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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August 21, 2009

충무공 이순신 장군 평전(19) - 최성재

임금에게 조총(鳥銃)을 만들어 바친 이순신


1593년 8월 이순신 장군은 1년 3개월의 고심 끝에 마침내 조총을 능가하는 개인화기를 제작하여 임금에게 바치지만...
최성재

1593년 8월, 임진왜란이 소강(小康) 상태에 들어갈 즈음에 이순신 장군은 신분을 뛰어넘는 인재 발탁으로 마침내 조총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1592년 5월에 이순신 장군이 왜적과 첫 전투를 벌였으니까, 이때부터 따지면 약 1년 3개월 만이다. 동양 삼국의 전쟁 양상과 세계역사를 근본적으로 바꾼 조총을 다름 아닌 일선 지휘관이, 전투하는 것만도 입에 단내가 날 조선의 일선 지휘관이 국산화했다. 조정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여 이순신 장군은 1인 10역을 담당해서 적의 생명선인 남해와 조선의 젖줄인 전라도 곡창지대를 홀로 지키면서도 노심초사 적의 최대 강점인 조총을 늘 곁에 두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는 한편, 비상한 재주를 지닌 군관과 대장장이와 관내 또는 다른 지방에서 피난 온 종들을 독려하고 격려하여 조총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하여 한두 자루도 아닌 다섯 자루를 임금에게 바친다. 이제 이것을 대량공급하기만 하면 왜적의 숨소리만 들려도 혼비백산 달아나던 조선군도 명나라 군대의 도움도 받을 것도 없이 왜적을 모조리 현해탄에 수장(水葬)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암군(暗君) 선조와 말싸움 세계1위 조정 대신들은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말았다. 그저 하늘 군대가 철천지원수 왜적을 여반장(如反掌)으로 소탕해 주기만을 바랐다.

조총은 개인 화기(火器)로서 이것만 가지면 일대 일로는 상대도 안 되던 천하디 천한 병졸들이 천하무적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하극상도 이런 하극상이 있을 수 없었다. 각고의 노력으로 수십 년 무예를 익힌 무사나 바람같이 내닫아 대군을 허수아비인 양 짓밟던 기마병도 3열 횡대로 늘어서서 한 줄씩 차례로 화약에 불붙일 시간을 확보한 병졸 앞에만 서면, 의지와 기백과 애국심과는 전혀 무관하게 짚단처럼 쓰러졌다. 축성술, 기병전, 백병전, 정보전, 합종연횡책 등 전쟁의 기술이 고도로 발달했던 일본은 전국시대 100년 동안 크고 작은 100여 명의 대명(大名)들이 각 지방을 호령했지만 누구도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여 영구평화를 가져올 통일은 요원하기만 했다. 바로 이때 구주 앞바다에 표류한 포르투갈 상인이 종자도(種子島)에 호위무사 대신 화승총(火繩銃) 곧 조총을 들고 왔다.

새로운 시대를 이끌 인재를 알아보기도 힘들지만, 새로운 세상을 열 물건을 알아보기도 힘들다. 이런 면에서 일본의 직전신장(織田信長 오다 노부나가)은 탁월한 위인이었다. 그는 신분도 천하고 풍채도 보잘것없는 미래의 영웅 풍신수길을 알아보았고, 어떤 대군도 물리칠 수 있는 조총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런데 이 조총을 그보다 먼저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전국대명 사이에서 조무래기에 지나지 않던 종자도의 우두머리 종자도 혜시(種子島惠時 다네가시마 마사토키)였다. 1543년 그는 포르투갈 상인의 천하무적 호위무사 조총을 한눈에 알아봤다. 사격 시범 때 사람들은 그 정확성과 사정거리와 파괴력과 소리에 너무 놀라 눈이 한 자나 튀어나오고 일제히 엉덩방아를 찧어 맨땅이 푹푹 꺼졌다고 한다. 일본에서 온 외래어 무대뽀는 원래 무철포(無鐵砲)의 일본음이다. 그들은 조총을 철포라 했고, 싸움에 임하여 철포도 없이 나서는 자의 만용을 비웃기 위해 이 말을 썼다. 하여간 혜시는 포르투갈 상인이 절대 거부할 수 없도록 오늘날 돈으로 치면 물경 1억 엔(약 10억 원)을 주고 전쟁의 보배를 샀다. 포르투갈 상인은 너무 비싸게 받은 것이 미안했던지 그 아들에게 한 자루를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화염조선, 박재광)

혜시는 즉시 최고의 대장장이에게 조총을 주면서 그것과 똑같은 것을 제작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최고의 일본도를 벼르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당시 일본 대장장이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때 대장장이의 방년 16세 딸이 굳은 결심을 아름다운 눈에 담고 조용히 일어나 아버지 앞으로 나아갔다. 일본의 논개였다. 그녀는 포르투갈의 상인에게 생명처럼 귀한 처녀의 몸을 바쳐 조총 제작의 비법을 알아냈다. 일본의 역사를 바꾼 당대 최고 기술자 팔판금병위(八板金兵衛 야이타 킨베)의 딸 약협(若狹 와카사)은 오늘도 ‘약협충효비’로 방명을 청사에 길이 남기고 있다. 그녀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아 500년 후 맥아더가 일본에 진주하자, 일본의 딸과 부인들은 다투어 구역질나는 미군의 품에 안겨 점령군이 패전국을 유린하지 않고 도리어 어제의 적국이 다시 떨치고 일어나게끔 열과 성을 다하도록 녹여 버렸다.

일본의 논개가 양이(洋夷)의 품에 몸을 던진 지 약 30년, 직전신장은 1575년 비밀병기 조총 3천 자루로 그렇고 그런 작은 영주에서 일약 천하를 호령하는 대명(大名 다이묘)으로 떠오른다. 그것은 당시에 3만 정예병, 10만 대군과 맞먹었다. 임진왜란에 침략에 동원된 왜적은 최대 16만 명이었는데,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일부 군 편성을 토대로 살펴보면, 최일선의 조총부대는 전체의 약 30%였던 것 같다. 임진왜란에 동원된 조총이 약 5만 정이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수군을 제외하면 조총은커녕 구부러지거나 부러지거나 녹슨 활, 창, 칼까지 몽땅 합해야 5만 개도 없었을 조선은 그들에게 숫제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부산에서 평양까지 하늘의 가호와 조상의 음덕만 믿고 막무가내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육지의 조선은 임란 7년 동안 제대로 훈련을 갖춘 정예병이 1만 명도 넘지 못했다.

1593년의 벽제전투에서 알 수 있듯이 기마병의 속도와 파괴력을 장기로 한 명나라의 이여송은 조총과 긴 창으로 무장한 패잔병한테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그로써 이여송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그 후 그는 두 번 다시 일본군과 싸우지 않았다. 그것은 1575년의 장조(長"023나가시노) 전투가 조선에서 그대로 재현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전국시대 최대의 영웅이자 경도(京都 교토) 입성을 눈앞에 두었던 무전신현(武田信玄 다케다 신겐)이 죽자, 그 영토와 군대와 전술을 그대로 이어받은 그의 아들 무전승뢰(武田勝賴 다케다 가스요리)는 경도 입성의 최대 방해자 직전신장과 1575년 장조에서 숙명의 대결을 벌였다. 결과는 무전 가문의 최대 자랑거리이자 당시까지 천하무적이었던 기마대가 3천 조총부대에 궤멸되는 것으로 허무하게 끝났다. 그것은 전국시대가 이제 곧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리는 장엄한 효시였다.

직전신장이 조총을 대규모로 동원한 최초의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똑같은 전국(戰國)대명의 일원이었던 본원사(本願寺 혼간사)의 3만 승병(僧兵)이었다. 1570년 승승장구하던 직전신장은 본원사의 싸움에서 대패했다. 3천 자루의 조총 때문이었다. 살아남은 게 기적이었다. 지옥의 문턱까지 쫓겨났던 쓰라린 경험을 통해 조총의 위력과 의미를 깨달은 직전신장은 그 후 5년 만에 3천 정의 비밀병기를 마련하여 천하포무(天下布武)의 뜻을 손에 잡힐 듯 현실화할 수 있었다. 이제 아무도 그를 허풍선이로 생각할 수 없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조총이 이순신 장군의 관심과 지시와 독려 하에 마침내 적군에게 돈 한 푼 안 바치고 꽃다운 처녀의 인신공양도 없이 군관과 대장장이와 종들의 밤낮을 가리지 않는 연구개발 끝에 드디어 오히려 일본의 조총을 능가하는 조선식 조총을 개발해서 시제품을 다섯 자루나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언제나 모든 공을 아랫사람에게 돌리는 이순신 장군은 이번에도 조총 연구개발 담당자의 이름을 일일이 밝히며 그들을 크게 칭찬하고 상을 주고 그들의 힘을 빌려 조총을 대량 생산할 것을 간곡히 요청한다. 대량생산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물적 인적 지원이 필요하다. 오늘날로 말하면 거대한 최첨단 군수산업을 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명나라 군대에게 화약 제조법을 알려 달라고 애원하고, 조선사람 중에 이를 알아 오는 사람은 바로 당상관의 벼슬을 주겠다고 했고, 심지어 독화살 만드는 법도 제발 알려 달라고 머리를 조아렸지만, 하늘나라 군대는 끝내 알려 주지 않았다.

화약제조법도 이순신 장군한테 물으면 바로 답이 나왔고, 그까짓 독화살 만드는 법도 이순신 장군한테 물으면 하루 이틀 만에 해결해 주었을 것이고, 이제 최일선의 지휘관이 하늘나라 군대마저 벌벌 떨게 만들던 조총의 제조법을 터득하여 대량생산의 길을 열고 상세히 보고서를 올렸지만, 그 가치를 알아보는 자가 없었다. 임금과 조정대신들이 어떤 조치를 취했다는 말이 전혀 없다. 그들은 그냥 천수답 농민처럼 전쟁의 신으로 떠받들던 하늘(명나라)만 바라봤다.

“척계광(戚繼光)이 지은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몇 부 사오게 하라. 그러나 이 책은 자세한 것과 소략한 것이 있으니 되도록이면 왕세정(王世貞)이 서문(序文)을 쓴 것으로 사오게 하라. 또 중국에는 바닷물을 졸여서 염초(焰硝)를 만드는 법이 있다는데, 그 일행(一行)에게 효유하여 그 법을 배워 가지고 오는 자에게는 크게 포상한다고 하라. 사인(士人)일 경우는 당상(堂上)을 시켜줄 것이다. 이 뜻을 동지사(冬至使) 허진(許晉)에게도 파발마를 보내어 하서하도록 하라.” (선조실록 1593/9/25)

○傳曰: “戚繼光所撰《紀効新書》數件, 貿得而來。 但此書有詳略, 須得王世貞作序之書貿來。 且中國有以海水煮取焰硝之法。 爾其曉諭一行, 有能傳習其法者, 當大加褒賞。 士人則當作堂上矣。 此意冬至使許晋處, 發馬下書。”

“유 제독의 군중에 화살에 바르는 독약(毒藥)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다른 군영에는 없는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활을 잘 쏘니 만약 이 독약을 제조하는 방법을 전수해 익힌다면 적을 막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전에 들으니, 그 재료가 모두 남원에서 생산되는데 제독이 제조하면서 비밀로 하였다고 한다. ‘경은 은밀히 그 일을 잘 아는 역관(譯官)과 협력하여 천금(千金)을 아끼지 말고 그 방법을 전수해 익히도록 하라. 만약 전수하여 익히기만 하면 역관에게 후한 상을 내릴 것이다.’라고 접반사에게 은밀히 전하라.”(선조실록 1598/7/5)

○傳于政院曰: “劉提督軍中, 有傅矢毒藥。 此他營所無也。 我國人善射。 若傳習此藥, 其有益於禦賊大矣。 前聞其材料, 皆産於南原, 提督劑造而秘之云。 ‘卿宜密與解事譯官協心, 不惜千金, 傳習其方。 若能傳習, 譯官當爲重賞矣。’ 密言于接伴使。”

무기만 있다고 강한 군대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산을 넘고 내를 건너고 바다를 헤집는 훈련을 쌓았더라도, 애국심이 하늘에 맞닿더라도! 무기가 시원찮으면, [정무문]의 천하무적 주먹 이소룡이 일본군의 탄막 사격에 벌집이 되는 것처럼 만사도루묵이다. 김정일이 핵무기 하나로 세계 8위권 한국의 군사력과 세계 10위권 경제력을 자랑하는 한국, 아울러 압도적 세계1위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여전히 보유한 미국을 각각 공포에 몰아넣고 답답하게 만드는 것처럼 군대에게 무기는 힘의 원천이다. 훈련과 보급은 그 다음 이야기이다. 람보 한 명이면 돌칼과 죽창을 번쩍이며 기세등등 질서정연하게 오와 열을 갖추고 다가서는 10만 대군도 능히 물리칠 수 있다.

노태우 정부의 민족주의에 의해 순진하게 철수한 전술 핵무기를 다시 배치하고, 한미연합사 해체를 무기한 연기하고, 김정일의 치명적 약점인 북한인권 문제를 정부가 나서서 정식으로 거론하면, 옛 소련의 핵무기에 비하면 고철 수준인 김정일의 핵무기는 매미 한 마리 놀라게 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이명박 정부는 400억 달러의 400분의 1도 안 쓰고 자유통일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가까이는 6.25 때도 마찬가지였다. 국군의 화력은 242대의 탱크와 552문의 곡사포를 앞세운 북괴군에게 이리떼에게 쫓기는 양떼처럼 흩어졌다. 그나마 155mm는 한 문도 없었고 국군 전체가 보유한 곡사포 105mm 91문도 김일성과 스탈린과 모택동의 기습작전에 말려들어 한강 이북에 고스란히 남기고 도망가는 바람에 말 그대로 국군은 미군이 올 때까지 오로지 애국심과 맨주먹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그들의 화력도 국군에 비하면 월등했다. 그래서 그들은 무기도 없고 훈련도 안 된 국군을 기가 막히게 골라서 그것도 사단과 사단 사이를 집요하게 공략했던 것이다. 이런 북괴군과 중공군에 맞서 싸워 밀리지 않은 거의 유일한 군대가 백선엽 군대였는데, 그가 차례로 지휘한 1사단, 1군단, 2군단은 다부동 전투 이래 항상 미군의 막강한 화력 지원을 받았다. 평양으로 달려갈 때는 M-26 일명 패튼 전차도 20대나 지원받았다.

마침내 국군은 꿈에도 소원을 이뤘다. 1952년 4월 미군과 대등한 화력을 갖춘 2군단이 창설된 것이다. 군단포병은 미군의 105mm 1개 대대 18문, 155mm 2개 대대 36문의 화력에 더하여 노재현 대령 이하 특별히 훈련받은 국군의 155mm 4개 대대 72문을 갖췄다. 그리하여 2군단은 중부전선의 일부를 독자적으로 담당했지만, 중공군은 감히 까불지 못했다. 까불다가 도리어 혼비백산했다. (군과 나, 백선엽)

중원을 통일한 모택동도 더 이상 동쪽 끝자락 손바닥만한 나라의 수도를 넘볼 수 없었다.

1593년 8월 너무도 기뻤던 나머지 평소와는 달리 점화 장치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순신 장군은 서둘러 임금한테 장계(狀啓)를 먼저 보내고, 그 해 9월 14일에 정철총통(正鐵銃筒) 곧 강철로 만든 조총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먼저 난중일기를 살펴본다.

맑음. 정철총통은 전쟁에 가장 긴요한 것인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만드는 법을 잘 알지 못하였다. 이제야 온갖 연구를 거듭하여 조총을 만들어 내니, 왜의 총보다도 나았다. 명나라 사람이 진중에 와서 시험사격을 살펴보고는 잘 되었다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다. 이미 그 비법을 알았으니, 도내에서 같은 모양으로 넉넉히 만들어내도록 순찰사와 병사에게 견본을 보내고, 공문을 돌려서 알게 했다. (난중일기, 1593/9/14)

晴 正鐵銃筒 最關於戰用 我國之人 未詳其造作妙法 今者百爾思得 造出鳥筒則最妙於倭筒 唐人到陣試放 無不稱善焉 已得其妙 道內一樣優造事 見樣輸送 巡察使 兵使處 移牒知委

임금의 대답이 없자, 이순신 장군은 도내에 널리 비법을 알려 주고 보급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후 기록에 별다른 게 없음을 미루어 보아, 광해군 대에 이르러 국가 차원에서 제대로 조선식 조총을 만든 듯하다.

다음은 봉진화포장(封進火砲狀) 전문이다.

삼가 (물건) 올려 보내는 일로 아뢰나이다. 신이 여러 번 큰 전쟁을 겪어 왜인의 조총을 얻은 것이 많사온데, 항상 눈앞에 두고 그 묘한 이치를 시험해 보았더니, 그것은 몸체(총신)가 길므로 총 구멍이 깊고 또 깊기 때문에 기운이 세어 맞기만 하면 부서지는데, 우리나라 승자(勝字: 승자총통)나 쌍혈(雙穴) 등은 총통이 얕아서 그 힘이 왜의 총통만 못하므로 매양 조총을 만들고자 하였삽던 바, 신의 군관 훈련주부 정사준이 비법을 알아내어 대장장이 낙안 수군 이필종, 순천 사노(私奴) 안성, 피난민 김해 절종[寺奴] 동지, 거제 절종 언복 등을 데리고 정철(正鐵)을 두들겨 만들었는데, 그 체제도 잘 되었고 총알 나가는 힘도 조총과 똑같사옵니다. 그 구멍에 불을 붙이는 장치는 좀 다른 것 같으나 몇 날 안으로 완성할 것이옵니다. 또한 작업하기도 그리 어렵지 않아서, 수군 소속 각 고을과 포구에서 우선 같은 모양으로 만들게 하는 것 외에 한 자루는 전 순찰사 권율에게 보내어 각 고을에서도 일제히 제조하도록 하셨사옵니다.

오늘날 적을 제어하는 무기는 이것보다 나은 것이 없삽기로 정철로 만든 조총 5자루를 봉하여 올려 보내오니, 엎드려 원컨대 조정에서도 각도와 각 고을에 명령하여 모두 다 만들게 하시기 바라오며, 감독해 만든 군관 정사준과 대장장이 이필종에선 각별히 상을 내리시와 그들이 감격하여 열심히 일하게 하옵소서. 그러면 모두든 서로 다투어 본떠서 만들어 내도록 하심이 좋을까 하옵니다. (1593/8)

謹啓爲上送事 臣累經大戰 倭人鳥銃 所得優多爲白乎等用良 常伴目前 驗其妙理 則以體長之故 其穴深邃 深邃之故 炮氣猛烈 觸之者必碎 而我國勝字雙穴等銃筒段 體短穴淺 其猛不如倭筒 其聲不雄乙仍于 同鳥銃乙 每欲制造爲白如乎 臣矣軍官訓鍊主簿鄭思竣亦 思得妙法 治匠樂安水軍李必從 順天私奴安成 避亂營居金海寺奴同之 巨濟寺奴彦福等率良㫆正鐵以打造爲白乎亦中 體制甚工 炮丸之烈 一如鳥銃 其線穴揷火之具 雖似少異爲白良置 數日內畢造 功役赤不甚難 舟師各官浦良中 爲先一樣造作亦爲白乎㫆一柄段 前巡察使權慄處輸送 使各官一樣制造亦爲白有在果 當今禦敵之備 莫過於此乙仍于 同正鐵鳥銃五柄乙 監封上送爲白去乎 朝廷以各道各官 竝令制造爲白乎矣 監造軍官鄭思竣及同冶匠李必從等乙良 各別論賞 使之感動興起 爭相效制爲白乎去 妄料爲白臥乎事是良厼謹具啓 聞 萬曆二十一年八月 日 節度使臣李

이 글에서 보듯이 이순신 장군은 총포에 대해서 해박한 전문지식을 갖고 있었다. 조선 수군도 개인화기로 승자총통을 사용했는데, 그것이 일본의 조총에 비해 성능이 많이 떨어지는 이유를 핵심을 찔러 간명하게 설명한다. 총신의 길이가 조총이 더 길고 총구도 깊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참고로 위의 글은 장계초본으로 충무공전서에 실린 것과는 달리 용언의 어미와 체언 다음의 조사에 이두(吏讀)를 많이 사용하였다. 두 가지 목적이 있지 않을까 한다. 임금과 조정대신이 무식하여 순 한문체는 잘 읽지 못할까 봐, 또는 경어체를 써서 존경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러지 않았을까 한다. 난중일기에는 이런 이두는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의 한문 실력이 부족해서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이순신 장군은 농담도 않고 잘 웃지도 않았다고 했는데, 가끔 두고두고 웃음을 참지 못할 해학을 글로 남기기도 했다. 그 중에 하나가 이 조총에 관한 것이다.

이홍명, 임희진이 찾아왔다. 대나무 총통을 만들어 왔기에 시험 삼아 쏘아 보니, 소리는 났지만, 별로 쓸모가 없었다. 우스웠다. (난중일기 1594/2/17)

李弘明 任希璡來 竹銃筒造來 試放則似有出聲 而別無所用 可笑

이미 그보다 6개월 전에 조총을 능가하는 총통을 만든 바 있는 이순신 장군에게 쇠도 아닌 대나무로 총을 만들었다고 자랑스레 들고 온 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말도 안 되므로 그 자리에서 혼을 내어 쫓아버릴 수도 있지만, 어디 한 번 쏘아 보라고 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소리만 요란했지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 이순신 장군은 표적을 정해 주고 그것을 얼마나 정확하고 세게 가격하는가를 직접 확인하게 했을 것이다. 머리를 긁적거리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2009. 8. 19.) 나로호 발사를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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