한 명 없었던 이순신 장군(5)-최성재

문서수발할 개인비서 1명 없던 삼도수군통제사
최성재

이순신 장군은 일인십역(一人十役)하신 분이다. 이렇게 하면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더라도 실수가 있게 마련인데, 놀랍게도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특히 최고지휘관으로서 제일 중요한 능력인 판단력이 갈수록 예리해져 아무리 위급한 상황에서도 적의 간담은 서늘하게 하고 아군의 가슴은 설레게 만들었다. 대신 당신의 몸이 견뎌내질 못했다. 통음(痛飮)하고도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혀 한 번 꼬부라지지 않는 타고난 건강 체질에 무의식까지 맑은 경이적인 정신력을 소유했지만, 수시로 아팠다. 전투 중에는 엄청난 정신력으로 이를 다 이겨냈지만, 비교적 안전한 평시에는 인사불성이 되도록 아플 때가 많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전혀 쉬지 못했을 것이고 큰 판단착오를 일으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식으로라도 강제로 쉬지 못했다면 과로사했을지도 모른다.

백성과 군사를 위해서는 조정에 여러 가지 건의도 하고 부탁도 했지만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리 어려워도 아쉬운 소리를 않던 분이었으나, 마침내 이순신 장군은 도무지 철부지 도련님 같은 선조에게 1593년 11월 17일 문서 수발할 개인비서를 한 명 청한다. 이순신 장군은 산더미 같은 공문과 장쾌하고 절절한 천하명문 장계를 일일이 직접 썼지만(제일 긴 것은 6천여 자나 됨), 이제 명과 왜의 강화회담으로 전쟁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계속 그런 일까지 다하다가는 더 큰 일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을 절감했던 모양이다. 저간의 사정을 살펴보면, 이 글 속에는 당신의 건강을 너무 해쳐서 악적 풍신수길만 신바람 나게 해줄 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숨어 있다.

신이 이미 통제사의 책임을 겸하여 삼도 수군의 장령들을 모두 부하로 거느리게 되어 감독하고 지휘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신은 영남 바다에 나와 있어서 글만으로 먼 길 사이를 연락하기 때문에 많은 사무가 신속히 실행되지 못합니다. 도원수와 순찰사가 머무는 곳에 결재를 받아야 할 일도 많은데 거리가 서로 멀어서 더러 기한에 미치지 못하여 일마다 어긋나게 되므로 못내 염려하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입니다만, 문관 한 사람을 순변사의 준례대로 종사관이라 일컫고 왕래하며 의논도 주고받고, 소속 연해안 여러 고을을 두루 다니며 감독도 하고 일도 처리하고, 사부(射夫)와 격군(格軍)과 군량도 계속하여 마련하게 한다면, 앞으로 닥쳐올 큰 일을 만분의 일이라도 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여러 섬의 목장 중에 노는 땅이 있어 농사 지을 만한 곳이 있는지도 조사해 보아야만 하겠으므로 감히 이렇게 품달합니다. 조정에서는 두루 헤아리셔서 만일 사리와 위신에 어긋남이 없다면, 장흥에 사는 전 부사(府使) 정경달(丁景達)이 마침 자기 집에 있다고 하니 특별히 임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신으로서 종사관(從事官)을 임명해 주시기를 청하는 장계 1593/윤11/17)

종사관은 원래 포도청에만 있던 문관직으로 종6품이었다. 임진년에 상주에서 참패한 이일이 후에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지방을 돌아다니며 각 도에서 육군의 최고 장수인 좌우병사와 수군의 최고 장수인 좌우수군절제사를 감독하고 지휘할 때, 조정에서 종사관을 붙여 주었다. 이순신 장군은, 절제사보다 한 급 높은 통제사는 직급으로 보아 순변사와 동일하므로 종사관을 한 명 붙여 주는 것이 명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전거(典據)를 스스로 제공하여 쑥덕공론만 무성한 조정의 입을 간단히 봉해 버린다. 또한 아예 그에 합당한 사람도 추천한다. 유능한 사람이 쉬고 있으므로 그 사람을 쓰겠다고 한 것이다. 부사라면 종4품인 군수보다 두 직급 높은 종3품이다. 종6품 종사관보다는 6직급 높은 자리다. 직급을 올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보다 6단계 낮은 것을 요구하니까, 조정에서는 반대할 것이 없다. 그러나 실지로는 임명만 되면 종2품인 통제사의 암행어사와 마찬가지니까, 3도의 수군 연해안에서는 정3품의 권한이 있다. 정경달에게도 사실 체면이 손상되지 않는다. 이처럼 이순신 장군은 짧은 문장 속에서 누구에게도 누가 되지 않는 묘수를 찾아 설득한 것이다.

순변사는 군사도 없이 돌아다니는데도 종사관을 딸려 주었지만, 이순신 장군은 조선 전체 군사의 3분의 2인 약 2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명장으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도 불구하고 간단한 공문들을 처리하고 당신이 구술하거나 초안을 잡은 글을 정서할 개인비서 한 명 없었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그 후 아무 소리도 않고 바로 정경달을 통제사의 종사관으로 임명한 모양이다. 아쉬운 것은 왜 한두 명 더 딸려 주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문서 수발 외에 군인 징발과 식량 조달, 둔전(屯田) 관리 이 세 가지 일을 더 알려 준 것은 최대 4명 최소 2명이 더 필요하다는 것인데, 달랑 한 명 정경달만 임명한 것이다.

웃기는 것은 후에 원균은 경상우수사에서 충청병사로 영전되면서(1594/12/1 수사와 병사는 직급이 같았지만 육군이 실세였음), 제멋대로 규정을 만들어 자격 미달의 인간을 종사관으로 스스로 임명했다가 사헌부의 질책을 받았다는 것이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각도의 병사(兵使)에게는 본래 종사관(從事官)이 없는 법인데, 충청병사(忠淸兵使) 원균(元均)은 전(前) 군수(郡守) 최덕순을 종사관의 명칭을 붙여 수행시킬 것을 계청하여 거느리고 갔으니, 이는 법규에 어긋나는 처사로서 지극히 잘못된 것입니다. 덕순은 바야흐로 도내에 우거(寓居)하고 있다가 연줄을 이용해 간청하여 이 소임을 맡게 되었으나,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열읍(列邑)에 전식(傳食)하므로 많은 폐단을 끼치고 있습니다. 원균을 추고(推考)하고 최덕순의 종사관 칭호를 없애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사는 추고할 수 없다. 칭호를 없애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 사신[史官]은 논한다. 최덕순은 음관(蔭官)으로서 추솔하고 비루하여 한 가지 점도 취할 것이 없다. 임진란 때 가평군수(加平郡守)로 있으면서 우리나라의 피난민을 죽여서 머리를 깎고 이마에 문신을 새겨 왜인의 형색을 만들어 행재소(行在所)에 거짓으로 보고하고 상공(上功)을 노리다가 여러 사람이 목격하여 정상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그에게 형이 가해지지 않았으니, 통탄함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대관(臺官)의 이 논란 역시 너무 가벼운 것이다. 】 (선조실록 1596/1/12)

하긴, 선조가 원균의 간을 잔뜩 키워 주었다. 원균이 조정의 쓰레기들과 작당하여 이순신 장군을 모함하자 이순신 장군이 너무 황당하고 갑갑하여 사직(辭職)을 청함에 어쩔 수 없이, 선조는 원균을 경상우수사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데, 벌을 주는 게 아니라 곧장 안전하고 '물 좋은' 후방으로 영전시킨다. 여기서 원균은 얼씨구나, 탐관오리의 본색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에 앞서 원균은 선조한테 말 한 마리 내려보내 주소서, 라고 당당히 청탁한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충청병사(忠淸兵使) 원균(元均)은 사람됨이 범람(泛濫)하고 게다가 탐욕 포학하기까지 합니다. 5∼6월에 입방(入防)한 군사를 기한 전에 역을 방면하고 그 대가로 씨콩을 거두어 다 농사(農舍)로 실어 보냈습니다. 또 무리한 형벌을 행하여 잔혹한 일을 자행하여 죽은 자가 잇달고 앓다가 죽는 자도 많아서 원망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온 도에 가득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통렬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철원부사(鐵原府使) 심원해(沈源海)는 사람됨이 탐욕스럽고 용렬합니다. 환자곡(還上穀)의 수효를 속여 보고하여 사사로이 사용하였으며, 소를 잡아 민간에서 재리(財利)를 꾀하였습니다. 심지어 형을 위해 경내에 집을 경영하고 전토를 널리 차지하기까지 하였으니, 듣고 보는 이들이 경악하고 있습니다. 파직하소서.
봉산군수(鳳山郡守) 박응인(朴應寅)은 전에 연안부사(延安府使)로 있을 때에 백성에게 거두어들이는 것이 한이 없고 비용이 너무 과람하여 길가의 거읍(巨邑)이 탕진되어 텅 비게 하였으니, 체차(遞差)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원균의 사람됨은 범람하지 않다. 이런 시기에 명장을 이처럼 해서는 안 된다. 윤허하지 않는다. 나머지(두 사람)는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선조실록 1595/8/15) **원균만 용서함**

상(上: 선조)이 승정원에 전교하였다.
“원균(元均)의 장계(狀啓)를 살펴보니 전마(戰馬)를 얻고자 하였다. 이번에 내구마(內廐馬) 2필을 보내 1필은 원균에게 보내고 1필은 군영에 두고 길러서 전쟁에 쓰도록 하라.”
(선조실록 1595/4/3)

다시 1년 후 선조는 전라병사로 떠나는 원균에게 미리 은총을 내려 말 한 필을 하사한다. 고금의 명장 이순신에게는 고양이 한 마리 내려보내지 않은 선조가 이렇게 원균이라면 간이라도 빼 주고 싶어했다. 원균은 왕이 친히 하사하는 말을 타고, 얼마나 기세등등했을까. 백성의 고혈을 얼마나 우려먹었을까.

전라 병사 원균(元均) 이 배사(拜辭)하니, 상이 일렀다.
“경(卿)이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하여 지성스러운 충성과 용맹이 옛 사람도 비할 자가 드물기에 내가 일찍이 아름답게 여겨 왔지만, 돌아보건대 아무 것도 보답한 것이 없었다. 이번에 또 멀리 떠나게 되어서 친히 접견하고 전송하려 했었는데, 하필 기운이 편치 못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 내구(內廐)의 양마(良馬) 한 필을 내려 나의 뜻을 표하니 경은 받으라.” (선조실록 1596/8/11)

선조는 글을 잘했다. 명나라에서 온 사람도 선조보다 글을 잘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속에 든 것이 온통 시샘, 편벽, 사대주의, 교만, 냉혹 등이어서 내용 없는 미사여구밖에 몰랐다. 이순신 장군이 장계를 100편(오늘날 전하는 것은 78편) 이상 올려 보냈음에도 거의 읽지 않았던 것 같다. 읽어도 공허한 시문에만 능했던지라 당대 최고 문장가의 글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선조: 이순신이 글을 잘하는가?
유성룡: 예. (선조실록 1597/1/27)

이순신 장군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선조가 조정 대신을 모아 하루 종일 윽박지르던 중 불쑥 경멸하듯이 내뱉은 말이다. 심지어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종6품인 일개 문관보다 하찮게 보았다. 왜군이 100리 밖에만 다가와도 공포에 질려 온갖 추태를 다 부린 것도 까맣게 잊고 고려 시대에 아비 김부식의 위세만 믿고 무장 정중부의 수염을 불로 태우던 새까만 문관 김돈중만큼이나 무인 천시 사상을 갖고 있었던 임금이었다. 지난 수십 년간 소련과 중공의 앞잡이로서 조국해방이란 황당무계한 논리로 동족을 3백만 학살한 김일성은 은유적으로 찬양하면서, 김정일의 핵실험에는 자폐증상의 민족적 긍지를 느끼면서, 민주라는 미명하에 군인 출신 대통령이라면 별의별 황당무계 꼬투리를 끌어대며,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침을 뱉을 정도로 증오하는 자들의 핏속에는 바로 선조와 김돈중의 DNA가 고스란히 담겨 있을 듯하다.

...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의 호령이 수령에게 시행되지 않고, 여러 장수가 서로 화합하지 않는다고 하니, 명망이 있는 문관으로 종사관을 삼아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전 부사(府使) 정경달(丁景達)이 내려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명망이 있는 문관을 정하여 보내야 열읍(列邑)을 호령할 수 있을 것이며 군중(軍中)에 외람한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를 꺼려 진정이 될 것이다. 병판(兵判)의 뜻은 어떠한가 ?”
하니, 심충겸이 아뢰기를,
“이 계책이 매우 타당합니다.”하였다. (선조실록 1594/6/18)

이순신 장군이 참 어렵게 특별히 청원함에 다들 그 명쾌한 논리와 깔끔한 문장에 꼼짝 못하고 종사관을 내려보낸 지 불과 반 년 남짓한 시간이 흘렀는데, 그새 선조는 까맣게 잊고, 해괴한 이유를 들어 이순신 장군의 일거수일투족을 자신에게 고자질해 줄 미관말직 문관 한 명을 내려보내려고 한다. 이에 영의정 유성룡이 이미 종사관을 내려보냈다고 상기한다. 그럼에도 선조는 고집을 피우며 군무의 최고 책임자인 병조판서에게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안이 어떠냐고 다그친다. 순전히 임금의 총애로 막중한 직책의 병조판서가 된 듯한 심충겸이란 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좋다고 '매우'란 수식어를 붙여 맞장구를 친다. 이것이 당시 만인지상의 안목이었고 조정의 수준이었다.
(2009.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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