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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August 11, 2009

충무공 이순신 장군 평전(18) - 최성재

충(忠)보다 효(孝)를 앞세운 조상과 후손들

신라의 충, 고려의 의, 조선의 효(4)
최성재

서기 660년 황산벌에서 5만의 신라군이 5천의 백제 결사대에게 초반전에서 4전4패하자, 현재로 말하면 중3, 고1 나이의 아들을 데리고 전투에 임했던 3장군 중 두 장군(대장군 김유신은 결혼이 늦어서 그 정도 나이의 아들도 없었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들을 삼국통일의 희생제로 바치기로 한다. 김유신의 동생 우장군(右將軍) 김흠순(金欽純, 金欽春이라고도 함)이 먼저 아들 반굴(盤屈)을 내보낸다. 그래도 신라군이 패배감에서 미처 헤어나지 못하자, 좌장군(左將軍) 품일(品日: 삼국사기에 성씨는 안 나왔으나 김씨라고 생각됨)이 아들 관창(官昌, 官狀이라고도 함)을 내보낸다.

이때 이들이 한 말이 ‘충이 곧 효다.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효다. 다시 말해서 충이 효보다 앞선다. 충이 없으면 효는 없다. 효 없는 충은 있지만, 충 없는 효는 없다. 우리 아들은 나이 16세에 불과하지만, 5만 대군의 표적(모범)이 될 수 있다. ’는 내용이다.

김흠순: 신하된 자로서 충보다 나은 것이 없고 아들된 자로서 효보다 나은 것이 없다. 국가의 위기를 맞아 목숨을 바치면 충과 효가 함께 온전해진다.

爲臣莫若忠 爲子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조선시대 같으면 아예 이런 어린 아들은 전쟁터에 데려가지도 않았거니와, 어찌 하다가 함께 위험을 맞이하게 되면 대를 이어야 한다며 먼저 고향으로 떠나보냈을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토지(경제)와 문자(지식과 언론)를 독점한 양반은 군 복무가 아예 면제되었다. 또한 양반의 사노(私奴)도 감히 국가가 징집하지 못했다. 의병이 일어난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군 복무 의무가 없었던 양반들 중 극히 일부가 양심의 가책을 받아 스스로 무기를 들고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이들을 포함하여 징집 연령의 양반은 전원 정규군으로 편성되어야 했었다.

나라 전체로 보아, 조선시대는 국가 지도자들이 국가보다는 가문을 중시했던 것이다. 임금부터 도망가기에 바빴고 가족을 피신시키기 위해 온갖 수작을 다 부렸다. 임금 이하 관료들은 적이 안 보이는 곳에서는 큰소리란 큰소리는 다 쳤지만, 막상 적의 깃발만 보여도 민들레 꽃씨처럼 흩어졌다. 그리고는 후에 승리한 장군이 간혹 있으면 그를 헐뜯는 데 열과 성을 다했다. 모든 공은 얼레빗 왜군 대신 쳐들어온 참빗 명나라 군대에 돌렸다. 그래야 자신들의 입지가 공고해지기 때문이었다. 태조, 태종, 세종에 이르는 조선초기의 문무 조화는 중기 이후 찾아보기가 대단히 힘들었다.

의(義)의 시대인 고려시대는 대체로 국가 위기를 맞이하면, 효보다 충을 앞세웠다. 광해군의 다음 말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중원의 형세가 참으로 급급하기만 하다. 이런 때에 안으로 스스로를 강화하면서[自强]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羈縻]을 써서 한결같이 ‘고려(高麗)에서 했던 것과 같이 한다면’ 그럭저럭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의 인심을 살펴보면 안으로 일을 힘쓰지 않고 밖으로 큰소리치는 것만 일삼고 있다. 조정의 신하들이 의견을 모은 것을 가지고 보건대, 무장들이 올린 의견은 모두 (압록)강에 나가서 결전을 벌리자는 의견이었으니 매우 가상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지금 무사들은 어찌하여 서쪽 변경은 죽을 곳이라도 되는 듯이 두려워하는 것인가. ‘고려에서 했던 것에는 너무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부질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강홍립 등의 편지를 받아 보는 것이 무엇이 구애가 되겠는가. 이것이 과연 적과 화친하자는 뜻이겠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끝내는 반드시 큰소리 때문에 나라 일을 망칠 것이다. (광해군일기 1621/6/6)

中原事勢, 誠爲岌岌。 此時內爲自强, 外爲羈縻, 一如高麗所爲, 則庶可保國, 而近觀我國人心, 內不辦事, 外務大言, 試以廷臣收議見之, 武將所獻, 皆是臨江決戰之意, 甚爲可尙矣。 然則今之武士, 何以畏西邊如死域乎? 不及高麗遠矣, 徒虛語耳。 弘立等書, 取見(之)何妨乎? 此果和賊之意乎? 我國人終必以大言, 誤國事矣。

1619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참전한 심하(深河)전투에서 참패한 후에 말로만 척화론(斥和論)을 일삼는 조정의 문무관료들에게 광해군이 질타하는 장면이다. 지휘권도 없고 군량도 없는 상황에서 오합지졸의 명나라 군대 휘하에서 조선군은 상당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궤멸되었다. 전투원 1만 명 중 최대 9천 명이 죽었으니까, 광해군의 밀명을 받고 강홍립이 일부러 항복했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한명기). 항복 후에 취한 행동은 광해군의 명에 따랐을 가능성이 크다.

임진왜란 7년 내내 이순신 장군의 2만 5천 수군을 제외하면, 조선 전체가 1만 명의 정규군도 유지하지 못하던 것에 비해 광해군은 외교수단인 기미책(羈靡策)으로 중립을 지키는 한편, 군사정책으로 자강책(自强策)으로 군대를 양성해서 비전투원 포함 1만 5,500명 대군을 요동으로 들여보낼 수 있었다. 이것 자체로도 그는 대단한 위업을 이뤘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많은 숫자였다.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았고 명나라가 서자이자 둘째인 광해군의 세자책봉과 국왕책봉을 빌미로, 재조지은(再造之恩) 곧 나라를 구원해 준 은혜를 갚으라며, 썩은 명나라의 썩은 사신들은 신라와 달리 군사력 턱없이 약한 바보 조선의 은(銀)을 빗자루로 쓸듯이 쓸어갔기 때문에, 요동에 대군을 파견한 것은 엄청난 출혈이었다. 어차피 가능성이 없는 전쟁에 마지못해 보내는 입장에서 그 절반만 보내도 되었다. 만약 그랬다면, 광해군은 국왕의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국왕을 호위할 친위대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광해군은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손도 못 쓰고 밀려났다. 광해군은 또한 왕권을 강화한다며 토목사업 곧 궁궐 짓는 일로 백성과 양반의 원성을 사며 국가예산을 너무 많이 썼다. 그게 그의 가장 큰 실정이었다.

하여간에 광해군의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는 ‘말로만 국방’이란 게 없었다. 당시 동아시아 최대 어쩌면 세계 최대최강의 세 제국 요나라와 금나라와 원나라를 맞이하여 앞의 둘은 스스로의 힘으로 물리쳤고, 마지막 원나라에는 40년간 버티다가 항복했지만 유례없이 직접통치 아닌 간접통치 받은 군사강국이었다.

광해군의 능수능란한 중립외교와 치열한 정보전과 피나는 자강책에 대해 그의 정권 기반인 대북파 영수 이이첨까지 반대하고 나섰다. 자중지란이 일어난 것이다. 자연히 망해 가는 명나라에 무조건 충성하는 것, 그것은 조선이란 국가를 위한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정권만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변질된 효도였다. 효도는 부모의 잘잘못을 따질 수 없고, 부모가 늙어 죽는다고 하여 변할 수 없다. 따라서 죽어가는 명나라도 언제나 옳다고 믿고, 또한 언제든지 소생할 것을 믿고, 죽어가는 부모에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고 다리의 살을 베어 불고기를 해 드림으로 스스로의 생명이 위태롭더라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듯이 지극 정성으로 섬겨야 했다. 이런 자들에게 온통 광해군은 둘러싸였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는, 김종수의 논문에 따르면, 1618년부터 인조반정이 일어나는 1623년까지 7년 동안 왕의 경호를 책임지는 훈련대장을 11번이나 교체했을까. 이에 비해 인조는 재위 26년 동안 훈련대장을 4번밖에 교체하지 않았다. 나라가 망해도 인조는 오늘로 말하면 여야 막론하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쫓겨날 염려가 없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한다.

조상의 효 DNA는 오늘날에도 맥맥히 이어진다. 김유신과 지채문과 이순신의 충 또는 의 DNA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졌다. 반면에 국가보다 가문을 중시하고 정부보다 패거리를 앞세우는 조선시대 중후기의 유습은 김일성과 김정일, 김영삼과 김대중과 노무현과 이명박으로 이어진다. 김일성의 과오는 절대 입 밖에 내지 않는 것으로, 민족최대 반역자를 사실상 어버이로 받든 김대중과 노무현을 보고 나라 걱정이 앞선 여론이 거세게 일어난 시점에서 이명박은 이전보다 약 10배의 표차로 승리한 만큼 김유신과 이순신, 이승만과 박정희의 뒤를 이을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못했다. 촛불 시위에서, 북한인권 문제에서 그는 늘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누가 대신 싸워 주길 바랐고 누가 대신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주길 바랐다. 법치를 확립하고 인권을 되살리고 국가를 중흥할 시점에서 모택동이 조종한 문화혁명 시기에 그러했듯이 경찰이 폭도에게 얻어맞아도 방송이 이를 정반대인 양 물 타기하는 걸 내버려 두고, 한국인이 북한에 육지로 바다로 인질로 끌려가도 언제든지 대량 인질이 될 수 있는 위험한 곳에 있는 국민을 위해 중도실용 대통령은 안전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 개성에서, 살인죄가 아닌 한 붙들려 갈 수 없는 곳에서 붙잡혀 가서 100일이 넘었지만 이름도 못 밝히고 겨우 유씨라는 성만 밝혔다.

국가야 망하든 말든, 회사야 망하든 말든, 정당이야 망하든 말든, 국회야 아수라장이 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는 무리들일수록 말씀이 화려하고 요란하다. 거둥이 거창하고 몸짓이 현란하다. 손발이 새털처럼 가볍고 차돌처럼 억세다. 300만이 굶어 죽어도 권력만 유지할 수 있다면, 만경대 김씨가 건재하기만 한다면, 이미 군사력 외에는 북한은 완전히 망해 버렸지만, 막판 뒤집기를 노리고 전쟁을 일으킨들 중국에 편입되거나 한국에게 흡수통일될 게 뻔해도 어버이 수령의 권력만 유지되는 한 그는 그 어떤 것도 돌아보지 않는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민주의 이름으로, 통일의 이름으로, 민족(이들에 따르면 김일성과 김정일은 민족이나 이승만과 박정희는 민족이 아님)의 이름으로 죽은 김일성과 산 김정일과 산 김영삼과 산 김대중과 죽은 노무현에게 어버이 이상의 효를 다하면, 명예와 권력과 돈이 쏟아진다. 국가로부터 온갖 보호는 다 받으면서 국가 이익은 언제나 뒷전이다. 정당이면 정당, 노조면 노조, 시민단체면 시민단체, 종교단체면 종교단체, 농민회이면 농민회, 부녀회면 부녀회, 거룩한 말은 도맡아 하면서 오로지 집단이기주의에 혈안이 되어 있다.

김유신과 이순신을 존경한 박정희 때는 안 그랬다. 공부를 하더라도, 일을 하더라도, 놀더라도 국민교육헌장과 애국가와 태극기를 항상 앞장세웠다. 스탈린과 모택동에 의해 세워지고 유지된 반국가 집단에 대해서는 추호도 양보가 없었고 꿈속에서도 곁눈질하지 않았다. 데모를 하더라도 김일성 만세는 절대 입에 올리지 못했다. 광주사태 때도 이런저런 외부세력이 끼어든 게 분명하지만, ‘오판하지 말라!’는 말의 깃발이 곳곳에 나부꼈다. 일제시대와 6.25를 겪으면서 4.19의 혼란을 겪으면서 한국인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비로소 몸으로 배웠다. 국가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배웠다. 경제도 국가 주도로 이뤘다. 기업하는 이들도 기업보국의 정신으로 일했다. 가능하면 많이 고용했고, 가능하면 해고하지 않았고, 가능하면 사업을 자꾸만 키웠다. 국졸, 중졸 사원들에게 공부도 시켜주었다. 그들을 중졸, 고졸로 만들어 주었다. 세상에 이런 나라가 어디 있고, 이런 기업이 어디 있는가. 국가 전체로 흑자를 이룩해야만 까마득히 높은 미국과 일본을 따라갈 수 있다는 생각에 수출입국에 총력을 기울였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무슨 공부를 하더라도 일본을 따라잡겠다고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맨땅에 헤딩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서건 빈둥거리는 자는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서울대 법대 나왔네, 10년이 넘도록 인생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고시공부하는 자는 인간취급도 않았다.

그 시절 공부 잘하는 학생들에게 의사와 국회의원은 한참 우선순위가 밀렸다. 선진국이 되려면 과학기술이 발전해야 함을 나라 전체가 절감함에 따라, 60년대부터 공대와 자연대가 최고의 인기학과로 떠올랐다. 그것이 80년대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80년대는 대학 입학 후 인생관이 완전히 바뀐 자들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국가보다 계급을 앞세운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에게 국가는, 대한민국과 미국은 적이었다. 주적이었다. 국가보다 가문이나 패거리를 앞세운 자들 때문에 성장동력이 지난 20여년간 계속 떨어졌지만, 그 때 이공계로 간 인재들이 한국을 아직도 만만찮은 나라로 유지시키고 있다. IMF의 분류에 따르면 한국은 세계 10대부국(Ten Rich Countries)이다. 인구가 2천만도 안 되는 여러 나라들은 개인소득은 높을지 모르나 전체의 부가 한국에 어림없이 못 미친다. 인구가 1억이 넘는 나라들 중에 국가 전체의 부는 많을지 모르나, 질과 양 양쪽에서 세계10대 부국에 끼는 나라는 미국과 일본뿐이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만큼 이제는 다시 충과 효가 모순되지 않는,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새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문을 최우선하는 김정일에 의해, 2천만으로부터 지극 효도를 받고 나아가 7천만으로부터 지극 효도를 받으려는 스탈린 꼭두각시의 아들에 의해 반드시 대한민국은 6.25에 버금가는 쓰라린 경험을 맛볼 것이다. 그의 2백만 군대와 핵무기와 땅굴과 한국 내 동조세력은 장난감이 아니고 허수아비가 아니다.

(2009.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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