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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July 29, 2009

충무공 이순신 평전(17) - 최성재

충무공 이순신 평진(17) - 최성재

金庾信(김유신)을 모르는 어리석은 후손들

김유신, 지채문, 이순신(2)/신라의 忠, 고려의 義, 조선의 孝(3)
최성재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의 위인 가운데 김유신 장군(AD 595~673)보다 과소평가되고 폄하된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 후로 신채호의 민족사관과 김일성의 주체사관에 의해 김유신 장군은 남북 양쪽에서 한민족의 웅혼한 기상을 짜부라뜨린 원흉이자 주적(主敵)으로 낙인 찍혀 마녀 재판에 끌려가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김유신은 한국이 주도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자주적 평화 통일의 사표로 숭앙되었다. 교과서에도 그렇게 나왔고, 위인전에도 그렇게 나왔고, 1977년에 문을 연 경주의 통일전에도 그렇게 나왔다. 일본의 식민사관에 맞선 신채호의 민족사관(이것은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지만, 본인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악용됨)과 김일성의 주체사관이 엉뚱하게 야합하여 탄생한 민중사관이 주류보다 무서운 비주류로서 1980년대부터 한국의 주류 사관을 어용사관으로 맹공격하더니, 급기야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근현대사를 따로 떼어내는 데 성공하여 1970년대까지의 주류 사관을 식민사관의 짝퉁 실증사관으로 박물관의 칼집에 집어넣고 현대사에서 시작하여 고대사까지 역사의 새 칼로 난도질하는 새로운 관학(官學)으로 군림한다.

2009년 2월 26일 서울대 이태진 교수가 은퇴하면서 이러한 사정을 조선일보에 털어놓았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이 지금 교수가 됐고, 역사 관련 학회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대사를 여전히 민중(民衆)이나 계급 중심의 좌파적 역사관으로 보고 있는 게 문제다. 이미 유효성이 없는 것으로 결론 났는데…. 그들은 역사학을 너무 정치화했다. 전교조 역사관(歷史觀)이 정치화한 역사학의 대표사례이다.”

신라는 고구려가 멸망한 지 8년 만인 676년,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과 힘을 모아 음흉한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국토 크기와 한반도와 거의 같은 영국은 그보다 1000년 후 1707년에야 겨우 통일국가를 이룬다. 그러나 그 후 역사는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 한민족은 조선의 세종 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확정하지만, 대영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2차대전 이전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영토를 통치한다. 한민족의 조상은 영국보다 1000년이나 앞섰지만, 그 후손은 1000년 이상 뒤떨어졌다.

시원찮은 인간일수록 가문 자랑에 목숨을 건다. 바리바리 뇌물로 3일짜리 한성부윤이라도 지낸 적이 있는 가문은 우스꽝 족보를 국보 1호보다 소중히 여긴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폄하하는 자의 심리가 바로 그것이다. 어떤 강대국도 100년의 영광을 유지하기 힘들다. 반면에 부족 단위로 흩어져 있던 약소국도 100년이면 징기스칸의 몽골이나 누르하치의 여진처럼 세계 최강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 신라가 통일한 지 1000년 하고도 300년도 더 지났는데, 한국이 근세에 겪은 치욕을 개미새끼 한 마리 들어가지 못해야 마땅한 구중궁궐에서 국모를 외국의 일개 깡패로부터 보호하지도 못한 조선왕조 중후기의 몰락과 무능에서 찾지 않고, 기업으로 말하면 동네 구멍가게에서 세계적 대기업으로 성장한 신라를 흠모하고 따라 배울 생각을 않고, 왜 그 때 당나라와 맞먹는 세계 제국을 건설하지 않았느냐고, 통일신라는 용어 자체부터 엉터리고 그들에 따르면 ‘후기 신라’는 아예 태어나지 말고 고구려에 망했어야만 했다고 저주를 퍼부을까. 이건 전형적인 패배주의자의 넋두리다. 스스로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조상의 유물을 팔아 평생 호의호식하겠다는 게으른 패륜아의 거지 근성이다.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한국을 몹시 부러워한다. 아버지의 나라 케냐와 한국을 비교하는 심리가 그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1950년에 그의 아버지가 미국으로 유학 갈 때만 해도 케냐가 한국보다 잘 살았다며 케냐도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도 한국을 본받으라고 한다.

"In fact, Kenya was a more affluent country than South Korea when my father first came to the States to study (in 1950). At that time, Kenya's per capita GDP was higher than that of South Korea. But South Korea is now a developed and affluent country, while Kenya still
remains in severe poverty. There is no reason African countries cannot do what South Korea did." (Barak Obama)

같은 출발선상에 있었지만, 아니 출발선상에서는 월등히 유리했지만, 북한은 오늘날 가난에 찌든 케냐보다 못 산다. 자유와 평등은 아예 박물관 유리상자 속의 헌법에만 존재한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스스로 생산하지는 않고 물려받거나 빼앗거나 얻은 것을 소비만 하기 때문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깡패의 의리와 거지의 근성을 대물림하기 때문이다. 일제가 남겨준 공업시설, 조상이 물려 준 천연자원, 소련과 중국이 건네준 무상원조로 버티다가, 그것이 떨어지자 전세계에서 가장 비참한 죽음의 땅으로 변한 것이다. 쿠바 포함 옛 공산권 전체에서도 가장 비참한 저주의 땅이 되어 버렸다. 북한을 음으로 양으로 옹호하는 자들도 북한에는 단 한 명 살려고 가지 않는 것을 보면, 그들도 알 만큼은 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제는 김정일 집단이 민중사관으로 해롱해롱하는 한국을 봉으로 삼아 핵무기로 위협하여 간신히 권력만 유지한다.

한국은 김유신의 자주정신을 이어받아 선진국의 도움을 받되 스스로 노력하여 도움을 종자돈으로 삼아 열 배 백 배 키웠지만, 북한은 김유신의 자주정신을 팽개치고 권력 자체부터 소련공산당으로부터 받은 주제에 주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세계의 흐름과는 정반대로 60여년 내내 노동자농민을 배불리 먹이는 경제보다 동족학살이 최종 목적인 전쟁을 우선하고(선군先軍정책), 경제도 스스로 먹고 사는 체제인 시장경제를 말살하는 쪽으로만 역주행하여 전농지의 99.99&per;를 차지하는 협동농장의 생산이 발톱 사이의 틈새처럼 작은 논두렁 밭두렁의 생산보다 적게 만들었다. 지금도 중국에 빌붙어 중국의 속마음을 스스로의 생각인 양 미국을 향해 거칠게 표현하고 있다. 스스로 먹고살 수 있는 방법 곧 개혁개방 정책은 모조리, 원천적으로 포기하고 강짜로 빼앗거나 공짜로 얻어먹을 궁리만 한다.

김유신은 충성의 화신이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의 화신이다. 그는 가족보다 국가를 우선했다. 전쟁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출전 명령을 받자 집 앞의 우물가에게 물만 한 모금 마시고, 물맛이 그대로 라며, 바로 전쟁터로 달려갔다. 이런 장군의 휘하에 약졸이 있었을 리 없다. 개인의 권력보다 왕의 권력을 우선했다. 가문의 영광보다 국가의 영광을 우선했다. 아들 원술이 하급장교로 패전한 전쟁에서 살아서 돌아오자, 하급장교로서 책임이 없다는 것을 내세워 왕이 애원함에도 불구하고 아들과 의절하여 죽을 때까지 얼굴 한 번 안 보았다. 패전이 뻔한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가족을 스스로 살해한 백제의 계백장군 못지않게, 김유신도 충성 앞에서는 독했다. 원술이 큰 공을 세운 후에도, 김유신은 이미 저 세상의 사람이 되었지만, 그 부인은 끝내 아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효보다 충을 중시한 김유신의 사상은 죽고 나서도 가풍으로 서슬 퍼렇게 살아 있었던 것이다. 국가가 없으면 가문도 개인도 없다는 것을 김유신은 몸으로 실천하고 행동으로 보였다. 백척간두에 선 나라에서는 충이 곧 효(忠卽孝)요, 충이 효보다 앞서야 함(忠必先於孝)을 언행일치로 보여 주었다.

그런 충성심으로 김유신은 삼국 중 제일 약하여 동네북 신세였던 신라를 백제와 고구려는 물론 세계최강 당나라와도 당당히 맞서는 강국으로 키우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도움은 청했으되, 당나라에 비굴하게 군 적이 없었다. 사비성에 쳐들어가기 전에 사소한 일로 트집 잡아 소정방이 까불자 바로 칼을 빼들고 소정방부터 베려고 들었다. 그러자 소정방은 바로 꼬리를 말았다. 백제 멸망 후 이간책으로 당나라가 김유신과 김인문과 김양도 세 사람에게만 큰 상을 내리려고 하자, 김유신은 그 속셈을 꿰뚫어보고 한 마디로 이를 거절했다. 당의 야욕을 항상 경계하고 있다가, 당나라가 사비성에 성을 쌓고 신라를 침범하려고 함에 무열왕이 벌벌 떨자 ‘개도 주인이 자신을 해롭게 하면 그 발꿈치를 문다’는 논리로 안심시키고 왕을 설득하여 당나라와 일전을 준비함으로써 당나라가 스스로 물러가게 만들었다.

소정방이 당나라에 돌아가자, 당의 황제 고종이 왜 신라도 꿀꺽 삼키지 않았느냐고 힐책했다. 이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신라는 그 임금은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들은 충성으로써 나라를 받들고 아랫사람은 그 윗사람을 친부형처럼 섬기고 있으니, 비록 나라를 작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재호 역

新羅其君仁而愛民, 其臣忠而事國, 下之人事其上如父兄, 雖小不可謀也(삼국사기 김유신전)

신라가 이런 나라가 되는 데, 김유신의 공이 가장 컸다고 본다. 그는 능히 왕위를 찬탈하여 새 왕조를 세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삼국일통의 꿈은 사라지고 여차하면 신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조카인 문무왕에게도 그는 신하로서의 예를 깍듯이 취했다. 그리하여 비담의 난 이후에 신라는 내분이 사라졌다. 백제와 고구려가 내분에 휩싸여 나당연합군이 쳐들어가기 전에 안으로 붕괴하던 것과는 선연히 비교된다.

이순신 장군은 충(忠)이 문자와 말의 숲에서만 존재하고 효(孝)만 방방곡곡 가가호호 난무하던 조선 중기에 태어나, 경이롭게도 충과 효를 일치시켰다. 일찍이 1583년 함경도의 건원에서 근무할 때 뒤늦게 아버지의 별세를 알자 그 옷차림 그대로 집까지 쉬지 않고 말을 달려가 3년상을 치렀다. 재상 정언신이 공의 몸이 상할까 상복으로 갈아입고 가라고 했지만, 일단 상복으로 갈아입으면 천천히 가야 하기 때문에 아산에 이르러서야 성복(成服)했다고 [이충무공 행록]에 기록되어 있다.

백의종군할 때는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하늘이 노래지도록 펄쩍펄쩍 뛰면서 통곡했지만, 죄인의 몸으로서 국법을 지켜 3년상은커녕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주검보다 못한 허깨비 몸을 이끌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갔다.

홍(찰방)과 작별하고 흥백의 집에 이르렀는데, 조금 있다가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며 가슴을 치고 펄쩍펄쩍 뛰었는데, 하늘이 온통 캄캄하였다. 곧 해암에 달려가니 배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가슴이 찢어지듯 애통함을 어찌 다 적을 수 있으랴. (난중일기 1597/4/13)

與洪告別 到興伯家 有頃 奴順花至自船中 告天只訃 奔出擗踊 天日晦暗 卽奔去于蟹巖 則船已至矣 路忙慟裂 不可盡記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 초계 변씨는 전라좌수영 부근에 머물다가 아들이 옥에 갇히자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이에서 보듯이 이순신 장군은 어머니를 아예 전쟁터인 전라도에 모시고 드문드문 찾아갔다. 실은 그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기도 했다. 이순신은 원균의 경상우수영을 대부분 회복하여 경상우수영 소속이었던 한산도에 삼도 수군통제영을 두고 견내량과 한산도를 오가며 지휘했기 때문에, 왜군은 나라에는 충성을 다했으나 어버이 임금에게는 효도를 다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이렇게 통치하는 데가 바로 북한이요, 운동권 대통령들의 한국) 수군통제사가 서울로 압송되기 전까지는 감히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은 넘볼 수 없었다. 전방 가까이에 모신 것은 국가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모순됨이 없이 하나로 묶은 경이적인 행위다.

이순신 장군의 효심은 곡진하여 난중일기 곳곳에 나타나 있다.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다. 왜적이 잠잠할 때, 왜적 13만을 벌벌 떨게 만든 용호(龍虎) 장군이 뵌 지 3년 만에 손이 부르트도록 정신없이 백발을 휘날리며 노를 저어 달려가 백발이 성성한 어머니를 찾아뵙고 다소곳이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은 전쟁터의 한가운데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한켠에 함초롬하게 피어 있는 한 송이 들꽃처럼 아름답다.

맑음. 하루 종일 부랴부랴 배를 저어 밤 10시에 어머니 앞에 이르니, 백발이 무성하였는데, 나를 보고는 놀라 일어나셨다. 숨이 가쁘셔서 아침저녁을 보전하기가 어려우셨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밤새도록 위로하여 마음을 기쁘게 해 드렸다. (난중일기 1596/윤8/12)

十二日丙子 晴 終日促櫓 二更到 天只前 則白髮依依 見我驚起 氣息奄奄 難保朝夕 含淚相持 達夜慰悅 以寬其情

맑음. 아침 식사할 때 곁에서 모시고 앉아 진지를 떠드리니 대단히 기뻐하시는 빛이었다. 늦게 하직인사를 드리고 본영에 돌아왔다. 오후 6시경에 작은 배를 타고 밤새도록 정신없이 노를 저었다. (난중일기 1596/윤8/13)

十三日丁丑 晴 朝食侍側而進 則多有喜悅之色 晩告辭到營 酉時乘小船 促櫓終夜

이보다 전에 이순신 장군은 체찰사 이원익에게 휴가 청원서를 내어 허가를 받고 잠시 짬을 내어 어머니를 뵈었다. 그 편지는 보는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눈물 없이는 읽지 못하게 만든다. 충과 효가 어떻게 조금도 충돌하지 않고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지 이로써 잘 알 수 있다. 길지만 전문을 소개한다.

살피건데 세상일이란 부득이한 경우도 있고 정에는 더할 수 없이 간절한 대목도 있는데, 이러한 정으로써 이러한 경우를 만나면, 차라리 나라 위한 의리엔 죄가 되면서도 할 수 없이 어버이를 위하는 사정으로 끌리는 수도 있는 듯합니다. 저는 늙으신 어머니가 계셔서 올해 여든 하나이온데 임진년 첫 무렵에 모두 함께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혹시 구차하더라도 (목숨을) 보전해 볼까 하고 드디어 뱃길로 남쪽으로 내려와 순천 땅에 피난살이를 하였사온 바, 그 때에는 다만 모자가 서로 만나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겼을 뿐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듬해 계사년에는 명나라 군사에게 휩쓸리어 적들이 숨고 도망가니, 이는 정히 떠돌던 백성들이 모두 제 고장을 그리워할 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음흉한 적들이라 속임수가 많고 온갖 꾀를 다 부리니, 적이 비록 한 모퉁이에 진 치고 있다 한들 어찌 그것이 예사로운 일이겠습니까? 다시 만일 무지하게 쳐들어오면 그대로 어버이를 주린 범의 입 속에 넣는 격이 되겠기에 얼른 돌아가지 못한 채 그럭저럭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저는 용렬한 재목으로 무거운 소임을 욕되이 맡아 일에는 허술히 해서 안 될 책임이 있고 몸은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어 부질없이 어버이 그리운 정곡만 더할 뿐이요, 자식 걱정하시는 그 마음을 위로해 드리지 못하는 바, ‘아침에 나가 미처 돌아오지만 않아도 어버이는 문밖에 서서 바라본다’하거늘 하물며 못 뵈온 지 3년째나 됨이리까. 얼마 전에 하인 편에 글월을 대신 써 보내셨는데, “늙은 몸의 병이 나날이 더해 가니 앞날인들 얼마 되랴. 죽기 전에 네 얼굴 다시 한 번 보고 싶다.”하였더이다. 남이 들어도 눈물이 날 일이어든 하물며 그 어머니의 자식된 사람이오리까. 그 기별 듣잡고는 가슴 더욱 산란할 뿐 다른 일에는 마음이 케이지 않습니다.

제가 지난 날 계미년에 함경도 건원의 권관(權管)으로 있을 적에 선친이 돌아가시어 천 리를 분상(奔喪)한 일이 있었사온 바, 살아 계실 때 약 한 첩 못 달여 드리고 영결조차 하지 못하여 언제나 그것으로 평생 유한이 되었습니다. 이제 또 어머니께서 연세 이미 여든을 넘으시어 해가 서산에 닿은 듯하온 바 이러다가 만일 또 하루아침에 다시는 뫼실 길 없는 슬픔을 만나는 날이 오면, 이는 제가 또 한 번 불효한 자식이 될뿐더러 어머니께서도 지하에서 눈을 감지 못하시리이다. 즈윽이 생각건대 왜적들이 화친을 청함은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일이며 또 명나라 사신들이 내려온 지가 벌써 언제인데 적들은 아직껏 물 건너가는 형적이 없으니, 앞날에 닥쳐 올 화단이 응당 전일보다 더 심할 듯합니다. 그러므로 이 겨울에 어머니를 가 뵈옵지 못하면 봄이 되어 방비하기에 바쁘게 되고서는 도저히 진을 떠나기가 어려울 것이온즉, 각하는 이 애틋한 정곡(情曲)을 살피시어 몇 날의 말미를 주시면 배를 타고 한 번 가 뵈옴으로 늙으신 어머니 마음이 적이 위로될 수가 있으리이다. 그리고 혹시 그 사이 무슨 변고가 생긴다면 어찌 허락을 받았다고 하여 감히 중대한 일을 그르치게야 하오리까. [체찰사 이원익에게 보내는 서신 이은상 역]

비록 내용은 다르지만, 제갈량의 [출사표]에 비견될 명문이다.

이에 대해서 이원익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지극한 정곡이야 피차에 같습니다. 이 글월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사(公事)에 관계된 일이므로 나로서도 얼른 가라 말라 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원익의 답서)

우선 당장은 이렇게 답했지만, 이원익은 곧 휴가를 허락하여 이순신 장군이 어머니를 잠시 찾아뵙게 하고 함께 전라도 지역을 순시한다.

변씨 대부인도 나라 사랑이 곡진했다. 전쟁터로 가는 아들에게 나라의 수치를 눈처럼 하얗게 씻으라고 등을 떠밀다시피 하며 보낸 적이 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다.

맑음. 아침식사를 한 뒤에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어여 퍼뜩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눈처럼 하얗게 크게 씻어야 한다(大雪國辱)."고 두 번 세 번 타이르시며, 조금도 떠난다는 것에 안타까워하지 않으셨다. 선창에 돌아오니 몸이 좀 불편한 것 같다.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난중일기 1594/1/12)

正月十二日辛卯 晴 朝食後 告辭天只前 則敎以好赴 大雪國辱 再三論諭 小無以別意爲嘆也 還到船倉 氣似不平 直入北房

(2009.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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