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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May 09, 2009

거북선도 원균에겐 무용지물(16)-최성재

거북선도 원균에겐 무용지물

임란 때나 현재나 원균의 무리는 여전히 득세하고 있다.
최성재


올해도 어김없이 대한의 아들딸들이 거제도의 칠천량 근방에서 거북선의 잔해를 찾고 있다. 그 곳은 이순신 장군과 이억기 장군이 6년간의 무수한 전투에서 거의 한 척도 잃지 않고, 눈물과 피와 한숨으로 임진년보다 두세 배 정도 늘려 놓았던 전라좌· 우도의 판옥선과 거북선(철갑선은 총 3척으로 추정)을 하룻밤 만에 몽땅 잃은 장소다. 도망간 12척 외에는 그렇게 허무하게 잃어 버렸다. 서해안처럼 갯벌이 발달했으면 모를까, 현대로 말하면 이지스함이나 원자력잠수함에 해당하는 세계최초 철갑선의 잔해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승리한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수한 무기체계 곧 조선의 주력함인 판옥선과 일본보다 앞선 화포(火砲)도 빼놓을 수가 없다. 거북선도 이순신 장군에 앞서 누군가 먼저 발명했을 수도 있다. 영웅이나 위인이라면 말만 들어도 머리에 김이 모락모락나는 위선적 절대평등 민중파들은 이런 사실에서 눈이 번쩍 뜨인다.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이 올라선 받침대를 절반으로 확 낮출 빌미를 발견한 것이다. 영웅사관도 안 되고, 독재정권의 우상화도 안 된다고, 그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어리석은 자들을 쏘아본다. 도대체 누가 영웅사관을 들먹였으며, 도대체 어느 정권이 독재정권이며, 도대체 우상화는 또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같이 절대평등의 칼을 휘두르며 뒤로는 절대권력을 추구하고 구축하고 휘두른 자들에게나 어울린다.

그것은 이순신 장군을 일개 봉건주의자로 깎아 내리고 스스로를 살아 있는 태양신으로 끌어올린 김일성에게 딱 어울리지, 이순신 장군의 멸사봉공과 애국충정과 실용주의를 오늘에 되새기고 따라 배움으로써 외국의 구호식품으로 연명하던 대한민국을 집집마다 자가용이 있고 집집마다 대학생이 있는 나라로, 초등학생도 너도나도 손전화가 있는 나라로 만드는 데 초석과 기둥과 대들보를 놓고 세우고 얹고 또한 16개국의 도움으로 간신히 자유민주를 지킨 대한민국이 다시는 전쟁의 비극을 겪지 않도록 자주국방의 기틀을 놓고 정신무장을 단단히 시키기 위해 노심초사한 박정희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이가 앉으신 데, 그이가 손잡으신 데, 그이가 눈여겨보신 데, 하면서 울먹거리는 안내자가 속으론 이만하면 감시원 동무에게 잘 보였겠지, 설마 생활총화에서 책잡힐 일은 없었겠지, 그건 그렇고 오늘 저녁은 무얼로 때우나 눈치보고 걱정하는 땅에나 어울리지; 노동자와 농민의 피와 땀으로 된 것이지, 정부와 대기업이 정경유착하여 중소기업을 착취해서 된 것이지, 누군들 그 정도야 못하랴, 문제점이 더 많아 차라리 천천히 발전한 게 훨씬 나았을 거야, 그건 그렇고 우리 애가 미국에서 잘 지내나, 이번 황금연휴에는 아시아를 떠나 유럽으로 확 날아봐, 하며 자유와 풍요를 주체하지 못하는 나라에서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임진왜란 때 분명히 조선은 몇몇 군데 이론상으로는 만만찮은 저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전쟁에서 활용한 사람은 진주대첩 이전에는 육지에도 없었고 옥포대첩 이전에는 바다에도 없었다. 꿈속에서도 없었다. 그저 달아나기 바빴다. 임금부터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기에 바빴다. 원균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산성과 동래성에서 약간의 저항을 받은 것 외에는 한양까지 무풍지대였다. 16만 전쟁의 달인 왜적들에게 성곽도 산도 강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혀끝과 붓끝으로 충효를 외치던 조선 사람은 바람소리만 들어도 뿔뿔이 흩어졌다(망풍개궤望風皆潰--明史 조선열전). 평소에 전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에 민심을 전혀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평소에 제도를 전혀 갖춰 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육지에서는 조선군이 스스로의 역량을 잘 발휘한 일이 크게 두 번 있었다. 임진년(1592년 10월)에는 진주에서 장한 일이 있었고, 계사년(1593년 2월)에는 행주에서 통쾌한 일이 있었다. 성문을 걸어 잠그고 화살도 쏘고 대포도 쏘고 돌도 던지고 고춧가루도 뿌리고 끓는 물도 끼얹어 왜적을 물리친 것이다. 만약 육지에서 그렇게 곳곳에서 싸웠더라면, 왜적의 칼과 조총과 군화에 그렇게 비참하게 유린당했을 리가 없다. 만약 바다에서도 경상좌수영의 박홍과 경상우수영의 원균이 바다의 요새를 스스로 가라앉히지 않고 군인을 자진 해산시키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더라면, 행군하듯이 압록강을 향해 달려오는 왜적을 보고 명나라가 조선이 왜적의 앞잡이가 되어 압록강을 넘어오는 게 아닐까, 하고 크게 의심할 정도로 일방적으로 도륙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공포의 대왕에게 사로잡히자, 판단력이 천 리 만 리 달아나서 거대한 타조가 모래에 머리를 파묻듯 이고 지고 너나없이 모두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막상 전투를 벌이려고 사람을 모아도 모이는 사람이 없었다. 모여도 까마귀 떼요, 오리 떼요, 염소 떼요, 참새 떼였다. 장군도 없었고 병사도 없었다. 제승방략제(制勝方略制)에 의해, 겨우 몇 백 명 웅성웅성 모여 있으면, 중앙에서 언제 장군이 내려올지 몰랐고, 그러다 보면 모였던 상투와 바지들은 노모가 걱정되고 제사 지낼 일도 있고 암소가 송아지 낳을 때도 되었고 아내 엉덩이도 삼삼하여 하나둘 사라졌다. 어찌 중앙에서 생판 처음 보는 장군이 와도 데면데면 도무지 말이 먹히지 않았다. '우향우, 좌향좌'도 안 되었다. 무기도 가관이었다. 칼은 죽은 돼지 베기도 어려웠고, 활은 제멋대로 춤을 췄다. 대포? 꿈같은 소리다. 이순신 장군이 펑펑 쏘니까 어디에나 있었을 것 같지만, 진주성과 행주산성 외에는 한 문도 안 갖춰졌다. 한양에 제일 많이 있었지만, 도원수 김명원은 드넓은 한강에서 단 한 방도 못 쏘고 한강에 던져 넣었다. 남은 화약은 신분의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노비들이 노비문서를 태우는 등 백성이 지른 불에 의해 왜군을 환영하는 거대한 폭죽처럼 그냥 터져 버렸다.

평소에 장부에 있는 대로 제대로 군사를 모으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무기를 갖추고 배를 건조하고 군량미를 갖춘 곳은 조선 전체에서 전라좌수영(5관5포) 딱 한군데밖에 없었다. 전라우수영(15관12포)은 그나마 이순신 장군이 다도해를 지켜주는 바람에 절반 정도는 갖췄다. 관할수역은 약 3배였지만, 군인이나 군선은 전라좌수영과 거의 같았던 것이다. 첫 전투 후 약 한 달 후에야 이순신 함대와 연합함대를 이룬 다음에 비로소 이억기 함대도 제대로 전력을 갖추게 되었다. 박홍의 경상좌수영은 한 척도 없었고, 원균은 혼비백산 도망간 3척과 합류했는데 군사를 제대로 못 갖추어 뒤에서 졸졸 따라다니며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적의 머리나 베었다.

전라좌도와 전라우도의 연합함대는 천하무적이었다. 야구로 말하면, 완봉승 아니면 완벽(퍼펙트)승이었다. 그런 천하무적의 함대도 원균이 지휘하자, 큰 전투 한 번에 적에게 실컷 농락당하다가 완벽하게 포위되어 화살도 화약도 식량도 물도 다 떨어져서 공포에 사로잡혀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억기 장군을 포함하여 여러 호랑이 장군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섬뜩섬뜩 빛나던 이리 병사들도 그런 상황에서 대포 한 방 제대로 못 쏘고 화살 한 대 제대로 못 날리고 바다의 용 거북선과 함께 일패도지(一敗塗地)했다. 허망해도 그렇게 허망할 수가 없었다.

반면에 이순신 장군은 도망친 12척에 전라우수영에 남아 있던 1척 이렇게 13척으로 무려 적선 1000척 중 133척을 상대로 하여 또다시 완승(完勝)을 거두었다. 단 한 척도 잃지 않고 칠천량의 승리로 기세등등해진 왜적의 배만 일방적으로 두들겨 부순 것이다. 모자라는 힘은 울돌목의 거센 물살로 보충했다. 그것도 적어도 1년, 길면 5년 6년 손발을 맞춘 군사를 데리고 얻은 승리가 아니라, 허겁지겁 긁어모아 노 저을 줄도 모르고 활 쏠 줄도 모르고 대포에 불붙일 줄도 모르는 사람들을 불과 한 달 만에 훈련시켜 이룬 대첩(大捷)이었다. 원균이 도원수 권율에게 곤장을 맞고 홧김에 자포자기 심정에 본의 아닌 전투를 치러 그렇게 되었다고, 선조가 한 말을 그대로 복창하면서 두둔해 주는 사람도 심심찮다. 독선과 위선과 거짓말로 밤하늘의 별보다 빛나는 노무현이나 김대중이나 김영삼의 정치자금을 민주세력이라며 두둔해 주는 논리와 비슷하다. 도원수가 무슨 자격으로 삼도수군통제사에게 곤장을 때릴 수 있는가.

첫째, 그것은 1만 명의 육군도 육성하지 못하는 조정을 향해 터무니없이 육군 30만의 협공이 필요하다는 등 전쟁할 의사가 아예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선조가 내린 명령에 따른 일이었다. (선조실록 1597년 6월 26일-- 명령체계를 제멋대로 무시하는 원균에 대해 왕의 권한을 위임받아, 도원수 권율이 실지로 통제사 원균에게 곤장을 친 것은 1597년 7월 7일이었다.)

둘째, 그것은 임금이 몰래 비망기를 내려 죽이라고 하여 아무 죄 없이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던 이순신 장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몇 대 맞았을 뿐 그는 여전히 천하무적 조선 수군의 최고사령관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죽도록 맞고 요새로 말하면 대장 또는 중장이 이등병으로 강등되었다. 겨우 12척으로 이름만 거창한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하고는 수군을 없애고 육군의 꽁무니나 따라다니라는 친절한 명령도 받았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그 명령을 거부하고 조정을 설득한 후 왜병을 다시 한 번 물고기 밥으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준비한다.

셋째, 원균의 완패(完敗)는 전라좌수영의 2.4배되는 경상우수영(8관16포) 수군을 싸움 한 번 않고 수장시킨 것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일본군은 4월 30일이나 5월 1일에 경상우수영의 수역인 김해부에 처음 들어왔는데, 그는 이순신 장군에게 공문을 보내는 4월 28일에 이미 김해에서 2백리 떨어진 사천에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게 꽁꽁 숨어 있었다. 상관인 경상순찰사 김수로부터 전투 명령을 받은 4월 18일부터 죽어라고 달아난 것이다. 둔갑술의 도사요, 타임머신의 운전자였다면 모를까, 그는 경상우수사 단독 지휘로 왜군과 싸운 적이 전혀 없다.

넷째, 최고사령관은 어떤 경우에도 퇴로를 마련해 두어야 한다. 이순신 장군이 자유자재로 열고 닫았던 견내량의 전술적 가치만 제대로 파악했으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조선수군의 절반 이상은 구할 수 있었다. 허겁지겁 견내량을 넘어 도망간 배설의 12척이 온전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남해의 문경새재, 바다의 천연요새 견내량에 전선 너덧 척만 배치하면 적선 100척도 능히 막을 수 있었다.

아무리 무기가 좋더라도 그것을 쓸 줄 모르면 무용지물이다. 더구나 그 무기를 평소에 확보해 두지 않으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문제일 뿐 현실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또한 고된 훈련으로 군사들에게 숙달시키지 않으면, 설령 적보다 우세한 무기를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있더라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원균은 육지와 바다의 다른 절대다수의 장군과 마찬가지로 준비가 전혀 없었다. 다른 사람에 의해 완벽하게 준비된 것도 막상 자신의 지휘체계에 들어오자, 자신과 군대를 파멸로 이끄는 자살 무기로 사용했다. 재목이 되지 못하는 사람이 연줄과 뇌물과 선전선동에 의해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참극(慘劇)이다. 특히 위기에는 더 심각하여 이런 자는 그 위기를 결정적으로 키운다.

원균의 인물됨은 그의 친척뻘인 안방준(安邦俊)의 <은봉전서(隱峯全書)>에 잘 나타나 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나 유성룡의 <징비록>, <선조실록>에 나온 것과 비슷하지만 친척의 기록이라 더 믿을 수 있다.

이 글에서 보면, 오로지 원균은 실력이나 공적과 무관하게 남을 헐뜯고 연줄을 동원하고 뇌물을 바쳐 어떻게든 입신양명하기만 바랐지, 나라나 겨레를 위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통제사에 오른 것으로 ‘꿈에도 소원’은 다 이뤄졌다. 인품도 그렇지만 장군으로서의 자질도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동네 패싸움에서도 대장 노릇은 하지 못하고 그저 졸병 역할밖에 못할 자였다. 전략전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이 기껏 무턱대고 용감히 싸운다는 것이었다. 그저 적이 멀리 있으면 활을 쏘고 가까이 있으면 칼을 휘두르고 칼이 부러지면 맨주먹으로라도 죽기 살기로 싸운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당하랴, 라며 으스대고 있다. 하늘도 놀라도 땅도 놀라는 조총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화살처럼 빠른 적의 전함에 어떻게 대처하고, 첩보전의 귀신인 적에 대한 정보는 어떻게 얻고, 거친 바닷길을 어떻게 오가고, 해안가와 섬 곳곳에 구축한 난공불락의 왜성을 어떻게 피하느냐 등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다. 이에 대해 안방준의 중부(仲父) 안중홍은 비웃으며 개탄한다. 나라를 걱정한다.

원균은 나의 중부 동암공의 처 원씨의 친척이다. 그는 통제사로 부임하는 날에 중부를 뵙고 인사하러 들렀다.

원균: 저는 이 직위를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단지 순신에게 겪은 치욕을 씻는 것이 통쾌할 뿐입니다.

안중홍: 영공(令公)은 마음을 다해 적을 격파하셔야지요. 순신보다 뛰어난 공적을 세우는 것이 곧 치욕을 씻는 일이지, 그저 순신을 대신한 것을 갖고 통쾌하게 여기고 어찌 그것을 일러 치욕을 씻었다고 하오?

원균: 저는 적을 만나 전투가 벌어지면,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엔 편전(片箭: 半기계식 활)을 쏘고 가까우면 장전(長箭: 수동식 활)을 쏘고 바로 곁에서 백병전이 벌어지면 칼을 휘두르고 칼이 부러지면 맨주먹으로도(挺은 ‘몸을 빼다’는 뜻인데, 혹자는 梃으로 보아 막대기나 곤봉으로 보기도 함) 싸울 겁니다. 그러니 이기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안중홍: (비웃으며) 대장된 자가 칼이나 맨주먹으로 싸워야 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되겠소?

원균이 가고 나서 중부가 나한테 말했다.

“원균의 사람됨을 살펴보니, 나랏일이 잘되기는 글렀더라.”

均是余仲父東巖公妻元氏之姓親也。其赴統制之日。歷拜于仲父。均曰。吾非以此職爲榮。惟以雪恥舜臣爲快也。仲父曰。令公能盡心破賊。使其功業出於舜臣之上。則可謂雪恥。徒以代舜臣爲快。則豈可謂之雪恥也。均曰。吾遇賊而戰。遠則片箭。近則長箭。而及其搏擊也。用之以劍。劍折。隨之以挺。則蔑不勝矣。仲父哂曰。爲大將。至於用劍與挺。則其可乎。均旣去。仲父謂余。曰觀均爲人。大事去矣。

--<은봉전서, 白沙論壬辰諸將士辨>--

안방준은 원균의 공적에 대해서도 백사 이항복의 글을 조목조목 통박하면서 ‘원균의 공적은 남의 힘 덕분에 얻었다’는 이항복의 완곡한 주장조차도 전적으로 부정한다. 공적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고 통박한다. 주륙(誅戮)당할 죄밖에 없다고 한다(有罪可誅。無功可記). 이건 이항복이 236명의 선조실록 편찬자 중에서 서열 2위인 감사(監事)로 있었지만, 마지막에 편찬자들이 목소리를 모아 원균에 대해 논평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서열 1위 영사(領事)는 기자헌이었다. 그들은 당쟁에 초연했던 이순신 장군과 어쨌건 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동인(東人)이나 남인(南人)과는 원수지간인 서인(西人) 또는 북인(北人) 쪽이었다. 유성룡의 죽음에 이르러 그의 졸기(卒記)에서 상당히 감정적이고 부정적으로 논평한 것이 있어서 선조실록의 편찬자들도 당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찬탄해 마지않았고, 원균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경멸해 마지않았다.

원균의 전후(前後) 전투에서 공적이라고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당시 여러 장수들이 왜적을 격파할 때에, 그는 뒤에 졸졸 따라다니면서 (바다에서 둥둥 떠다니는) 적의 목을 베었다. 여러 장수들이 각기 획득한 것을 나누면서 원균에게도 나눠주었다. 원균이 얻은 것이 여러 장수 가운데 가장 많았다. 그래서 그 당시 진중의 사람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얻은 밥이 원래 밥보다 많다’고 수군거렸다. 원균이 이순신에게 입은 은공은 측량할 수가 없다. 그러나 원균은 간교한 꾀를 내어 허장성세로 임금을 속여 심복(心腹) 군관을 남 먼저 몽진 간 임금에게 보내어 (엉터리 전공을 아뢰었다). 급기야 임금이 한양에 돌아오자 차츰 공론이 일게 되면 실상이 들통 날까 봐, 원균은 두려워했다. 그는 적반하장으로 연줄을 동원하고 뇌물을 써서 이순신을 거짓으로 모함했다. 조정에 통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마침내 잡혀서 국문(鞠問)을 당하고, 원균이 그를 대신했다. 5, 6년 동안 완벽하게 갖춘 전함과 군사가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러던 중) 하루아침에 몽땅 사라졌다. 원균의 죄는 진실로 말로 다할 수가 없다. 임무를 맡은 신하로서 어찌 (그렇게) 방심할 수 있는가!

대체로 임진왜란 당시 육군과 수군의 사적(事蹟)은 조정이 단지 여러 장수들의 일방적 장계에 따라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기록된 것이란 게 종종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元均則於前後之戰。頓無尺寸之功。而當諸將破賊之時。隨後取馘。諸將又各以其所獲。分載於均。均之所得。最多於諸將。故其時陣中。有收匙飯多本飯之說。均之於舜臣。恩固不貲。而均便生奸計。虛張聲勢。欺罔君父。使其腹心軍官。先達于行朝。及大駕還都。公論稍行。則均恐其情狀敗露。反因緣行賂。誣陷舜臣。無所不至。以爲有異志。舜臣終至於拿鞫。均代之。五六年完裝舟師。缺器具。一朝蕩盡。均之罪。固不足道也。任事之臣。於心安乎。大抵壬辰之變。水陸事蹟。朝廷一從諸將之狀啓。故凡所記錄。種種無一可信。--은봉전서, 釜山記事--

(2009. 4. 28.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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