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k-projects

Thursday, November 02, 2006

[링컨을 배우자] 링컨은 철저한 '헌법의 수호자'

주간조선 창간 38주년 특집기사 - 2006년 10월 23일

[링컨을 배우자] 링컨은 철저한‘헌법의 수호자’

링컨 대통령은 독했다. 그 착하고 정직하고 위대한 링컨 대통령이 독했었다고? 그렇다. 링컨은 연방의 정통성, 독립선언서와 헌법의 절대성에 관하여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고, 두 치의 영합도 없었다. 연방의 정통성, 독립선언서·헌법의 절대성, 흑인노예 해방은 링컨 대통령의 삼위일체(三位一體)였다. 이 삼위에서 어느 것이 우위고 하위냐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링컨에게는 이 셋이 다 절대적이었고 강력한 ‘통합의 리더십’을 통해 이 셋을 다 지켜내고 성사시켰다.

링컨은 젊은 시절부터 독립선언서와 헌법을 철저히 연구하고 외웠다. 그래서 연설을 할 때도 성경은 물론 항상 독립선언서와 헌법을 인용하고 해석하고 국민에게 가르쳤다. 링컨은 1860년 11월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다음해인 1861년 2월 11일, 대통령에 취임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자신의 고향과 같은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를 떠나 수도 워싱턴 DC까지 12일 동안 여행한다. 링컨은 여행 도중인 2월 22일, 필라델피아의 독립기념관에 모인 청중에게 독립선언서의 뜻을 재확인하는 연설을 했다.

“저는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이 매우 감격스럽습니다. 우리 모두가 지금 누리고 있는 체제가 태어날 수 있게끔, 모든 지혜와 애국심과 원칙에 대한 충정을 모았던 곳이 바로 이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치적으로 한번도 우리 독립선언서에 결집되어 있는 사상에서 벗어난 의견을 고려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스스로 자문한 적이 많았습니다. 무슨 대단한 원칙이 있었기에 우리 연방이 이토록 오래 유지되어 왔던가? 그것은 우리가 단순히 영국에서 떨어져 나와 연방을 만들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만 아니고 온 세상, 먼 후대까지 자유를 확실하게 해줄 독립선언서에 담긴 사상이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런 원칙에 의하여 우리가 우리나라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럴 수 있다면 그리고 제가 그 일에 한몫을 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서 저는 제일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만일 그런 원칙에 의하여 나라를 구할 수가 없다면 저는 그런 원칙을 포기하느니 차리리 지금 이 자리에서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링컨은 일찍부터 모든 사람에게 “법을 지키자. 무슨 일이 있어도 법을 지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남북전쟁을 한 것도 노예제도보다는 남부의 반란세력 제주(諸州)들이 미 합중국의 헌법을 무시하고 파괴했기 때문이다.

링컨은 28세 되던 때인 1838년 1월 27일,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의 청년회관에서 ‘우리나라 정치적 체제의 영구성’이란 연설을 통해 준법정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미국인,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시민, 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일하는 시민은 우리 선조가 독립전쟁에서 흘린 피로 서약해야 합니다. 국법에 무조건 따라야 하고, 남이 국법을 어기면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을 서약해야 합니다.”

링컨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미국의 어머니들은 무릎에서 재롱을 떠는 어린 아이에게 법의 존엄성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모든 학교에서, 신학교, 대학교에서도 학생에게 법의 존엄성을 가르쳐야 합니다. 교과서에도 법의 존엄성을 적어놔야 합니다. 모든 교회 강단에서, 의회에서, 법정에서도 법의 존엄성을 가르쳐야 합니다. 간단히 말씀 드리자면 법을 우리나라의 종교로 만듭시다. 노인이거나 젊은이이거나, 부자이거나 가난한 사람이거나, 여자이거나 남자이거나, 무슨 피부색으로 어떻게 보이든 간에 우리 모두가 법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일리노이주에서만 조금 알려졌을 뿐인 지방정치가 링컨을 1860년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만들고, 이어서 미 합중국 16대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연설이 있다. 링컨은 당시 하버드 대학에 다니던 큰 아들 로버트를 만나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동부로 온다. 링컨은 1860년 2월 27일 뉴욕시의 쿠퍼 유니언 대학에서 긴 연설을 했다. 링컨의 쿠퍼 유니언 연설은 그 유명한 대통령 2기 취임 연설문보다 10배나 길고, 그보다 더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문보다는 28배나 더 길다.

링컨을 하루 아침에 전국적인 유명 정치인, 그리고 대선 후보감으로 만들어준 게 이 연설이다. 그는 여기에서 ‘건국 아버지(Founding Fathers)’들이 만든 헌법에 서명한 39명 중 21명은 노예제도의 확산을 반대했고 노예제도의 점진적 소멸을 원했다고 역설했다. 노예해방의 당위성을 공개적으로 알린 것이다. 그는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북부 주민의 지역감정에 호소한 것이 아니라 헌법의 제정 과정과 역사를 하나하나 거론하면서 자신의 이론이 건국 아버지들의 생각과 헌법에 합치한 것이라고 설득했다. 쿠퍼 유니언 연설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우리 모두 정의는 막강하다는 진리를 믿읍시다. 우리 모두가 그런 믿음을 갖고서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로 결심해야 하겠습니다.(Let us have faith that right makes might, and in that faith, let us, to the end, dare to do our duty as we understand it.)”

링컨은 대통령에 두 번 당선되었다. 그의 제1기 대통령 취임 연설은 2기 연설문처럼 명문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링컨은 이 연설에서도 자신의 모든 책임과 권리가 헌법에서 나온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의 헌법을 고찰해 보면 연방이 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능력이 닿는 한, 헌법이 저에게 맡긴 것처럼, 우리 연방의 법들을 모든 주에서 성심껏 집행할 것입니다.”

게티즈버그의 치열한 전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863년 8월 26일, 링컨은 자신의 오랜 친구인 제임스 컹클링을 통하여 국민에게 다음과 같은 공한(公翰)을 보냈다. “저는 미 합중국 헌법이 정의한 대로 제가 국민의 머슴이란 것을 주저 없이 인정합니다.”이렇게 법의 존엄성을 일찍부터 부르짖은 링컨이 대통령이 된 다음, 과연 실제로 법을 무조건 끝까지 집행하고 준수하고 지켰는가?

사가(史家)들은 이 명제에 관하여 지난 140년간 논쟁을 많이 해왔다. 논쟁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한 예로서, 링컨이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대표적인 영미 관습법인 하베아스 코르푸스(habeas corpus·신병인도법:영장 없이 시민을 체포구금할 수 없다는 법)를 유보시킨 일은 유명하다.

1861년 4월 12일, 남부연합의 반란군이 연방 소유인 섬터 요새를 포격함으로써 미국은 전쟁에 돌입한다. 수도 워싱턴DC는 남쪽에는 버지니아주, 북쪽에는 메릴랜드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버지니아에는 반란세력의 수도인 리치먼드가 있고, 메릴랜드도 노예제도가 인정되고 반란세력이 득시글거리는 소위 접경주였다. 그래서 메릴랜드가 연방에서 이탈하게 되면 워싱턴DC는 반란세력에 둘러싸여 북부와 차단될 위기에 처했다.

메릴랜드 주의회가 소집돼 연방 이탈을 결의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링컨은 지체 없이 “메릴랜드주의 반란세력 용의자를 몽땅 영장 없이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대법원장이었던 로저 B 터니가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했다”고 지적하자 링컨은 “대법원장도 가두어 버리겠다”고 을러댔다.

국무장관 윌리엄 H 수워드가 깜짝 놀라서 “우리 대통령, 참 대단하시다! 어쩔 작정이냐”고 묻자 링컨은 “이 보세요, 국무장관님! 이 세상에서 제일 지고(至高)의 법은 개인이나 국가나 생존법입니다. 나라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마당에서 그까짓 신병인도법이 무슨 소용입니까!”라고 일축해 버렸다.남북전쟁의 4년 동안 링컨은 단 한 번도 남부연맹의 행정수반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링컨은 남부 반란세력이 연방에서 떨어져 나가 만든 미 연맹(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한번도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연방의 법이 반란 주에 미치지 못한 것이지, 남부연맹이 나라는 무슨 나라냐!”고 링컨은 생각했다.

링컨은 나라를 지키고 노예들을 해방시킴으로써 미국을 미래로 전진시켰다. 그는 이렇게 미국의 ‘진보적 혁명’에 성공했지만 오히려 역사가들은 링컨을 보수주의 정치인으로 정의하고 있다. 영어로 진보는 progressive, 즉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보수란 영어로 conservative이다. 신중하고, 검증된 가치를 따르고, 손발을 움직여 노력하는 것이 바로 보수이다. 링컨 연구가이자 프린스턴 대학에서 미국 역사를 가르치는 제임스 맥피어슨 석좌교수가 역사가들의 링컨관(觀)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 세대 전, 당시 링컨 연구에서 가장 선두에 위치했던 제임스 G 랜달 교수는 ‘제16대 대통령은 국가가 직면한 근본적 명제, 즉 연방과 노예제도에 관해서 보수적이었다’고 주장했다. 랜달 교수에 의하면 만일 보수란 말의 정의를 ‘조심성’ ‘이미 실험이 끝난 가치에 대한 분별 있는 수용’ ‘성급하게 새로운 것을 추종하지 않는 것’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발전을 좇는 것’ 등으로 해석한다면 링컨은 분명히 보수적이었다.”

랜달 교수는 링컨이 보수적이었다는 예로, 링컨의 노예문제에 관한 해결방안을 들었다. 링컨은 노예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몇 세대에 걸쳐서라도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 해방을 주장했다. 링컨은 구체적으로 노예 소유주에게 변상을 해주고 해방된 노예들은 외지에 소개이민으로 내보내 정착시켜서 연방 내의 인종적 갈등이나 사회적 혼란을 최소화하는 쪽을 생각했다. 링컨은 “극단적 정책을 피하고 중간적 입지를 선호하며 협상을 통한, 그리고 상호양보의 정신에 입각해서 목적을 달성하고 싶다”라고 말했다.랜달 교수의 결론에 의하면 링컨은 혁명(revolution)이 아니라 진화(evolution)를 믿었다. 그는 “(링컨은) 파종을 하고 가꾸어서 수확하는 것을 믿었지, 뿌리를 뽑아 파괴하는 식의 해결은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후 많은 역사가들은 랜달 교수의 이런 해석에 공감해 왔다. 대표적인 예를 둘만 들어보자. 해리 윌리엄스 교수는 “링컨은 대부분의 문제에서와 같이 노예문제에 관해서도 보수적이었다”고 말했고 놀먼 그래브너 교수는 ‘에이브러햄 링컨: 보수적 정치가’란 논문에서 “링컨은 상황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상황을 억지로 바꿔 가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보수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링컨이 가장 위대했던 점은 과연 무엇인가? 몇 마디로 쉽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링컨이 천성적으로 숙명론자이고 수동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1864년 4월, 켄터키 출신의 동향 친구 앨버트 G 호지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수동적 천성을 자인했다. “내가 이제까지 일어난 일들을 조종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반대로, 이제까지 일어난 일들이 저를 조종했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링컨’의 저자인 하버드대 역사학부 명예교수 데이비드 허버트 도널드는 링컨의 숙명론이랄 수 있는 초절주의(超絶主義·transcendentalism)에서 링컨의 가장 존경할 만한 장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연민, 아량, 남의 잘못을 덮어주는 관용, 유연성 등이 바로 그것이다. 남북전쟁 중 링컨의 좌우명은 “무정책이 나의 정책”이란 것이었다.

링컨은 과감한 기획을 세워서 남보다 훨씬 앞장서 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응하여 또는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처하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링컨은 그 누구도 감당하기 힘들었던 남북전쟁을 해낼 수 있었고 부러지지 않고 성공한 것이다. 링컨을 간단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그의 위대한 점을 하나만 짚으라면 바로 이 점이다.

이제까지 링컨에 관한 책이 1만6000권이 나오고 앞으로도 미국에서 링컨에 관한 책은 계속 나올 것이다. 그러나 링컨과 미국의 남북전쟁은 태평양 건너의 먼 나라에서 140년 전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으로만 생각할 수 없다. 헌법, 연방의 정통성, 노예해방 등 링컨을 고민하게 했던 사회적 갈등과 명제는 지금 한국 사회에도 존재한다. 민족과 나라를 살리고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이 링컨이나 미국민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중요하다.

남신우 재미건축가
뉴욕 링컨 그룹 회원
‘대통령 링컨’ 번역자
2006/10/23

0 Comments:

Post a Comment

<< Home