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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November 17, 2007

義人의 일생

지난 몇 년간 워싱턴을 오르내리면서 주로 만난 사람들은 김정일의 생지옥에서 탈출해나온 탈북자 동지들이었다. 오늘은 자기 스스로 김정일의 생지옥으로 걸어들어간 김동식 목사님의 사모님을 만나러 내려간다. 지난 몇 해동안 끌고 돌아다닌 문국한 씨의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에서는 2000년 1월 연길에서 피랍납북된 김동식 목사님의 구명운동 일환으로 김목사님이 1996년 아틀란타 올림픽에서 북한의 유도선수 계순희 양과 함께 찍은 사진을 걸어놓고 구명탄원엽서를 사람들에게 돌렸었다.

김목사님 부부는, 돈이 없어 올림픽에 참여치 못한다는 북한선수단 70명을 평양에서 아틀란타로 모셔와(?) 지극정성 돌보아줬다. 한 사람당 4불만 달랑 들고온 북한선수들에게 교포들을 동원하여 잘 곳을 마련해주고 세 끼 밥을 해먹이고 선수들의 옷을 매일 빨아주고, 술없이는 밥을 못 먹겠다는 코치들의 생떼에 사모님은 난생 처음 술가게에 가서 술도 사다가 먹이곤 매일 “이 죄(?)를 용서해주십사”고 기도하셨단다. 이런 지극정성이 통했던지, 체구가 조그만 다윗같이 예쁘게 생긴 계순희 선수는 아틀란타 올림픽에서 골리앗같은 일본 유도선수를 누르고 금메달을 땄다.

김동식 목사님의 평생은 성경에 나오는 義人 욥같이 고통과 수난의 연속이었다. 일찌기 1968년에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게 되었고, 자신이 장애자가 되면서 딴 장애자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86년 또 교통사고를 당하여 아버님과 아내를 한꺼번에 잃었다. 어머님은 간신히 살아났으나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수술을 몇 번이나 하고 몸 속에 강철봉을 박는 대수술까지 하셨다 한다. 김목사님은 돌아가신 사모님과의 사이에서 두 아이가 있었는데 또 다섯 아이를 입양하여 자녀가 모두 일곱이었다 한다. 이런 분에게 지금 사모님 정영화 전도사는 시집을 갔다. 못 말리는 분들이다.

김동식 목사님은 88 서울 올림픽에서도 장애자 올림픽을 돕다가 등소평의 장애자 아들을 만나 한중수교 이전부터 중국을 드나들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 땅에 숨어사는 탈북난민들을 만나게 되었다. 김목사님은 장애자들보다 더 큰 일이 난 탈북난민들을 돌보리라 결심하셨다 한다. 연길에 식당을 차리고 9군데 탈북자 은신처를 마련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셨다.

아틀란타 올림픽의 이 恩人을 김정일은 김동식목사 납치공작조를 중국에 보내어 북한으로 잡아 끌고가서, 예수를 부정하면 살려주마, 주체사상을 믿으면 살려주마, 달래고 때리고 굶기다가 죽여버렸다 한다. 80킬로였던 체중이 어떻게 35킬로로 내려갈 수가 있을까? 믿기지가 않는다. 올해 팔순이신 김목사님의 어머님은 아들의 죽음을 믿지 않으신다 한다. 착하디 착한 내 아들은 언젠가 내 품으로 돌아올 것이다.

김동식 목사님이 마지막 길을 떠나실 때, 사모님은 말리셨다. 가지 마세요! 목사님이 대답하시길, 내가 안 가면 이 한겨울 추위에 얼어죽고 배고파 죽어가는 꽃제비 아이들을 누가 거둘 것인가!

사모님과 함께 이틀을 보냈다. 일본 엔지오들도 만나고 일본 미국 국회의원들도 만나고 북한자유연대 회원들도 만나서, 김정일아! 납북자들을 가족에게 돌려 보내라! 부시 대통령! 납치살인범 김정일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풀어주면 안 됩니다! 안 됩니다! 라고 부르짖었다. 이제는 사모님과 헤어질 때가 되었다.

“사모님, 사모님 덕분에 이틀동안 비기독교인인 제가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선생님, 또 만나요. 다음에는 이렇게 계속 떠들지 않을게요.”

2007년 11월 17일
김정일의 대학살 전시회/남신우가 정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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