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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February 14, 2009

하느님이 우리 민족을 보우하사 이순신을 보내심 (6) - 최성재

거제도 대신 한산도, 한산도 대신 고금도
최성재

1591년 2월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1년 2개월 전에 되돌아보면 새삼 아찔한 인사이동이 있었다. 그 해 2월 4일자 선조실록을 보면, 원래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이는 원균이었다. 사간원에서 인사고과에서 하(下) 등급을 받은 자를 품계를 뛰어넘어 국가의 안위를 담당할 자리에 앉힐 수 없다고 거세게 항의하자, 선조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임명을 취소한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원균(元均)은 전에 수령으로 있을 적에 고적(考積)이 거하(居下)였는데 겨우 반년이 지난 오늘 좌수사에 초수(超授)하시니 출척권징(黜陟勸懲)의 뜻이 없으므로 물정이 마땅치 않게 여깁니다. 체차를 명하시고 나이 젊고 무략(武略)이 있는 사람을 각별히 선택하여 보내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辛未/司諫院啓曰: “全羅左水使 元均 , 前爲守令, 考績居下,  過半年, 超授 帥, 殊無黜陟勸懲之意, 物情未便。 請命遞差, 年少有武略人, 各別擇遣。” 答曰: “依啓。”
(선조실록 1591/2/4)

이순신 장군은 그 뒤에도 바로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게 아니었다. 유극량이 원균의 뒤를 이었다. 이번에는 사헌부가 가만있지 않았다. 유극량은 도무지 위엄이 없어서 장군의 재목이 될 수 없다고 길길이 뛰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선조가 미소를 머금고 이미 임명을 취소했다고 대답한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전라좌수영은 바로 적을 맞는 지역이어서 방어가 매우 긴요하니 주장(主將)은 불가불 잘 가려서 보내야 합니다. 새 수사(水使) 유극량(劉克良)은 인물은 쓸 만하나 가문이 한미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겸손합니다. 그리하여 군관(軍官)이나 무뢰배들과도 서로 '너니 내니'하는 사이여서 체통이 문란하고 호령이 시행되지 않습니다. 비단 위급한 변을 당했을 때에만 대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방어하는 군졸을 각 고을에 보낼 때에도 틀림없이 착오가 생길 것이니, 곤외( 外: 水軍)의 일을 맡기는 것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체차시키소서.
...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수사는 이미 체직하였다.”

司憲府啓曰: “ 全羅 左水使正當受敵之地, 防禦極緊, 主將不可不極擇以送。新水使 劉克良, 人物則可用, 而自以門微過恭。 至與軍官行僞之輩, 相爲爾汝, 體統紊亂, 號令莫施。 非徒緩急之間, 恐難爲備, 各官防卒之送, 必至失 , 付以 寄, 極爲可慮。 請命遞差。
(선조실록 1591/2/8)

그 후에야 비로소 이순신 장군이 진도군수로 부임하던 길에 전라좌수영으로 발길을 돌리게 된다. 오늘날 못지않는 조선시대의 인사 난맥상을 여기서 엿볼 수 있는데, 하여간 불과 열흘도 안 되는 사이에 임금 이하 조정이 전쟁의 암운을 막연히 느끼기 시작하면서도 그저 벼슬자리 나눠 먹기에 몰두하던 중에, 경상좌수영과 경상우수영에 이어 왜군이 몰려올 바다의 세 번째 길목을 지키는 으뜸 장수로 3명 중 2명이 축하 인사를 받다가 우습게 족보에만 가문의 영광을 남기고, 마지막으로 뇌물과 연줄을 초개같이 여기는 바람에 별 볼일 없고 힘만 드는 자리에만 머물러 그 당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한 인물이 1년 2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불철주야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가 조선의 2백년 사직을 구한다. 홀로 구한다.

전쟁이 일어나고 7년이 다 되도록 임금 이하 조선 전체가 불과 1만 명의 정예병도 양성하지 못했지만, 이순신 장군은 도움을 받기는커녕 이리저리 군사든 식량이든 빼앗기고 자의반타의반 갖다바치고 그것도 모자라 온갖 황당한 모함과 시기(猜忌)에 시달리면서 16세기 현재 세계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2만 명의 무적함대를 양성하여 말 그대로 홀로 나라를 구한다. 우의정 유성룡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지만, 그 뒤에는 국가의 운명이 걸렸을 때는 이순신 장군의 꿈에 꼭 나타나 귀신 곡하게 도와 준 신인(神人)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느껴진다.

1591년 2월 13일 인사 발령의 말석을 차지한 이 융통머리 없던 정의파가 그토록 중요한 일을 해낼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전쟁 기간 대부분을 영의정 신분으로 사악한 철부지 선조를 때로는 일깨우고 때로는 꾸짖고 때로는 그에게 아첨도 하며 민심을 간신히 얼키설키 모은 유성룡도 이순신 장군이 그 정도로 유능한 인물일 줄은 몰랐을 것이다. 훗날 유성룡은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던 바로 그 날에 영의정의 자리에서 쫓겨나서 고향 안동 하회마을로 내려가는데, 그 후로 선조가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한 발짝도 북쪽으로 내딛지 않았다.

정사(政事)가 있었다. 심대(沈岱)를 사간에, 이홍(李珙)을 강원도 도사에, 이경록(李慶祿) 을 나주목사에, 성윤문(成允文)을 갑산 부사에 제수하였다. 이비(吏批)에게 전교하였다.
“전라 감사 이광(李洸)은 지금 자헌대부에 가자하고, 윤두수(尹斗壽)는 호조판서에, 이증(李增)은 대사헌에, 진도군수 이순신(李舜臣)은 초자(超資)하여 전라도 좌수사에 제수하라.”

○庚辰/有政。 以 沈岱 爲司諫, 李珙 爲 江原 都事, 李慶祿 爲 羅州 牧使, 成允文 爲 甲山 府使。 傳于吏批曰: “ 全羅 監司 李洸 , 今加資憲, 以 尹斗壽 爲戶曹判書, 李增 爲大司憲, 以 珍島 郡守 李舜臣 , 超資除 全羅道 左水使。”
(조선실록 1591/2/13)

그러면 이 때 왜 유성룡은 이순신 장군을 전라도우수사나 경상우수사로 추천하지 못했을까. 전라우수영은 15관(官 고을) 12포(浦 해안고을)로 전라좌수영 5관 5포보다 약 3배 크고, 경상우수영은 8관 16포로 전라좌수영보다 2배 반이나 된다.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은 이순신 장군의 장계에 각각 5관 5포, 15관 12포란 말이 나오지만, 경상우수영에 대해서는 그런 말이 없다. 최석남은 8관 16포라고 추정하고 김종대는 <<경국대전>>에 그렇게 쓰여 있다고 한다.) 경상좌수영도 크기가 경상우수영과 비슷했던 것 같다.
1589년 1월 21일자 선조실록을 보면, 비변사에서 품계를 건너뛰어(不次採用) 유능한 무관을 추천하라고 하자, 총 37명이 추천되는데, 이순신은 우의정 이산해와 병조판서 정언신으로부터 공히 서열 3위로 복수 추천 받는다. 추천인 가운데 이산해가 가장 지위가 높았는데, 그는 오랫동안 이조판서의 직을 맡았기 때문에 누구보다 인재에 대한 자료를 많이 갖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정언신은 군무의 총책인 병조판서였다. 정언신은 그로부터 열흘 후인 1589년 2월 1일 우의정으로 발탁된다. (이 때 유성룡은 병조판서가 된다.) 다른 누구보다 이 두 사람으로부터 추천 받았다는 것은 이순신 장군이 함경도에서 근무할 때의 무능한 상관이자 후일 상주에서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줄행랑 놓는 이일에게 모함을 받아 백의종군한 후 크게 공을 세워 명예를 회복하고 집으로 돌아와 낙동강 오리알처럼 아무 공직도 없이 쉬고 있었지만, 무인 이순신의 인품이나 능력이 빼어나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이 함경도의 조산만호로 근무하던 때, 정언신은 함경도 순찰사이자 군사 총책으로서 함경도 북병사 이일의 상관이었다. 그는 자세히 조사해 본 후 이순신이 공을 세우고도 모함 받았다는 것을 알고 이순신의 1차 백의종군 시에도 조산만호의 직을 그대로 갖도록 배려했다. 참고로 이 때 원균은 어느 누구의 추천도 받지 못했다. 원균을 두둔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대로 그가 함경도에서 맹활약했다면 왜 추천 받지 못했을까. 아마 그것도 원균의 친척인 윤두수 무리들이 지어낸 말이 아닌가 한다.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강력한 추천을 받고도 아무런 직위도 받지 못한다. 선조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이순신이 모함 받았다는 것을 안 모양이다. 그래서 그로부터 6개월 후 하삼도(下三道)의 병마절제사(병사)와 수군절도사(수사)에 대한 비변사의 건의에 대해 답하는 중에 특별히 이순신을 따로 거론하며 중용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한다. 이 때 이순신은 전라 순찰사 이광의 특별 상주(上奏)로 그의 군관 겸 종4품 조방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사간원에서는 이순신이 7품계를 건너뛴 발령을 두고 불과 3일 만에 들고 일어난다. 이에 대해 선조는 헛소리 말라고 간단히 제압한다. 이틀 후에 또 사간원이 쫑알거린다. 이 때도 선조는 면박을 주어 그들의 입을 막는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하였다. (선조실록 1591/2/16)

사간원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경력이 매우 얕으므로 중망(衆望)에 흡족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인재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어떻게 현령을 갑자기 수사(水使)에 승임시킬 수 있겠습니까. 요행의 문이 한번 열리면 뒤 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빨리 체차시키소서. 나주(羅州)는 남쪽의 거진(巨鎭)으로 본시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로 이름난 곳인데 변경(邊境)에 일이 생기면 원수(元帥)는 영(營)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이웃 고을 수령과 본주(本州)의 판관들이 모두 무변(武弁)인 만큼 군대를 이끌고 적을 방어하는 데 사람이 없는 것을 걱정할 것 없습니다. 목사 이경록(李慶祿)을 체차하고 재략이 있는 문관을 각별히 골라 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순신에 대한 일은, 개정하는 것이 옳다면 개정하지 어찌 않겠는가. 개정할 수 없다. 나주 목사는 천천히 발락(發落)하겠다.”
하였다. (선조실록 1591/2/18)

최소한 1589년 1월에서 1591년 2월까지는 선조가 이순신에 대해 아무런 편견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과연 이순신의 품계를 뛰어넘은 인사가 파격적이었을까. 조금만 살펴보면 그렇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이순신은 1580년 36세에 종4품인 고흥의 발포만호로 재직한 적이 있다. 이 때도 상관의 엉터리 보고로 파면 당했었다. 그로부터 11년 후 이순신은 정읍현감으로 일생 중 가장 평온한 때를 보내게 되는데, 그것은 11년 전보다 4품계나 낮은 종6품이었다. 정읍현감 직전 이광의 군관 겸 조방장으로 근무할 때도 종4품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4품계가 낮은 현감으로 간 것이다. 품계 자체로 보면 좌천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관과 무관의 차이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오히려 현감은 종6품이지만 문관이자 고을 수령이기 때문에 종4품인 무관보다 높이 평가하던 시절이었다. 수입도 더 많아서, 현감 이순신은 이 때 어머니와 조카들을 몽땅 데려가 난생 처음으로 제대로 된 효도를 다할 수 있었고 아버지를 일찍 여읜 조카들에게 작은아버지로서 체면이 섰다. 종2품인 삼도수군통제사보다 그 비서인 종6품인 종사관이 단지 문관이란 이유만으로 선조가 더 중시했다는 것을 지난번에 얘기한 적이 있다. 이런 문관도 6품계를 뛰어넘은 사람도 있었다. 그가 바로 유성룡이다. 1569년에 28세의 유성룡은 정9품 성균관 전적(典籍)에서 정6품 공조좌랑으로 수직 승진했던 것이다. 이에 비하면 11년 만에 무관으로서 겨우 3품계 오른 것은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안타까움의 대상이다.

유성룡이 전쟁을 감지하고 위기의식을 느껴 다소 무리를 하며 이순신을 발탁했지만, 전라좌수영보다 3배 큰 전라우수영에 추천하지 못한 것은 이미 그 곳에는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발령 나기 전에 이억기가 발령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전라좌수영보다 두 배 이상 큰 경상우수영을 추천하고 싶었겠지만, 어쨌건 7품계를 뛰어넘는 상황에서 그랬다간 언관(言官)들의 입방아로 다 된 일을 망칠 수도 있을 것 같아, 수영(水營) 중에 가장 작은 전라좌수영으로 보냈던 것 같다.

또 하나, 이순신 장군보다 딱 하루 먼저 전라좌수영보다 3배나 큰 전라우수영의 총책으로 임명된 이억기와 비교해 보면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승진이 늦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억기는 1561년생으로 1545년생인 이순신 장군보다 16세나 아래다. 그럼에도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한 서른 두 살보다 한 살 적은 서른 한 살에 이순신보다 직급은 같되, 사실상 권한이 3배나 되는 전라우수사에 임명되었다. 후일 원균이 후배 이순신보다 지위가 더 낮은 것이 불만이었다고 투덜대며 이순신 모함의 정당성을 찾는데, 이억기와 비교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트집임을 알 수 있다. 선조는 사간원의 지극히 타당한 항변에 이순신보다 먼저 원균을 전라좌수사에 임명했다가 바로 취소했지만, 1년 후 전라좌수영보다 두 배 반이나 큰 경상우수영의 주장으로 내려보낸다. 1592년 2월 당시로 보면 누가 보아도 고과가 하(下)였던 탐관오리 원균이 이순신보다 출세했다. 새옹지마, 1년 만에 대역전한 것이다. 누가 알았으랴, 그것이 불과 몇 개월 후에 오로지 능력 차이로 인해 신분이 역전될 줄이야. 이번에는 아예 종2품과 정3품으로 품계가 달라졌다.

이순신 장군은 한번도 나이가 16살이나 어린 이억기가 전라좌수영보다 3배나 관할 지역이 넓은 전라우수영을 책임지고 있는 것을 부러워하거나 시샘한 적이 없다.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살리기 위해 앞장서서 눈부신 공을 세우다 보니까, 한산대첩 이후 절로 이억기의 상관이 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이억기도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전라좌수영의 3배나 되는 군사를 보유했어야만 했지만, 미처 준비를 못하여 1차 해전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한 달이나 지나서 2차 해전 중간에 전라좌수영보다 겨우 1척 많은 판옥선 25척을 끌고 왔다. 만약 이순신 장군이 경상우수영의 대부분과 전라좌수영을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그 준비 상황을 미루어 보아 경상좌수사 박홍이나 경상우수사 원균에 버금갈 정도로 왜군에게 기습당하여 일패도지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로선 생명의 은인이요 명예의 보루였다. 아마 이억기는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반면에 원균은 이순신보다 두 배 반이나 되는 관할 지역 중에서 단 한 뼘도 지키지 못하여 달랑 전선 한 척만 끌고 도망갔다가, 바로 처형되었어야 함에도 순전히 이순신 장군 덕분에 천만뜻밖에도 승전의 나팔을 불고도 은혜를 원수로 갚았던 것이다.

남해안 지도를 펼쳐 보면, 전라좌수영은 오늘날 고흥반도와 여천시 사이의 연안 지역과 섬들이다. 큰 섬은 없다. 다섯 고을은 광양현, 순천부, 보성군, 낙안부, 그리고 흥양현(고흥)이다. 포구는 여천시 앞 돌섬의 방답진 외에는 고흥반도를 빙 둘러 군데군데 위치했다. 동쪽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여도진, 사도진, 발포진, 녹도진이 바로 그것이다. 흥양현도 사실 고흥반도 서쪽에 있었으니까, 5관 5포 중에 다섯 군데가 고흥반도에 있었다. 전라좌수영은 이처럼 고흥반도가 중심이었다. 여수에는 본영이 있었다. 전라우수영은 그 서쪽 전라도 해안 지역과 섬들이었다. 가장 큰 섬은 진도다. 경상우수영은 남해도에서 충무시를 거쳐 거제시에 이어 낙동강 하구까지 미친다. 다대포 이동은 경상좌수영이다.

군사에서는 크게 세 가지가 중요하다. 천문과 지리와 인간이 그것이다. 해전에서는 육전보다 천문과 지리가 더 중요하다. 적벽대전의 남동풍이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던 조조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하여 천하가 삼분되는(天下三分) 계기를 가져왔는데, 사실상 중국이 통일되는 것은 그 후 약 4백 년이 지난 수당(隋唐) 시대였다. 지나친 단순화일지 모르나, 천문을 누가 읽었느냐에 따라, 또는 천운에 따라 중국은 전란시대가 4백년 더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일기를 쓸 때 늘 가장 처음에 날씨를 기록했다. 이것이 단지 하나의 습관이었을까. 아마 개미 한 마리의 움직임도 예사로 보지 않았던 이순신 장군의 성격으로 보아, 이것은 수군의 활동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을 것이다. 개고 흐림, 밀물과 썰물(모든 날짜가 음력으로 기록되어 있으니까,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한 눈에 거의 짐작할 수 있음), 바람 등을 파악하지 못하면, 전투는커녕 평소의 훈련도 제대로 못한다.

지형도 마찬가지다. 다도해는 리아스식 해안이라 굴곡이 대단히 심하다. 게다가 한반도는 대부분 고생대 지역이라 퇴적층이 두텁다. 천연의 항구도 많지만 그만큼 수심이 얕고 곳곳에 바위가 아니더라도 모래와 흙이 쌓이고 다져져서 만들어진 암초가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배 밑바닥이 평평하고 폭이 넓은 평저선(平底船)이 발달했다. 금강산과 설악산 등 신생대 지역이 많아 퇴적층도 별로 없고 단층구조가 발달하여 해안에서 조금만 나가면 바로 200미터 이상 깊어지는 동해안과는 전혀 다르다. 일본은 화산에 의한 신생대 지역이 대부분이라 강이 짧고 좁고 거세다. 해양성 기후라 강수량도 많다. 해안은 우리나라보다는 훨씬 단순하고 물도 깊다. 파도도 매우 거칠다. 배의 아랫부분이 깊어야 한다. 폭은 좁아야 한다. 그래야 빠르게 물살을 헤치고 나갈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남해안의 지형지물에 대해 누구보다 해박했다. 모르는 것은 어부든 목동이든 아낙네든 촌로든 누구한테든 물었다. 난중일기에 이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맑다. 아침에 광양의 고언선이 와서 봤다. 한산도의 일을 많이 전한다. 체찰사가 군관 이지각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경상우도의 연해안 지도를 그리고 싶으나 도리가 없으니 본 대로 지도를 그려 보내 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서 지도를 쓱쓱 그려서 보냈다. (난중일기 1597/5/24)

체찰사는 이원익을 말한다. 이원익은 당시 우의정으로 전쟁 총사령관이었다. 도원수 권율보다 높았다. 임금 대리였다. 이순신 장군은 흰옷을 입고 도원수 권율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권율의 지시를 기다리며 구례에 머물러 있다가 이보다 며칠 전에 이원익을 찾아뵈었다. 이원익은 어머니를 안장(安葬)하지도 못하고 천 리 밖에서 떠도는, 개인적으로는 상주(喪主)요 국가적으로는 죄인인 이순신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했다. 누구보다 이순신의 역량과 처지를 잘 아는 이원익은 이 때 어려운 부탁을 하나 한다. 원래부터 원균의 담당 해안인 경상우도의 지도를 그려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원래 군진(軍陳)을 그리는 데 기가 막힌 재주를 지녔던 장군이었지만, 보지도 않고 다른 장수의 지역 지도를 그 날로 그린다. 이원익은 이 때 마땅한 사람만 있다면, 당시 통제사로 있던 원균 휘하의 누구에게든 지도를 그리라고 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누구도 그것을 그릴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건 있다면 원래 계급이나 신분은 높지 않지만 병사 중에 있어야 한다. 수군 총책인 삼도수군통제사가 할 일이 아니다. 공자가 여러 방면에 재주가 많았듯이 이순신도 그 못지않았다. 뱃길에 대해서 부분적인 것은 몰라도 그 어떤 토박이도 이순신보다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이로써 드러난다.

가만히 살펴보면 이순신 장군은 본영은 여수였지만, 전쟁 총본부는 한 번도 전라좌수영에 설치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산도는 경상우수영 관할이었고 나중의 고금도는 전라우수영 소속이었다.

그러면 왜 이순신 장군은 거대한 거제도를 본부로 삼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원균 때문이었다. 거제도에 본부를 설치하지 못한 것도 원균 때문이었고 한산도에 본부를 설치한 것도 원균 때문이었고 고금도에 본부를 설치한 것도 원균 때문이었다. 그 이유를 밝히기 전에 먼저 이들 세 섬에 대해서 잠깐 기술한다.

거제도는 제주도를 제외하곤 한국의 5대 섬 중 제일 크다. 넓이는 375㎢로 서울시 605㎢의 절반이 넘는다. 이론상 5백만 명이 거주할 수 있다. 경상우수영에는 이보다 조금 작은 남해도도 있다. 남해도는 298㎢다. 바로 곁의 54㎢의 창선도와 합하면, 전라우수영의 진도 354㎢와 거의 같다. 참고로, 고려가 인류 역사상 최강 몽골에 맞서 약 40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바다의 철옹성 강화도는 300㎢이다.

한산도는 15㎢밖에 안 된다. 명량대첩 후 명나라 수군과 함께 둥지를 튼 고금도는 44㎢로 백령도 45㎢와 비슷하다. 임진년 이후 경상도 연안에 소굴을 짓고 틀어박힌 왜군으로 하여금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게 한 조선 판 버뮤다 삼각지대의 한복판 한산도의 약 3배 크기다. 2007년에 고금대교가 개통되어 지금은 강진에서 버스 타고 쉽게 갈 수 있다. 충무사는 묘당도에 있는데, 고금도와 연결되어 한 몸이 되어 있다. 2008년 4월에 내가 갔을 때는 중고등 학생들이 소풍 와서 수건돌리기를 하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즐거웠다.

거제도에는 한때 왜군이 세 곳에 2만 4천 명이나 주둔하고 있었다. 1595년 6월 8일자 선조실록에 따르면 왜군은 총 13만 1천 명이었다. 그 다음 해에는 거제도 동쪽 가덕도와 그 맞은 편 안골포를 경계로 짓고 일제히 물러가지만, 여전히 거제도는 한산도와 견내량 부근을 제외하곤 왜군의 소굴이었다. 거제도와 그 맞은 편 진해 웅천의 제포를 조선이 관할하려면 최소한 육군 1만 명과 수군 1만 명이 더 필요했다. 그러면 조선 수군은 전진 배치하면서 한산도의 제2 방어책도 확보하므로 시간적으로는 최소한 한 나절, 공간적으로는 바다를 포함하여 1천㎢의 작전 지역을 더 확보할 수 있었다.

원균이 경상우수영을 한 뼘도 방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은 선제공격으로 나가 경상우수영의 약 절반을 확보했지만, 중과부적으로 거제도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한산도와 견내량이라는 천험의 지형을 이용하여 적에게는 아군의 움직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하면서 불리하면 견내량의 좁은 지역에 전선 5척만 배치하면 얼마든지 적의 대군을 가로막을 수 있었다. 그 사이 전열을 갖추면 한산대첩 때처럼 견내량과 한산도 사이로 유인하여 사방의 크고 작은 섬에서 숨어 있다가 독 안에 든 쥐처럼 적을 섬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견내량에 항상 작은 탐후선과 협선을 들락거리게 하면서 전선도 몇 척 상시 대기시켰다. 또한 오늘날의 진해, 창원, 마산, 고성을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왜적이 감히 넘보지 못하게 했다. 그러면 사람들이 지도를 보면서 왜적이 거제도를 우회하여 남해도로 침략하면 되지 않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했다. 첫째는 거제도를 우회하는 것은 난바다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당시 항해술로는 대단히 위험했다. 둘째는 한산도에서 바라보면 대마도까지 보였으니까, 아군이 그들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가만히 기다리다가 배를 젓느라 지칠 대로 지친 왜군의 전선을 박살내는 것은 에프킬라로 모기떼 몰살시키기보다 쉬웠다. 만약 원균이 보통 정도의 머리만 갖고 있었더라면, 5년 간 이순신 장군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견내량과 한산도와 거제도의 함수 관계를 알아채고 어떤 경우에도 몰살당하는 경우는 피했을 것이다. 조금만 신경 쓰면 최소한 비길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이순신 장군은 지리(地利)로 1만 명 이상의 군사와 1백 척 이상의 힘을 얻었다.

명량대첩은 이순신 장군이 적은 군사로 많은 군사를 어떻게 궤멸시켰는가를 무엇보다 잘 보여 준다. 말 그대로 울돌목은 조류가 이순신 장군의 불운을 400년이 지나도록 밤낮으로 통곡하듯이 우당탕탕 울면서 지나가는 곳이다. 진도대교와 목포 앞의 방파제로 물살이 약화되었다고 하지만, 작년 4월에 내가 밤낮으로 지켜본 바에 의하면 과히 천험의 요새였다. 이순신 장군의 기함(旗艦) 한 척으로 능히 세 시간을 버틸 수 있는 곳이었다. 배가 나란히 두세 척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양쪽은 암초가 가득하다고 한다. 바다의 울음은 바로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니까!

그러면 이순신 장군은 왜 진도 벽파진이나 해남의 전라우수영에 본부를 설치하지 않았을까. 당연히 그것은 한 뼘이라도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경상우수영과 전라좌수영은 원균의 일패도지 때문에 너무도 허무하게 잃었지만, 전라우수영은 한 치도 잃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침 일찍이 장군이 둔전을 설치했던 고금도가 있었다. 완도가 더 큰 섬이지만, 육지와 멀어서 육지와 바다 사이의 길목을 차단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견내량이나 명량보다는 못하지만 아쉬운 대로 적은 군사로 능히 대군을 막을 수 있고 완도 등으로 보호도 받는 고금도에 본부를 설치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왜성이 설치된 순천 서쪽의 연안 지방과 섬들을 확보하여 수많은 백의민족의 생명도 구하고 군량미도 확보할 수 있었다. 전선도 더 만들 수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천문과 지리도 기가 막히게 잘 활용했지만, 가장 중시한 것은 역시 인간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아무리 하찮은 사람도 무시하지 않고 그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했다. 단, 소를 훔쳐가면서 적이 쳐들어왔다고 거짓말하는 등 사악한 인간은 바로 목을 베어 공중에 높이 매달거나 둥근 엉덩이가 판판해지도록 곤장을 침으로써 군기를 엄히 다스렸다. 착한 사람에게는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바람보다 부드러웠지만, 악한 인간에게는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청상과부의 오뉴월 서리보다 매몰찼다. 이 충무공의 민심 얻기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밝혀 볼까 한다.
(2009.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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